213화 진소은-1
광동성의 명문 세가인 광동 진가장은 전 무림에 곤법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곳이었다.
특히 과거 해남파 제일고수인 남해검왕 인증호, 그의 친우였던 자연곤 진지인은 만약 인증호만 없었다면 천하제일의 자리는 그의 것이었을 거라고 모두들 입을 모아 말할 정도로 뛰어난 고수였다.
하지만 그 대단했던 자연곤의 진전은 현재의 진가장에 이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아무도 이을 수 없었다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았다.
자연곤 진지인은 평생을 진가장의 기본 곤법인 팔방곤법 하나만을 연마했었던 사람이었다.
진가장의 직계들이 익히는 광마(狂馬)십팔곤이나 다른 문도들이 익히는 노호(怒虎)삼십육곤과 같은 무공은 전혀 익히지 않은 채, 단지 그 기본 곤법 하나만으로 깨달음을 얻어 나뭇가지 하나만 잡아도 아무도 당할 수 없는 천하제이의 고수가 되었던 것이다.
그 자연곤 진지인이 생존해 있을 때, 그리고 그의 사후에도 자연곤의 진전을 잇기 위해 수많은 진가장의 인재들이 그와 같이 팔방곤법 하나에만 집중하며 자연곤의 경지에 도전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건 마치 자연곤 진지인에게만 가능한 경지인 것처럼 말이다.
결국 진가장의 인재들은 시간이 지나고 헛된 세월을 후회하며 뒤늦게 다른 곤법들을 익혀야만 했다.
그리고 많은 인재들이 때를 놓쳐 무위를 높이지 못했던 진가장은 오히려 더 세력이 약화되고야 말았다.
그런 악순환이 몇 번 반복되자 현재 진가장의 인재들 중 자연곤의 진전에 도전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현 진가장주인 광마(狂馬)곤 진공무는 물론 소가주인 진계군 역시 진가장의 비기인 광마십팔곤을 익혔고, 다른 문도들 역시 모두 노호(怒虎)삽십육곤을 수련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이 언니는 현 진가장에서 유일하게 자연곤의 진전에 도전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스물셋이 되도록 이제껏 팔방곤법 이외엔 아무것도 익히지 않았거든요.”
진가장주의 딸 진가인은 광동성 광주의 후기지수들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자신의 배다른 언니인 진소은을 이렇게 소개했다.
그러자 마치 사내처럼 짧게 머리를 자르고 허름한 옷차림을 한 진소은은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인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조부와 함께 산에 들어가 수련만 반복했던 그녀로서는 이런 자리가 너무 낯설고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모여 있던 후기지수들 중 가장 잘생긴 외모를 지닌 교가장의 소장주 교과룡이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진 소저. 아, 죄송합니다. 진가인 소저가 아닌 이분 진소은 소저께서 산에서 내려오신 건, 혹시 자연곤의 진전을 잇는 데 성공하셨기 때문인 겁니까?”
그 말에 진소은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그, 그, 그럴 리가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경지에….”
그러자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진가인 또한 말도 안 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교과룡에게 말했다.
“교 공자는 무슨 그런 질문을 하고 그래요? 언니의 나이가 이제 겨우 스물셋인데 자연곤의 진전을 어떻게 잇겠어요? 그게 그렇게 쉬웠으면 진작 맥이 끊어지지도 않았겠죠.”
그 대답에 교과룡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진 소저는 그냥 시간을 허비하신 게 되는 거 아니오? 스물셋이 되실 때까지 산에만 처박혀서 고작 팔방곤법 하나만을 익히셨다니 말이오.”
그 말에 후기지수들 중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진가장의 소장주 진계군이 짜증 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왜 아니겠나, 교 소제? 소은이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조부님의 욕심으로 저 애의 인생만 망친 거지. 다 큰 계집애가 산에서만 사느라 제대로 꾸미는 법도 모르고, 머리 꼴이며 옷 꼴이며 저래서 시집이나 갈 수 있을는지. 에잉!”
그러자 진가인이 풋 웃으며 대꾸했다.
