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청포마군
“선우 공자, 어떻게,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저는 정말 절 버리신 줄 알고, 정말…. 으흐흑!”
진소은은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여전히 대항하던 혈우련의 살수들을 모두 처리하고 한숨 돌리고 있다, 문득 자신을 웃으며 지켜보고 있는 선우진의 모습을 발견한 직후였다.
그러자 선우진은 당황했다.
늘 약간은 사내 같았던 그녀가 울음까지 터트릴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했었기 때문이었다.
“지, 진 소저, 나는 결코 소저를 버린 게 아니라….”
선우진은 어떻게든 변명을 해 보려 했다.
그녀를 버린 것이 아니라 성장시키기 위해 그랬었다는 걸 납득시켜 보려는 변명이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몰라요! 너무해! 미워요! 선우 공자, 정말 미워요! 으흐흐흐흑!”
진소은은 선우진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더욱 펑펑 눈물을 쏟아 냈다.
며칠간의 서러움이 이 순간 모두 쏟아지는 듯한 눈물이었다.
“아, 아니, 지, 진 소저, 그게….”
선우진은 이런 상황에서 뭘 어찌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는 여인을 달래 줘 본 건 당여은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 안아서 달래 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던 선우진은 결국 자신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존경스러운 어른, 묵랑에게 조언을 구해 보기로 했다.
‘어, 어르신.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묵랑이 냉정하게 대답했다.
-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건가? 일을 저지른 사람이 처리해야….
너무나도 단호한 목소리, 완전히 선을 긋는 듯한 대답이었다.
그러자 그 상상도 못 했던 비정한 대답에 선우진은 입을 떡 벌리고야 말았다.
저건 정말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가 아닌가.
아니, 상관없는 것을 넘어 오히려 조금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듯한 목소리였다.
선우진은 처음으로 묵랑에게 배신감이라는 감정을 느끼고야 말았다.
그가 묵랑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어르신! 그녀도 무인이니 자신의 성장을 위함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오히려 좋아할 거라고 하신 분이 바로 어르신이셨잖습니까?! 그래 놓고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그랬었다.
아무리 그녀의 성장을 위한 것이어도 혼자 두고 사라지는 건 좀 과하지 않겠냐는 선우진의 물음에 묵랑은 바로 그렇게 대답했던 것이었다.
그것도 매우 확신에 가득 찬 말투로 말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계획을 수행한 사람이야 선우진이지만 그 계획을 세운 건 묵랑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자 선우진의 울분에 가득 찬 외침을 들은 묵랑은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 …….
그리고 그 침묵을 무시로 간주한 선우진은 다시 분노의 외침을 토해 냈다.
‘어르신! 정말 실망입니다! 제가 무공뿐 아니라 인생의 스승으로서 존경하고 있던 어르신께서 이렇게 무책임하게 저를 버리실 줄은…!’
그러자 묵랑이 작게 입을 열었다.
- …미안하네.
‘…예?’
- 그러게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그렇게 오래 존재하고도 여전히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여인의 마음이라고. 그러니 내가 여인에 대해 하는 얘기는 자네가 잘 선별해서 들었어야….
‘어르신!’
선우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세상에서 제일 믿고 있던 묵랑에게 이렇게 배신을 당하게 되다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사과를 들었더니 오히려 더 허탈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에 관해 따지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지금은 실제 상황, 그의 눈앞에서 진소은이 여전히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믿었던 조력자는 무능한 배신자로 판별된 상태, 최근 겪은 위기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느낌상 혈해마도 윤삭을 상대할 때보다도 더 난이도가 높은 듯했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잠시 고민하던 선우진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우.”
아무래도 평소처럼 기책을 이용해 위기 상황을 넘겨 보려는 시도는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 대상이 여인에 관한 문제에 한정된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위기 대처 능력은 평균 이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평균 이하가 아니라 천하 남성 중 최하 값에 가까울 수도 있겠지. 그런데 설마 스승으로 모신 분마저 나와 동류일 줄이야….’
