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고백
해청연이 운기를 시작한 시각.
그녀의 예상대로 혈마 전무광은 출타 중이었다.
쉬이이이이익!
그의 몸은 지금 울창한 밀림 위를 한 줄기 붉은빛이 되어 달리고 있었다.
날아가는 새들조차 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였다.
슈하아아아악!
그가 전속력으로 향하고 있는 곳은 운남성 곤명, 과거에는 운남성의 성도였으나 마인을 생산하던 애뇌산과 가까웠기에 이젠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린 도시였다.
어느덧 혈마의 눈에 무너져 돌무더기가 되어 버린 성벽이 들어왔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지도 어느덧 십 년이 흘렀기에 이젠 울창한 수풀에 먹혀 버리다시피 한 모습의 성벽이었다.
혈마는 속도를 늦추고는 무너진 성벽을 훌쩍 뛰어넘어 곤명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는 곧 발견할 수 있었다.
이 폐허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천막과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내며 그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백여 명의 무사들을.
얼핏 보기에도 대단한 위세를 지닌 자가 그 안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천막과 무사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본 혈마는 그저 비웃었다.
나름대로 기세를 세워 보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혈마가 보기엔 그저 비루한 현재 꼴만을 짐작게 할 뿐이기 때문이었다.
타닥!
혈마가 바닥에 내려서자 백여 명의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챵!
한 명이 검을 뽑듯 동시에 나는 발검 소리.
자신을 겨눈 검에서 느껴지는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예기.
확실히 공들여 키운 정예들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혈마는 그들에게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들어갈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겨누고 있는 검 앞에서 한순간 기운을 뿜어냈다.
화아아악!
그러자 폭풍이 일어나듯 엄청난 기세가 무사들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그 가공할 기세에 백여 명의 무사들은 동시에 신음을 흘리며 뒤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허억!”
“크윽!”
그것으로 대치는 끝이었다.
단 한 번 기세를 뿜어낸 것만으로 무사들은 쓰러지듯 물러서며 길을 만들었고, 혈마는 그 길로 오연하게 걸어 들어갔던 것이었다.
그가 천막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장난이었다면 재미없었고, 진심이었다면 추하구려, 제갈 군사.”
그 안에는 일그러진 얼굴로 애써 여유 있는 척하려는 제갈지강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제갈지강은 이를 악물었다.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건만, 단 한 번 그의 기세를 느낀 것만으로 자신의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의 눈조차 마주치기 힘든 상태였다.
그러자 혈마는 그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빙긋이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요즘 몸이 별로 좋지 않으신 모양이구려. 그러게 비급만 따로 보내 주셔도 될 걸 왜 굳이 만나자고 하셨소.”
두 사람이 오늘 만난 이유는 검성을 죽여 주는 대가로 제갈지강이 약속한 비급을 건네받기 위해서였다.
바로 해청연의 몸에 역천혈마 과염을 다시 불러내기 위한 비급을 말이다.
그러니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면 제갈지강이 굳이 혈마를 만날 필요까지도 없었다.
그저 비급만 전달했어도 충분했을 테니까.
하지만 제갈지강은 절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오늘 만남으로 혈마에게 받아 내야만 할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애써 혈마를 노려보며 말했다.
“비급은 오늘 가져오지 않았소.”
그러자 혈마의 얼굴에서 순간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이 된 혈마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뜻이오?”
제갈지강은 입술을 한 번 꽉 깨물고는 말했다.
“전선에서 마인들이 사라져 가고 있소! 심지어 근무자들 사이에서 이젠 전선은 더 이상 위험한 곳이 아니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단 말이오! 거기에 대한 해명을 먼저 들어야겠소!”
전선을 죽음의 땅으로 만든 것은 양쪽의 상호 합의하에 의한 일이었다.
