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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전선 비룡십삼대-267화 (267/359)

267화 남해성녀 시서우-2

푸화아악!

마경의 머리가 피를 뿌리며 떨어져 나갔다.

방금 전까지 괴물과 같은 무위를 발휘하고 있던 그가 진짜 죽은 것이었다.

그러자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숨죽인 채 지켜보던 모든 이들, 복건용가의 무사들과 내 일행들은 잠시 멍하니 있다 한 박자 늦게 환호성을 터트렸다.

“우와아아아아!”

“마경이 죽었다!”

“성녀께서 마경을 물리치셨다!”

“와아아아아아!”

복건용가의 무사들이 마치 축제처럼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가운데, 나는 문득 성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어쩐지 씁쓸한 눈빛으로 마경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워낙 망가진 얼굴이라 표정을 잘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묵랑 어르신의 가르침을 받아 사람의 마음을 읽는 연습을 하고 있는 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무척 가라앉아 있다는 사실을.

하긴,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무림의 절대자인 그녀가 새까만 후배인 내 도움을 받아 마경을 죽였으니, 세인들은 앞으로도 그녀가 마경의 하수라고 떠들어 댈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가 죽어 버렸으니 이제 그 평가를 뒤집을 기회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제가 성녀님의 명성에 누를 끼치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워낙 망가진 얼굴이기에 조금만 일그러져도 마치 악귀 같은 표정으로 보이고 있었다.

그 흉측한 모습에 나는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더욱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녀가 입을 열자, 나는 그게 내 오해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얼굴과 달리 무척 부드러웠기 때문이었다.

“소협께선 저와 소중한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 주셨습니다. 은혜를 입혀 놓고 사과라니요. 오히려 제가 감사해야지요. 저는 제 명예 따위보단 사람들의 생명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목소리를 들어 보건대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은 아마 웃음을 짓고 있는 표정이었던 모양이었다.

워낙 얼굴이 망가져 있어서 웃음마저도 흉측해 보였던 것이었다.

나는 그제야 좀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녀에 대한 안쓰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어 사과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얼굴이 이 모양인지라 웃으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알고 있는데, 용가의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그런지 또 실수를 범했군요.”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표정을 들켜 무례를 범한 것은 분명 나인데 그녀가 사과를 하다니, 그렇게 민망할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성녀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는….”

하지만 거기까지 말하고는 잠시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표정에 놀랐던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뻔히 알고 있을 텐데 차마 전혀 놀라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잠시 멈칫했던 나는 바로 다른 말로 이어 갔다.

“개인적으로 무림의 선배님들 중 검성 어르신과 성녀님을 가장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다시 흉측하게 일그러지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호! 이렇게 잘생기고 무공도 뛰어난 후배님이 배려심마저 훌륭하다니. 필시 이제껏 수많은 여인들을 울렸겠지요? 안 봐도 눈에 선하군요.”

“네, 네?”

나는 순간 진심으로 당황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문득 머릿속에 몇 명 소저들의 얼굴이 떠올라 차마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내 당황한 표정이 웃겼는지 성녀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호! 정곡을 찔린 모양이군요. 이런 순진한 모습까지 있다니, 내가 젊었을 때 만났더라면 나도 반했겠어요.”

그녀가 그렇게 계속 웃음을 이어 가고 내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용가의 가주 용우신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시 여협께서 기분이 좋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그러자 성녀는 웃음을 그치고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용우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기특하고 귀여운 후배를 만나서 그런지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제 목숨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용 가주님. 덕분에 제가 아직 살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성녀는 그렇게 말하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공손한 감사 인사에 용우신은 어쩔 줄 몰라 하며 황급히 같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시 여협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니 오히려 제가 죄를 청해야지요.”

그러자 성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만약 그때 마경에게 당했다면 아마 용 가주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목숨도 위험했을 것입니다. 저는 제 명예 따위보단 가주님과 사람들의 목숨이 훨씬 더 소중합니다. 그러니 그걸 지킬 수 있게 해 주신 걸 감사드려야지요.”