문득 이게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인가 싶을 정도였다.
이런 자신을 견뎌 내고 여전히 사랑해 주는 당여은이 새삼 고맙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선우진은 그냥 완전히 항복하기로 했다.
스스로를 알기에 이 상황에서 승리를 가져올 능력 따윈 자신에게 전혀 없다고 결론을 냈기 때문이었다.
그가 진심을 다해 진소은에게 말했다.
“진 소저, 내 진심으로 사과하겠소. 진 소저가 그렇게까지 상처를 받을 줄은 생각… 해 본 적도 물론 있긴 했지만 소저를 성장시키겠다는 욕심에 그만 무시하고 말았소.”
정확히는 그런 욕심을 부린 사람은 선우진이 아닌 묵랑이었지만 말이다.
새삼 억울함이 몰려왔다.
- 흠, 흠.
묵랑의 헛기침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바보 같은 짓이었소. 아무리 소저를 위한 일이라 해도 소저의 동의하에 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말았던 거요. 소저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말이오. 모두가 내 잘못이오. 정말… 미안하오, 진 소저.”
그러자 진소은의 눈물이 조금 줄어들었다.
느낌상 폭포가 급류 정도로 줄어든 게 아닌가 싶었다.
선우진은 잠시 기대했다.
‘내 진심 어린 사과가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진소은은 여전히 훌쩍거리며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에게 물었다.
“정말, 절, 걱정하시긴, 했어요?”
‘됐다!’
선우진은 본능적으로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이 기회를 잡아야만 했다.
만약 지금의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면 다시 아까의 상황으로 돌아갈 것만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고 있었다.
온 정신을 집중해 빠르게 대답했다.
“당연히 걱정했소! 너무 걱정이 돼서 소저 옆에서 떠날 수가 없더구려! 그래서 지둔을 쓰는 살수들이 너무 많으면 미리 줄여 놓기도 하고, 아! 아까 그 암기를 쓰는 노인과 소저가 싸우는 동안 그와 비슷한 노인 두 명도 내가 먼저 처리했다오! 딱 소저가 위험하지 않을 정도만 남겨 놨소! 진짜, 정말로, 지켜보는 나도 심장이 어찌나 떨리던지 죽는 줄만 알았다오!”
선우진은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중간에 숨을 쉬느라 말을 끊으면 이 기회를 놓치게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의 말을 들은 진소은은 잠시 선우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물었다.
“혹시, 그 말 외워 놓으신 거예요? 저에게 했던 것처럼 한 여인들이 너무 많아서 그때마다 쓰시려고요?”
‘윽!’
갑자기 뒷골이 당겨 왔다.
아무래도 너무 능수능란한 말이었던 모양이었다.
문득 과유불급이라는 말도 머릿속을 스쳐 갔다.
“아, 아니, 그럴 리가….”
결국 다시 눈을 질끈 감았던 선우진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번엔 좀 더 진심을 담아 천천히 말했다.
“내가 전에도 이런 짓을 했었다면 그게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지 않았겠소? 맹세코 진 소저에게 처음으로 해 본 짓이오. 그리고… 진심으로 걱정했다오. 진 소저가 혹시 많이 다치기라도 했다면 나는 절대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오.”
가능한 모든 진심을 담아, 최대한 진솔한 목소리로 풀어낸 말이었다.
그러자 물기 어린 눈빛으로 선우진을 바라보던 진소은은 마침내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울음을 그친 것을 넘어 드디어 자신에게 웃어 준 것이었다.
그 모습에 선우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여인 무능력자인 자신도 이렇게 노력을 하니 성공할 수 있다는 성취감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진소은이 물기 어린 눈으로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저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선우 공자가 절 위해서 그러셨다는 걸. 덕분에 제가 엄청나게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도요. 그리고 옆에서 지켜 주신 것도 알아요. 폭뢰가 달린 그물을 잘라 주신 것도 그렇고, 전음으로 알려 주신 것도. 다 알고 있었어요.”