혈마야 당연히 혈마인을 만들기 위한 실험체 마인들을 생산할 필요가 있었고, 무림맹 쪽에선 전대 맹주나 군사에 비해 인망이 없었던 모용검과 제갈지강의 권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제갈지강은 혈교에 대한 공포와 적의로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해 왔던 것이었다.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를 결속시키고, 대의를 내세워 반대파들을 억누르는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그런데 요즘 마인들의 위협이 눈에 띄게 확 줄어들고 있었다.
아직은 얼마 안 돼 별다른 반응이 없지만,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전선이 별로 위험하지도 중요하지도 않다는 인식이 생기게 될지도 몰랐다.
그것은 맹주 모용검이나 제갈지강에게 있어 매우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자 혈마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맺혔다.
그가 큭큭 웃으며 제갈지강에게 말했다.
“해명이라…. 그래, 해 주지.”
그리고 그가 한 손을 앞으로 뻗자, 제갈지강은 엄청난 흡입력에 의해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화악!
“컥!”
혈마가 자신의 손에 잡힌 제갈지강의 목을 천천히 조르며 말했다.
“얼마 전, 전선의 근무자들이 운남성 안으로 침투해 마인들의 생산 시설을 파괴했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마인들을 생산할 수 없게 되고 말았지. 자, 묻겠다. 이게 누구의 탓이냐?”
그러자 제갈지강은 이제 공포로 가득한 눈을 숨기지 못한 채 컥컥거리며 말했다.
“그, 그런! 전선의 근무자라니, 대체 누가…?!”
그의 질문에 혈마가 씹어뱉듯 그들의 이름을 말했다.
“비룡십삼대의 설풍과 선우진이란 놈이라더군. 모른다고는 얘기하지 않겠지?”
그 이름을 들은 제갈지강의 눈은 경악의 빛으로 물들고 말았다.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그들의 이름을 여기서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더더군다나 혈교로 쳐들어가 마인들의 생산 시설을 부숴 버리다니….
그들이 그 정도의 무력을 지닌 자들이었다는 걸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 그들은 고작 이십 대에 불과한…!”
그러자 혈마가 살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화악!
“그들이 이십 대건 십 대건 중요한 건 네놈이 관리하지 못한 비룡대원들이 내 생산 시설을 부쉈다는 것이다. 그런데 뭐라고? 비급을 안 가져와? 내게 해명을 들어?”
제갈지강의 목을 쥔 혈마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제갈지강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커컥! 나를 죽이면 비급을 가질 수가…!”
하지만 혈마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그래 봐야 이 천막 안이 아니면 비룡대 본대겠지. 모든 걸 자기 손안에서 관리하고 싶어 하는 네놈이 그것을 무림맹에 놓고 올 리는 절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어떠냐? 내 말이 틀렸나?”
제갈지강은 결국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혈마가 말한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혈마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놈을 죽이고 바로 비룡대 본대를 쓸어 주마. 아마 그곳에 네놈 딸도 있다고 했었지? 어디 네놈의 딸이 무슨 꼴을 당하게 되는지 지옥에서 한번 지켜보려무나.”
제갈지강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겐 이제 혈마를 제어할 수 있는 아무런 패도 없다는 걸.
그리고 이젠 살아남기 위해 그에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는 걸 말이다.
그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컥! 가져왔소! 저기! 저기에 있소! 그러니 제발…!”
그러자 혈마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한순간 돌변한 모습으로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제갈지강의 목을 천천히 놔주었다.
“역시 제갈 군사는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신의 있는 군자시구려.”
그는 제갈지강의 옷을 매만져 구겨진 곳을 펴 주며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죄송하오. 이 무도한 자가 제갈 군사의 농도 알아듣지 못하고 그만 못난 모습을 보이고 말았구려.”
제갈지강은 온몸이 덜덜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도 이것이 짙은 패배감과 굴욕감 때문인지, 아니면 그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제 혈마에게 자신은 대등한 존재조차 되지 못한다는 걸.
더군다나 실권을 잃은 지금의 자신은 언제라도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어 있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갈지강은 자신의 야망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제 그에게 있어 야망은 살아가는 이유와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제갈지강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비급은 드리겠소. 대신… 한 가지 부탁을 좀 들어주시면 안 되겠소?”