두 사람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각자 자기가 더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훈훈한 광경이었다.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서로를 위하는 진심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

하지만 그러면서도 뭔가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지 않는 듯한 조심스러운 태도 또한 느껴지고 있었다.

묘한 느낌이었다.

잠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문득 묵랑 어르신께 물었다.

‘저 두 사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그가 의아한 말투로 되물었다.

- 음? 뭐가 말인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역시 이런 종류의 질문은 묵랑 어르신께 하면 안 되는 건가 싶었다.

그러자 그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 하하하! 농담일세. 저 두 사람… 서로에게 깊은 호감을 가지고 있군.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각자 서로에게 죄책감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네. 그래서 서로 조심하고 있는 것 같군.

‘죄책감이라고요?’

- 구체적으로야 알 수 없지만 죄책감? 열등감? 그런 종류의 감정인 것 같네.

나는 문득 두 사람에 관해 알고 있는 사실들을 떠올려봤다.

일단 두 사람이 함께하기 시작한 건 복건용가가 한참 마경의 무리와 싸우고 있던 육칠 년 전부터였다.

그 당시 마경의 세력은 절정에 달해 있었고, 복건용가는 매번 패하면서도 그들에게 대항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성녀는 그때 복건용가로 가 그들을 지원하기 시작했었다.

그러자 상황은 금세 역전됐다.

그전까지 복건용가가 패했던 건 마경의 무력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성녀가 마경의 무력을 상쇄하자 두 세력 간의 우열이 순식간에 뒤집어져 버렸던 것이었다.

그리고 바다에서 승부를 낼 수 없었던 두 세력은 결국 긴 대치를 시작했었다.

그 얘기를 들은 묵랑 어르신께서 말씀하셨다.

- 육칠 년이라…. 두 사람이 외모가 아닌 서로의 진실 된 모습을 알아보고 호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로군. 저 두 사람은 혹시 미혼자인가?

‘제가 알기로 성녀님은 혼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평생 힘든 처지의 사람들을 후원하거나 고아들을 키우며 살아오셨었죠. 하지만 용가주님은 기혼자이십니다. 두 아들과 한 명의 딸이 있다고 하더군요. 다만 오래전에 상처하셔서 홀로 지내신 지는 좀 됐다고 들었습니다.’

- 흐음, 복건용가 같은 거대 세가의 가주가 상처한 후 후처를 얻지 않았다는 건가? 그것도 좀 특이하군.

‘생각해 보니 그도 그렇군요. 세가의 안주인 자리를 비워 놓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무림 세가의 가주들은 보통 몇 명의 아내를 두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내 아버지도 그러셨듯 주변 세력과의 혼인 동맹이 필요한 경우도 많았고, 세력의 내부를 책임져 줄 안주인의 존재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복건용가 같은 거대 세가의 안주인 자리가 몇 년 이상 비어 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 내 생각엔 그 이유가 아마 성녀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이제껏 그런 소문도 없었던 건가?

‘…제가 알기론 없었습니다.’

용가의 안주인 자리가 몇 년이나 비어 있고, 용가주는 성녀와 가깝게 지내고 있다.

당연히 호사가들이 이런저런 소문을 퍼뜨리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저 두 사람에 관한 소문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어쩐지 그 이유도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성녀님의 외모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가 저분에게 연심을 품을 거라곤 전혀 생각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또한 복건용가는 예전부터 혼인을 통한 세력 확장을 시도하지 않는 곳으로 유명했습니다. 내부인들끼리 혼인하는 경우가 많고, 가주들도 한 명 이상의 아내를 두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흐음, 하긴 복건용가는 예전부터 좀 그랬었지. 그래서 더 멋있는 곳이기도 했고.

그때였다.

