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해남파의 정당한 후계자
피피피피피핑!
“으아아아아악!”
“끄아아악!”
“돌격해! 가까이 다가가야 강전을 쏘지 못한다!”
“가라! 어떻게든 접근해! 허억?! 끄아악!”
첫 기습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흑룡함의 무사들은 그 후 어떻게든 강전을 방어하며 포위망을 돌파해 보려고 시도했다.
그들을 습격한 백의무사들의 주력이 강전으로 보이니만큼, 거리만 좁힐 수 있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백의무사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첫 기습에서 모두 강전을 사용했던 백의무사들은 바로 삼분지 일만을 남겨 둔 채 모두 검을 들어 흑룡함 무사들의 접근을 막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실로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대응이 아닐 수 없었다.
채챙! 채채챙!
피피핑!
“크어억!”
그들은 전위 이백 명 정도의 무사들이 앞에서 적들을 저지하는 사이, 후위 백 명의 무사들이 동료들 사이로 강전을 쏘며 포위를 뚫어 보려는 흑룡함 무사들을 저격하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완벽한 역할 분담과 호흡이었다.
말로만 쉽지 조금만 잘못하면 동료를 쏘게 될지도 모를 아슬아슬한 묘기들.
그런데 그들은 그 말도 안 되는 묘기들을 실전에서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물 흐르듯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아주 오랜 시간 함께 훈련을 거듭했던 정예들임을 알 수 있었다.
채채챙! 피피피핑!
“아아아악!”
“끄어어억!”
그 기예에 가까운 놀라운 포위합격에 흑룡함의 무사들은 속절없이 죽어 갔다.
그리고 해남술가의 가주 술모생은 그런 흑룡함 무사들을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럴 수가….”
그의 눈앞에서 펼쳐진 상황은 원래 그가 생각하고 있던 그림과 너무나 달랐다.
흑룡함 무사 이백 명이라는 압도적인 전력으로 인파랑이라는 놈을 간단히 처리하고 당당히 개선하는 장면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십여 년 전 진태도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 술모생은 그동안 계속 탄탄대로만을 걸어왔었다.
그가 주인으로 삼은 진태도는 해남파의 장문인이 되었고, 술모생은 그의 밑에서 모든 혜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장애물도, 고난도 없었다.
모든 것이 탄탄대로였고, 앞으로도 이런 삶이 계속될 거라는 걸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가는 흑룡함 무사들을 바라보며 술모생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켜야만 했다.
꿀꺽!
아무래도 자신의 인생에 심각한 위기가 찾아온 것 같았다.
그는 흑룡함 무사들에게서 고개를 돌려 다시 자신의 눈앞을 바라봤다.
그러자 정체불명의 백의무사들만이 아닌 다른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서 백호검을 뽑은 인파랑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도 마치 다 잡은 사냥감에게 다가가듯 여유 있는 걸음걸이였다.
그를 바라본 술모생은 분노한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으드득!
이 모든 게 다 저놈 때문이었다.
그때 깔끔하게 죽어 줬다면 모든 것이 끝났을 것을, 죽지도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끝내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놈!”
챙!
술모생은 분노 가득한 눈빛으로 검을 뽑았다.
저놈을 반드시 죽여야만 했다.
모든 일이 저놈 때문에 생겼으니 저놈만 죽인다면 모두 다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술모생에겐 놈을 해치울 자신도 있었다.
아무리 해남인가의 후계자니 어쩌니 해도 아직 이십 대에 불과한 애송이가 아니던가.
저따위 놈이 초절정을 눈앞에 둔 자신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술모생은 인파랑에게로 자신 있게 검을 겨누며 소리쳤다.
“이노옴! 이번에는 반드시 죽여 주마!”
그러자 그의 눈에 인파랑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비웃음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 술모생이 기합을 내지르며 인파랑에게 달려들려 할 때였다.
“이놈! 감히!”
문득 그의 눈에 인파랑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보였다.