그러자 혈마가 비릿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대신이란 말은 적합지 않은 것 같구려. 비급의 대가는 이미 예전에 지불되었으니 말이오. 하지만… 새로운 거래 정도라면 고려해 볼 수도 있겠지. 일단 부탁이 무엇인지부터 들어 보고 싶구려.”
제갈지강은 차마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말했다.
“비룡십삼대를 정리해 주시오. 그들을 정리한다면 후환을 제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느슨해진 전선에도 긴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오.”
그 말에 혈마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 정도는 밖에 있는 무사들을 이용하거나 다른 곳에 청부를 넣어도 되지 않겠소? 내게 고작 그런 아해들이나 처리해 달라는 거요?”
그러자 제갈지강이 급히 말했다.
“그, 그곳엔 백학노검 양문헌이 있소!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이 머물고 있단 말이오! 내가 가용할 수 있는 전력으로 그자를 제거하기엔 무리였소!”
그 말에 혈마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호오! 백학노검이라고?”
잠시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던 혈마는 사나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좋소. 하지만 이번엔 내 조건을 들어주는 쪽이 먼저요. 제갈 군사가 내 요구 조건을 들어준다면 나 또한 그 부탁을 들어드리지.”
“요구 조건이라면…?”
“필요한 것들이 좀 있소. 일단 십 세가 되지 않은 동녀들이 백 명 필요하오. 또….”
혈마가 말하고 있는 것은 역천혈마를 해청연에게 빙의시키기 위해 필요한 재료들이었다.
그의 입에서 줄줄이 나오는 재료들의 끔찍함에 제갈지강의 얼굴빛이 점점 창백해졌다.
“이 정도요. 어떻소? 구해 줄 수 있겠소? 아, 물론 내가 직접 구해도 상관은 없소. 하지만 제갈 군사의 능력이라면 나보다는 좀 더 쉽고 빠르게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씀드리는 거요. 어떻소? 거래를 하시겠소?”
제갈지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혈마가 방금 말한 재료들을 구하는 건 정말 천인공노할 만한 짓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거부할 수는 없었다.
혈마가 방금 말한 대로, 이건 혈마도 직접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이게 아니라면 자신이 거래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제갈지강은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소. 그 재료를… 구해 드리도록 하겠소.”
그의 대답에 혈마는 환하게 웃음 지었다.
마치 며칠을 굶긴 개가 먹이를 먹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드는지 안 뛰어드는지를 확인해 보듯 흥미 가득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
선우진이 혈우련의 살수들을 격파하고 육합검수 파산조를 얻게 된 후.
손대수와 손이랑, 진소은들은 이제 은신을 풀어 버린 설풍과 증칠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설풍 옆에 딱 붙어 있는 하원달기 연태진의 모습도….
선우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제 그들에게도 진실을 밝힐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숨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그들이 신뢰할 만한 이들임을 확인한 이상 앞으로의 일들을 위해서도 진실을 공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우진은 마침내 그들 앞에서 선언했다.
“저는 사실 인파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선우진의 그 뜬금없는 고백에 그의 일행인 손대수, 손이랑, 진소은은 그저 눈을 껌뻑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말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보단 그 말에 무슨 의미가 숨어 있을지를 생각해 보는 모습이었다.
안 그래도 그들은 지금 무척 당황스러워하고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선우진을 졸졸 따라다니게 된 형산파의 육합검수들이 그랬고, 인파랑의 일행이라며 갑자기 등장한 증칠과 설풍의 존재가 그랬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갑자기 인파랑이 자기는 사실 인파랑이 아니었다고 말하다니, 그들로선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선우진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그간의 상황을 알게 되자 그들의 얼굴에는 점점 경악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손대수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그, 그러니까 인 공자는 사실 인 공자가 아니고 원래 인 공자의 복수를 대신해 주려 지금 이런 판을 벌이고 있다는….”
“그간 손 노사님을 속였습니다. 죄송합니다.”
“허어!”
