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절묘한 시점
다음 날, 선우진 일행은 외딴 관도 위를 이동하는 중이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기에 주변 어디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문득 손이랑이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벌써 이틀째 노숙을 했으니 제발 오늘은 마을에서 묵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온몸이 다 근질거리는 것 같다고요.”
그러자 진소은이 유쾌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하! 뭘 이틀을 가지고. 내가 조부님과 산에 있을 땐 일주일간 안 씻은 적도….”
하지만 그렇게 말하던 진소은의 얼굴은 순식간에 돌처럼 굳어졌다.
선우진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지금 그의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려 한 것인지를 깨달은 진소은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 이, 있긴 하지만, 그렇지만….”
그러자 손이랑이 바로 끼어들었다.
“다 어렸을 때나 가능했던 얘기겠죠! 그죠, 언니?”
그녀의 구원에 진소은은 한 가닥 동아줄을 본 기분이었다.
진소은은 얼른 그 동아줄을 붙잡았다.
“그, 그, 그럼! 다 어렸을 때나 가능했던 얘기지! 지금은 어휴! 어림도 없지! 어우, 끔찍해라. 하하, 하.”
“그러게요. 언니는 참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나 봐요. 이렇게 예쁘고 깔끔한 언니가 어렸을 땐 그렇게 힘들게 살아야 했다니. 호호호.”
“맞아. 정말 그랬지. 하하. 하하하….”
진소은은 그간 손이랑의 노력 덕분에 자신의 감정에 대해 약간의 감을 잡게 된 상태였다.
그래서 적어도 이젠 자신의 감정이 존경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구분할 수는 있게 되었다.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유도 말이다.
그것은 분명히 긍정적인 신호이긴 했다.
산에서 너무 오랫동안 혼자 지내느라 정상적인 여인의 감수성을 갖지 못했던 그녀가 조금씩 다른 사람들과 맞춰지고 있다는 얘기였으니까.
하지만 문제도 있었다.
그것도 심각한 문제가 말이다.
진소은이 자신의 얼굴을 손부채질 하며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어떡해! 인 공자님이 계속 바라보시니까 얼굴이 타버릴 것 같아!’
가장 큰 문제는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된 후, 더 이상 선우진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는 점이었다.
그를 바라보기만 해도 심장과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소은은 이제 항상 선우진과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서서 움직이곤 했다.
그래 봐야 손대수, 손이랑을 사이에 둔 거리이긴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숨도 쉬지 못할 것만 같았다.
산골 소녀의 늦은 첫사랑이란 이렇게도 힘겨운 것이었다.
진소은과 손이랑이 본인들만 어색한지 모르는 상황극을 펼치고, 손대수와 선우진이 그녀들을 보며 내심 웃음 짓고 있을 때였다.
문득 그들의 눈에 작은 마을 하나가 들어왔다.
외딴곳에 위치해 있음에도 꽤 잘 정비되어 보이는 마을이었다.
일행 중 그곳을 가장 먼저 발견한 선우진이 두 여인에게 말했다.
“저기 마을이 있구려. 하늘님이 깔끔한 두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시려는 모양이오.”
그러자 손이랑과 진소은은 고개를 돌려 마을을 확인하고는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꺄악! 진짜 마을이다!”
“그러게! 이제 좀 제대로 씻을 수 있겠어!”
일행들은 기쁜 마음에 발걸음을 빨리했다.
오랜만에 만나게 될 제대로 된 숙소와 식사에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 목표가 접근한다.
마을 외곽에서 도끼로 나무를 찍으며 바깥을 살피는 역할을 맡고 있던 혈우련의 살수 사십팔 호는 가장 근처에 있는 동료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러자 그 전음을 받은 살수가 다시 주변 동료들에게 전음을 보내며 그 소식은 순식간에 마을 전체로 퍼져 갔다.
- 목표가 접근한다.
- 목표가 접근한다.
- 목표가 접근한다.
하지만 메아리가 울리듯 마을 전체에 퍼져 가는 전음과는 달리, 겉으로 보이는 마을의 모습은 무척이나 활기차고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모두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자신의 일에 매진하고 있었고, 골목 사이사이에는 아이들이 나와 뛰어놀고 있었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아무 의심할 바 없는 완벽하게 평화로운 시골 마을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마을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객잔, 그곳의 점소이로 화한 이번 살행의 책임자, 살수 사 호는 사냥감이 거미줄 안으로 걸어 들어올 것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일단 마을의 위치가 너무 좋았다.
놈들은 이곳에 오기 전 이틀 정도 노숙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니 이곳을 지나면 또 어디서 제대로 된 숙식을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기에, 설사 하루를 묵지는 않더라도 식사는 반드시 여기서 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또 마을 사람들로 화한 살수들의 연기도 완벽했다.
