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가장 바라는 일-1
천하삽십육성의 일인인 진태도가 흑룡함을 비롯한 해전대를 이끌고 출진했고, 형산파 최강의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육합검수 파천조가 선우진을 향해 달려오고 있을 때였다.
의외로 가장 먼저 선우진 일행을 습격한 자들은 그들이 아니었다.
바로 천하제일의 살수 집단이라는 혈우련이었다.
쉬리리리리릭!
공간을 까맣게 덮으며 암기가 날아왔다.
피할 곳을 막기 위해 모든 공간을 점유한 그물 같은 공격이었다.
“하아아압!”
부아아아아앙!
진소은은 기합을 지르며 장봉을 휘돌렸다.
원형으로 회전하는 장봉이 방패처럼 암기를 튕겨 냈다.
티티티티티팅!
하지만 그 순간, 진소은의 발밑 땅바닥이 일어나며 세 명의 살수가 튀어나왔다.
그녀가 암기를 막는 순간에 등 뒤를 노린 치명적인 습격이었다.
쉬이이익!
세 자루의 비수가 그녀의 등 뒤로 꽂혔다.
아니, 꽂힐 뻔했다.
따다당!
어느새 그녀의 등 뒤를 방어한 장봉이 세 자루의 비수를 막아 내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녀의 손과 상관없이 살아 있는 용처럼 휘도는 장봉이 그 치명적인 습격을 비껴 냈던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후우웁!”
휘리리리릭!
회전하며 세 자루의 비수를 비껴 낸 장봉은 곧 불규칙하게 회전하며 습격자들이 예측하지 못한 각도로 그들의 머리를 스쳐 갔다.
퍼퍼퍽!
장봉이 지나간 그들의 머리는 마치 뭔가에 푹 파인 것처럼 그 일부분이 사라져 있었다.
장봉의 끝에서 살짝 빛나는 백색의 광채, 진소은의 강기가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머리의 일부분이 사라진 그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잠시 가만히 서 있다 그대로 털썩털썩 쓰러져 버릴 뿐이었다.
하지만 진소은은 그들에게 눈길을 줄 시간이 없었다.
그 순간 하늘 위로 거대한 그물이 그녀를 덮쳐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아아악!
철끈을 꼬아 만든 듯 까만 광택으로 빛나는 거대한 그물이 하늘을 온통 가리고 있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범위의 공격이었다.
게다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진소은이 놀란 눈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물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사방에서 암기가 쏟아져 왔다.
쉬리리리리릭! 쐐애애애애액!
한꺼번에 암기를 털어 넣는 총공격이었다.
진소은이 그물에 걸리든, 그것을 방어하든 그사이 암기로 고슴도치를 만들고 말겠다는 의도인 것 같았다.
그러자 피할 곳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 진소은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떠올랐다.
위기였다.
하지만 당황도 잠시, 그녀는 곧 이를 악물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련한 백전노장과도 같은 망설임 없는 움직임이었다.
“후웁!”
슈욱!
땅 밑을 제외한 온 사방에 그녀를 노리는 것들만이 가득한 그 상황에서, 진소은이 한 선택은 장봉을 뻗어 그물 사이를 찌르는 것이었다.
그러자 장봉을 하늘로 뻗어 무방비 상태가 된 그녀의 주변으로 곧 암기들이 쏟아졌다.
쉬리리리리릭!
그 순간이었다.
“하압!”
진소은이 그물 사이로 건 장봉을 힘껏 휘둘렀다.
슈하아아아악!
그러자 장봉에 낀 철 그물이 거대한 구름처럼 그녀 주변을 휘돌며 암기를 방어해 내기 시작했다.
부아아아아앙!
투투투투투툭!
암기들이 속절없이 그물 덩어리에 틀어박히고 있었다.
워낙 거대한 그물이었기에 장봉에 걸려 뭉쳐진 것만으로도 진소은의 몸을 가리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결국 진소은은 그물을 이용해 암기를 모두 막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후에도 그물을 휘돌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부우우우우웅!