“왜 그래요, 오라버니? 그래도 소은 언니는 본판이 나쁘지 않아 잘만 꾸미면 조금은 나아질 수 있다고요. 뭐, 산에만 있느라 잘 씻지 않았던 습관이야 이제 좀 고쳐야 하겠지만요.”
“어머! 잘 씻지도 않는다고요?!”
“아우, 더러워!”
그녀의 말에 모여 있는 후기지수들 중 여인들은 어떻게 잘 씻지도 않을 수 있느냐며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들은 그 말을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우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진소은은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보는 주변의 시선들에 비웃음이 가득하다는 것을….
그리고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배다른 여동생인 진가인과 오빠인 진계군의 말 때문이라는 것도 말이다.
하지만 진소은은 자신을 가운데 두고 떠드는 주변의 말들에도 아무런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소심한 표정으로 고개만 푹 숙일 뿐이었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그들의 말대로 산에서 조부와 단둘이 지내느라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이곳에 데리고 온 여동생 진가인이 자기를 정말 걱정해 줘서 저런 말을 해 주는 건지, 아니면 망신 주기 위해 저러는 건지도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때였다.
모임의 구석 자리에서 홀로 홀짝홀짝 술을 마시고 있던 진소은의 친오빠 진정군이 문득 취한 듯 큭큭거리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큭큭큭큭! 이 멍청한 계집애야. 그저 착하기만 한 걸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이제는 좀 알겠느냐? 저것 봐라. 네 덕분에 산에 들어가지도 않고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자들이 지금 네년을 비웃고 있지 않느냐? 이것 참, 기가 막히지 않느냐? 큭큭큭큭!”
그 말에 소장주 진계군과 그의 친여동생 진가인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들만은 진정군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계군은 서둘러 다른 말로 화제를 전환하려고 했다.
“자, 자! 이제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하지만 그때였다.
진계군이 미처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진정군이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다들 그거 아시오? 십오 년쯤 전 조부님께서 아버지께 장주의 자리를 물려주시고는 이제부터 자연곤을 부활시키는 일에만 집중하겠다고 선언하셨을 때의 일이었소. 그때 조부님께서는 계군 형님과 나, 소은이와 가인이, 이렇게 네 사람을 모아 놓고는 그중 한 명이 당신과 함께 산에 들어가 팔방곤법만을 수련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었지.”
그러자 처음엔 주정을 부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던 후기지수들이 점점 흥미진진한 표정이 되어 그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진정군은 술 취한 목소리로 계속 떠들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선뜻 조부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대답하지 못했소! 왜냐고? 큭큭큭, 뭘 물어? 싫었거든. 안락한 집을 떠나 산에 처박혀 무공 수련을 해야 한다는 것도, 이제껏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실패했던 자연곤에 도전해야 한다는 것도, 모두 다 말이오. 생각해 보시오. 누가 평생 동안 기초 무공인 팔방곤법만 수련하고 싶겠소? 안 그렇소? 큭큭큭큭!”
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그의 배다른 형이자 진가장의 소장주인 진계군이 끼어들며 호통을 쳤다.
“정군이, 이놈! 또 취했느냐?! 취했으면 어서 집으로나 돌아갈 것이지, 여기가 어디라고 술주정을 부리고 있느냐?! 당장 조용히 돌아가지 못하겠느냐!”
그러자 진정군은 깜짝 놀랐다는 표정을 짓더니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취했다고? 형님, 내가 진짜 취한 것 같소? 이게 취해서 하는 소리 같냐는 말이오?”
그때 진정군의 배다른 여동생인 진가인이 진정군의 옆으로 다가와 그의 팔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오라버니, 많이 취하셨어요.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러고는 남들은 눈치채지 못하도록 힘껏 그의 몸을 당겨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진정군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진가인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그녀를 확 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어지간히는 그 얘기가 듣기 싫은 모양이로구나! 그래, 간다! 가 주마! 내가 가면 될 게 아니냐?!”
그는 벌떡 일어나 바로 밖으로 나가 버릴 듯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진계군과 진가인은 살짝 찌푸린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알아서 나가 준다는데 굳이 더 말을 늘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막 밖으로 나가려던 진정군이 문득 멈춰 뒤돌아보더니만 진소은을 향해 소리쳤다.
