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진소은-2
문득 아까 친오빠인 진정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멍청한 계집애야. 그저 착하기만 한 걸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이제는 알겠느냐? 저것 봐라. 네 덕분에 산에 들어가지 않고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자들이 지금 네년을 비웃고 있지 않느냐?’
진소은은 문득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이 조부님과 함께 산으로 들어가기로 결정됐던 그 순간을….
그때 진소은을 포함한 사 남매 중 아무도 함께 산으로 가겠다고 나서지 않자, 조부인 진사몽은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진소은은 자기도 모르게 홀로 손을 들고 말았었다.
‘제가, 제가 갈게요, 조부님.’
그녀가 그렇게 했던 건 자연곤을 부활시키느니 하는 무슨 거창한 목표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조부께서 실망한 표정을 지으시는 것이 죄송했기 때문이었다.
그랬는데….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그 때문에 자신은 산에만 처박혀 있다 십오 년 만에 간신히 세상에 나와야 했고, 또 그렇게 나온 세상에선 이렇게 꼴사납게 겉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허탈했다.
그때였다.
진계군이 문득 후기지수들에게 말했다.
“자, 자! 안에만 있으니 지루하지 않은가? 우리 이제 배나 타러 가는 것이 어떤가?”
늘 주강의 물길과 함께 살아가는 광주 사람들에게 있어 뱃놀이를 하는 것은 무척이나 일상적인 일이었다.
특히 부유층의 자제들은 얼마나 크고 멋진 배를 가지고 있는가가 자존심의 척도가 되기도 했다.
그러니 그들이 뱃놀이를 하는 것이야 전혀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진소은은 문득 눈앞의 식탁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아직 먹지도 않은 음식이 가득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배를 타러 간다면 저 음식은 다 어쩌지? 혹시 다 배로 싸 가려는 건가?’
홀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 생각이 무색하게도 방 안에 있던 후기지수들은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뱃놀이! 좋습니다!”
“역시! 진 대공자의 마음이 딱 제 마음과 같으시군요!”
그들 사이에 반대가 있을 리 없었다.
후기지수들은 모두 진계군을 따라 기다렸다는 듯 소리치며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탁자에 수북이 쌓인 수많은 음식들은 모두 버려 둔 채였다.
그때 동생인 진가인이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언니도 함께 갈 거지?”
그 말에 진소은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나는 별로….”
하지만 진가인은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에이, 빼지 마. 산에만 있었으니 뱃놀이 같은 건 못 해 봤을 거 아냐. 광주 사람이 뱃놀이도 못 해 보다니, 그보다 촌스러운 게 어디 있겠어?”
그렇게 말하며 진가인은 진소은의 손을 잡아끌었다.
차마 그녀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던 진소은은 어쩔 수 없이 끌려가며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지금 나가면 저 음식들은 다 어떻게 해? 누가 옮겨 주는 거야?”
그러자 진가인이 잠시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진소은을 바라보다 말했다.
“하아, 추잡하게 좀 굴지 마, 언니. 우리 진가장의 자식들이야. 광동성 최강 문파의 자식들이라고. 창피한 소리 좀 그만하고 빨리 와!”
진소은은 그녀의 말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가장이 광동성 최강 문파인 것과 저렇게 많은 음식들을 남기는 것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산에 있을 때 그녀의 조부는 그녀가 쌀 한 톨을 남기는 것조차 용서하지 않으셨다.
항상 무언가 먹을 수 있음을 감사하라고 가르치셨고, 음식을 남기지 않고 먹는 것이 그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말씀하셨었다.
물론 조부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음식을 남길 일은 별로 없었다.
산에선 항상 음식이 부족했기에 너무 끔찍한 재료로 만들지 않은 다음에야 남길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산더미 같은 진수성찬을 내버리고 가는 모습이라니, 산 밑으로 내려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건만 아무래도 그녀는 산 밑 생활에 적응할 자신이 점점 없어지고 있었다.
그토록 내려오고 싶었던 산이었는데, 문득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주루에서 나온 후기지수들은 바로 주강의 선착장으로 가 진계군이 준비해 놨던 커다란 배에 올라탔다.
그 배는 진가장의 많은 배들 중에서도 손꼽히도록 호화스러운 유람선으로, 배 전체가 사치스러운 물품들로 잔뜩 치장되어 있었다.
후기지수들은 배에 오르며 앞다퉈 탄성을 터트렸다.
“크아! 역시 이 ‘진조호’의 아름다움은 광주 제일이라니까! 진 소장주님, 역시 최곱니다!”
“자네, 어떻게 그런 말을 하고 그러나?! 광동성 제일의 배를 광주 제일이라고 깎아내리다니! 이 배는 광동성 제일, 아니 천하제일로 아름다운 배가 틀림없다네!”
후기지수들의 아부를 들은 진계군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자네들이 벌써 취한 모양이로군! 진조호에도 술과 음식을 잔뜩 준비해 놨는데 벌써 취해서야 쓰겠는가?! 자, 모두 마음껏 먹고 마시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진 대공자!”
“잘 먹겠습니다, 진 소장주님!”
후기지수들은 모두 왁자지껄 떠들며 선실로 들어가 익숙하게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셨다.
아까 주루와 장소만 바뀌었지 똑같은 광경이었다.
그리고 진소은은 그 속에서 또 혼자가 되고 말았다.
그녀를 배로 이끌었던 여동생 진가인은 막상 배에 오르자 더 이상 그녀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후기지수들 중 가장 잘생긴 교가장의 소장주 교과룡과 딱 붙어 앉아 밀어를 속삭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어디에 앉지도 못한 채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진소은은 뒤늦게 후회해야만 했다.
