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그와 그녀들의 시간-3
운남성 점창산.
이제 혈교의 총본산이 된 이곳 주변은 수많은 마두들이 상주하고 있는, 일반 백성들에겐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곳이 된 상태였다.
특히 점창산 인근의 대리는 원래 묘족보다도 한족들이 더 많이 살고 있던 풍요롭고 번화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랬던 대리의 백성들은 지금 자신들이 묘족이 아닌 것을 안타까워해야만 했다.
묘족들은 밀림으로라도 들어가 마두들을 피할 수 있었지만, 자신들은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혈마에게서 일반 백성들을 절대 건드리지 말라는 엄명이 내려온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두려운 지존이라도 광기를 완전히 제어할 수 있다면 그건 혈교의 마두가 아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혈마 또한 점창산 밖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일일이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 결과, 대리의 주민들은 이제 늘 생존을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어느 이른 저녁, 대리의 한 객점 안으로 세 명의 마두들이 문을 박차며 들어왔다.
콰아앙!
“주인장! 가장 비싼 술과 안주를 가져오너라!”
그들은 대리에 상주하는 많은 혈교의 마두들 중에서도 꽤 이름을 날리고 있는 초웅삼마란 자들이었다.
그러자 객점의 주인인 왕소반은 허리가 부러질 듯 굽신거리며 뛰어나가 그들을 환영했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영웅님들!”
비굴한 모습이긴 했지만 왕소반의 밝은 얼굴은 적어도 가식은 아니었다.
초웅삼마는 벌써 몇 번이나 이곳에 와 제대로 돈을 지불하고 음식을 먹었던 나름 이 객점의 단골손님이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들 초웅삼마를 단골로 유치한 것은 이 객점에 있어 굉장한 행운이라고도 말할 수 있었다.
그들처럼 강력한 마두들이 들락거리는 곳은 그들보다 약한 마두들이 차마 행패를 부리지 못했으니까.
나름대로 객점의 든든한 바람막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여기 앉으십시오! 잠시만 기다리시면 최고의 술과 요리로 대접해 올리겠습니다!”
왕소반은 그들의 방문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주방으로 들어가 그의 아내에게 특별히 신경 써서 요리를 만들라고 신신당부하고는 다시 돌아왔다.
그때였다.
초웅삼마의 어딘가 심기가 불편한 듯한 대화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요새는 도무지 밖을 나돌아다니는 계집을 볼 수가 없군. 하나 붙잡아서 데리고 놀 때가 되었는데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요즘은 즐길 거리가 없으니 영 흥이 안 납니다.”
왕소반은 그들의 끔찍한 대화를 듣고 문득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스스로를 일깨웠다.
그들이 아무리 자신의 객점에 득이 되는 존재이고 돈도 잘 내는 우수 고객이라지만, 그들의 진면목은 결국 무도한 혈교의 마두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들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만 했다.
왕소반이 그렇게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단속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초웅삼마의 셋째 노빈독이 그를 불렀다.
“그러고 보니 주인장!”
그러자 왕소반은 황급히 만면에 웃음을 띠고는 그에게 달려갔다.
“예! 부르셨습니까?!”
막내인 노빈독이 형제들을 대표해 그를 부르는 건 매우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왕소반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노빈독의 입에서 무슨 얘기를 듣게 될지를 말이다.
노빈독이 문득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왕소반에게 물었다.
“주인장이 성혼을 했던가?”
그 순간, 뭔가 불길한 느낌이 왕소반의 뒷목을 스쳐 갔다.
하지만 미처 그 불길함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던 왕소반은 몸에 밴 대로 친절하게 웃으며 대답해 줄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그러무닙쇼! 제 아내가 저희 객점의 요리사입니다요!”
그러자 노빈독이 반색하며 말했다.
“호오! 잘됐군. 그럼 아내를 잠깐 나오라고 하게.”
그 말에 왕소반의 얼굴은 순간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이들이 하던 말, 그리고 갑자기 아내를 불러오라는 요구가 그의 머릿속에서 뭔가 불길한 결론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소반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제 아내는 지금 영웅님들 드릴 요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좀….”
하지만 왕소반은 기억했어야만 했다.
