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혈해마도 윤삭-2
그 엄청난 충돌을 만들어 낸 두 사람, 선우진과 윤삭은 지금 가라앉고 있는 대장선을 사이에 둔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각각 대장선의 양옆에 위치한 배의 돛대 위에서, 엄청난 배의 흔들림에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윤삭이 이를 갈며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이놈….”
그의 눈은 분노로 이글이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눈빛만으로 살인을 할 수 있다면 선우진은 당장이라도 찢겨 버렸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살기 어린 눈빛 앞에서 선우진은 씨익 웃음 짓고 있었다.
윤삭의 살기 가득한 눈빛 안에 섞여 있는 놀람과 당황의 빛을 읽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분명 자신의 발도를 정면으로 튕겨 낸 선우진의 ‘개천’에 당황하고 있었다.
선우진이 비릿하게 웃으며 저 맞은편 돛대 위에 선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혈해마도 윤삭! 그게 네 밑천의 전부인가?! 그렇다면 매우 실망인데?! 그 정도가 너의 전력이라면 아무래도 자식을 구하는 건 좀 힘들겠어!”
그 말은 지금 윤삭의 마음에서 가장 약한 부분을 정확히 찌른 말이었다.
자식을 구하지 못하게 되는 것.
그러자 윤삭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으아아아악! 죽여 버리겠다!”
그가 괴성을 지르며 쏘아진 화살처럼 몸을 날렸다.
파앙!
그는 가라앉고 있는 대장선을 한번 밟고는 바로 선우진을 향해 날아왔다.
납도한 도파를 잡고 발도를 준비한 채로였다.
하지만 선우진은 이번엔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았다.
이성을 잃은 듯한 윤삭의 모습에 피식 웃음 지은 그는 돛대 아래로 표홀하게 떨어져 내렸다.
마치 바람이 되어 흘러가듯 빠르고 자연스러운 신법이었다.
휘이이이익!
“놓칠 것 같으냐?!”
윤삭은 선우진이 이동한 배를 향해 발도했다.
샤아아아아악!
한순간 빛의 선이 배와 강물에 수평으로 그어졌다.
그러자 잠시 후 배가 사선으로 천천히 어긋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미끄러지듯 천천히 갈라지던 배는 이내 파도의 출렁임에 휘말려 쩌억 갈라져 버렸고, 그 갑작스러운 사태에 배에 타고 있던 수적들은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아악! 배가!”
“바, 방주! 왜 우리 배를?!”
“떨어진다! 살려 줘!”
윤삭은 부하들의 아우성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신경 쓰고 있는 곳은 오직 자신의 발도에서 벗어난 선우진의 위치뿐이었다.
배와 강물을 모두 베었지만 선우진만큼은 베지 못했던 것이었다.
바람 같은 움직임으로 윤삭의 참격에서 벗어났던 선우진이 이제 윤삭을 향해 몸을 솟구치고 있었다.
파악!
그러곤 윤삭을 향해 씨익 웃어 주며 검을 내리쳤다.
상대의 발도를 끌어냈으니 이젠 자신의 차례였다.
묵랑검법 일 초.
개천.
촤아아아아아악!
공간을 찢는 선우진의 검격이 윤삭을 덮쳤다.
윤삭의 눈앞에 거대한 심연의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크윽?!”
윤삭은 자신이 성급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저런 검격을 가진 자를 상대하면서 함부로 맞추지도 못할 발도를 날려 틈을 보이다니, 너무 큰 실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후회는 언제나 때늦은 법. 윤삭은 이를 악물고는 사력을 다해 도를 휘둘렀다.
발도만큼의 위력은 안 돼도 그의 모든 깨달음이 함축된 참격이었다.
쉬이이이이익!
콰아아아아아앙!
그 순간, 검격과 도격의 충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윤삭이 포탄처럼 뒤로 튕겨 났다.
그의 참격이 선우진의 개천을 파훼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퍼어엉!
커다란 물보라를 일으키며 그의 몸이 강 속으로 처박혔다.
저대로라면 강바닥에 처박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격렬한 속도였다.
타닥!
선우진은 다시 배 위에 내려서 잠시 그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비록 개천을 파훼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아직 죽지 않았을 거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는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마치 그대로 수장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선우진은 잠시 어두운 수면을 바라보고 있다 다른 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어차피 배가 가라앉고 있었기에 그 위에 오래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파박!
하지만 선우진이 허공을 날아 다른 배를 향해 옮겨 가고 있을 때였다.