“네년은 안 가고 뭐 하고 있는 거냐?! 기껏 네 한 몸 희생해 조부님과 산으로 들어가 줬더니만, 고마워하기는커녕 어떻게든 물어뜯으려 하는 짐승들 사이에서 뭘 하고 있느냔 말이다!”
그러자 깜짝 놀란 진계군이 호위들을 향해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저놈이 더 추태를 부리기 전에 집으로 데려가지 않고!”
그의 명령에 방 주변에 도열해 있던 진가장의 무사들이 바로 달려들어 그의 팔을 잡고는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어서 가시지요, 이 공자.”
“이거 놔! 내 말 아직 안 끝났다고!”
진정군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크게 몸부림은 치지 않고 얌전히 호위들에게 이끌려 나갔다.
다른 사람들은 몰랐지만 이미 하고 싶은 말은 다 했기에 더 버티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완전히 멀어지자 진계군이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후기지수들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아우의 추태를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녀석의 술주정이 어째 나날이 심해지는 것 같군. 부디 마음 넓은 우리 광주의 후기지수들께서 방금 들은 말들을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너그럽게 넘겨주시기를 바랄 뿐이네.”
얼핏 사과의 말 같지만 사실은 방금 들은 말을 잊어버리라는 얘기였다.
그러자 다른 후기지수들이 앞다퉈 그의 말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진 소장주님!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뭘 사과까지 하고 그러십니까?”
“맞습니다. 저런 게 또 진 이 공자의 인간미가 아니겠습니까?”
“누구에게나 단점은 있지 않습니까? 어떤 가문에나 오점도 있고 말입니다.”
마지막 말을 한 사람은 순사문의 소문주인 서윤직이었다.
그의 재치 있는 말에 ‘오!’ 하고 감탄한 진계군은 바로 웃으며 그를 칭찬하려 했다.
“오! 서 소문주가….”
하지만 그때 이 모임에서 가장 미남자인 교가장의 교과룡이 먼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응? 방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소제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아니? 진 이 공자께서는 어디로 가신 겁니까? 또 술에 취하기라도 하신 겁니까?”
그의 능청스러운 말에 진계군은 마침내 웃음을 터트렸다.
“와하하하하! 역시 교과룡, 교 소제의 재치는 당할 자가 없군! 얼굴도 그렇게 잘생겨 놓고 재치까지 뛰어나다니, 나 같은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는가? 부탁이니 내 아내가 생기거든 교 소제는 부디 가까이 오지 말아 주시게나.”
그러자 순사문의 서윤직이 교과룡을 질시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교과룡은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여유 있게 빙긋이 웃으며 대꾸했다.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형님. 무림인의 매력은 첫째가 무공, 둘째가 세력인데, 그 두 가지를 다 갖추신 형님께서 어찌 제게 그런 말씀을 하고 그러십니까? 이 소제야말로 형님께서 부디 제 여인만큼은 뺏어 가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응? 그게 그렇게 되는가? 와하하하하!”
분위기는 순식간에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아까 진정군 때문에 잠시 어색해졌던 분위기는 이미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
남자처럼 짧은 머리에 허름한 옷차림을 한 진소은은 한쪽 구석에 앉은 채 그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를 제외한 주변의 모두가 즐겁게 웃고 떠들고 있었다.
교과룡이 했던 말처럼, 마치 조금 전 있었던 일들을 모두 다 까맣게 잊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진소은은 이런 자리가 처음임에도 이게 무슨 분위기인지 대강 눈치챌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 모인 후기지수들은 모두 진계군의 추종자들인 모양이었다.
그들이 관심 있는 것은 그저 진가장의 소장주 진계군에게 잘 보이는 것뿐, 나머지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아까 진정군이 했던 말도, 진소은 자신이 왜 산에 들어가게 됐었는지에 대한 진실도 말이다.
그 속에서 진소은은 문득 세상 속에 홀로 동떨어진 듯한 외로움을 느꼈다.
어째서인지 진짜 홀로 지내야 했던 산에서보다 더 외로운 것 같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