장봉과 함께 뭉쳐진 그물 덩어리가 점점 더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온통 철 끈으로 만들어져 무겁기 그지없는 그 덩어리를 점점 빠르게 돌리던 진소은은, 한순간 괴성을 내지르며 그것을 던져 버렸다.
“으으으으, 합!”
그러자 뭉쳐진 그물 덩어리가 유성처럼 날아갔다.
진소은에게 암기를 던졌던 혈우련 살수들을 향해서였다.
슈하아아악!
“!”
깜짝 놀란 그쪽 방향의 살수들은 분분히 몸을 날리며 그것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날아오던 그물 뒤에서 진소은이 튀어나왔다.
“하아압!”
“!”
그녀가 그물을 던지고 유령처럼 그 뒤로 따라왔던 것이었다.
게다가 살수들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건 순간 그녀가 은신술까지 사용했다는 얘기였다.
그녀의 기습에 살수들의 눈이 크게 확대됐을 때 진소은의 장봉이 다시 회오리바람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부아아아아앙!
퍼퍼퍼퍼퍽!
장봉이 지나간 후 머리가 사라진 다섯 명의 살수는 몸을 날리던 기세 그대로 주위로 날아갔다.
빨간 물감을 흩뿌리듯 붉은 피를 공중에 뿜어내는 채로였다.
털썩! 털썩! 털썩!
다섯 구의 시신이 그대로 땅에 떨어져 뒹굴었다.
하지만 장내의 누구도 그 시신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열두 시진(24시간) 가까이 계속됐던 그간의 싸움에서 수없이 봐 왔던 장면이기 때문이었다.
“하아, 하아.”
진소은은 물먹은 듯 축 늘어진 몸과 목까지 차오른 호흡을 어떻게든 정돈하려 해 봤다.
열두 시진을 죽였건만 아직도 주변은 온통 혈우련의 살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죽여도 죽여도 바퀴벌레처럼 기어 나와 두려움도 없이 공격해 오는 그들을 보며 진소은은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하지만 이젠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후회해 봐야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진소은은 이를 악물고는 이제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몸을 움직여 적들을 향해 덮쳐 갔다.
그리고 분노를 담아 크게 소리쳤다.
“선우지이인!”
***
나흘 전, 선우진은 해남인가와 사가의 무사들, 그리고 묘아란과 헤어졌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태도가 자신을 잡기 위해 해남도를 나오게 하는 것이 선우진의 기본 계획이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해남인가와 사가의 무사들은 그간 선우진이 수집한 증거들을 가지고 몰래 해남도로 들어가기로 했다. 다른 반대파들과 접촉해 진태도의 만행을 알리고 명분을 얻어, 그가 없는 사이 해남도를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십 년 전 형산파와 작당해 인가 가주인 인계군을 암살한 일, 역시 형산파와 작당해 합산파를 만들고 해전대의 병력을 빼돌려 백교방을 만들었던 일.
무엇 하나 용서받을 수 없는 일들뿐이니 그를 장문인에서 쫓아내기에 명분은 차고 넘칠 것이 틀림없었다.
다만 좀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해남인가의 무사들이 진태도 몰래 해남도로 잠입해 다른 가주들과 접촉할 수 있느냐의 여부였다.
해남도 전체에 진태도의 눈이 깔려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선우진의 계획을 파악했던 묘아란은 그에게 이렇게 경고했었다.
‘만약 진태도가 이들의 움직임을 먼저 파악하기라도 한다면 그는 해남도에서 내전을 벌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거예요. 한발 앞서 다른 가주들을 숙청하려고 하겠죠.’
맞는 말이었다.
선우진도 그 부분만큼은 천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말이다.
선우진이 묘아란의 말을 깨끗이 인정하자 그녀는 선우진에게 이렇게 제안했었다.
‘제가 그의 시선을 끌어 드리지요. 그들과 다른 경로로 공개적으로 해남도로 들어가 진태도를 만나겠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아버지의 복수를 해 달라고 부탁하겠어요.’
‘흐음.’