충격을 받은 것은 손대수의 손녀 손이랑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상처받은 얼굴로 눈물을 글썽거리며 소리쳤다.
“너무해요, 공자! 어떻게 우리를 그렇게 감쪽같이 속이실 수가 있어요?! 안 그래요, 언니?!”
그러자 그녀의 옆에 있던 진소은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어, 그, 그런가? 하지만 인 공자님이 사실 인 공자님이 아니었다고 해서 공자님께 받은 은혜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그럼 인 공자님이든 아니든 상관없는 게 아닐까?”
그 말에 설풍의 옆에 서서 듣고 있던 하원달기 연태진이 사내처럼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하! 동생은 무척 현명한 사람이군! 그 말이 정답이지. 나도 그가 혈해마도 윤삭과 싸웠다는 것이 중요한 거지 그의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거든!”
그리고 설풍을 힐끗 보고는 살짝 조신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이젠 그것도 상관없지만….”
선우진은 그녀들을 향해 빙긋이 웃어 주고는 다시 손대수를 바라봤다.
그는 어떠냐는 물음이 담긴 시선이었다.
그러자 손대수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그가 인파랑이 아니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건, 분명 인파랑의 존재를 반형회의 싸움에 이용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인정하자 손대수 또한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허허허! 노부 또한 공자께 사과드려야 하겠구려. 공자도 눈치챘겠지만, 이 늙은이는 사실 공자를 반형회의 싸움에 이용하려 했었다오. 부끄럽구려. 그런 마음이 아니라면 공자가 인파랑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 있겠소?”
그의 깔끔한 인정에 선우진은 흐뭇하게 웃음 지었다.
그의 반응 여하에 따라 앞으로도 그와 함께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하려 했는데, 역시 그간의 판단대로 그는 신뢰할 만한 사람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그의 옆에 있는 손이랑만이 입을 삐죽거리며 여전히 마음이 상한 기색을 보였지만, 그녀 또한 그저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을 뿐인 것 같았다.
대충 일행들의 반응이 정리되자 선우진은 다시 말을 시작했다.
“먼저 제 이름을 제대로 소개해야겠군요. 제 이름은 선우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기 계신 분들은 제 의형분들이신 증칠, 그리고 설풍 형님이십니다.”
그 말에 손대수가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증칠이라면, 설마 십여 년 전에 잠적했던 홍해아 증칠 대협이시란 말이오?”
손대수가 대번에 자신의 별호를 알아맞히자 증칠이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동생들을 바라봤다.
표정만 봐도 ‘봤냐? 형님이 이런 사람이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선우진은 그 표정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설풍은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설풍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태진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먼 하늘을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손대수가 선우진을 향해 물었다.
“그리고 선우진, 설풍이라면…. 혹시 두 분이 흑상방을 무너뜨렸던 비천흑랑과 광풍비룡이시오?”
“역시 손 노사님의 견문은 대단하시군요. 그렇게 불리고 있기도 합니다.”
“허어!”
손대수는 탄식했다.
하지만 그 탄식은 그들의 명성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런 엄청난 고수들의 명성이 이렇게 세상에 제대로 알려져 있지도 않다니, 기가 막히는구려.”
손대수는 잠시 탄식하고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선우 공자께서 갑자기 진정한 이름을 밝히신 이유가 있을 것 같소. 안 그렇소?”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선우진이 말을 시작했다.
“맞습니다. 이렇게 여러분께 진실을 공유한 건 앞으로의 상황을 위해 서로가 더 신뢰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지금과 좀 다르게 행동해야 할 것 같거든요.”
“지금과는 다르게라고 하셨소?”
“예, 무엇보다 이번에 형산파 육합검수들의 위력을 직접 보셨으니 잘 아실 겁니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선우진의 뒤에 병풍처럼 주욱 서 있는 육합검수들에게 향했다.
인형처럼 무감정한 얼굴로 서 있는 그들의 모습, 하지만 그들의 육합검진이 보여 준 위력은 일행들의 뇌리에 생생히 박혀 있었다.
