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진가삼대-2
두 사람은 열이 식은 듯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며 헛기침을 했다.
그러다 진사몽이 문득 생각난 듯 진소은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소은이 너는 어떻게 된 것이냐?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성장한 게냐?”
그러자 진소은이 뭘 떠올렸는지 활짝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분! 인 공자님께서 제게 영약을 주셨어요! 절정의 경지에 오르면 더 제대로 된 자연곤을 펼칠 수 있을 거라고 말하시면서요! 그래서 영약을 먹었더니 바로 절정에 오를 수 있더라고요! 그분 말대로 경지는 이미 절정을 넘어섰는데 내공이 부족해서 절정이 되지 못했던 거였나 봐요!”
그 말에 진사몽이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탄식했다.
“허어! 절정이라고?! 절정, 그랬구나!”
진사몽은 이제껏 진소은의 내공을 증진시키는 데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예전 자연곤 진지인이 그런 경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했던 말이 그의 머릿속에 꽉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류와 절정 고수의 차이는 단지 강기를 쓸 수 있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순발력, 반응 속도, 근력, 지구력, 심지어 상대를 읽는 능력까지도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그러니 절정에 오른 진소은이 더 자연스럽게 곤을 다룰 수 있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진지인의 말에 얽매여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진사몽은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진사몽과 같은 말을 듣고 있던 진공무가 느낀 것은 좀 다른 것이었다.
“인 공자라….”
그는 그 인 공자라는 자에게 진가장이 너무나도 큰 은혜를 입었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혈해마도 윤삭에게서 진가장을 구해 준 것도 엄청난 은혜인데 진소은의 경지를 높여 주기까지….
진가장의 현재와 미래 모두가 그에게 엄청난 은혜를 입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진가장의 무인은 원한도 은혜도 열 배로 갚는 법, 진공무는 그에게 입은 은혜를 대체 어떻게 갚을 수 있을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진공무가 문득 한숨을 내쉬며 진소은에게 물었다.
“하아, 그 인 공자라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냐? 대체 누구길래 그 젊은 나이에 그런 무위를 지니고….”
그러자 그의 아버지 진사몽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너는 그가 사용하는 검, 그가 사용한 검법을 보고도 그가 누구인지 모르겠더냐?”
그 말에 진공무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그의 검, 그의 검법이요? 아니오. 저는 둘 다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만.”
그러자 진사몽이 침음성을 흘리며 말했다.
“으음, 너는 백호검, 그리고 남십자검을 본 적이 없었구나.”
“백호검, 남십자검?”
그 이름들을 되뇌어 보던 진공무는 한순간 그것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설마 해남인가?! 해남인가의 후계자가 살아 있었다는 겁니까?!”
진사몽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런 것 같구나. 생각해 보면 그 인 공자가 말하길 혈해마도 윤삭이 진태도의 부하라고 했었지. 그가 일부러 백교방을 찾아왔던 이유도 그렇고, 그는 아마도 아버지의 복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구나.”
그러자 진공무는 탄성을 터트리며 그 말을 조용히 되뇌었다.
“하아, 복수행, 그렇군요.”
그리고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에게 어떻게 은혜를 갚을 수 있을지 이제 알겠습니다.”
해남파도,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인 해남마검 진태도도 진가장에게 있어선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힘으론 절대 이길 수 없는 강적임에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진가장의 가주인 진공무는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은혜를 입지 않았다면 모를까, 한 번 입은 은혜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갚는 것이 광동 진가장의 사내였으니까.
진공무와 진사몽이 인파랑, 선우진의 복수행을 돕기로 결심을 굳혔을 때였다.
문득 진소은이 발그레해진 얼굴로 꿈꾸듯 중얼거렸다.
“그분의 복수행을 도와주게 되면, 앞으로도 그분과 계속 함께 있을 수 있겠네요?”
그 심상치 않은 말에 진공무와 진사몽이 문득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으, 응?”