그녀의 말에 선우진은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 그랬구려. 역시….”
하지만, 그 순간 다시 진소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흑!”
그러자 당황한 선우진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뻐끔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 알고 있다면서 왜 또 저렇게 우는 것인지 그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여자 무능력자 선우진이라 해도 이것만큼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질문은 절대 하면 안 된다는 걸 말이다.
결국 그는 숨도 크게 쉬지 않고 상황이 파악될 때까지 일단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러자 진소은이 눈물을 흘리다 문득 선우진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문득 그녀의 향기가 코에 훅 들어왔다.
이틀 가까이를 내내 땅바닥을 뒹굴며 싸웠으니 짙은 땀 냄새가 나야 하는 게 정상일 것인데, 이상하게도 한 가닥 들꽃 내음 같은 것이 코를 스치고 있었다.
향기로웠다.
진소은은 선우진의 가슴에 이마를 천천히 묻으며 속삭였다.
“그래도,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제 성장을 위해 냉정하게 대하시는 건 조부님만으로 족해요. 선우 공자는… 제게 그러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처연한 눈빛과 물기 어린 목소리, 그리고 한 가닥 풍겨 오는 들꽃 내음에, 선우진은 홀린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소.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다. 약속하겠소.”
그때 문득 머릿속에 묵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자네는 역시 여인들의….
‘조용히 하시지요, 어르신.’
- 흠, 흠. 알겠네.
두 사람은 잠시 그렇게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 진소은이 갑자기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도망치듯 달려간 건 잠시 후의 일이었다.
“아악! 나 땀 냄새 날 텐데! 이 바보!”
선우진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귀여웠다.
***
두 사람은 다음 날 광동성의 동쪽 끝에 위치한 항구 도시, 산두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배를 타고 대남도로 향할 계획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계획이라고 사람들에게 인식시켜 놓은 상태였다.
수많은 선원들이 오가는 번화한 산두의 거리와, 배가 가득한 바닷가의 항구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진소은이 문득 선우진에게 물었다.
“근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대남도로 갈 계획이라고 사람들에게 인식시켜 놓았다는 게?”
진소은은 어제 이후로도 계속 선우진과 대련을 하고 그에 관한 궁금한 것들을 묻느라 정작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듣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선우진은 항구에 가득한 선원들을 주욱 둘러보며 그저 지나치듯 대답했다.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해 주겠소.”
그러자 진소은이 볼을 잔뜩 부풀리고는 선우진을 째려보며 말했다.
“이제 나한테 더 이상 숨기지 않겠다고 해 놓고선.”
그녀의 반응에 선우진은 급 당황했다.
“아, 그, 그게….”
혈우련 사태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 달라진 상태였다.
이제 진소은은 더 이상 선우진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벽을 넘어섰기 때문인지 아니면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인지, 그녀는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고 이제 자신의 감정을 보다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반면에 선우진은 이제 진소은이 좀 어려워졌다.
이번 일로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된 데다, 가끔씩 훅 치고 들어오는 그녀의 감정들이 너무도 순수하고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선우진은 난처하게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이곳엔 사람들이 많지 않소. 계획을 말하기엔 주변 환경이 좀….”
“전엔 전음으로 잘만 설명하셨잖아요.”
“아, 그야 물론 그렇지만….”
그때였다.
선우진의 눈이 한순간 예리해지며 옆쪽을 돌아봤다.
그리고 전음으로 진소은에게 말했다.
- 대비하시오, 소저.
무엇에 대비하라는 말은 없었지만, 진소은도 더 묻지 않고 선우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선우진처럼 빠르게 감지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말을 들은 후에는 그녀 또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방향에서 심상치 않은 무위를 지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선우진과 진소은의 눈이 그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날카로운 인상의 청의 중년인에게 닿았다.