선우진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손 노사님이 주신 정보에 따르면 저 파산조 세 개 조가 반형회를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다고 했었습니다. 저들보다 더한 파천조는 복건용가를 노리고 있고요. 노사님께 여쭙겠습니다. 반형회의 힘만으로 저들을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의 질문에 손대수는 신음을 흘렸다.
“으으음.”
반형회에는 여러 재주를 가진 수많은 능력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저들의 무력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세 개 조라니….
만약 저들과 조우하게 된다면 수많은 동지들이 피해를 입게 될 것이 분명했다.
손대수가 탄식하며 말했다.
“불가하오.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구려. 안 그래도 저들의 위력을 빨리 보고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오.”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상했던 대답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제 설풍 쪽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설풍 형님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반형회를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제안에 설풍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말인가?”
그러자 손대수의 눈도 번쩍 뜨였다.
파산조 하나를 단신으로 박살 낼 수 있는 초절정 고수가 반형회를 도와준다니, 차마 부탁하지는 못했어도 절대 마다할 수 없는 제안이기 때문이었다.
손대수가 간절한 눈빛으로 설풍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안 될 건 없겠지. 하지만… 내가 아우 옆에 없어도 괜찮겠나?”
그러자 선우진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당연히 형님이 계신 쪽이 든든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형님이 안 계셔도 버틸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그쪽은 아마 누군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절대 버틸 수 없을 겁니다.”
그러고는 전음으로 설풍에게 은밀히 말을 전달했다.
그러자 설풍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네. 그럼 내가 반형회로 가서 그들을 지원하도록 하지.”
설풍의 대답에 손대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동지들을 살릴 수 있는 한 줄기 구원의 빛이 내려온 기분이었다.
그가 급히 말했다.
“그, 그럼 나와 함께 가는 게 어떻소, 설 공자? 내가 안내해 주겠소!”
하지만 그 말에는 선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죄송하지만 손 노사님과 함께 움직이면 설풍 형님의 속도가 느려질 테니까요. 손 노사께서는 전서응으로 형님에 대해 알려만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곧 노사님의 도움을 좀 받아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정 동지들이 걱정되신다면 그 이후에 움직이는 걸로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손대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자신이 선우진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간도 너무 도움이 안 되어 반형회에 관한 일도 차마 부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그에게 도움을 줘서 빚을 만들 수 있다면 나쁠 것은 없었다.
그의 말대로 설풍이 최대한 빨리 그쪽으로 갈 수 있다면 동지들에게도 좋은 일일 테고 말이다.
“좋소. 이 늙은이가 공자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야 얼마든지 공자의 옆에 있겠소.”
그때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하원달기 연태진이 끼어들었다.
“내가 가는 건 문제없겠지? 난 초절정이고 그의 속도를 늦추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그 말을 들은 선우진이 문득 실소하며 물었다.
“형산파에 대항해 반형회를 구원하는 일에 동참하시겠다는 겁니까, 연 선배?”
그러자 백옥같이 하얀 피부에 여리여리하게 생긴 아름다운 그녀가 남자처럼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전부터 형산파 놈들 마음에 안 들었거든. 이번에 그 육합검진인가 뭔가로 한 방 먹기도 했고 말이야. 그런 놈들과 대항하는 좋은 사람들이 있다면 여령색마의 후계자인 내가 당연히 도와줘야 하지 않겠어?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그녀가 은근슬쩍 설풍을 쳐다봤다.
눈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올 듯 반짝거리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본 사람들은 그녀가 말한 이유보다 말하지 않은 이유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설풍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부담스러운 눈빛에 설풍이 구원을 바라는 눈빛으로 선우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선우진은 그의 눈길을 외면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나서유에게 다시 한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나 소저. 저 정도 실력자의 조력을 거절할 수는 없겠군요.’
그 후, 선우진은 증칠에게도 따로 해야 할 일을 부탁했다.
앞으로의 일을 위한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세 의형제는 각자의 길로 찢어졌다.
그들의 앞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선우진 또한 정확히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