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망월
마경 만학숭이 선우진에게 물었다.
“자신은 있느냐?”
그러자 선우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부모의 원수를 갚는 일에 자신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마경 만학숭은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하얀 턱수염을 매만졌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부모의 원수를 못 갚게 할 수는 없지. 좋다. 너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마.”
그러자 선우진은 그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고, 진태도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인파랑! 이런 망할 놈이 끝까지….’
진태도는 분노했다.
선우진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그와 싸워 이긴다는 게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만학숭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후 이곳에서 도주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선우진과 일대일의 대결을 할 경우 그 두 가지가 모두 불가능해져 버리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최악의 경우 자신의 밑천을 드러내 버리게 될지도 몰랐다.
‘마경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이겠지. 어차피 인파랑 놈이 나를 이길 거란 생각을 하진 않았을 테니까. 져도 상관없다고. 아니, 당연히 질 거란 생각에 허락한 모양이로군.’
대결의 결과가 어찌 되든 만학숭에겐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일일 터였다.
진태도가 이기면 그 이후 그가 손을 쓰면 된다고 생각할 테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선우진이 이겨도 그로선 좀 아쉬울 뿐일 테니까.
반면에 진태도 자신에겐 손해만이 가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진태도 자신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선우진의 말 몇 마디로 형산파의 자성진인마저 불신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선우진이 진태도를 향해 백호검을 겨누며 말했다.
“진태도, 네놈에게 억울하게 돌아가신 해남인가와 사가 어르신들의 원한을 갚아 주마.”
진태도는 눈을 실룩거리며 그런 선우진을 바라봤다.
둘 사이에 아직 몇 장의 거리가 있건만 서릿발 같은 예기가 피부를 꿰뚫을 듯 찔러 오고 있었다.
그 범상치 않은 기세에 진태도는 이제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저놈을 죽여야만 다음을 볼 수 있겠군. 아니, 죽이지 말고 인질로 삼는다면? 마경에게 놈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머리가 복잡했다.
하지만 겉으론 사납게 기세를 뿜어내며 검을 뽑았다.
챙!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기어오르는구나!”
아무리 모략을 좋아했어도 진태도 역시 한 명의 무사였다.
검을 뽑자 생각이 조금 단순해졌다.
‘그래, 죽이든 살리든 일단 빠르게 결과를 낸다.’
진태도가 본능적으로 생각한 해법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선우진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보나 마나 나와 빠르게 결판을 내고 도망갈 생각이겠지. 가능하다면 나를 인질로 삼을 생각도 있을 것이고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진태도가 다시 눈을 부릅떴다.
아까부터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온 듯 말하고 있는 놈이 그렇게 거슬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다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 진태도를 향해 선우진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물었다.
“내가 한 방에 네 머릿속을 깨끗이 비워 줄까?”
“….”
자신의 머리를 비워 준다고?
놈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진태도는 일단 놈의 말을 들어 보기로 했다.
그 또한 놈의 말이 궁금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선우진이 얼굴에서 웃음을 싹 지우고는 단호하게 못을 박듯 선언했다.
“진태도, 너는 어차피 내 검에 죽는다. 그러니 그다음을 생각할 필요도 없지. 어떤가? 깨끗이 정리되지 않았나?”
감히!
그 말을 들은 순간 진태도의 가슴 속에서 울컥 분노가 끓어올랐다.
또다시 놈에게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이 애송이 놈이, 감히!”
쉬이익!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한 진태도의 검이 공간을 꿰뚫고 선우진을 향해 쏘아졌다.
사전 동작이 거의 없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쾌검.
해남진가의 진룡검법이었다.
쩌엉!
다음 순간, 강한 충돌음과 함께 두 사람이 양쪽으로 물러섰다.
눈을 실룩거리는 진태도와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는 선우진이었다.
그 찰나의 격돌에 만학숭의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대남사흉의 일인 비요마군 상도경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뭐였지? 방금 그건?”
당황한 건 상도경만이 아니었다.
팔짱을 낀 채 함께 보고 있던 흑교마군과 백적마군 또한 당황한 표정이었다.
진태도와 선우진의 첫 번째 충돌을 눈으로 인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해를 주름잡는 세 명의 초절정 마두들이 눈으로도 따라잡지 못했을 만큼 엄청난 속도의 검격들이었다.
오직 유일하게 그들의 충돌을 볼 수 있었던 만학숭만이 탄성을 토해 낼 뿐이었다.
“호오!”
한편 다시 떨어져 검을 겨누고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은 사뭇 달랐다.
진태도는 살짝 당황한 상태였다.