“그, 그와 함께 있고 싶다고?”
그러자 진소은이 활짝 웃으며 신이 난 듯 말하기 시작했다.
“네! 그분과 함께 있고 싶어요! 처음 가라앉는 배 위에 서 계실 때는 막 신비하다는 생각밖에 없었는데, 그분이 절정고수 네 명을 간단히 죽이고 저를 구해 주셨을 때부터 너무 존경스러워졌어요! 세상에 저런 고수도 있구나, 나도 열심히 해야겠다! 이런 생각도 들고 또….”
진사몽과 진공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또?”
분명히 말은 존경이라고 하는데 어째 진소은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녀의 신이 난 목소리와 꿈꾸는 듯한 눈빛이 존경의 감정이라고 말하기엔 좀 과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진소은은 자신의 두 손까지 꼭 모아 가슴 앞에 붙이며 꿈꾸듯 말했다.
“그리고 그분과 얘기를 하는데 막 얼굴에 열이 나고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정말 이상했어요.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 그리고 사실 지금도 좀 그래요. 그분이 혹시 안 돌아오시면 어쩌지 막 불안하기도 하고, 그분을 따라가 보고 싶기도 하고, 다시 보고 싶고….”
진소은이 말을 계속할수록 진사몽과 진공무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졌다.
그들도 그리 눈치가 빠른 남자들은 아니었지만 저걸 존경심이라고 부르기엔 많이 이상하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그때 진소은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조부 진사몽에게 물었다.
“조부님도 자연곤 진지인 고조부님께 이런 기분을 느끼셨나요? 존경의 감정이 크면 이런 기분이 되다니, 왜 조부님께서 평생 자연곤을 부활시키려 하셨는지 저 이젠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그, 그러냐?”
진사몽은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다 큰 여자아이가 연심과 존경심도 구분하지 못하는 이 난감한 상황에, 아들 진공무가 비난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종류의 대화에 미숙한 그들로선 차마 진소은에게 진실을 말해 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꿈꾸는 듯한 표정의 진소은을 보며 그저 난감한 표정으로 눈을 마주칠 뿐이었다.
***
혈해마도 윤삭을 처리했던 선우진은 그 후 설풍, 증칠과 만나 백교방 전체를 완전히 소각해 버렸다.
그 안에 있던 일류 이상의 무사들은 눈에 띄는 대로 모두 죽였다.
그들이 과거 해적이었든 아니든, 일류 이상의 무인이라면 백교방이 이제껏 했던 만행들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건물과 배들도 모두 불태워 버렸고, 재산과 비밀 문서들은 모두 수거해 전장에 맡겼다.
그러자 합산파와 백교방을 무너뜨리며 얼마 되지도 않는 기간 동안 엄청나게 불어나 버린 재산에 증칠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협객행이 이렇게 부자 되기 쉬운 방법인 줄 미처 몰랐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포기하지 말고 계속 협객 노릇이나 해 볼 것을.”
그 후 두 사람이 다시 선우진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 들어간 가운데, 선우진은 다시 진가장으로 돌아와 진가장주 진공무를 만났다.
이후의 계획을 위해 그에게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선우진은 지금 당장 백교방이 진태도의 괴뢰였다는 증거를 모두 풀 생각은 없었다.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풀 경우, 궁지에 몰린 쥐처럼 그가 극단적인 행동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와 관련한 정보 통제를 부탁하기 위해 진가장주를 설득할 생각이었는데, 대화는 어쩐지 선우진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진공무가 너무나도 단호하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진가장은 인 공자에게 전폭적으로 협조하겠소. 설사 그로 인해 우리 진가장이 멸문된다 해도 상관없소. 진가장의 단 한 사람이 남는 순간까지 우리는 인 공자와 함께할 것을 약속드리겠소.”
그것은 선우진으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과격한 선언이 아닐 수 없었다.
오히려 당황한 표정이 된 선우진이 그에게 물었다.