그들이 왕소반의 변명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세상 누구보다도 무도한 혈교의 마두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의 변명에 노빈독이 얼굴에서 싹 웃음기를 지운 채 말하고 있었다.
“나오라고 해. 당장.”
그 순간, 왕소반은 온몸의 피부가 찌릿찌릿해지는 느낌에 숨이 턱 막히고 오금이 저리기 시작했다.
굳이 무인이 아니어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노빈독이 내뿜고 있는 살기 때문이라는 것을.
왕소반은 결국 억지로 입을 열어 그의 아내를 불러내야만 했다.
다른 대리의 주민들처럼, 그에게도 이미 혈교의 마두들에게 대항할 힘과 의지 따위는 잃어버린지 오래였다.
“이, 임자! 자, 잠깐 나와 보시오!”
하지만 요리를 하느라 못 들었는지 그녀의 대답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왕소반은 직접 들어가 그녀를 찾아보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한 발자국이라도 발을 떼는 순간 자신의 목도 떼어질 것만 같은 공포감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더 절박하게 목소리를 내는 것뿐이었다.
“임자! 어서 나와 보시오! 어서 나와 보라니까!”
그러자 요리를 하고 있던 왕소반의 아내가 약간 짜증을 내며 주방 밖으로 나왔다.
“지금 한참 요리 중인데 왜…?!”
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나오던 그녀는 바로 목격할 수 있었다.
초웅삼마의 험상궂은 눈이 자신의 온몸을 훑고 있는 모습과 그 앞에 선 남편이 곧 쓰러질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을.
그녀는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초웅삼마의 셋째 노빈독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호오, 별로 기대는 안 했는데, 그냥저냥 봐 줄 만은 하잖아? 안 그렇습니까, 형님들?”
그의 질문에 초웅삼마의 첫째와 둘째인 노계독과 노역독 역시 비릿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생각보단 괜찮구나.”
“급한 대로 쓸 만은 하겠는걸?”
여자인 그녀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를 이제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를 말이다.
그녀가 문득 절박한 눈빛으로 남편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바라보지 못했다.
죄책감과 자괴감, 그리고 그것으로도 극복하지 못하는 공포심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노빈독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자아, 여자. 어서 이쪽으로 와 보거라.”
그러자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간곡히 사정하기 시작했다.
“영웅님들, 저는 보시다시피 남편이 있고 집에는 아이도 있는 몸입니다. 그러니 부디….”
하지만 그 또한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말을 끊으며 노빈독이 이렇게 물었기 때문이었다.
“남편과 아이가 있어서 안 된다. 그럼 남편과 아이가 없으면 되겠구나?”
그 말에 여인은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며 남편 왕소반을 바라보는 노빈독의 날카로운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인의 눈은 노빈독의 손가락이 남편을 향해 살짝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황급히 소리쳤다.
“아닙니다!”
여인은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늦으면 남편을 잃게 될 거라는 걸.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는 더 망설일 시간이 없다는 걸 말이다.
노빈독의 차가운 눈이 자신에게로 향했다.
뭐가 아니냐고 묻고 있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러자 여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편과 아이가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그제야 노빈독의 입이 한 줄기 호선을 그렸다.
“호오, 그래?”
그 순간,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네…. 상관없습니다.”
그녀에게서 원하던 대답이 나오자, 이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은 노빈독이 자신의 두 형을 보며 말했다.
“그렇다는군요, 형님들.”
그러자 재밌는 구경을 하듯 웃으며 보고 있던 그의 두 형, 노계독과 노역독 역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오늘은 음식 대신 다른 걸 좀 먹어 봐야겠군. 주인장, 우리는 이만 가 보겠네.”
“에헤이, 귀찮게 뭘 밖으로 나가려 하십니까? 그냥 여기서 해결하시지요.”
“그래? 그것도 괜찮겠군. 주인장, 여기를 좀 빌리지. 문을 닫고 잠깐 나가 있겠나?”
객점 주인인 왕소반은 절망과 무력감에 온몸이 푹 절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무도한 놈들은 지금 자신의 가게 안에서 아내를 범하겠다면서 자기보고 나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소반은 바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 영웅님들. 알겠습니다.”