커다란 물보라와 함께 윤삭이 돌고래처럼 솟구쳤다.
촤아아악!
선우진의 눈에 크게 다쳐 피가 흐르는 그의 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수와 같이 번뜩이는 눈빛이 또렷이 들어왔다.
아까처럼 살기로 가득하지만, 아까완 달리 전혀 이성을 잃지 않은 냉정한 눈빛이었다.
묵랑이 말했다.
- 역시 노리고 있었군.
‘그런 것 같군요.’
선우진은 예전 해남파와 싸울 때의 경험으로 물 위에서 윤삭과 싸울 경우 수공이 부족한 자신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경동시켜 이성을 잃게 만들었던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백전노장인 그가 그 사실을 바로 파악한 모양이었다.
쉬이이이익!
윤삭의 발도가 다시 공간에 선을 그었다.
이미 몸을 날리고 있는 선우진을 포함해, 하늘을 두 쪽으로 쪼개는 듯한 빛의 선이었다.
샤아아아악!
그의 참격이 하늘을 갈라 버린 듯한 환상이 보이고, 다음 순간 선우진은 무사히 처음 목표했던 배 위로 건너올 수 있었다.
타닥!
경지에 달한 선우진의 신법이 허공을 발로 차며 가속해 윤삭이 그은 선을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법은 확실히 선우진의 우위였다.
그러자 윤삭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선우진을 보며 다시 물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풍덩!
선우진은 그가 떨어진 물속을 주시했다.
하지만 이미 어두워진 이 시간에 육안으로 물밑에 있을 그의 위치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또한 공기의 흐름으로 주변을 파악하는 심안도 마찬가지였다.
선우진 자신도 물속에 들어가면 모를까 그 속에 있는 윤삭의 움직임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오랜만에 상대를 읽지 못한다는 사실에 답답함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촤아아아악!
선우진이 탔던 배가 느닷없이 반으로 쪼개졌다.
그 갑작스러운 뒤틀림에 숨죽인 채 선우진을 지켜보고 있던 수적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으아아아악!”
“배, 배가?!”
그 순간 선우진은 윤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발판을 없애 허점을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선우진은 망설이지 않고 주변에 있는 다른 배로 몸을 날렸다.
파박!
방금 발도를 사용했으니 다시 사용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터, 그사이를 놓치지 않고 바로 다른 배로 이동한 것이었다.
타닥!
선우진은 가까이 있던 배로 무사히 착지할 수 있었다. 생각대로 발도를 한 번 사용하고 바로 다시 공격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또 타고 있던 배가 갈라졌다.
촤아아아아악!
“음.”
놈은 아무래도 발판을 모두 없애 버리려는 모양이었다.
선우진은 혀를 차고는 바로 다른 배로 몸을 날렸다.
“칫!”
파박!
그리고 잠시 후, 그 배 또한 두 쪽으로 쪼개지며 가라앉았다.
그 배들에 자신의 부하들이 타고 있다는 건 전혀 생각지도 않는 듯한 거침없는 행보였다.
선우진은 또 다른 배로 몸을 날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곤란한걸.’
윤삭이 부하들을 죽이는 것을 꺼리지 않고 배를 모두 침몰시켜 버리기로 했다면 그건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해남파의 오익덕과 싸우던 증칠과 같은 꼴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
혈해마도 윤삭은 자신이 쪼갠 배 사이의 수면으로 올라와 한 번 호흡하고는 다시 돌고래처럼 잠수해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배를 향해 나아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귀한 아들이 위험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급함이 밀려왔지만, 백전노장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가장 돌아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걸.
여기서 먼저 조급해지는 자가 패하게 될 것이라는 걸 말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발도를 대등하게 받아칠 수 있는 상대라면 정면으로 상대하는 것보단 상대의 약점을 극대화하는 것이 가장 빨리 놈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몸은 지금 정상이 아니었다.
‘크윽!’
다음 배를 향해 돌고래처럼 헤엄치던 윤삭은 한순간 가슴을 움켜잡고는 피를 토해 냈다.
울컥!
아까 무리하게 놈의 검격을 받아 낸 대가였다.
몸 여기저기가 찢겨 난 출혈이야 혈도를 점해 대강 막아 놨지만, 그때 입은 내상만큼은 계속해서 윤삭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얼마나 더 움직일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피를 한 움큼 토해 낸 윤삭은 바로 다시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이 싸움은 인내심 싸움이라는 것을.