이제껏 계속 걸어오고 있었건만 어쩐지 이번 걸음만큼은 이제까지와 좀 다르게 느껴지는 그런 걸음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술모생은 갑자기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인파랑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헉!”
술모생은 인파랑의 신법에 경악하고 말았다.
놈이 사용한 것과 비슷한 신법을 뭐라고 부르는지가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 이형환위?!’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눈앞에서 발검한 놈의 검이 빛살로 그어져 오고 있었으니까.
슈하아아악!
“크윽!”
술모생은 황급히 검을 세워 수평으로 베어 오는 놈의 검을 막으려 했다.
쩌엉!
“!”
엄청난 경력이었다.
단 한 번의 검격을 막았을 뿐인데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파 오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술모생은 자신의 검이 세차게 진동하며 옆으로 튕겨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만 했다.
속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크윽! 고작 이십 대의 어린놈이 어찌 이런?!’
그가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수평으로 그은 놈의 검을 분명히 막았다고 생각했건만, 어찌 된 일인지 놈의 이 격이 시간차도 없이 수직으로 내리찍어 오고 있었다.
츄하아아아악!
“!”
자신의 머리 위에서 벼락처럼 찍어 오는 검날을 바라보며 술모생은 한 가지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남십자검…?’
그리고 그것이 그가 떠올릴 수 있었던 마지막 생각이었다.
푸하아아악!
술모생의 몸이 깨끗이 양쪽으로 쪼개졌다.
초절정을 바라보고 있던 고수인 그가 이십 대에 불과한 인파랑의 검에, 그것도 고작 두 번의 검격만으로 양단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오오오오!”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해남자가의 가주 자개추는 감격스러운 눈으로 탄성을 토해 냈다.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확대된 그의 눈에선 눈물마저 글썽거리고 있었다.
저게 바로 남십자검이었다.
해남의 이름으로 천하제일인을 배출했던, 이제 해남파가 영영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남십자검 말이다.
게다가 그가 들고 있는 저 하얀 검을 보라.
저것은 백호검이 아니던가.
다시는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해남파의 신물 백호검.
자개추는 솔직히 남십자검도, 백호검도 이제는 완전히 잃어버린 거라며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서 백호검을 든 해남인가의 후계자가 나타나, 남십자검으로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이며 해남파의 배신자를 처단했던 것이었다.
그가 살면서 봤던 광경 중 가장 감격스러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울컥 솟구친 감정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선우진을 바라보던 자개추는 문득 아직 싸우고 있는 무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우렁차게 소리쳤다.
- 해남의 무사들이여, 보아라! 백호검과 남십자검의 정당한 후계자가 나타났다! 해남인가의 후계자 인파랑 공자가 남십자검으로 배신자 술모생을 처단하였다!
그 외침의 효과는 엄청났다.
여전히 저항하고 있던 흑룡함의 무사들이 선우진의 손에 들려 있는 백호검과, 그 앞에 두 쪽으로 갈라진 술모생의 시신을 확인하고는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해남파의 신물인 백호검이 자신들의 반대편에 있다는 사실에, 자신들을 이끌어 줄 최고수인 술모생이 순식간에 고혼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에 흑룡함 무사들은 자기도 모르게 전의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문득 검과 발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이, 이제 어떻게 하지?”
“저게 정말 백호검이라고?”
그러자 그들의 혼란을 예리하게 포착한 선우진이 백호검을 하늘 높이 번쩍 치켜들며 소리쳤다.
- 자신이 아직 해남의 무사라고 생각한다면 이 백호검 앞에 투항하라! 진태도의 부하라면 참할 것이되 해남의 무사라면 한 번은 살려 줄 것이다!
그 말은 흑룡함의 무사들에게 있어 해남파의 무사가 될 것인지, 아니면 진태도의 사병으로 남을 것인지를 결정하라는 강요의 말과도 같았다.
