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광동 진가장-2
‘천하에 사마가 있다면 남해에는 삼마가 있으니 마경과 마검과 마도라.’
남해삼마 중 마도에 해당하는 혈해마도 윤삭은 자신의 배, 자신의 자리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지금 진가장의 자식들을 잡으러 간 백교방 사천왕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을 인질로 진가장의 병력을 분산시킨 후 각개 격파 하는 것이 계획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예상한 것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러자 윤삭의 측근들은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눈치를 보며 노심초사했다.
윤삭의 성격상 그들을 많이 기다려 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한순간, 윤삭이 번쩍 눈을 뜨고는 옆에 있는 부하들에게 짧게 물었다.
“소식은?”
그러자 부하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직 없습니다.”
윤삭은 잠시 손가락으로 의자를 똑똑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어 짧게 말했다.
“실행.”
의미를 알 수 없는 짧은 말이었지만, 그 짧은 말에 주변에 있던 부하들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윤삭은 원래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옆에 오래 있었던 측근들은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유추할 수 있었다.
인질 없이 계획을 실행하라는 의미라는 걸 말이다.
부하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 하지만 방주님. 저들을 분산시키지 않고 쳐들어간다면 피해가 매우 커질 것입니다. 진 장문인께서 내리신 지시와도 다르고 말입니다.”
그러자 윤삭이 피식 웃으며 다시 말했다.
“형님은 결과. 해적답게.”
윤삭이 말한 형님은 해남파 장문인 진태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진태도는 어차피 결과에만 신경 쓸 테니 꼭 그의 지시대로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는, 그러니 윤삭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적답게 정면으로 부딪치겠다는 얘기였다.
그 말에 부하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의 두목인 혈해마도 윤삭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진가장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단지 강하다는 걸 넘어서 무척이나 끈질기고 독하기로 유명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측근 한 명이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그 순간이었다.
스팟!
선실 안에 한 줄기 빛의 선이 나타났다.
윤삭이 허리에 찬 왜도를 잡는 순간 나타났던 선이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왜도에서 손을 떼었을 때 말을 하던 측근의 목이 천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푸화악!
그의 떨어진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자, 얼굴색이 확 변한 다른 부하들이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방주!”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윤삭은 전형적인 말은 적고 행동을 많이 하는 무림인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는 사람의 생명을 아끼는 자가 아니었다.
그것이 적이든 부하이든 상관없이.
그로써 인질 없이 진가장에 대한 정면 공격이 결정된 것이었다.
***
퍼퍼퍼펑!
첫 시작은 대포였다.
백교방은 대담하게도 초저녁에 불과한 지금, 광동성의 성도인 광주 안에서 대포로 진가장을 폭격했다.
관군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 이상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대담한 공격의 효과는 지대했다.
콰콰쾅! 콰아아앙! 콰르르륵!
“으아악!”
“뭐, 뭐야?!”
“대, 대포다! 폭격이야!”
“뭐라고?! 이 광주 안에서 그게 무슨 소리야?!”
“또 온다! 피해!”
퍼퍼퍼펑!
“으아아아악!”
“배, 배가!”
“내 다리! 아아악!”
“끄아아악! 살려 줘!”
그들의 포격에 진가장의 한쪽이 그대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진가장이 수상 전력을 바로 투입할 수 있도록 주강과 맞닿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가장의 부두와 그곳에 정박되어 있던 배들이 순식간에 부서져 가고 있었다.
부두와 강가를 경계하고 있던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혼비백산한 채 우왕좌왕하다가 대포에 직격당해 폭사하거나 무너진 건물 잔해에 깔려 신음하며 죽어 갔다.
진가장에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삼십여 척의 함선 중 대장선에 탄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혈해마도 윤삭은 자신이 만든 아수라장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려 피식 웃었다.
대단히 기분이 좋다는 뜻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부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목, 아니 방주님.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윤삭이 시선을 진가장에 고정한 채로 짧게 대답했다.
“계속.”
“네! 알겠습니다!”
폭격은 한동안 더 계속됐다.
진가장의 부두에 인접한 곳이 완전히 초토화될 때까지였다.
같은 시각 진가장 안쪽의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포격에 휘말려 죽어 가는 자들이 곳곳에서 신음을 흘리고 있었고, 다른 무인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차마 포격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구해 낼 수 없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동료들이 죽어 가는 모습, 그리고 진가장이 파괴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때 진가장의 장주 광마곤 진공무가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는 아버지 진사몽의 방에서 나와 씁쓸하게 정원을 거닐고 있다가 굉음에 놀라 바로 달려온 상태였다.