내상을 참고 발판을 모두 없앨 수만 있다면 자신의 승리가 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는 결국 마지막까지 버텨 내고야 말았다.
콰지지지직!
윤삭은 가슴에 느껴지는 격통을 참아 내며 마침내 마지막 배를 쪼개 버렸다.
이제 놈의 발판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물론 배의 파편들이 강 위에 온통 가득하긴 하지만, 수공을 모르는 자가 그런 곳을 밟고 자신을 상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제 승부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격통을 참으며 마지막 배를 격침시킨 윤삭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마지막 배와 함께 놈의 기척도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
윤삭은 경악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배 위를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며 자신을 피해 다니던 놈이 한순간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은신?’
아마도 그런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의 감각을 속일 수 있는 은신이라니,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놈이 무슨 초일류 살수라도 된다는 말인가?
윤삭은 수면 밑에서 놈의 위치를 찾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일단 놈이 숨을 수 있는 곳이 너무 많았다.
강물 위가 온통 자신이 부순 배의 파편들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윤삭은 숨이 점점 가빠 오는 것을 느꼈다.
다시 수면 위로 올라가 호흡을 해야만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쉽게 수면 위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
놈이 저 파편들 어딘가에 숨어서 자신이 올라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호흡이 모자란 자신이, 그것도 내상을 입은 자신이 아까 그 공격을 받게 된다면 승부는 그것으로 끝날지도 몰랐다.
윤삭은 이를 악물었다.
배만 다 부수면 승부가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상황이 역전되어 버린 것이었다.
정말 이가 갈리는 놈이 아닐 수 없었다.
***
같은 시각, 선우진은 부유물 위에 은신한 채 수면 아래의 움직임을 읽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경신술로 몸의 무게를 낮춰 부유물에 가해지는 압력을 줄여야만 했고, 동시에 익숙지 않은 물속의 진동에 적응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감에도 윤삭의 움직임이 없었다.
분명 물고기가 아닌 이상 물속에서 무한정 머물 수는 없을 터인데도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면 그 순간 승부를 끝낼 수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놈 역시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 같았다.
역시 만만치 않은 자였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놈은 어차피 언젠가는 올라와야 했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불리해지는 건 놈일 것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호흡으로 아까와 같은 발도를 쓸 수도 없을 테고, 내상 또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져만 갈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선우진으로선 놈을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놈이 수면으로 올라오는 순간 승부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선우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살짝 물에 담근 손끝에 거센 진동이 느껴졌다.
사람 크기 정도 되는 무언가가 수면 위로 급속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놈인가?!’
선우진은 바로 덮칠 준비를 했다.
놈이 올라오는 순간 ‘개천’을 날릴 생각이었다.
다음 순간 물보라를 일으키며 그것이 솟구쳐 올랐다.
촤아악!
“?!”
선우진은 검격을 날리려다 순간 멈칫했다.
물 위로 올라온 것이 놈이 아니라는 걸 마지막 순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시신?’
그랬다.
물 위로 올라온 것은 이미 죽은 자의 시신이었다.
물속에 가라앉았던 시신을 위로 던졌던 모양이었다.
‘꽤 머리를 썼군.’
나름대로 괜찮은 방법이었다.
진짜로 속을 뻔했으니까.
하지만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미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 방법도 역시 헛된 시도가 되고 말았다.
적어도 선우진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 순간 갑작스레 뒤통수가 서늘해지기 전까지는.
“?!”
모골이 송연해지는 감각에 선우진은 황급히 몸을 솟구쳤다.
파악!
그 순간 강물이 좌악 갈라지며 물속에서부터 놈의 발도가 선우진을 덮쳐 왔다.
미처 대비하지도 못한 상황에서였다.
“크윽!”
***
윤삭은 평생을 거친 바다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수공은 선우진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무엇보다 물속에서 그의 감각은 물 위에서 선우진의 심안과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시신을 위로 던졌을 때 멈칫했던 선우진의 미동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윤삭에겐 그 정도면 충분했다.
‘흡!’
윤삭은 남은 호흡을 모두 사용해 발도했다.
쉬이이이이익!
그의 온 힘을 다한 발도가 마치 기적처럼 강물과 놈을 가르고 있었다.
놈이 만약 물 아래의 진동을 느낄 수 없다면 이걸로 승부가 끝날 수도 있었다.
콰아아아아앙!
강력한 충격이 느껴졌다.