그는 등 뒤에 수십의 부하들을 대동한 채 비릿한 웃음으로 두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그들의 기세는 마치 한 무리의 맹수들 같았다.
마치 불한당처럼 제멋대로 걸어오고 있었으나 웬만한 정예 무력대들보다도 더 날카롭게 느껴지는 기세였다.
그 위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주변에서 떠들던 험악한 뱃사람들도 숨을 죽인 채 양쪽으로 물러서며 길을 열어 주고 있었다.
마침내 두 사람의 앞에까지 다가온 청의인이 비릿하게 웃으며 물었다.
“네놈이 인파랑이라는 애송이냐?”
깔보는 듯한 말투와 표정,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그의 말에 울컥한 진소은이 먼저 나설 뻔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귀에 선우진의 전음이 들려왔다.
- 진 소저, 가만히.
진소은은 일단 가만히 서서 선우진의 대응을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당장 움직이지 않았을 뿐 바로 공격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선우진이 당연히 그를 응징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진소은이 이제껏 봐 온 선우진은 결코 상대의 도발을 그냥 웃으며 넘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늘 받은 것 이상으로 과격하게 상대에게 갚아 주곤 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당연히 싸움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던 건데, 이번만큼은 그녀의 생각이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그의 시비조 말투에도 불구하고 선우진이 너무도 정중한 태도로 그에게 되물었기 때문이었다.
“마경께서 보내셨습니까?”
게다가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생각지도 못한 선우진의 정중한 말투뿐만이 아니었다.
그 내용 자체도 충분히 놀랄 만했다.
마경이라고?
남해마경 만학숭?
그러자 그의 말에 청의인이 약간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호오, 머리는 꽤 돌아가는 놈이로구나. 맞다. 마경께서 네놈을 데려오라고 하셨다.”
그러자 선우진이 잠시 그를 바라보다 다시 물었다.
“그럼 선배님께선 마경의 사천왕 중 한 명인 청포 효치곤 선배님이시겠군요.”
그 말에 청의인은 씨익 사나운 웃음을 지었다.
“눈썰미도 제법인 놈이로군.”
맞다는 뜻이었다.
‘청포마군 효치곤.’
진소은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상대가 생각보다 훨씬 더 거물이기 때문이었다.
청포(푸른 돌고래) 또는 청포마군이라고 불리는 효치곤은 마경의 직속 부하인 네 명의 초절정 고수, 대남사흉의 일인이었다.
그는 바다에서 가장 영리한 돌고래라는 별호를 가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마경의 수하들 중에선 가장 계략과 수완이 좋은, 그야말로 마경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자였다.
그들의 적수인 해남파로 따지면 열두 가문의 가주들보다도 오히려 더 윗줄로 쳐줄 만한 인물.
그런데 그런 그가 선우진을 데려오기 위해 직접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었다.
사납게 웃고 있던 그가 갑자기 강력한 살기를 확 뿜어내며 말했다.
“그런데… 이 나를 알아봤으면서도 그런 태도란 말이지? 허리가 무척 뻣뻣하구나. 내가 직접 접어 주랴?”
화아악!
“!”
그야말로 칼날 같은 기세였다.
진소은은 자기도 모르게 목봉을 앞으로 내밀며 경계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초절정이라 해도 일전에 싸웠던 혈우련의 삼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압감이었다.
게다가 효치곤의 뒤에 선 수하들도 위압적인 웃음을 흘리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바로 달려들 늑대 떼들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진소은은 긴장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기세를 보건대 아무래도 좋은 마음으로 온 자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알지 못한 채 선우진을 힐끗 바라봤다.
‘선우 공자?’
그러자 그 순간, 진소은은 자신과 달리 선우진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쏟아지는 살기와 적의 어린 시선들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물끄러미 효치곤을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그저 가만히만 있지도 않았다.
잠시 상대를 바라보던 선우진이 문득 효치곤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여 포권하며 말했다.
“청포마군 선배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너무나도 공손한 인사였다.
