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이해
선우진은 비웃음을 날려 진태도를 도발한 후 진소은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대자로 누워 있다 그의 시선을 느끼고는 애써 바닥에서 일어나려 하는 진소은의 모습이 보였다.
마유겸과 묘아란을 업고 다리를 건넜던 그녀의 체력은 이제 완전히 고갈된 것 같았다.
초절정 고수를 이겼던 그녀가 자신의 몸 하나 가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내게 곤봉을 던져준 것도 죽을힘을 다한 것이었겠지.’
새삼 그녀가 고마웠다.
그리고 땀에 절어 엉망이 된 그녀의 모습도 어쩐지 귀엽게 느껴지고 있었다.
선우진은 버둥거리며 일어나려는 그녀를 만류했다.
“진 소저, 그냥 누워 있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저도 힘이 다해 잠시 쉴 생각입니다.”
“하, 하지만 진태도가….”
“괜찮습니다. 저들이 봉암에서 내려간 후 산을 돌아 우리를 따라오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저들 또한 지치기도 했을 거고요.”
선우진의 따뜻한 말에 진소은은 일어나려는 노력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바닥에 대자로 누워 버렸다.
선우진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하아아.”
진소은은 마지막 숨을 내뱉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기절하듯 눈을 감았다.
긴장이 풀린 그녀가 바로 잠들어 버린 것이었다.
“코오오.”
선우진은 눈을 감자마자 작게 코까지 골며 잠들어 버린 진소은의 모습에 실소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쓰러지듯 누워 있는 마유겸과 묘아란의 모습도 둘러봤다.
그들의 안색은 매우 좋지 않아 보였다.
마유겸의 안색도 창백해져 있었고, 묘아란의 안색은 지금 곧 죽어도 이상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선우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심각하군. 아무리 봐도 이들이 계속 추격전을 감당하는 것은 무리야.’
지금 한 번이야 진태도를 따돌렸다고 하지만 앞으로 다시 하는 건 절대 무리란 얘기였다.
만약 다시 또 이런 추격전을 벌이게 된다면 이들은 등에 업힌 채 죽게 될지도 몰랐다.
‘후우우.’
그들을 바라보는 선우진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다.
***
뿌드득!
진태도는 이가 부러지도록 갈았다.
또 눈앞에서 놈을 놓쳐 버린 것이었다.
너무 화가 치밀어 올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인파랑, 인파랑! 인파라앙!’
생각만으로도 살인을 할 수 있었다면 진태도는 이미 놈을 수천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어 버렸을 것 같았다.
그만큼 그의 분노는 거칠고 거대했다.
하지만 그는 그저 무공만 강한 무부가 아니었다.
음모와 계략으로 무려 해남파를 집어삼켰던 효웅, 그가 바로 진태도였다.
그는 분노한 와중에도 맞은편 황암의 정상에 지쳐 쓰러져 있는 진소은과 다른 부상자들을 면밀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 결과, 적어도 저들이 당장 움직이는 일은 없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낼 수 있었다.
그때였다.
문득 그의 뒤에서 자성진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 장문인,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진태도는 방금 전까지의 분노한 표정을 바로 감춘 채 빙긋이 웃으며 자성진인을 돌아봤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또다시 쫓아가 볼 수밖에요. 마침 저쪽을 보니 놈의 일행들도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것 같군요. 다 지치고 다친 모양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따라간다면 이번엔 놓쳤어도 다음번엔 잡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자성진인은 여유가 넘치는 진태도의 태도에 감탄했다.
바로 눈앞에서 놈을 놓쳐 마음이 상했을 텐데도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태도라니.
그릇만 놓고 따지면 형산파의 장문인인 위정국보다도 훨씬 더 넓은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모습이었다.
그런 자성진인의 감탄을 느낀 진태도는 다시 한번 빙긋이 웃음 지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자, 괜찮으시다면 바로 가 보시겠습니까? 거리를 좁히려면 좀 더 서둘러야 할 것 같군요.”
“아, 저희야 물론 괜찮지만, 장문인께서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아까 그렇게 검환을 방출하셨는데….”
“하하하!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밑에 내려가 부하들을 만나면 속도를 조절할 수 있을 테니까요. 공력은 그때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장문인.”
자성진인을 포함한 육합검수들이 봉암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자, 진태도는 맞은편 황암에 있는 선우진의 일행을 한번 노려봤다.