지독한 자괴감에 그대로 죽어 버릴 것 같았지만, 대리의 주민인 그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저 이 무도한 일들에 익숙해지는 것밖에는….
그렇게 왕소반이 아내의 눈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객점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여인 말고 나는 어때?”
그것은 젊은 여인의 맑은 목소리였다.
갑자기 들려온 그 목소리에 초웅삼마가 모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언제 들어왔는지 붉은 무복을 입은 여인 한 명이 문 옆에 기대선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여인의 자태를 본 초웅삼마의 눈은 순간 번쩍 뜨이고 말았다.
“호오!”
“요것 봐라?”
여인의 자태는 매우 훌륭했다.
무복을 입었음에도 그 안의 몸매가 아주 훌륭하다는 것을 바로 인식할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앞머리를 코까지 내려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좀 아쉽긴 하지만, 그 밑으로 보이는 입술만으로도 그녀가 대단한 미인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그녀가 다시 물었다.
“싫어?”
“응?”
그 질문을 들은 후에야 초웅삼마는 방금 전 여인이 주인의 아내 말고 자신과 노는 게 어떠냐고 물었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들이 킬킬 웃으며 대답했다.
“싫을 리가 있겠느냐?”
“두말하면 잔소리지.”
“어서 이리 오너라!”
그러자 그녀가 다시 짧게 말했다.
“그럼 그들을 보내 줘.”
그녀의 말에 초웅삼마는 주인과 주인의 아내를 바라봤다.
빨리 안 꺼지고 뭐 하고 있느냐는 시선이었다.
“아,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자신들이 살아났음을 깨달은 주인과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황급히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들은 나가며 문 옆에 기대선 여인을 향해 잠시 안타까운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결국 그녀에겐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바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자 초웅삼마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진짜 제대로 놀아 볼 시간이었다.
맏이 노계독이 혀로 입술의 침을 핥으며 말했다.
“자아, 그럼 시작해 볼까?”
그 말에 앞머리로 얼굴을 가린 여인, 해청연 또한 문가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곤 왼손 엄지로 검의 호수구를 밀어 검을 살짝 뽑았다.
팅!
백색의 검 사이로 드러난 순백의 검날이 하얀 광채를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초웅삼마는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냥 자신들에게 몸을 주지 않을 거란 건 이미 예상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들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천천히 해청연을 향해 다가갔다.
“큭큭큭, 장미는 가시가 있어야 더 예쁘지.”
“사냥은 힘들어야 그 즐거움이 더하고 말입니다.”
“여자는 앙탈을 부릴수록 귀여운 거 아니겠습니까?”
초웅삼마는 대리에 상주하는 마두들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절정의 고수들이었다.
맏이 노계독은 무려 내공 구십 년에 달하는 고수였고 그의 두 아우도 내공 팔십 년에 달했으니, 초절정 고수가 아니고서야 감히 건드릴 수조차 없는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잠시 바라보던 해청연은, 마치 검을 뽑을 듯 검파를 향해 오른손을 가져갔다가는 갑자기 그들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화악!
그러자 그녀의 손에서 뭔가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위이이이이잉!
“!”
초웅삼마는 근거리에서 갑자기 자신들을 향해 쏘아진 작은 륜 세 개에 깜짝 놀라 황급히 그것을 피했다.
아무리 근거리라고 해도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쉬이이익!
“허억!”
“흑!”
소륜이 그들의 옷을 맹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간신히 소륜을 피한 노계독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년, 검이 아니라 암기가 특기였…!”
그 순간이었다.
그들을 스쳐 갔던 작은 륜이 맹렬히 회전하며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엄청난 회전으로 이 작은 객잔 안에서도 벽에 부딪히지 않았던 것이었다.
위이이이이잉!
“!”
“저, 저건?!”
“혈륜마공?!”
초웅삼마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예전 염라혈승 축호탁이 사용했던 혈륜마공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혈교의 고위 간부들이나 익힐 수 있다는 그 혈륜마공이 해청연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초웅삼마는 기겁하며 뒤돌아 소륜을 방어하려 했다.
그러자 그 순간, 해청연의 검 백연의 검날이 드디어 빛을 발했다.