이번 의뢰비가 비싼 만큼 마을을 구성하는 살수들의 등급도 최고위로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아이들 역할을 할 살수들이 많다는 게 더욱 만족스러웠다.
마지막으로 함정도 완벽했다.
놈들은 전혀 알 수 없겠지만 이 마을은 이미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함정으로 꾸며진 상태였다.
독과 암기, 매복한 살수들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러니 놈들 중 미래를 읽는 예언자라도 있지 않은 이상 이번 살행도 역시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성공할 수밖에 없도록 준비해 놓고 실행하는 것이 혈우련의 방식이었으니까 말이다.
***
물론 혈우련의 함정은 누구나 빠질 수밖에 없을 만큼 실로 완벽한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엔 가끔 일반적인 사람들과 궤를 달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묵랑이 문득 선우진에게 말했다.
- 함정이로군.
‘예?’
- 저 마을 사람들 모두가 다 살수들이네. 겉으로 살기는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모두 다 자네를 노리고 있군.
묵랑의 갑작스러운 말에 처음엔 선우진도 당황했다.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도 평화롭고 평범해 보이는 마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우진의 기억력은 곧 살행을 할 때 객잔, 심하면 마을까지도 만들어 함정을 파곤 한다는 살수 단체에 대한 소문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혈우련! 그들인가 보군요. 과연.’
- 나는 혈우련이란 자들은 모르지만, 저 마을을 보니 범상치 않은 자들임에는 분명하군. 살행을 하기 위해 살수들이 마을 하나를 구성하다니, 내 생전에도 본 적이 없는 수법일세. 어쩔 셈인가? 먼저 선공을 할 텐가?
묵랑의 질문에 선우진은 잠시 고민했다.
함정인 걸 알았으니 굳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갈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다.
묵랑의 말대로 저들이 대비하기 전에 먼저 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 같았다.
하지만 잠깐 고민하던 선우진은 문득 씨익 웃음 지었다. 어쩐지 악동같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잠시 후, 혈우련이 만든 마을 근처까지 온 선우진 일행은 마을에서 일정 거리만큼 떨어진 채 그곳을 그냥 지나쳐 갔다.
그러자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혈우련 살수들 사이에서 다시 전음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목표가 그냥 지나쳐 간다! 반복한다! 목표가 마을을 그냥 지나쳐 가고 있다.
- 목표가 이곳을 지나쳐 간다!
- 목표가 이곳을 지나쳐 간다!
그 전음의 메아리는 곧 객잔에 위치한 살수 사 호에게도 전파됐다.
‘뭐라고?!’
사 호는 눈을 부릅뜨고는 이를 꽉 깨물었다.
놈들이 이곳을 그냥 지나쳐 가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설마 노숙을 더 좋아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앞으로 얼마나 더 노숙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사 호는 전에 겪어 보지 못한 이 사태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객잔도 아닌 마을을 만든 상황이었다.
놈들이 이곳을 그냥 지나간다면 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바로 본색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함정에 들어오지도 않은 적을 치는 건 성공이 불확실한 일이었고, 그건 혈우련의 방식이 아니었으니까.
‘혹시 우리의 존재를 눈치챈 것인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아닐 것 같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냥 저렇게 지나가기만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후우우우!”
사 호는 분노한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지금 했던 이 짓을 다시 한번 더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때도 혹시 놈이 그냥 지나갈지도 모르니까 놈에 대한 관찰도 좀 더 해 봐야 할 테고 말이다.
문득 다른 살수들의 질문이 들려왔다.
- 사 호, 이제 어떻게 합니까?
살수 사 호는 이를 꽉 깨물며 대답했다.
- 대기하라. 놈들이 완전히 지나간 후 이곳을 정리한다.
그러자 마을 안에는 같은 내용의 전음들이 다시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 대기하라. 놈들이 지나간 후 이곳을 정리한다.
- 대기하라. 놈들이 지나간 후 이곳을 정리한다.
- 대기하라. 놈들이 지나간 후 이곳을 정리한다.
***
선우진은 마을을 지나쳐 가며 놈들의 움직임을 계속 관찰해 봤다.
그러자 과연 마을 사람들의 움직임이 급속도로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들이 그냥 지나갔으니 일반 사람인 척 연기하는 것을 포기한 모양이었다.
웃음이 나왔다.
마을 하나를 만들었던 정성을 송두리째 물거품으로 만들어 줬다는 것이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한 번 놓쳤다고 저들이 포기할 리 없으니 정리는 다음에 해 주면 될 테고 말이다.