선우진으로선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그녀가 공개적으로 해남도로 돌아가 시선을 끌어 준다면 성동격서의 계가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계획의 성공률을 확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단 그 제안을 수락하지 않고 묘아란에게 물었다.
‘위험할 거라는 걸 알고 계시지 않소?’
그녀 혼자, 그것도 스스로 진태도의 손안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묘가의 가주 묘청주도 없는 상황이니, 그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무슨 짓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묘아란은 단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아무리 위험해도 선우 공자만큼은 아니겠지요. 그리고… 제가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공자께 부탁을 드릴 염치도 있을 거고요.’
그녀의 말에 선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부탁이라. 아버님의 처우에 관한 것이겠구려.’
묘청주는 점혈당한 채 해남인가의 무사들에게 속박되어 있는 상태였다.
해남인가의 무사들은 옛 가주 인계군의 원수 중 한 명인 그를 당장이라도 찢어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 선우진의 말 한마디라도 떨어진다면 순식간에 갈가리 찢어 죽일 것만 같았다.
묘아란은 복잡한 눈빛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본 후 고개를 숙이며 선우진에게 간청했다.
‘제가 감히 묘가의 존속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멸문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잘못을 저지르셨으니까요. 다만 딸로서 그 죽음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저를 이해해 주세요. 제가 목숨으로서 공자의 계획을 완성시키겠습니다. 그러니 제 행동을 강제할 인질의 명분으로라도 목숨만은 살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말은 이런 것이었다.
선우진의 계획을 더 완벽하게 완성시킬 말로써 자신을 써 달라는, 그리고 아버지인 묘청주를 그녀의 행동을 강요할 인질로 잡는다는 핑계로 죽이지만은 말아 달라는 그런 제안 말이다.
선우진으로선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그로서도 이미 그녀의 진심을 알게 되었기에 그녀의 아버지 묘청주를 죽이기는 개운치 않았고, 자신의 계획에서 불안한 부분도 지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우진은 그녀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해남인가 무사들의 우두머리인 현청군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고 무사들을 이해시킬 수 있도록 부탁했다.
그러자 현청군 또한 흔쾌히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원수인 묘청주를 죽이지 않는다는 건 아쉬운 일이었지만, 모든 것이 진정한 원수 진태도를 몰락시키기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풀어 주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이 계속 구속하고 있는 것이라면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을 터였다.
또한 해남인가의 무사들도 선우진의 계획을 듣고 오히려 환호했다.
드디어 진정한 원수, 진태도를 죽일 수 있게 됐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보다 선우진을 걱정했다.
현청군이 말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소주. 저희의 절반만이라도 소주와 함께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현청군과 인가, 사가의 무사들은 이번 한 번의 만남만으로도 선우진을 완전히 신봉하게 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선우진이 그들에게 진태도에게 죽어 희생양이 되라고 명령한다 해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을 정도였다.
지난 십 년간을 주인도 없는 무사로서 원수가 누군지도 모르며 그저 울분과 증오만을 키워 왔던 그들은, 인가의 정통 후계자 인파랑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늘에 감사했었다.
그런데 심지어 그 인파랑이 무림 어떤 젊은 고수보다도 훌륭한 모습으로 성장해 인가의 진정한 원수를 찾아내고 그 복수를 훌륭히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로서는 다시 찾은 어린 주인에게 충심을 바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선우진은 그의 충언에도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건 진태도와 싸우는 것이 아닌 그를 끌어내고 시간을 끄는 것이오. 그와 정면으로 싸울 것이 아니기에 인원은 적을수록 좋고, 적에게 도망 다닐 것이기에 중요한 건 무력이 아닌 신법과 은신술이 될 것이오. 다시 말해 나 혼자일 때 가장 희생을 줄이고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뜻이오.’
그 대답에 현청군은 더 남기를 청할 수 없었다.
술모생과 싸울 때 선우진이 이형환위로 보이는 신법을 사용했던 걸 분명히 목격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들이 옆에 남는 것이 오히려 그에게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
현청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선우진을 바라봤다.