그러고는 육합검수들을 따라 봉암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맞은편 황암에선 선우진 또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진태도는 봉암에서 내려가는 동안 뒤늦게 쫓아오고 있던 부하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독촉해 다시 선우진들을 쫓기 시작했다.
“서둘러라! 놈들은 이미 지친 상태다! 우리가 조금만 서둘면 바로 놈들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지친 것은 그의 부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진태도는 부하들의 사정을 봐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성진인에게 말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마음속에 여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마음은 오직 인파랑을 잡아 찢어 죽이겠다는 일념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번엔 잘도 도망쳤지만, 그것도 이번으로 끝이다. 부상자 둘과 완전히 지쳐 버린 여자 하나를 달고 네놈이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비록 분노에 미친 상태이긴 했지만 진태도의 판단은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이번만 해도 만약 출렁다리가 없었다면 바로 잡을 뻔했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제 평지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놈들이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진태도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부하들을 독려했다.
최소한 놈들이 다시 바다에 닿아 마경과 접촉하기 전까지는 반드시 잡아야만 했다.
***
진태도의 생각은 정확했다.
선우진의 일행은 더 이상 스스로 움직여 도주할 여력이 없는 상태였다.
진소은은 너무 지쳐 있었고 선우진 혼자 그녀와 마유겸, 묘아란까지 책임지는 것은 확실히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선우진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 상태라면 거리가 얼마나 벌어졌든 진태도에게 다시 따라잡히는 것이 시간문제라는 사실도 말이다.
그래서 선우진은 결심했다.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기로.
‘어쩔 수 없군. 포기해야겠어.’
그리고 그가 포기한 건 바로 여력을 남겨 두는 것이었다.
삐이이이이익!
선우진은 숲을 향해 크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육합검수들을 불렀다.
새끼 고를 삼킨 육합검수들은 어미 고를 삼킨 사람과 심혼으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원래 어미 고를 삼켰던 파산조 조장 운당도 간단한 명령은 마음속으로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심 가득한 도사였던 운당과 선우진의 역량이 같을 리 없었다.
심안을 터득한 데다 이제 지존신안까지 익힌 선우진은 운당이 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육합검수들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저 자신의 수하들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거리가 얼마이든 거의 수족처럼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잠시 후, 선우진의 지시를 받은 육합검수들이 바람처럼 달려 모두 황암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휘파람 소리를 들은 조력자 또한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르르릉!”
그 조력자는 바로 흑표 삭월이었다.
운남의 애뇌산에서부터 함께했던 삭월이 다시 나타났던 것이었다.
그간 흑표 삭월은 선우진 일행이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움직이게 되며 일행들과 떨어져 따로 움직였었다.
하지만 심안을 사용하는 선우진과 설풍은 삭월이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아예 돌아가지 않고 근처를 맴돌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선우진은 자신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비비는 삭월을 반갑게 끌어안았다.
“삭월! 잘 지냈어?!”
“크르르르르릉!”
삭월은 반가웠는지 선우진에게 얼굴을 비비며 그를 덮쳤다.
그러자 그 거대한 덩치에 밀려 잠시 함께 땅을 뒹굴었던 선우진은 고개를 들고는 일행들을 바라봤다.
일행들은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흑표에 놀라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녀석은 삭월이라고 합니다. 비록 겉보기엔 좀 위험해 보이겠지만 영물에 가까울 정도로 영리하고 능력이 뛰어난 녀석이니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의 말을 들은 마유겸이 허탈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영물까지…. 자넨 정말 대단하군.”
그 말에 쓰게 웃은 선우진은 바로 육합검수들을 시켜 나뭇가지와 천으로 들것 두 개를 만들게 했다.
마유겸과 묘아란을 운반할 들것이었다.
“자, 사제들! 두 명씩 앞뒤로 들것을 붙잡아 들도록 하게. 이분들은 환자들이시니 최대한 흔들림 없이 움직일 수 있도록 주의하고!”
그러고는 여자 조원인 운영에게는 진소은을 업도록 시켰다.
그러자 멍하니 지켜보던 진소은이 화들짝 놀라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저는 굳이…!”
“나중에 제대로 싸우기 위해선 지금 체력을 보존해야 합니다. 사양 말고 업히세요, 진 소저.”
“아, 그, 그런 이유라면야…. 네. 알겠어요.”
그렇게 다섯 명의 육합검수들이 세 사람을 책임지게 되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흐뭇하게 웃으며 지켜보던 선우진은 훌쩍 뛰어 삭월의 등에 올라탔다.