성라검법 오 초.
혜성시흑.
푸우욱!
“커헉!”
혜성시흑은 예전 해청연의 아버지 검성 해운백이 점창의 일시사일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장담했던 극쾌의 찌르기였다.
그 찌르기에 뒤에서 심장을 관통당한 막내 노빈독은 그대로 즉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미 죽은 그의 배로 해청연의 소륜이 틀어박혔다.
푸욱!
그 모습을 본 노계독과 노역독이 놀라 소리쳤다.
“막내야!”
“이년, 감히!”
팅! 팅!
첫째 노계독과 둘째 노역독은 바로 소륜을 쳐 내고는 몸을 돌려 해청연을 덮쳐 갔다.
아직 해청연의 검이 노빈독의 등에서 뽑히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녀언!”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해청연의 검 백연 주위에서 자홍색 뇌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파지지지직!
“크으으윽!”
“이, 이건?!”
그녀를 덮쳐 가던 노계독과 노역독은 갑자기 그녀 주변을 감싼 강력한 뇌기에 더 다가가지 못하고 물러서야만 했다.
첫째 노계독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설마… 혈뢰검결이라고?”
혈뢰검결이라면 남궁세가의 제왕검형을 변형해 만든 혈교 최고의 검법이었다.
또한 그야말로 혈교의 중심인물들만이 익힐 수 있는 최고위의 검법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엄청난 검법이 어디서 본 적도 없는 눈앞의 젊은 여인에게서 펼쳐진 것이었다.
노계독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너, 너는 누구냐?”
하지만 해청연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향해 말없이 왼손바닥을 내밀 뿐이었다.
그녀의 왼손을 짙게 뒤덮은 자홍색 강기가 불길함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노계독이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또 무슨 짓을…?!”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왼손에서 갑자기 자홍색 용이 뛰쳐나왔다.
크라라라라라!
그것은 강기로 이루어진 자홍색 용이었다.
그리고 노계독은 그 무공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구, 구천혈룡…?!”
경악한 노계독과 노역독이 황급히 몸을 날려 흩어지며 그것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해청연의 혈륜마공이 끝나지 않았음을….
위이이이이잉!
그들의 등 뒤로 두 개의 소륜이 맹렬히 회전하며 날아오고 있었다.
다급해진 그들은 어렵게 몸을 돌려 그것을 쳐 내야 했다.
터텅!
그 순간이었다.
어느새 방향을 바꾼 혈룡이 노계독의 등을 덮쳐 오고 있었다.
크롸라라라라락!
“크윽!”
노계독은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온몸의 공력을 짜내 밖으로 방출했다.
아직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는 호신강기였다.
“흐아아아압!”
화아아아악!
다음 순간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간 붉은 막 위로 사나운 혈룡이 들이받았다.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폭음이 일고 잠시 후, 먼지가 가라앉은 객점 안에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노계독이 양손을 앞으로 뻗은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힘없이 풀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털썩.
“커헉!”
입에서 피가 울컥 뿜어져 나왔다.
큰 내상을 입은 것이었다.
노계독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그러자 어느새 가슴이 쩍 갈라진 채 죽어 있는 둘째 동생 노역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갈라진 가슴이 검게 탄 모습을 보건대 아마도 혈뢰검결에 당한 모양이었다.
노계독은 또각또각 자신에게 걸어오는 여인을 향해 이를 갈며 물었다.
“네년은… 대체… 누구냐? 말로만 듣던 혈마인이라도 되는 것이냐?”
그의 물음에 해청연은 잠시 멈칫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혈마인이라…. 어쩌면 그럴지도.”
그러곤 검을 휘둘러 노계독의 두 팔을 베어 버렸다.
휘리리릭!
푸하악!
“끄윽!”
노계독은 두 눈을 멀쩡히 뜨고도 자신의 팔이 잘리는 광경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혈교 최강의 무공이라는 구천혈룡마공에 너무 큰 내상을 입어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입만은 움직일 수 있었던 노계독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흥! 왜 죽이지 않고 팔만 베는 것이냐? 날 가지고 놀기라도 할 셈이냐? 만약 내게 비굴한 모습을 기대했던 거라면….”