진소은이 느끼기에 약간 비굴하게까지 보일 정도였다.
그러자 잡아먹을 듯 선우진을 노려보고 있던 효치곤이 눈을 꿈틀하고는 씹어뱉듯 말했다.
“뼈대도 없는 새끼로구나. 호랑이 새끼라고 들었는데 알고 보니 고양이 새끼였나 보군.”
그는 아무래도 선우진을 그냥 둘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아까는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시비를 걸더니, 이젠 인사가 비굴하다며 시비를 걸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부하들도 킬킬거리고 웃으며 말을 보탰다.
“해남인가가 아니고 해남묘가였나 봅니다.”
“쓰다듬어 주면 배를 뒤집는 모습도 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크크크!”
“합산파를 무너뜨렸느니 백교방을 무너뜨렸느니 소문만 무성하더니 그건 다 뒤의 계집이 했던 모양입니다? 크크크크!”
하나같이 선우진을 도발하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선우진은 그저 빙긋이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제가 호랑이 새끼인지 고양이 새끼인지는 마경께서 판단하실 일인 것 같군요.”
그러자 잠시 선우진을 노려보고 있던 효치곤이 혀를 차며 말했다.
“쳇, 재미없는 놈이로구나. 따라와라.”
그 말을 끝으로 효치곤은 등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선우진 또한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진소은은 자신들의 뒤를 따라오는 효치곤의 부하들을 경계하며 선우진 옆으로 따라붙었다.
그때 문득 선우진의 전음이 들어왔다.
- 그렇게 경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마경이 데려오라고 명령한 이상 저들이 먼저 우리에게 손을 대진 않을 테니까요. 다만 효치곤 저자는 제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로군요. 그래서 어떻게든 우리가 먼저 손을 쓰도록 도발해 본 것 같습니다.
진소은은 그의 말을 듣고서야 방금 일어난 일의 전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선우진이 평소와 달리 저들의 도발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이유도 말이다.
그리고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자신에게 부족한 게 무공만이 아니라는 걸.
***
잠시 후, 효치곤이 그들을 데려간 곳은 거대한 배가 정박되어 있는 곳이었다.
주위에 정박된 모든 배들 중 가장 압도적으로 큰 배였고, 그 돛대에는 검은 고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바로 마경의 해적선이었다.
효치곤은 배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가 두 사람을 작은 선실로 안내해 줬다.
작은 침상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선실이었다.
그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하루쯤 걸릴 것이다. 그동안 얌전히 여기서 기다리도록.”
그리고 바로 나가려던 그는 문득 진소은을 보더니 음흉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계집과 함께 있으니 심심하지는 않겠구나.”
“!”
그 말에 진소은의 얼굴이 순간 새빨개지고 말았다.
손이랑의 교육 덕분에 그녀도 이제 남녀 간의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효치곤은 그런 진소은을 음흉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선실에서 나가 버렸다.
“그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아, 소리를 너무 크게 내면 다른 놈들이 못 참고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조심하고.”
탁!
문이 닫히고 잠시 선실 안은 침묵이 감돌았다.
선우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침상에 걸터앉았고, 진소은은 바싹 굳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어야만 했다.
방금 효치곤이 한 말이 귓가에 맴돌아 차마 선우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지금 상황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하루 동안 이 안에서 선우 공자와 둘이서만 있어야 한다고?’
자기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갑자기 어제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라 사라지지 않았다.
손이랑이 그녀에게 해 줬던 남녀 간의 일들에 관한 얘기도 마찬가지였다.
‘이랑이가 말하길, 남녀가 좁은 곳에 같이 있으면….’
그때였다.
갑자기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
“!”
진소은은 깜짝 놀랐다가 배가 대남도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선우진이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며 진소은을 불렀다.
“진 소저.”
“네, 네?!”
진소은은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며 대답했다.
그러자 선우진이 번뜩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움직일 시간이요.”
“네? 움직… 이다니요? 뭘, 어떻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