그 또한 체력을 보존하기 위해 삭월을 말처럼 타고 가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자, 부탁한다, 삭월!”
“크르르르릉!”
그 후 출발한 일행의 모습은 묘했다.
선두에서 거대한 흑표를 탄 사람이 길을 이끌고, 그 뒤로 들것 두 개를 든 네 명의 남자와 한 명을 업은 여자가 신법을 전개해 달리고 있는 기묘한 광경.
그것은 세상 어디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행렬이 아닐 수 없었다.
진소은이 문득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아까까진 분명 도주 중이었던 것 같은데, 왜 지금은 유람을 하고 있는 기분이지? 이래도 되는 건가?”
진소은의 말대로 일행들의 도주행은 갑자기 너무도 편해진 상태였다.
들것은 편안했고 육합검수들이 주의를 기울였기에 흔들림도 별로 없었다.
더군다나 육합검수들의 체력이 가득 찬 상태였기에 속도 또한 충분히 빨랐다.
그러자 들것에 편안히 누워 이동하는 묘아란과 마유겸의 상태도 점점 호전되기 시작했다.
선우진과 진소은의 체력이 회복되고 있는 것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잠시 후, 운영에게 업혀 가느라 체력이 남게 된 진소은은 이동하며 선우진에게 흑표 삭월에 대해 물어봤다.
그러자 역시 삭월을 타고 있느라 편했던 선우진은 삭월과의 인연에 대해 여유 있게 대답해 줄 수 있었다.
“삭월을 처음 만난 건 비룡십삼대 근처의 독림이란 곳으로 갈 때였습니다….”
그 이야기는 독림에서 만난 석경달 노인으로 이어져 점창파와 혈마의 비사까지 나아갈 수 있었고, 결국 애뇌산의 무황총을 파괴했다는 얘기로 끝을 맺었다.
그러자 진소은이 입을 떡 벌리며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네요! 혈교와 점창파의 비사, 마인과 영물, 게다가 무황총이라니. 진짜 무슨 전설 속의 영웅담을 듣는 것만 같아요!”
그의 얘기에 놀란 건 진소은만이 아니었다.
자살을 막기 위해 점혈 당한 채 들것에 실려 가고 있던 마유겸 또한 놀란 표정으로 선우진에게 물었다.
“마인들의 생산 시설을 파괴했다고?! 그게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이제 다시 생산 시설을 건설하지 않는 한 놈들은 다시 마인들을 만들 수 없습니다.”
“하아….”
그 말을 들은 마유겸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전선에 있었던 십여 년 동안 수많은 동료들을 잃게 만들었던 마인들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믿기지 않다가, 그다음엔 진한 감회가 밀려왔다.
그가 잃어버렸던 조원들과 동료들의 얼굴도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마유겸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잠시 후 물기 어린 목소리로 선우진에게 말했다.
“…고맙네.”
그의 감사에 선우진은 그저 빙긋이 웃음 지었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 말 속에 담긴 짙은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선우진 또한 지난 삶 동안 전선에서 십여 년의 세월을 보내지 않았었던가.
그땐 비사영도, 배종관도, 나서유도 모두 지켜 주지 못했었고 말이다.
그러니 마유겸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회를 선우진이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
한동안 감상에 잠겨 있던 마유겸은 문득 자조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결국 묵랑검의 봉인을 푼 자네는 무려 혈교의 소굴에 쳐들어가 마인을 영원히 없애 버렸다는 얘기로군. 설랑검의 봉인을 푼 내가 고작 이러고 있을 때 말일세. 하하하. 대체 어르신께선 왜 이런 자를 택하셔서….”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공허한 눈빛으로 물었다.
“선우진, 자네는 대체 왜 이토록 쓸모없는 나를 죽게 놔두지 않는 건가? 그녀와… 장래를 약속한 자네라면 내가 무척이나 증오스러울 것이 당연할 텐데도 말일세. 부탁일세. 이제 그만 나를 좀 보내 주지 않겠나?”
선우진은 잠시 묵묵히 마유겸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은 이미 모든 빛을 잃은 죽은 자의 눈이었다.
삶의 의욕도, 의미도 잃어버린.
스스로를 증오하는 자의 눈.
그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죽고 싶어 한다는 것을.
만약 그의 점혈을 풀어 준다면 아마도 그는 바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 때문에 역설적으로 선우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진짜 변했다는 것을.