하지만 그의 말에 해청연은 짧게 대꾸했다.
“그럴 생각 없어.”
타탁!
그녀는 감정 없이 대꾸하며 노계독의 혈도를 짚고는 그의 등 뒤로 걸어갔다.
그러자 노계독이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난 해청연을 향해 소리쳤다.
“이년! 내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감…!”
그 순간이었다.
콰직!
노계독은 갑자기 옆 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끄윽!”
그리고 소리가 들려왔다.
쭈욱! 쭈욱!
노계독은 이제야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피를 빨고 있었던 것이었다.
피를 마셔서 내공을 흡수하는 건 혈교 특유의 흡정법, 그녀는 아마도 자신의 내공을 흡수하려는 모양이었다.
“이, 이년! 내 내공을…!”
하지만 노계독은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온몸이 쭈욱 늘어지는 무력감에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입을 뻐끔거리며 천천히 죽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수없이 남에게 행했던 방법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 것이었다.
잠시 후, 충분히 피를 빨아 내공을 흡수한 해청연이 노계독의 목에서 입을 뗐다.
입술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액체의 느낌과 혀와 코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맛과 냄새, 이 감각에 어느새 익숙해져 버렸다는 사실에 강렬한 자기혐오가 느껴졌다.
더러웠다.
모든 것이 다….
해청연은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지금은 수단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야만 해.’
늘 그랬듯 스스로를 설득해 봤다.
하지만 더러운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대연정심결로 억누른 혈교 무공의 광기가 솟구쳐 오를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결국 해청연은 혼자서 견뎌 내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곤 요즘 견딜 수 없을 때마다 떠올리곤 하는 그의 얼굴을 생각했다.
‘선우 공자.’
머릿속에 그의 웃는 얼굴이 떠오르자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혈교의 소굴까지도 쳐들어왔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 정도 더러움조차 견뎌 내지 못한다면 그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었다.
해청연은 이를 악물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버텨 내, 해청연.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야 해. 무슨 수를 써서든. 그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
해청연은 감았던 눈을 떴다.
머리카락에 눈이 가려졌기에 겉으로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다.
방금 그녀를 덮쳤던 광기도, 혼란도.
해청연은 문득 다시 눈을 감고는 주변의 기척을 감지해 보았다.
세심하게 정신을 집중해도 그녀의 심안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무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주변에는 항상 구유음마 지기음의 부하들이 맴돌며 그녀를 감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이제 내공 구십 년의 벽을 깬 그녀가 기척조차 느낄 수 없다면 답은 뻔한 얘기였다.
해청연이 문득 입을 열어 말했다.
“이제 운기를 할 생각인데, 죄송하지만 음마께서 객점 앞을 좀 지켜 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의 물음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완벽한 침묵, 말을 건 것이 민망하게도 그녀 주변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해청연은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답을 기다리기 전에는 전혀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자 마침내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도 소저의 운기를 방해할 수 없을 것이오.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오.”
이 좁은 객잔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음에도 위치를 파악할 수 없는 놀라운 은신술이었다.
그의 은신술을 파악할 수 있기 전까지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해청연은 그 자리에 앉아 운기에 들어갔다.
예전에 설풍 조장이 그의 위치를 파악했던 걸 생각해 보면 자신의 무력은 아직 설풍 조장에 비해서도 모자란 모양이었다.
역시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리고 또한 생각했다.
구유음마 지기음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걸 보면 혈마가 다시 어딘가로 외출한 모양이라고.
그들은 알리고 싶지 않았겠지만 그녀는 이미 혈마가 출타할 때만 지기음이 자신을 감시한다는 사실을 파악한 상태였다.
‘그러니 언젠가 탈출한다면 지기음이 내 옆을 감시하고 있을 때를 노려야 하겠지.’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지금 흡수한 마두의 내공으로 일단 내공 백 년을 채워야만 할 것이었다.
내공 백 년.
그녀는 어느새 초절정의 문턱 바로 앞까지 도달했던 것이었다.
묵랑이 옆에서 전폭적으로 도와주고 있는 선우진에 비해서도 결코 느리지 않은 엄청난 속도의 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