놈이 자신의 발도를 막아 낸 모양. 아무래도 이번 일격으로 놈을 끝내는 건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이 그랬듯 놈도 아무런 피해 없이 자신의 발도를 받아 내지 못했을 것이고, 일단 모습을 드러낸 이상 물에서 절대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없을 테니까.
윤삭은 전속력으로 수면 위로 솟구쳤다.
“푸하!”
일단 한계에 달했던 호흡을 힘껏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다시 놈을 향해 도를 휘두르려 했다.
예상했던 대로 공중으로 튕겨 난 놈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내상을 입은 것이었다.
“끝이다!”
윤삭은 놈을 향해 도를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하늘 위로 높이 튕겨 나갔던 놈이 한발 먼저였다.
내상을 입었을 것임에 틀림없을 텐데도 자신이 호흡하는 사이 놈이 먼저 검을 휘둘렀던 것이었다.
화아아아악!
놈이 검을 펼친 순간, 윤삭의 눈에 당황의 빛이 떠올랐다.
놈의 검이 수십, 수백 개의 검영으로 분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사방으로 빛을 뿜어내는 태양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윤삭은 이를 악물었다.
보기엔 화려해 보이지만 환검에 불과하다는 걸 순식간에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저런 잔재주를 부리다니, 최후의 발악을 하는 모양이었다.
윤삭은 환상적으로 분열한 검영을 상관하지 않고 그 중심을 향해 다시 왜도를 휘두르려 했다.
이번에야말로 끝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놈이 먼저 소리쳤다.
“가라!”
뭐?
윤삭의 눈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경악했다.
방금 전까지 환검에 불과했던 수백 개의 검영들이 갑자기 실체를 띤 채 사방에서 자신을 덮쳐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로선 알 수 없었지만 선우진의 공즉시색이 펼쳐졌던 것이었다.
쉬이이이이익!
“크윽!”
윤삭은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그냥 맞아 줄 수도 없었다.
윤삭은 놈의 검격을 일일이 방어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한순간 공력을 방출했다.
“합!”
그러자 윤삭의 몸에서 유형의 강기가 방출되어 절대 뚫을 수 없는 막을 형성했다.
호신강기였다.
화아아악!
투투투투투투투퉁!
그의 호신강기는 어렵지 않게 선우진의 공즉시색을 무위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쿨럭!”
윤삭은 호신강기를 회수하며 또다시 피를 토해 내야 했다.
내상이 점점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방금 호신강기는 확실히 무리였다.
윤삭은 최대한 빠르게 피를 토해 내고는 황급히 도를 들어 선우진의 공격을 방어하려 했다.
자신이 방금 보인 틈을 놓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
주변을 살핀 윤삭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호신강기로 놈의 공격을 막아 내고 피를 토해 낸 사이 놈의 종적이 다시 사라졌다는 걸.
“이놈….”
윤삭은 이를 갈았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바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놈은 내상을 입은 자신을 상대로 장기전을 택했던 것이었다.
풍덩!
윤삭의 몸이 다시 물속으로 떨어졌다.
또다시 아까와 같은 상황의 반복이었다.
‘크윽!’
물속에서 윤삭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좋지 않았다.
상황은 아까와 같을지 몰라도 자신의 상태는 같지 못했다.
내상이 아까보다 훨씬 더 악화된 상태였던 것이다.
무리하게 호신강기를 사용했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윤삭의 마음이 점점 더 조급해지고 있었다.
이젠 진짜 시간이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놈과 싸워 보지도 못하고 쓰러질 수도 있었다.
***
한편, 선우진의 상태 또한 좋지 못했다.
아까 윤삭의 발도를 받아 내며 내상을 입은 상태로 바로 환검경과 공즉시색을 전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윤삭이 허점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그를 공격할 수 없었다.
그 상태로 무리하게 공격을 가하다가 만약 막힐 경우 그다음이 없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선우진은 간신히 은신을 유지한 채 울컥 솟구치려는 핏물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내상이 악화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피를 토해 내 위치를 들키게 되면 끝장일 테니까.
‘후우우우.’
선우진은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내상을 달랬다.
역시 남해삼마의 일인인 윤삭은 만만치 않았다.
무공을 떠나 그라는 사람 자체가 끔찍하게도 질기고 노련했다.
이렇게 무공 싸움이 아닌 인내 싸움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그를 경동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래서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물 위에서 그에게 싸움을 걸었던 것 자체가 무모한 짓이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후회해 봐야 소용없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버텨 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끝을 내야만 했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더 이상 뭔가를 시도할 수 있는 여력이 남지 않을 테니까.
선우진은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놈이 올라오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