또한 진태도가 더 이상 해남파의 정당한 장문인이 아니라는 뜻을 내포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말은 결국 싸움을 종결짓는 선언이 되고야 말았다.
흑룡함의 무사들은 비록 해남진가의 무사들이었지만 여전히 해남파의 무사들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모든 승기를 잃은 상황에서 해남파의 배신자로서 죽어 가고 싶은 무사는 아무도 없었다.
흑룡함의 무사들은 이제 완전히 싸울 의지를 잃고 그들의 검을 손에서 놓을 수밖에 없었다.
철그렁! 철그렁!
“투, 투항하겠소!”
“항복이오.”
“항복….”
싸움은 그렇게 끝나 버렸다.
명분을 빼앗긴 싸움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그 후, 항복한 흑룡함의 무사들은 모두 무기를 빼앗긴 채 점혈 당해 한쪽에 꿇어앉혀졌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처리한 백의무사들은 바로 선우진을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선우진을 바라보는 그들 모두의 눈이 불꽃처럼 뜨겁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날카로운 인상의 무사 한 명이 선우진을 향해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해남인가와 해남사가의 무사들이 소주를 뵙습니다!”
어쩐지 가슴속에 맺혀 있던 깊은 한을 토해 내는 듯한 절절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가 선창하듯 소리치며 무릎을 꿇자, 거의 삼백에 달하는 백의무사 전부가 절절하게 소리치며 무릎을 꿇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해남인가의 무사들이 소주를 뵙습니다!”
“해남사가의 무사들이 소주를 뵙습니다!”
“소주!”
“소주를 뵙습니다!”
털썩! 털썩! 털썩!
그것은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삼백여 명의 무사들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선우진을 향해 무릎을 꿇는 광경이란,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영웅의 귀환을 보는 것만 같았다.
선우진의 옆에 서 있던 손대수, 손이랑, 진소은은 자신들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는 삼백 무사들의 모습을 넋이 나간 듯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전율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백의무사 모두가 무릎을 꿇고 절절하게 소리쳤을 때였다.
마지막으로 해남자가의 가주 자개추가 선우진을 향해 천천히 다가와서는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자가의 가주 자개추가 해남파의 정당한 후계자께 인사드립니다.”
해남파의 정당한 후계자.
그것은 실로 엄청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선우진의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손대수는 자기도 모르게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허어!”
해남파의 정당한 후계자라니.
너무도 무거운 말이었다.
지금 장문인인 진태도가 부정한 자라는, 그러니 그를 몰아내고 정당한 자리를 되찾아야만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 말, 또한 그렇기에 앞으로 해남파에 거대한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말이기도 했다.
손대수는 벌써부터 공기 중에 짙은 피 냄새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일이 너무 커지는 것이 아닌가? 이대로라면 진태도와의 전면전이 될 수밖에 없을 터인데…. 게다가 선우 공자는 진짜 인파랑 공자도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좋은 의도로 인파랑 공자의 복수를 해 주려 했다 해도 만약 저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손대수는 문득 머리가 아득해지는 느낌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선우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런 무거운 상황이 펼쳐졌음에도 선우진의 표정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는 그저 묵묵히 팔짱을 낀 채 해남파의 무사들을 바라보다가 짧게 말했을 뿐이었다.
“모두 그만 일어나라.”
그 순간 손대수는 헛웃음을 지으며 감탄하고 말았다.
자신의 걱정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무사들에게 명령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마치 자신이 그들의 지배자인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한 오연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보라.
그의 명령을 들은 해남파의 무사들이 마치 홀린 것처럼 그 명령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그에게 모두를 복종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지배력이 있다는 뜻이었다.
손대수는 고개를 저으며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그가 진짜 인파랑이고 아니고가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대단한 지배력이다. 애초에 태어나길 왕으로서 태어나는 자들이 있다 해서 말도 안 된다고 비웃었더니만, 내가 오늘 그 광경을 직접 보게 되는구나.’