그때 손대수가 불만스러워 보이는 손녀 손이랑의 표정을 슬쩍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인 공자, 이젠 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소? 왜 저 마을을 그냥 지나쳤는지를 말이오.”
아까 선우진은 일행들에게 마을을 그냥 지나쳐 간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었다.
이유는 나중에 제대로 설명해 준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일행의 중심인 그가 진지한 얼굴로 하는 말에 일행들은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대로 씻을 수 있기를 고대했던 두 여성들에겐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선우진은 작은 목소리로 일행들에게 물었다.
“아무도 저들에게서 이상함을 못 느끼셨습니까?”
그의 질문에 일행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함이라고요?”
그러자 선우진은 약간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모두 살수들이었습니다. 나무꾼, 농사꾼, 아이들 할 것 없이 모두 살수들이더군요. 제 생각엔 아마 저들이 그 소문의 혈우련인 것 같았습니다.”
그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혀, 혈우련이라고요?”
“허어, 저들이 말이오?”
“혈우련! …저, 죄송하지만 그게 뭔가요?”
손이랑은 진소은에게 혈우련에 대해 설명해 줬다.
그사이 손대수는 선우진에게 물었다.
“대, 대체 어디서 그런 걸 알아보셨소?”
선우진은 잠시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사실 대답해 줄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원래 몰랐는데 묵랑이 알려 줬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때였다.
선우진의 곤란함을 해결해 주려는 듯 그의 감각에 뭔가가 느껴졌다.
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누군가 옵니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군요.”
그것도 한 방향이 아닌 두 방향이었다.
선우진의 말에 일행들은 문득 긴장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잠시 후 동쪽에서 한 명의 죽립인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고 있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손대수가 중얼거렸다.
“…초절정?”
신법을 보건대 아마도 그럴 듯했다.
하지만 선우진의 눈이 향한 곳은 그쪽이 아니었다.
그는 동쪽이 아닌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어느새 그들의 앞에 착지한 작은 체격의 죽립인이 죽립을 벗으며 말했다.
“네가 인파랑이냐?”
무척이나 괄괄하고 씩씩한 여인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죽립 안에서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목소리와 전혀 달랐다.
마치 백옥처럼 하얗고 장미처럼 화사하게 느껴지는 아름다운 얼굴, 그녀가 바로 하원달기 연태진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을 본 손이랑과 진소은이 자신들도 모르게 감탄성을 터트렸다.
“우와! 예쁘다!”
“와아! 정말 미인이시네요!”
하지만 그녀들의 감탄에도 연태진은 코웃음을 쳤다.
그런 감탄 따위는 너무 익숙해 아무 감흥도 없기 때문이었다.
오직 손대수만이 그녀의 정체를 깨닫고 놀라 중얼거렸다.
“…하원달기?”
그러자 아름다운 얼굴로 사내처럼 씨익 웃은 연태진이 오연하게 말했다.
“그래, 내가 바로 하원달기 연태진이다! 인파랑이라는 놈에게 제대로 된 싸움을 가르쳐 주기 위해 이곳에 왔다! 다시 묻겠다. 네가 인파랑이냐?!”
하지만 여전히 선우진은 그녀 쪽을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계속해서 북쪽에 머물러 있는 상태였다.
그러자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연태진이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감히! 네가 나를 무시…!”
하지만 그때였다.
선우진이 바라보고 있던 북쪽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여섯 명씩 두 무리, 모두 열두 명의 사람들이 각각 기러기와 같은 진형을 짜고는 그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쉬이이익!
선우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왔군.”
하얀 무복에 청색 영웅건, 복장만 봐도 그들이 형산파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형산파의 비밀 병기인 육합검수 파산조, 그들의 등장이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그들의 등장에 연태진마저도 그들 쪽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육합검수들은 금세 다가와 일행의 앞에 착지했다.
탁!
마치 한 명이 내려선 듯 동시에 들려오는 발소리.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모두가 그들을 주목하고 있을 때였다.
육합검수들 중 파산 사 조의 조장 운당이 앞으로 나서며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인파랑! 형산파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하겠다!”
그 말에 이미 그들이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손대수와 손이랑, 진소은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마침내 형산파의 비밀 병기 육합검수들이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났던 것이었다.
광동성의 무인인 그들에게 형산파의 이름은 더없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형산파란 이름에 놀란 것은 세상 무서운 것이 없었던 하원달기 연태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형산파라고?”
선우진은 자신의 정면을 가로막은 연태진과 왼쪽에 나타난 형산파의 파산조를 주욱 훑어보았다.
그리고 뒤쪽에 있을 혈우련의 존재까지.
참으로 절묘한 시점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