그가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대체 누가 광주 안에서 대포까지 쏴 가며 우리를 공격한다는 말이냐?!”
“모르겠습니다! 아무 전조도 없이 다짜고짜 포격을 가해 오고 있습니다!”
진가장의 한쪽이 완전히 초토화되고 있건만 아직 적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진공무는 부상당해 포격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어 가는 부하들을 보며 악을 쓰듯 소리쳤다.
“그러니까 대체 누가?! 대체 왜?!”
그때였다.
부하 한 명이 문득 배들 사이에 거의 가려져 있는 가장 큰 배가 있는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자, 장주님! 저 배에 걸린 깃발을 보십시오! 저건 분명…!”
진공무의 눈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깃발의 표식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바탕에 흰 상어 문양의 깃발.
바로 백교방의 표식이었다.
“…백교방?”
진공무의 표정이 일순 멍해졌다.
백교방이라니, 그 겁쟁이들이 우리를 공격했다고?
그것도 이렇게 대대적으로?
백교방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진가장에게 각을 세운 적이 없었다.
심지어 광주의 이인자로 성장할 때까지도 사소한 충돌 한 번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진가장의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주제를 아는 자들이라고 말하며 은근슬쩍 그들을 무시하곤 했었다.
그랬는데….
“그 백교방이 우리를 공격해 왔다고?”
진공무는 자신들이 이제껏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빨을 숨긴 승냥이를 꼬리를 만 개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으득!
진공무는 이를 갈았다.
눈 아래로 보던 자들에게 공격을 당해 식솔들을 잃었다는 분노에, 저 승냥이 같은 자들에게 감쪽같이 속아 버렸다는 분노까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진공무가 핏발 선 눈으로 중얼거렸다.
“감히, 우리 진가장을 물로 봤다 이거지?”
진가장의 성명절기는 가주 일가가 익히는 광마십팔곤, 그리고 다른 문도들이 익히는 노호삽십육곤이었다.
그리고 그 두 무공은 모두 분노와 열정을 그 원천으로 하고 있었다.
분노하면 할수록 더욱 강한 저력을 발휘하는 자들이 바로 광동 진가장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광동성 무림에는 그런 말이 떠돌 정도였다.
‘진가장 사람과 싸우려거든 반드시 그들이 분노하기 전에 죽여라. 만약 그렇지 못하면 당신이 얼마나 강하든 상관없이 그들과 함께 죽게 될 것이다.’
일단 분노가 끓어오르면 상대가 누구든 미친개처럼 달려들어 동귀어진도 마다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광동 진가장의 무인들이었다.
진공무가 핏발 선 눈으로 내공을 담아 소리쳤다.
- 진가장의 무인들은 들어라! 어차피 포격이 닿는 사거리는 저 정도가 한계, 곧 저들은 포격을 마치고 상륙할 것이다!
진공무의 목소리에 포격에 휩쓸린 동료들을 전전긍긍 바라보고 있던 진가장 무사들이 집중했다.
진공무의 말은 계속됐다.
- 저들과 싸울 때 진가장을 지키겠다는 생각도, 저들을 이기겠다는 생각도 하지 마라! 우리가 할 생각은 단 하나다! 모두 저곳을 봐라!
진공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포격에 휘말려 박살 나 버린 부두와 담장, 강에 인접한 건물들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사람들과 이미 죽은 시신들이었다.
진공무가 절절히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 저곳에서 우리 형제들이 고통스럽게 죽어 갔다. 죽어 가고 있다! 하나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구하지 못했다! 명심하라! 그들을 기억하라! 그 무력감을 잊지 마라! 우리가 할 것은 단 하나! 그들에 대한 복수뿐이다!
진공무의 피 끓는 외침이 끝나자 진가장의 무인들은 그들의 장주와 비슷하게 핏발 선 눈으로 짐승의 소리 같은 낮은 소리를 냈다.
“우우우우!”
그것은 끓어오르는 분노의 소리였다.
적들에게 한꺼번에 쏟아 내기 위해 가슴속의 열화를 꽉꽉 압축하는 소리였다.
그러자 배에서도 그의 말을 명확하게 듣고 있던 혈해마도 윤삭이 입꼬리를 올리며 사납게 웃음 지었다.
“흐.”
아무래도 이번 사냥감은 진짜 맹수인 것 같았다.