손대수는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말았다.
고작 이십 대에 불과하고, 다른 이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본 경험도 없을 그가 이런 자연스러운 지배력을 보일 수 있다면, 그건 태생 자체가 왕일 수밖에 없는 거라고 말이다.
또한 생각했다.
만약 그가 계속 인파랑으로 살고자 마음먹는다면 그는 결국 진짜 남해의 왕이 되고 말 것이라고.
어쩌면 남해검왕 이후의 새로운 전설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그렇게 손대수를 비롯한 모두가 그 이야기 속의 한 장면과도 같은 광경을 바라보며 전율하고 있을 때였다.
단 한 명만큼은 그들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바로 해남묘가의 가주 묘청주의 얘기였다.
묘청주는 후회했다.
‘아까 그가 술모생과 싸울 때 합공해 어떻게든 그를 죽였어야만 했다. 그때의 망설임이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하고 말았구나. 이젠 너무 늦어 버렸으니 그럴 기회조차 없을 테고.’
묘청주는 방금 전까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늘 중간에서 양쪽을 조율하며 자신의 뜻대로 의사를 결정하곤 했던 습관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이제껏 어느 한쪽에 붙지 않고 중간에 위치함으로써 늘 마지막 선택을 할 수 있었고, 또한 그럼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곤 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인파랑이 술모생과 싸우기 시작했을 때도 끼어들기보단 잠깐 사태를 관망하는 쪽을 택했었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승부가 결정 날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묘청주가 입술을 깨물며 후회했다.
‘완전히 잘못된 판단이었던 게지.’
그리고 모든 것이 순식간에 끝나 버린 지금, 묘청주는 자신이 마지막 선택을 할 수 있을 때는 어디까지나 양쪽의 균형이 팽팽할 때뿐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서야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더더군다나 인파랑은 자신이 그의 아버지 인계운을 형산파로 보냈음을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가 자신을 절대 중립으로 인정해 줄 리가 없었다.
문득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떠올려 봤다.
‘협상의 여지라는 게… 있을까?’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인파랑과 함께 진태도에게 대항해 해남파를 되찾아 주겠다고 약속한다면 말이다.
진태도에 비해 명백히 약세인 그라면 당연히 조력자가 필요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도 해남묘가를 완전히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 부분만 잘 설득한다면….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선우진의 눈이 문득 묘청주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을 보는 그의 얼음 같은 눈빛을 보는 순간, 묘청주는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협상의 여지는 없다는 걸.
그에게 자신을 살릴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는 걸 말이다.
선우진이 그에게 검을 겨누며 소리쳤다.
“묘청주! 지옥에 가거든 억울하게 돌아가신 인가와 사가의 분들께 사죄드리길 바란다!”
그의 검을 따라 모든 백의무사들 또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수를 처단하고자 하는 복수심 가득한 눈빛들이었다.
묘청주는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그에게 협상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라면 설사 인파랑에게 협상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해도 다른 무사들이 그것을 납득할 리 없었다.
‘끝이로구나.’
허탈했다.
당시의 상황을 보고 장문인이 될 확률이 높아 보였던 진태도에게 붙었던 선택이 결국 이런 방식으로 돌아오게 되다니….
늘 후회했듯 거기까지 가서는 안 됐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후회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마침내 죽음을 받아들인 묘청주가 눈을 감고, 선우진이 막 그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 할 때였다.
묘청주의 옆에 있던 묘아란이 갑자기 소리쳤다.
“잠시만요!”
그 청아한 목소리에 한순간 모든 이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됐다.
그러자 묘아란이 선우진을 향해 절절하게 소리쳤다.
“아버지를 죽이기 전에 저와 먼저 대화를 해 주세요! 인 공자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도 선우진의 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가 여전히 차가운 눈빛을 한 채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오?”
그러자 묘아란이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선우진을 바라보다 천천히 대답했다.
“제가… 당신의 정혼자니까요.”
순간 선우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