그는 확실히 예전의 마유겸이 아니었다.
문득 생각했다.
‘그 자기애 강하던 마유겸이 스스로를 증오해 죽고 싶어 하다니. 예전의 그를 아는 이라면 그 누구에게 말해 줘도 믿지 못할 얘기로구나.’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처럼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는 그라면 분명 계속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었다.
더군다나 목숨을 걸고 다른 이를 구해 설랑검의 시험을 통과했을 그는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죽고 싶어 하고 있었다.
선우진이 그를 인정한 이유, 과거를 후회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말이다.
그야말로 모순이 아닐 수 없었다.
선우진은 결심했다.
그를 살게 하기로.
검신의 유지를 잇기 위해서라도, 또 설랑검법을 실전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그는 계속 살아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에게 어떻게 삶의 의지를 불어넣어 줄 수 있을까? 무슨 수로?’
지금 그에게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설픈 위로 따위는커녕 어떤 말도 통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선우진은 오히려 반대로 가 보기로 했다.
그를 위로하는 것이 아닌 도발하는 쪽으로.
마음을 결정한 그가 냉정한 눈빛으로 마유겸에게 물었다.
“죽게 해 달라. 또 도망칠 생각이오, 마 조장? 비룡대에서 도망쳤던 것처럼? 근데 만약 그렇게 되면 마 조장을 만나기 위해 백 년을 기다려 오신 설랑 어르신은 어찌 되시는 거요? 그분도 혹시 동의하신 일이오?”
그러자 마유겸은 선우진의 물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는지 그저 눈을 질끈 감았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짙은 죄책감이 어려 있었다.
‘역시.’
그의 표정을 보며 선우진은 눈을 빛냈다.
역시 자신의 짐작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아까도 죄스러운 얼굴로 어르신이란 말을 입에 담길래 그의 죄책감을 자극해 봤던 것이었는데, 확실히 그는 설랑검에 봉인되어 있었을 검신에게 부채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감을 잡은 선우진은 신랄한 어조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혹시 마 조장이 죽으면 설랑 어르신도 다른 후계자를 찾으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구려. 그게 또 백 년 후의 일일지, 아니면 이백 년 후의 일일지는 모르지만 말이오. 대단하구려. 참 대단한 책임감이오.”
명백하게 비꼬는 말이었다.
하지만 선우진의 비꼬는 말에도 마유겸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입술을 꽉 깨물었을 뿐이었다.
선우진은 그를 계속해서 도발했다.
“죽는 순간만큼이라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셨소? 쓸모 있는 사람이라…. 그것참 웃기는 말이구려. 뭐, 이해는 하오. 사람이 어떻게 목표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가 있겠소. 하고 싶지만 못 하는 것도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말이오. 최소한 쓸모 있는 사람은 못되더라도 다른 이에게 죄는 짓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소? 그것도 죽는 순간까지 말이오.”
그 죄가 누구에게 짓는 것인지는 굳이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견디지 못한 마유겸은 공허하게 헛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넨… 정말 신랄하군. 너무 신랄해. 하하하, 하하하하.”
그리고 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이런 내게 뭘 더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묻는 그의 얼굴은 마치 길을 잃은 미아와도 같아 보였다.
가야 할 방향도, 갈 힘도 잃어버린 미아.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선우진은 자신이 제대로 방향을 잡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유겸의 얼굴에서 최소한 죽고 싶다는 의지는 사라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젠 새로운 길을 보여 줄 차례였다.
그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어째야 하는지 정말 몰라서 묻는 거요? 당연히 속죄해야 할 것이 아니오.”
“…속죄라고?”
“그렇소, 속죄. 죽음으로 속죄하겠다는 말 따위는 하지 마시오. 어르신의 무공을 이은 마 조장이 죽는 건 절대 속죄가 아닐 테니. 마 조장, 당신은 살아서 속죄해야만 하오. 끝까지 살아남아 천하제일의 협객이셨던 어르신의 유지를 이으란 말이오.”
비난하듯 내뱉는 선우진의 말에 마유겸은 눈을 감은 채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천천히 눈을 뜨며 물었다.
“자네는… 왜 그렇게까지 해서 나를 살리려고 하는 건가? 어르신 때문인가?”
선우진은 살짝 뜨끔함을 느꼈다.
그를 살리기 위해 했던 얘기라는 걸 벌써 들킨 모양이었다.
역시 잠시 망가졌다곤 해도 그는 여전히 총명한 사람이었다.