자신의 기습이 너무 쉽게 튕겨 났기 때문이었다.
그저 한번 찔러 봤을 뿐이지만 자신의 쾌검을 놈이 비슷한 속도의 쾌검으로 쳐 냈다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방금 놈이 보여 준 수법은 지난번에 보여 준 사일검법의 일시사일도 아니었다.
그저 검을 휘두르는 단순한 동작에 불과했다.
자신의 쾌검에 반응한 것만도 충분히 놀라운데, 그걸 단순히 검을 휘둘러 쳐 냈다는 사실에 진태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네놈, 방금 그건…?”
그러자 선우진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설마 방금 그게 최선은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매우 실망인데?”
그의 여유 있는 웃음을 보며 진태도는 깨달았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놈이 바로 며칠 전 봤을 때보다 한층 더 성장해 있다는 걸.
이제 더 이상 어떤 상황이든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놈….”
진태도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상대를 인정한 이상 이제 진지하게 임할 생각이었다.
그러자 선우진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천하삼십육성의 일인 해남마검 진태도다운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제부터가 진짜로군.’
선우진은 정신을 집중했다.
드디어 천하삼십육성, 그것도 암혈향과 같은 살수 기술이 아닌 검으로 그 경지에 도달한 자와 제대로 겨룰 수 있게 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까지의 싸움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천하삼십육성과 정면으로 실력을 겨룬다.’
지난 삶에서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한 번의 삶을 건너 그저 하늘 위의 존재로 우러러봤던 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지난번의 깨달음을 통해 선우진은 드디어 내공 백 년의 벽을 넘어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선 상태였다.
그가 앞으로 싸워야 하는 괴물 같은 자들과 드디어 같은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상태에서 월하환검무까지 쓸 경우 어느 정도의 무위를 발휘할 수 있을지, 선우진 스스로도 무척이나 궁금했다.
마경에게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는 일을 감수하면서도 진태도와의 일전을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이유였다.
‘자, 그럼 나도 단계를 좀 올려 볼까?’
월하환검무 삼 식.
현망월 발동.
화아아아아악!
선우진은 이제껏 이 식 현월 상태로 유지하던 월하환검무를 한 단계 올려 현망월 상태로 들어갔다.
그러자 다시 느껴지는 전능과 전지의 감각, 늘 버거웠던 현망월 상태가 이제 훨씬 더 편안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진태도와 선우진은 그 상태로 서로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원을 그리며 천천히 거닐었다.
쾌검수의 승부는 단 한 번의 검격으로 결정되는 법.
어쩌면 다음 충돌이 마지막이 될지도 몰랐다.
서로의 발걸음, 손가락 근육의 움직임, 미세한 솜털의 떨림까지도 완전히 서로의 인식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 공간 안에 단 두 명만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던 한순간, 진태도가 먼저 검을 뻗었다.
사전 동작이 거의 없는 극쾌의 찌르기.
그것도 이번엔 삼 연격이었다.
슈슈슉!
거의 동시에 세 개의 검이 선우진의 몸을 찔러 왔다.
엄청난 속도였다.
차마 제자리에서 감당할 수 없었던 선우진은 급히 뒤로 물러서며 그것들을 쳐 냈다.
쩌쩌정!
그러자 기세를 탄 진태도가 계속해서 검을 찔러 왔다.
이번엔 오 연격이었다.
슈슈슈슈슉!
선우진은 이번에도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그것을 쳐 낼 수밖에 없었다.
쩌저저저정!
하지만 진태도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이 기세를 살려 그대로 끝을 내겠다는 듯 폭풍처럼 몰아쳐 오기 시작했다.
“하아아압!”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대남사흉의 일인 비요마군 상도경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마경 만학숭에게 물었다.
“저렇게 뒷걸음질 치다니. 많이 밀리는 것 같군요. 저대로 둬도 괜찮겠습니까, 대두목?”
솔직히 그의 눈으론 지금 일어나는 공방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대결할 때 뒤로 물러서면 안 된다는 건 상식과도 같은 일이었다.
적의 기세를 살려 줘 반격이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만학숭이 짧게 대답했다.
“놈의 눈이 아직 살아 있다.”
“예?”
만학숭의 말을 들은 상도경은 문득 선우진의 눈을 바라봤다.
그러자 정신없이 뒤로 몰리고 있는 선우진의 눈이 여전히 날카롭게 빛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눈만큼은 적어도 위기에 빠진 자의 눈빛으로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하아아압!”
진태도가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찔렀다.
그러자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검격이 폭풍이 되어 선우진을 몰아쳐 갔다.