‘좀 더 확실하게 말할걸….’
따라오고 싶지 않다고, 그만 돌아가고 싶다고 말이다.
어쩌면 그 이전에 이미 잘못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동생인 진가인이 먹이를 노리는 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자신에게 함께 가자고 말했을 때부터 거절했어야 했는지도 말이다.
‘아니면 화를 냈어야 했을까?’
알 수 없었다.
사람을 대하는 건 그녀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후우우.”
그때였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쉰 그녀가 문득 배 바깥쪽의 강을 바라봤을 때였다.
그녀의 눈에 문득 커다란 배 몇 척이 이 ‘진조호’로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자 그런 배가 한두 척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한 척, 두 척, 세 척, 네 척.
모두 네 척의 배가 사방에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진소은은 당황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일을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황급히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던 진소은은 일단 진가인에게 말을 해 보기로 했다.
그래도 친자매이고 자신을 데려온 사람이니 그나마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진소은은 서둘러 동생에게로 가 그녀를 불렀다.
“저기, 가인아.”
그러자 교과룡과 웃으며 밀어를 속삭이던 진가인이 그녀를 바라봤다.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눈빛이었다.
“왜 그래?”
빨리 용건이나 말하라는 듯한 말투였다.
그 차가운 태도에 말하기가 좀 망설여졌지만, 워낙 급한 일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배, 배들이 우리 배를 둘러싸고 있어. 뭔가 이상해.”
그러자 진가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치며 반문했다.
“뭐? 다른 배들이 우리 배를 포위하고 있다고?”
“그래! 저길 좀 봐! 저 배들이…!”
하지만 진가인은 진소은이 가리킨 쪽은 보지도 않은 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언니, 제발 정신 좀 차려. 이 주강에서 대체 누가 우리를 포위한다는 거야? 우리 광동 진가장의 자식들이야. 광주 최강 세력의 자식들이라고! 대체 이 얘기를 몇 번이나 해야 해?”
“하, 하지만…!”
그때였다.
진가인의 옆에 앉아 있던 교과룡이 잘생긴 얼굴로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진 소저께서 산에서 내려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착각을 하신 모양이구려. 이곳 주강에는 원래 배들이 무척 많다오. 그래서 얼핏 둘러싸인 것처럼…!”
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쿠우우우웅!
갑자기 큰 충돌음과 함께 배가 크게 휘청거렸다.
그러자 무위가 낮은 후기지수들은 일순 균형도 잡지 못하고 배 바닥을 뒹굴 수밖에 없었다.
“꺄아아아악!”
“우아아아악! 뭐, 뭐야?!”
“뭐냐?! 무슨 일이야?!”
하지만 균형을 잃지 않았던 진소은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네 척의 배가 이미 그들의 배를 포위한 채 접현한 상태였다.
광동 진가장의 소장주 진계군은 갑작스러운 배의 충격에 인상을 팍 찡그리며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대체 무슨 일인데 이렇게…!”
그나마 그는 모인 후기지수들 중 가장 무공이 높은 일류 최상급의 경지였다.
그렇기에 꼴사납게 바닥을 구르지 않고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계군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배 바깥쪽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챙! 채챙! 챙! 챙!
“죽어라! 끼얏!”
“마, 막아라! 으아악!”
“크하하하! 쉽구나!”
밖에서 들려 온 갑작스러운 소리에 진계군과 다른 후기지수들은 모두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들려오는 소리, 그리고 선실의 창문으로 보이는 광경이 지금의 상황을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배를 습격한 것이었다.
이 광동성 광주에서, 감히 광주제일세인 진가장의 배를 말이다.
그들로선 이제껏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후기지수들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스, 습격?”
“대, 대체 누가?”
“지, 진가장의 배를?”
그들이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였다.
밖을 지키던 호위들을 뚫고 마침내 습격자 한 명이 선실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푸화악!
“크아아악!”
“아아악!”
피를 뿌리는 호위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자는 얼굴에 기다란 칼자국이 난 험악한 인상의 장한이었다.
그가 대도를 한 손으로 가볍게 휘휘 휘돌리며 사나운 웃음을 지은 채, 선실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어, 도련님들, 아가씨들, 다 여기에 계셨군.”
그러자 진계군이 용기를 내 그를 향해 소리쳤다.
“뭐 하는 놈들이냐?! 감히 우리 진가장의 배를 공격하다니! 죽고 싶은 것이냐?!”
그도 사실 두려운 것은 다른 후기지수들과 마찬가지였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데다, 이런 사태는 처음 겪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진가장의 소장주로서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주변에 여인들이 있기에 특히 더욱 그랬다.
그러자 그의 호통에 다른 후기지수들도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문 가까이 있던 후기지수 한 명이 역시 용기를 내고는 소리쳤다.
“그렇다! 감히 이 광주에서 진 소장주님의 배를 공격하다니, 모두 죽고 싶은 것이냐?!”
그로선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용기를 낸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상대방은 그런 용기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목숨을 걸 것도 아니면서 뒤를 생각하지 않는 용기는 결국 객기에 불과했다.
얼굴에 칼자국이 난 남자가 그를 향해 비릿한 웃음을 짓고는 감탄한 듯 말했다.
“호오! 젊은 영웅이시군.”
하지만 그의 행동은 말과 전혀 달랐다.
그렇게 말한 그가 아무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도를 내리쳤던 것이었다.
푸화악!
“끄아아악!”
커다란 대도로 펼쳐진 벼락같은 도격이었다.
그 강맹한 일격에 후기지수는 당황한 얼굴 그대로 두 쪽으로 쪼개질 수밖에 없었다.
즉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