서로 멀찍이 떨어져 애틋한 눈빛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던 용가주와 성녀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용가주 용우신이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은인을 옆에 세워 두고 내가 너무 다른 얘기만 하고 있었군. 선우 공자, 이번에 우리 용가가 공자에게 큰 은혜를 입었네. 형산파의 육합검수도, 저 마경도 공자가 아니었다면 절대 해결하지 못했을 거라네.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네.”

그렇게 말한 용가주는 깊게 고개를 숙이며 포권했다.

복건용가라는 거대 세가의 수장이자 천하삼십육성 중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인 그가, 아무리 은혜를 입었다고는 하나 새까만 후배인 내게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고개를 숙였던 것이었다.

정말이지 너무도 담백하고 그릇이 넓은 남자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다시 한번 감탄하며 마주 고개를 숙여 포권했다.

“은인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제가 두 분께 사죄를 청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감히 성녀님과 용가를 이용했으니까요. 그 일이 다행히 잘 풀려 용가에 도움이 된 것이지, 자칫 잘못됐다면 두 분까지 위험에 처하실 뻔한 일이 아니었습니까?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그러자 내 말을 들은 용가주와 성녀는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는 빙긋이 웃음 지었다.

그리고 이번엔 성녀가 말했다.

“무공과 지혜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심성까지 이리 겸손하니 실로 무림의 홍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시서우는 공자라는 사람을 알게 된 것이 마경을 죽인 것보다 더 기쁘군요. 우리 앞으로도 자주 볼 수 있겠습니까? 공자와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으면 좋겠군요.”

그러자 용가주 용우신 또한 흐뭇하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나 역시 성녀님의 의견에 동감일세. 인연도 없었던 인파랑 공자를 위해 목숨을 걸고 남해의 두 악적을 처단해 줬는데, 그 어디에 사사로운 목적이 있었다는 건가? 그런 사사로움이라면 몇 번, 아니 몇십 번이라도 우리 용가를 이용해 주었으면 좋겠군. 언제라도 불러 주시게. 세상 끝까지라도 달려갈 테니.”

세상 끝까지라도 달려간다.

누가 말해도 허풍으로 들릴 법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도 용가주의 입에서 나오니 진심으로 느껴졌다.

그들의 말을 들으며 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흐뭇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웃음의 의미는 두 가지였다.

일단 심정적인 면에서 이런 이들과 연을 맺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 기뻤다.

무림은 낭만과 모험이 가득한 곳이라고 하지만, 실상 가득한 것은 패도와 야망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배신과 귀계가 판을 치는 곳이 바로 내가 아는 무림이었다.

그런데 그런 무림에도 아직 이런 진정한 협객들이 남아 있었고, 또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게 된 것이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문득 돌아가신 검성 어르신이 생각났다.

‘검성 어르신….’

그리고 웃음의 또 한 가지 이유는 저들에게 빚을 지워 둠으로써 막강한 아군을 얻게 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이번 여정의 목적은 검신 어르신의 진신절기를 얻는 것이었고, 또한 설풍 형님께 세력을 얻게 해 주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일이 잘 풀리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이 여정이 끝나면 반드시 혈교와 전면전을 벌이게 될 것이었다.

아마 무림맹 또한 적으로 만나게 될 확률이 높았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 일로 천하삼성 중 한 명인 남해성녀 시서우와 협의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복건용가의 가주가 나를 도와주겠다고 말해 준 것이었다.

물론 그게 아직 혈교와의 싸움을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들이 혈교와 무림맹에 대한 얘기를 듣고도 그 일을 외면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은 두 분께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저는 원래 전선의 비룡대에서 혈교와 싸우고 있던 비룡대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들에게 전선에 관한 얘기를 천천히 풀어 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처음엔 의아한 표정으로 듣기 시작했던 두 사람의 표정이 점점 더 심각해졌다.

나는 그간의 이야기를 천천히, 그리고 아주 상세하게 설명해 줬다.