옆에서 보기엔 여러 개의 검이 동시에 사방에서 찔러 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헉!”
“저, 저런?!”
그 폭풍 같은 쾌검에 대남사흉의 두 사람이 경호성을 내질렀다.
자신들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공격이었다.
하지만 선우진은 그들이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예리한 눈빛으로 진태도의 공격을 보고 있던 그의 신형이 한순간 마치 공기가 된 듯 가벼워졌다.
슈슈슈슉! 쩡! 슈슈슈슉! 쩌정! 슈슈슈슉!
“허어!”
“저럴 수가?!”
그것은 놀라운 광경이었다.
마치 산들바람에 흩날리듯 가볍게 흔들리는 선우진의 신형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진태도의 검격을 모두 흘려 버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가끔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은 쳐 내며 폭풍 같은 연격을 모두 흘려 내는 모습에 대남사흉은 그저 입을 떡 벌린 채 탄식밖에 뱉을 수 없었다.
그러자 진태도의 눈에 당황의 빛이 떠올랐다.
이번 공격으로 끝을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의 마음이 살짝 흔들린 순간이었다.
그 순간, 선우진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의 검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아압!”
쩌엉!
진태도는 자신의 검을 강하게 후려친 놈의 베기에 이를 악물었다.
‘크윽!’
한순간 후려친 벼락같은 검격에 검이 손에서 뛰쳐나갈 듯 진동하고 있었다.
엄청난 강검이었다.
게다가 그걸로 공격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진태도가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을 참아 내며 검을 꽉 쥐고 있을 때 머리 위에서 놈의 검이 도끼처럼 찍어 왔다.
거의 시간차가 없는 두 번의 연격이었다.
진태도는 마음속으로 그 검법의 이름을 외쳤다.
‘남십자검!’
쩌엉!
진태도는 간신히 이 격 또한 막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검을 막아 냈을 뿐 거기에 실린 경력은 이겨 낼 수 없었다.
검에 실린 엄청난 경력에 그는 정신없이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그의 검 또한 손아귀에서 활어처럼 진동하고 있었다.
우우우웅!
“으으윽!”
진태도는 자신의 검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선우진의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느새 다시 자신의 눈앞까지 도달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부아아아앙!
진태도는 그제야 남십자검이 어떤 검법이었는지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십자 검격을 이어 갈수록 점점 강력한 경력을 실어 마침내 상대, 또는 상대의 검을 부숴 버리고 마는 것.
그것이 남십자검의 특징이었다.
쩌엉!
세 번째 검격을 받아 내자 드디어 진태도의 손아귀가 찢어졌다.
화끈한 고통과 함께 피가 새어 나왔다.
“크으윽!”
그리고 또 한 번.
쩌엉!
네 번째 검격에 ‘찌직!’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팔 근육 어딘가가 찢어진 것 같았다.
검격은 계속 이어졌다.
쩌엉!
진태도는 다섯 번째 검격을 간신히 받아 내며 생각했다. 이다음으로 올 여섯 번째는 받아 낼 수 없겠다고.
이대로는 놈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으드득!
진태도는 이를 갈았다.
절대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할 수는 없었다.
이제껏 자신이 쌓아 온 모든 것들을 이 한 번의 패배로 다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진태도는 다시 검을 내리쳐 오는 선우진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이 모든 게 다 저놈 때문이었다.
인파랑, 저 증오스러운 놈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 갔던 것이었다.
그러니 죽여야만 했다.
설사 자신이 여기서 죽더라도 저 증오스러운 놈만큼은 어떻게든 죽이고 싶었다.
찰나의 순간, 이런 생각들을 끝낸 진태도는 머리 위로 내리찍어 오는 검을 바라보며 마음을 결정했다.
‘어차피 이대로 가다간 패할 수밖에 없을 터, 더 이상 여력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고는 온 힘을 다해 검을 쏘아 냈다.
마경과 싸울 때를 대비해 아껴 놨던 초식이었다.
진룡검법 구 초.
맹룡관해.
바다를 가르는 맹룡의 돌진.
일전에 대남사흉인 청포마군의 가슴을 뻥 뚫어 버렸던 비장의 절초였다.
퍼어어엉!
대포가 쏘아지는 듯한 파공성과 함께 진태도의 검이 내리쳐 오는 선우진의 검을 향해 엄청난 기세로 쏘아졌다. 검을 그대로 부숴 버릴 듯한 과격한 찌르기였다.
콰아아앙!
진태도의 검첨과 선우진의 검날이 충돌했다.