선우진은 잠시 망설이다 그냥 솔직하게 얘기하기로 했다.
최소한 이제 죽어야겠다는 의지는 버린 것 같으니 진심을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뭐, 그런 이유도 없지는 않소.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내가 당신을 이해하기 때문이오.”
“…나를 이해한다고? 자네가 말인가?”
마유겸은 헛웃음을 지었다.
선우진이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는, 말도 안 된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선우진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마 조장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사실 그 일이 있기 전부터 당신을 싫어했었소. 당신의 오만함이 싫었고, 당신의 자기애가 싫었소. 무엇보다 설풍 형님께 보이는 당신의 질투가 너무도 한심했지.”
그러자 마유겸은 씁쓸하게 웃음 지었다.
“그랬나? 그 이전부터 내가 그렇게 쓰레기였다니, 꽤 충격적인 얘기로군.”
“맞소. 당신은 그 이전부터 충분히 쓰레기였소.”
선우진의 말을 들은 마유겸의 눈빛은 더 어두워질 수 없을 만큼 어두워졌다.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졌기에 자신의 과거마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 모양이었다.
그런 마유겸의 모습에 선우진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소. 아마 당신의 조원들에겐 아니었던 것 같지만 말이오.”
그 말에 마유겸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가 선우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 조원들?”
“그렇소. 지금 사 조는 점창검호 제원영 형님이 맡고 있소. 근데 그 형님이 그러시더구려. 사 조원들이 여전히 마 조장을 잊지 못하고 있어 골치 아프다고 말이오. 마 조장이 그런 짓을 저질렀어도 그들은 여전히 마 조장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소.”
“그들이….”
마유겸의 눈에 문득 물기가 어렸다.
그런 짓을 저질렀어도 여전히 자신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조원들의 얘기에 가슴이 아파 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그리웠다.
선우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솔직히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당신은 꽤 괜찮은 조장이었소. 적어도 당신의 조원들에게는 말이오. 그리고….”
선우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제 그에게 자신의 진심을 들려줄 차례였다.
“그 일이 있은 이후 나도 한번 생각을 해 봤다오. 내가 만약 당신이었다면…. 그러니까 평생 증오하던 내 원수가 사실은 내 혈육이었고 내 어머니의 원수가 아버지였음을 알게 된다면 나는 과연 망가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말이오.”
“…….”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은 ‘아니다.’였소.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한 거요.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이오. 적어도 그 일에 관해서라면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이해하오. 마 조장, 당신이 아닌 누구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망가질 수밖에 없었을 거요.”
그 말을 들은 마유겸은 붉어진 눈으로 선우진을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가 풍랑을 만난 듯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일 이후로 마유겸은 늘 자기 자신을 욕하고 비하했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고, 자신은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한다고 말해 주는 상황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근데 그 말을 다른 이도 아닌 선우진에게서 듣게 된 것이었다.
가슴에서 문득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사실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했음을.
한 번만이라도 누군가에게 이해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했음을 말이다.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선우진은 그런 그를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완전히 믿지는 못하오. 하지만… 적어도 어르신은 완전히 믿소. 그래서 어르신께서 선택하신 당신도 믿을 생각이오. 그러니 당신도 믿었으면 좋겠구려. 당신을 선택하신 어르신을. 그리고 다른 이를 위해 목숨을 걸어 마침내 어르신의 시험을 통과한 자기 자신을 말이오.”
이제 마유겸의 눈에선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눈물이 그렁거리고 있었다.
그가 덜덜 떨리는 억눌린 목소리로 선우진에게 물었다.
“정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나를 이해할 수 있다고? 내게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선우진은 이제 그를 향해 따뜻하게 웃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그러더구려. 길가에 스치는 돌멩이와 풀잎도 서로를 상처 입히며 살아간다고. 그렇기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치유해 주려는 진실된 노력이라고 말이오. 나는 그때도 당신을 용서할 수는 없었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소.”
거기까지 말한 선우진은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당신이 그때의 일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또 속죄해 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봤소. 그러니 이제는 나도 당신을 용서해 보려고 하오. 여은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의 약혼자인 나는 당신을 용서하겠다는 뜻이오. 그러니 이제 당신도 계속 살아보려고 했으면 좋겠구려. 그래서 언젠가 그녀에게도 용서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소.”
마유겸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의 눈에선 마침내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단 한 명의 이해와 용서로 인해 삶을 허락받은 그가 흘리는 눈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