간신히 재회한 주인과 다시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자신들이 무능해 주인의 계획에 도움이 되지도 못한다는 사실이 그를 너무도 안타깝게 했다.
그러자 선우진은 그의 마음을 풀어 주려는 듯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진정한 싸움은 해남도를 수복한 이후가 될 것이오. 십 년을 기다려 온 인가와 사가의 무사들이 이런 쓸데없는 역할로 희생되어서야 쓰겠소? 부디 몸을 아끼시오. 최후의 결전 때 그대들의 활약을 기대하겠소.’
현청군은 감격했다.
그 나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엄청난 무공과 지략을 겸비한 이 젊은 주인은 심지어 배려심까지도 지니고 있었던 것이었다.
세상 누구도 이런 주인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자부심에 현청군의 가슴이 뜨거워져 오고 있었다.
그는 털썩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소주! 부디 몸을 보중하십시오! 소주가 돌아오시기 전까지 저희가 목숨을 바쳐 해남도를 수복하겠습니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삼백에 가까운 인가와 사가 무사들도 모두 털썩털썩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소주! 부디 몸을 보중하십시오!’
‘소주! 부디 몸을 보중하십시오!’
삼백여 무사들의 진심으로 만들어 낸 가슴 뜨거워지는 광경이었다.
선우진은 그렇게 무사들과 묘아란을 보낸 후 그의 곁에 남은 손대수과 손이랑, 진소은에게도 말했다.
‘그들과 같은 이유로 이제 여러분들과도 함께할 수 없습니다. 이제 손 노사께서도 동지들에게 돌아가서 그들을 도와주시지요. 그간의 도움에 감사했습니다.’
손대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함께했던 그와 헤어지는 건 아쉬운 일이었지만, 확실히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았다.
천하삼십육성인 진태도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온다면 자신들이 선우진에게 도움이 될 리 없었다.
사실은 그간도 도움이 됐었다고 말하기 애매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형산파의 육합검수 파산조들의 습격을 받고 있을 동지들을 생각하면 빨리 그들에게 돌아가 봐야 하기도 했다.
그가 서운하게 웃으며 말했다.
‘회자정리라고 하니, 지금이 그때인가 보오. 부디 다시 만날 때까지 보중하시오, 공자.’
그러자 그의 손녀 손이랑 또한 입을 삐쭉거리며 말했다.
‘거자필반이라는 말은 왜 빼먹으세요, 할아버지. 우리 반드시 다시 만날 수 있겠죠, 공자님?’
선우진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해 줬다.
‘내 의형께서 이미 그쪽에 가 계시지 않느냐? 당연히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선 서로가 무사히 살아남아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굳이 그런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두 조손과 인사를 마친 선우진은 이제 진소은을 바라봤다.
요즘 진소은은 극도로 선우진을 피하고 있었기에 무척 오랜만에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것이었다.
‘진 소저도 고마웠습니다. 괜히 저를 따라와 고생만 하셨군요. 진 소저께선 진가장으로 다시 돌아가셔도 되고, 손 노사님을 따라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소저의 마음이 끌리는 대로 하시지요.’
그러자 진소은은 이번에도 선우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잠시 동안 땅만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어 선우진의 말에 대답했다.
선우진이 그녀에게 들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싫어요.’
‘…예?’
선우진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뭐가 싫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그녀의 원망 섞인 시선도 이해가 안 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소은이 다시 말했다.
‘이렇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채 선우 공자에게서 떠나기 싫다고요. 옆에 있게 해 주세요. 이번에야말로 공자께 도움이 되고 싶어요.’
그녀의 말에 선우진은 당황했다.
여태껏 자신을 피하기만 했던 그녀이기에 이런 대답이 나오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간 늘 소심하게 움츠려 있었던 그녀의 눈빛이 이 순간 무엇보다도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곧 피식 웃음 지은 선우진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안 되오. 이제부터의 일은 소저에게 너무 위험하오. 또한 나와 대화를 하는 것조차 힘들어해서야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오.’