“장주님께선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의 물음에 진공무가 엄숙하게 말했다.
“이 진 모가 비록 모자란 사람이나 이번에 인 공자가 아니었다면 진가장의 이백 년 역사가 내 대에서 끝났을 거라는 것쯤은 충분히 짐작하고 있소. 원한도 은혜도 열 배로 갚는 것이 진가장의 전통, 그 은혜는 진가장의 명운을 걸어야만 비로소 갚을 수 있을 것이외다.”
그 확고한 말에 선우진은 살짝 감동을 받고 말았다.
열혈의 진가장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었지만, 앞서 진가장의 소장주라는 진계군을 보고 사실 많이 실망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진공무가 보여 주는 모습은 열혈남아들만 모여 있다는 진가장의 소문 그대로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진공무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 부족한 식견이지만 아마도 인 공자는 해남인가의 후손인 듯하오. 그리고 아마도 그런 이유로 해남마검 진태도에게 복수행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짐작했소. 어떻소? 내 짐작이 맞소이까?”
선우진은 다시 한번 감탄했다.
그의 식견 또한 기대 이상이기 때문이었다.
저 정도까지 유추했다는 것도 놀라웠고, 그 상대가 진태도라는 것을 짐작했음에도 자신과 함께하겠다고 말 할 수 있는 의기는 더 대단했다.
선우진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맞습니다. 해남마검 진태도가 저의 원수입니다. 게다가… 호남성의 형산파도 그와 얽혀 있지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말에 진공무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형산파? 형산파도 그 일에 얽혀 있었단 말이오?”
그건 쉽지 않은 얘기였다.
서남해의 지배자 해남파만 해도 명운을 걸어야 하는데, 거기에 구대문파의 하나이자 호남성의 지배자라고 할 수 있는 형산파까지 얽혀 있다니.
그 누구에게라도 부담스럽고 두려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공무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진중한 눈빛으로 말했다.
“인 공자께선 정말 무거운 짐을 지고 계셨구려. 부디 우리 진가장이 공자의 짐을 함께 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오. 끝까지 공자와 함께하겠소.”
선우진은 이제 진심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그의 말에 거짓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해남파와 형산파를 적대하는 일임에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돕겠다고 말하다니, 전선의 동료들 외에도 무림에 이런 호한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선우진은 감탄한 눈빛으로 그에게 대답했다.
“왜 사람들이 진가장의 무인들을 열혈남아라 칭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진 장주님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곤 다시 말했다.
“하나 제 일 때문에 진가장이 위험에 처하는 건 절대 제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장주님께서 진정 저를 도와주시겠다면, 제가 필요할 때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만 좀 나서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진공무가 선우진에게 감탄했다.
그가 듣기에 인 공자라는 자의 상황은 너무도 암울한 상태였다.
저렇게 젊은 무인이 단신으로 해남파와 형산파를 적대하고 있다니,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보일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그가 자신의 도움을 거절한 것이었다.
그것도 전혀 상상치 못한 이유로 말이다.
‘자신 때문에 진가장이 위험에 처하는 건 원하는 바가 아니라고? 저런 상황에서 오히려 우리의 안위를 걱정해 줘? 허어, 정말 영웅이로구나! 여태껏 본 적 없는 영웅이야!’
진공무는 이 젊은 무인에게 자신이 홀딱 반해 버렸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떤 상상에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선우진에게 물었다.
“어떤 도움이 필요하시든 말만 하시오, 인 공자. 이미 공자와 한배를 타기로 결정한 이상, 우리의 안위 따위는 걱정할 필요도 없소.”
그러자 선우진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순간 진공무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한 말이 자신의 상상을 아득히 넘어선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지, 지금 뭐라고 하셨소, 인 공자?”
당황해 말까지 더듬는 진공무를 보며 선우진은 빙긋이 웃음 지었다.
남해의 판세를 뒤흔들려는 그의 계획이 비로소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