그러자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 여파로 이번엔 선우진이 뒤로 삼 장쯤 튕겨 나갈 수밖에 없었다.
“!”
선우진은 냉정한 눈빛으로 뒤로 물러서며 부드럽게 몸을 멈춰 세웠다.
그러자 당황한 쪽은 오히려 진태도였다.
맹룡관해라면 놈의 검을 부수고 머리까지 관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놈의 검격에 대한 반발력으로 자신마저 살짝 뒷걸음질 치고 있는 상황이라니.
‘아무리 남십자검이 강검술이라 해도 놈의 공력은 분명 나보다 아래일 텐데 대체 어떻게 이런 경력이?’
진태도로선 알 수 없었지만, 그의 검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선우진이 뒤늦게 개천의 묘리를 검격에 섞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진태도는 이를 악물고 다시 돌진했다.
놈의 경력이야 어쨌든 기세를 탄 지금 다시 몰아붙여야만 했다.
“하아압!”
그의 검이 다시 대포처럼 쏘아졌다.
속도는 아까의 쾌검보다 좀 덜하지만, 마치 거대한 기둥이 쏘아지는 듯한 위력의 맹룡관해였다.
퍼어어어엉!
강력한 검격에 선우진의 가슴이 뻥 뚫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잔상이 스르륵 사라지고, 약간 옆쪽에서 그의 신형이 나타났다.
공기처럼 부드럽게 검격을 흘려 냈던 것이었다.
“놓치지 않는다!”
진태도는 연속해서 다시 검을 날렸다.
이번에도 맹룡관해였다.
퍼어어어어엉!
대포가 쏘아지는 듯한 파공성.
그 강력한 경력에 선우진이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진태도는 그를 놔주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끝을 내겠다는 듯 계속 따라붙었다.
퍼어어어엉!
선우진은 간신히 몸을 날려 진태도의 검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그의 옷깃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검격의 폭이 너무 넓었다.
어떻게든 피해 내고는 있지만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기둥이 날아오는 듯한 상황.
이대로는 금방이라도 검격에 휘말려 찢겨질 듯 위태로운 상태였다.
“선우 공자….”
진소은이 간절한 눈빛으로 선우진을 바라봤다.
대남사흉의 삼 인 또한 인상을 찌푸리며 만학숭에게 말했다.
“대두목, 저대로는….”
“곧 죽을 것 같군요. 끼어들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만학숭은 그들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계속 관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마음속에선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진태도 놈, 저런 검초를 숨기고 있었군. 제법 위협적이야. 게다가 저 새끼 호랑이는 또 저걸 어떻게든 받아 내고 있단 말이지?’
솔직히 놀라웠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생각했던 수준을 훨씬 상회하는 무위를 보여 주고 있었다.
하찮은 뱀 새끼라고 생각했던 진태도는 독니를 머금고 있었고, 애완용으로 키우면 되겠다고 생각했던 새끼 호랑이는 이미 맹수였다.
‘지금은 아니어도 놔두면 곧 위협이 될 수도 있겠군.’
그리고 만학숭은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자들을 살려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한편 선우진은 온 정신을 신법에 집중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난번에 한 번 보기는 했지만 직접 당하는 맹룡관해가 생각보다도 더 위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퍼어어어엉!
“후우우우!”
자신이 펼치는 일시사일에 버금갈 속도, 배종관의 팔뚝 같은 공격 범위에 설풍의 정권 같은 위력이라니.
지나치게 까다로웠다.
물론 상대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개천으로 정면으로 쳐 내면 될 것 같긴 했다.
맹룡관해의 위력이 아무리 강해도 개천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선우진은 그렇게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마경 앞에서 묵랑검법을 보여 주고 싶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인파랑의 복수를 남십자검으로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려면 지금 상태로는 안 되겠지?’
진태도는 확실히 강했다.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섰고, 그 상태에서 월하환검무 삼 식 현망월 상태로 들어갔음에도 여전히 버거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다음 단계가 필요했다.
선우진은 그렇게 지금 상황을 합리화시키며 생각했다.
‘광검 스승님께서는 절대 아직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이제 초절정에도 올랐으니!’
그러니 이제 질러 볼 때도 된 것 같았다.
‘좋아, 가자!’
선우진의 눈이 한순간 빛을 뿜어냈다.
연보랏빛 안광, 하지만 푸른빛이 더 강해 월광같이 시린 느낌의 빛이었다.
월하환검무 사 식.
망월 진입.
화아아아아아악!
선우진의 정신이 한순간 이 세상의 중심에 진입했다.
그러자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서 유일무이하다는 것을.