평소였다면 이 정도의 거절로도 진소은은 소심하게 고개를 푹 숙였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진소은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더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안 그럴게요! 절대 대화를 피하지 않을게요! 뭘 시키시든 다 따라갈게요! 부디 제게 기회를 주세요!’
진소은은 지금 스스로에 대한 지독한 실망과 환멸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방금 무려 십 년이란 긴 시간 동안 주인을 기다리며 스스로를 단련해 왔던 해남인가와 사가의 무사들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정혼자인 인파랑을 위해 망설임 없이 사지로 뛰어드는 묘아란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진소은은 생각했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모두가 각자의 소중한 것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있었다. 심지어 선우진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 위험한 일에 뛰어들어 목숨을 걸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만 아니었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고?’
자신은 선우진과 함께 있고 싶다는 이유로 그를 따라와 놓고는, 가슴이 아프다는 이유로 그를 외면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의 보잘것없는 이유가, 한심한 행태가 너무 환멸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생각해. 난 뭘 해야 하지? 뭘 하고 싶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해남파 사람들만큼의 절박한 이유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충성이나 복수와 같은 거창한 이유 따위는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절실하게 하고 싶은 것이 없지는 않았다.
‘그와 함께 있고 싶어. 무엇보다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그랬다.
그것이 그녀가 지금 간절하게 원하고, 또 이루고 싶은 일이었다.
그러니 이대로 그를 떠날 수는 없었다.
이런 한심한 모습만 간직한 채로 그와의 여정을 끝낼 수는 없었다.
그게 복수나 충성 같은 대단한 이유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무엇보다 간절히 원하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진소은의 간절하고 뜨거운 눈빛을 받으며 선우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왜 진소은이 갑자기 이렇게 절박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엄청난 병력을 몰고 올 진태도를 유인하는 일이었고, 그 상황에서 자신 정도의 능력을 지닌 자가 아니라면 방해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진소은의 능력으로는 무리였다.
그녀를 옆에 남기면, 그녀와 선우진 모두가 위험에 처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래서 그가 진소은을 향해 또다시 고개를 저으려고 할 때였다.
문득 묵랑이 그의 머릿속에서 말했다.
‘한번 기회를 줘 보지 그러나?’
그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선우진은 당황해 되물었다.
‘…네? 그녀에게 말입니까?’
그러자 묵랑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나는 그녀의 잠재력을 무척 높이 평가하고 있다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것을 개화할 조건이 간신히 충족된 것 같아 보이는군. 이제 얼마간의 실전만 겪으면 쑥쑥 자라날 것 같은데?’
그의 말에 선우진은 잠시 망설였다.
그는 누구보다 묵랑의 말을 십 할 신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를 데려가는 건 곤란했다.
얼마간의 실전을 겪으면 쑥쑥 자라날 거라는데, 그 실전이 처음부터 진태도를 만나는 것이어서야 자라기도 전에 꺾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선우진은 역시 안 된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문득 선우진의 머릿속에 가장 빨리 만나게 될 적이 진태도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바다 건너 멀리 해남도에 있는 그들이 육지로 올라와 자신들을 쫓는 것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선우진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첫 번째로 조우할 적들은 아마도…?’
거기까지 생각한 선우진은 문득 씨익 웃음 지었다.
투지를 불태우고 있던 진소은마저도 어쩐지 흠칫할 만큼이나 섬뜩해지는 그런 웃음이었다.
선우진이 그녀에게 물었다.
‘정말 내가 시키는 걸 모두 다 성실히 수행할 수 있겠소, 소저?’
그러자 진소은이 다시 투지를 불태우며 대답했다.
‘뭐든지요! 어떤 일을 시키시든 다 따르겠어요!’
그녀의 대답에 옆에서 듣고 있던 손이랑이 중얼거렸다.
‘여자가 저런 위험한 대답을 하다니….’
그녀가 보기에 선우진의 지금 표정은 어쩐지 매우 음흉하고 위험해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투지를 불태우고 있는 진소은에게는 어떤 다른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나흘이 지난 지금.
하루 동안 꼬박 혈우련의 살수들과 싸운 진소은은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채 이를 박박 갈며 선우진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선우 공자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