피 좀 흘렸다고 비명을 지르는 허접한 토끼들이 아닌 상처를 입으면 입을수록 더 강해지는 진짜 맹수.
그리고 윤삭은 늘 그런 적을 원해 왔었다.
그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짧게 말했다.
“돌격.”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부하들이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전원 상륙하라! 돌격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곧 삼십여 척의 함대 전체에 전파됐다.
“상륙하라! 돌격이다!”
“돌격!”
“우와아아아아아!”
그러자 엄청난 함성과 함께 모든 배에서 수적들이 강으로 쏟아지듯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풍덩! 풍덩! 풍덩!
그것은 마치 배에서 시작된 사람의 파도가 강을 뒤덮은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강으로 뛰어든 수적들이 능숙하게 강을 헤엄쳐 상륙하고는 진가장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육지로 밀려가는 해일을 보는 듯한 무서운 기세였다.
“우와아아아아!”
“다 죽여 버려!”
“이이하!”
진가장의 무인들로선 그들이 물에서 나오기 전에 막는 것이 가장 현명한 대응이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미 강에 근접한 곳이 포격으로 초토화된 진가장으로선 바로 그들에게 대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진가장이었다.
분노와 열정의 진가장.
그들은 선공 좀 빼앗기고 동료들이 죽었다고 사기가 떨어지는 심약한 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압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반발력이 강해지는 용수철 같은 자들이었다.
진가장주 진공무가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
- 진가장의 무인들이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러자 모든 진가장 무인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복수!”
그러자 진공무가 제일 먼저 앞으로 튀어 나가며 소리쳤다.
- 가자! 복수의 시간이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오랜 세월 광동성 최강을 자랑하던 진가장의 정예들이 분노한 야생마 떼처럼 돌진하기 시작했다.
***
진가장이 백교방에게 한참 포격을 당하고 있던 시점, 별채에 누워 있던 진가장의 전 장주 진사몽은 밖에서부터 들려온 소란을 듣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대기하고 있을 의원을 불렀다.
“임 의원! 임 의원!”
그의 부름에 문밖에 있던 의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태상장주님?”
“저 소란은 뭐요? 무슨 일이 난 거요?”
그러자 의원이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어떤 놈들이 우리 진가장을 습격해 온 것 같습니다. 삼십여 척의 배가 포격을 퍼붓고 있다고 하더군요.”
“포격이라고?”
굳은 얼굴로 포격이란 말을 되뇌던 진사몽은 이내 눈을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초췌해진 얼굴이었지만 눈빛만큼은 맹수 같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임 의원, 날 좀 거기로 데려다주시오.”
진사몽의 부탁에 의원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만류했다.
“안 됩니다, 태상장주님!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진사몽은 완고했다.
“만약 진가장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지금 안정을 취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오. 별일 아니라면 절대 움직이지 않을 테니 염려 말고 날 데려다주시오. 그리고 광혈단을 준비해 주시오.”
그 말에 의원이 경악해 소리쳤다.
“태상장주님!”
광혈단은 한순간 기운을 폭발시켜 신체를 강화시켜 주는 단약이었다.
다만 약효의 지속 시간이 끝나면 높은 확률로 주화입마에 빠지거나 신체가 망가져 버리는 부작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광혈단은 분노와 열정을 원천으로 하는 진가장의 무공들과 매우 상성이 좋았다.
약기운으로 인한 무위의 증폭 효과가 다른 무공들보다 훨씬 뛰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진가장의 상급 무인들은 다들 광혈단을 하나씩 소지하고 다니곤 했다.
물론 효과가 강한만큼 부작용이 더 큰 것 역시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진가장의 무인들이 광혈단을 복용하게 되면, 약효가 끝난 후 강화된 부작용으로 거의 대부분 죽게 되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가장의 무인들은 그것을 복용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것은 상대와 함께 죽을지언정 적의 앞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진가장 무인들의 독기를 증명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었다.
의원이 간곡한 목소리로 진사몽을 만류했다.
“안 되십니다, 태상장주님! 태상장주님의 몸에 광혈단을 섭취한다면…!”
하지만 진사몽은 완고했다.
“말했다시피 꼭 나서야 할 일이 아니면 절대 나서지 않겠소. 하지만 진가장에 위기가 닥친다면 내 목숨 하나를 건져 무엇에 쓴단 말이오. 어서 준비해 주시오.”
“태상장주님….”
의원으로선 결코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