그에 비해 자신을 둘러싼 세상 모든 존재들은 그저 무용하고 무의미했다.
모두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다.
천하삼십육성인 진태도도, 천하사마인 마경 만학숭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그저 먼지와 같을 뿐이었다.
그러니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가치를 지닌 자신이 바로 세상의 주인이었다.
자신만이 오롯이 존재할 가치가 있었고, 모든 것의 생사를 주관할 자격이 있었다.
퍼어어어엉!
진태도의 맹룡관해가 자신을 찔러 왔다.
먼지 주제에 세상의 주인을 해하려 하는 가소로운 존재였다.
무가치하다 못해 귀찮기까지 했다.
선우진이 놈의 검격을 향해 선언했다.
‘갈라져라.’
그러자 놈의 검격에서 틈이 드러났다.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한 가닥의 결이었다.
그 선을 따라 검을 그었다.
그러자 선우진의 검날이 놈의 검면을 정확히 쳐 낼 수 있었다.
쩌엉!
검면을 정확하게 가격해 맹룡관해를 비껴 낸 것이었다.
진태도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먼지 주제에….
우스웠다.
그대로 놈의 머리를 내리그었다.
그러자 놈이 튕겨 나간 검을 간신히 수습해 그것을 막으려 하는 것이 보였다.
피식 웃으며 명령했다.
‘쓸데없는 짓. 깨져라.’
그러자 놈의 검에 선이 드러났다.
이리저리 갈라진 선.
이제껏 받은 충격으로 생긴 검의 실금들이었다.
선우진은 검격의 방향을 살짝 틀어 가장 커다란 실금을 향해 내리쳤다.
쩌엉!
퍼석!
그러자 놈의 검이 견디지 못하고 결국 쪼개졌다.
그걸 본 놈의 눈이 크게 확대되고 있었다.
선우진은 비릿하게 웃으며 검을 부순 그대로 내리그었다.
푸화악!
“크으으으윽!”
놈의 왼팔이 벌레처럼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랬다.
놈은 벌레였다.
아니,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은 벌레였다.
그러니 이제 벌레의 머리를 떨어뜨릴 차례였다.
선우진은 바로 진태도의 머리를 향해 검을 그으려 했다.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에 팔이 약간 삐걱거렸지만 상관없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정신 차리게, 진! 더 이상은 몸이 버텨 내지 못해!
버티지 못한다고?
피식 웃음 지었다.
쓸데없는 소리였다.
세상의 주인인 자신의 몸이 이 정도를 못 버텨 낼 리 없었다.
그때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자네의 스승인 내 말을 듣게! 당 소저를 생각해! 소중한 것들! 친구들, 비사영과 배종관, 설풍을 생각하게! 해 소저를 구해야 하지 않나!
소중한 것들?
우스웠다.
세상의 주인인 자신에게 그런 것들이 있을 리가….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번쩍 정신이 들었다.
스승인 묵랑과 친구들, 당여은과 해청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크으윽!”
선우진은 입술이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러자 찢어진 입술에서 피가 팍 솟구치며 억지로 월하환검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으그그그극!”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특히 검을 무리하게 휘두르던 오른쪽 어깨 근육이 심각하게 아파 왔다.
근육이 거의 찢겨질 뻔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후우우우!”
선우진은 심호흡을 하며 진태도를 바라봤다.
그러자 창백해진 얼굴의 그가 쪼개진 검을 들고 자신을 경계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선우진은 그의 눈에 가득 차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어찌나 공포에 질렸는지 그는 떨어져 나간 왼팔에서 피가 솟구치는 것도 막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묵랑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 괜찮은가, 진?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 어르신이 제때 깨워 주신 덕분에 다행히 근육은 찢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로써 아직 망월을 사용하는 게 무리라는 건 확실히 알 것 같군요.’
- 그래, 몸이 멀쩡하다니 그건 다행이로군. 근데… 바깥의 상황은 좀 심각해진 것 같은데?
선우진은 묵랑의 말을 듣고는 슬쩍 주변을 살펴봤다.
그러자 마경 만학숭이 심각해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귀엽다는 듯 쳐다보고 있던 아까와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본 선우진이 묵랑에게 물었다.
‘저 표정, 혹시 제가 생각하는 그걸까요?’
그러자 묵랑이 대답했다.
- 그래, 고양이처럼 생각했던 호랑이 새끼가 이미 맹수였음을 깨달은 표정이라고 생각했다면 정확하네.
‘…큰일 났군요.’
그때였다.
만학숭이 선우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법이구나. 아주 제법이야.”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에선 진득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선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