그러자 두 사람은 때로 분노하고 때로 감탄하며 내 이야기에 집중해 주었고, 이야기가 끝나자 성녀께서 먼저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사실 제가 전선으로 가지 않았던 이유는 무림맹주인 모용검이란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그곳에 가는 것이 그라는 믿을 수 없는 자의 입지를 더 높여 주는 일이 될까 봐 외면했던 거였지요. 그런데… 사실 제가 외면했었던 건 그가 아닌 수많은 전선 무인들의 생사였었군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용가주 용우신 또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마경과 싸우고 있는 우리가 무림의 가장 큰 해악을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었네. 그런데 이제 보니 그는 쭉정이에 불과했었군. 진짜 거악을 놔두고 소악을 붙잡고 있었어.”

그 후, 두 사람은 입을 모아 혈교와의 싸움을 시작하는 날 모든 일을 제쳐 두고 달려와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건 이번 일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

이야기가 끝난 후 성녀와 복건용가의 무인들은 곧 용가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그들은 마경이 사라진 지금 그의 부하들이 흩어지기 전에 대남도를 공격해 일망타진할 계획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떠나기 전 내게 뭔가 부탁할 일은 없느냐고 물어봤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성녀님께 무너진 협곡의 잔해를 좀 치워 줄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 안에 깔려 있을 진태도의 시신과 백호검, 그리고 다른 것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원래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진태도의 시신을 포기하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묵랑 어르신께서 확신하듯 조언해 주셨다.

- 성녀에게 부탁하게. 그녀 정도의 무인이라면 저런 잔해를 치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걸세.

그래서 혹시나 싶어 그녀에게 부탁했던 것이었는데, 그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줬다.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해남파의 사람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라도 그의 시신이 필요하겠군요.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챙겨 줬어야 하는데 미안합니다. 나이를 먹어도 이렇게 생각이 짧으니 대체 언제나 제대로 된 사람이 될까 싶군요. 이런 제가 성녀라니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지요.”

그러면서 그녀는 내게 이렇게 제안했다.

“해남파 사람들과 만날 때까지 내가 공자의 옆에 있어 드리겠습니다. 비록 허명이나마 내가 있으면 그들의 분노도 조금 덜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녀의 배려에 나는 다시 한번 감탄했다.

그녀는 해남파 사람들에게 내가 인파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힐 때를 대비해 자신이 남아 주겠다고 말해 준 것이었다.

그들의 분노가 지나칠 경우 막아 주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깊이 고개를 숙여 진심으로 그녀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께선 아니라고 하시지만, 제가 보기엔 성녀라는 호칭만큼 선배님께 잘 어울리는 호칭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저를 배려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를 위해 남아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분노한다면 그 분노를 풀어 주는 것 또한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내 정중한 거절에 잠시 나를 바라보시던 성녀님은 다시 흉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셨다.

아직 적응은 잘 안 되지만 이젠 그 표정이 웃는 표정이라는 걸 잘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는 아이들을 몇 명 키우고 있습니다.”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성녀가 인연이 닿은 고아들을 모아 키우고 있는 것은 유명한 일화였으니까.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다만 몇 명은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내가 알기론 최소한 몇십 명은 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자 다시 흉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녀가 대꾸했다.

“그보다 조금 더 되긴 하지요. 그보다 언제 시간이 된다면 그 아이들과 시간을 좀 보내 주시지 않겠습니까? 본받을 수 있는 형, 오라버니를 본다면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그녀가 생각하기에 내가 아이들의 좋은 본보기가 되어 줄 것 같다는 얘기였다.

성녀라는 존경스러운 협객에게 너무 지나친 인정을 받는 것 같아 민망했다.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해 줬다.

“세상에서 가장 본받을 수 있는 분이야 바로 여기 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들르겠습니다.”

성녀님께선 내 대답에 만족하시고는 잔해를 치우러 가셨다.

그리고 그녀가 잔해를 치우는 방법을 본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것들을 치우기 위해 한 일은 그저 잔해 근처로 가 팔을 휘휘 젓는 것이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녀 주변에 있던 잔해들이 용권풍에 휘말린 듯 날아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게 작은 돌멩이건 큰 바위건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렇게 잔해를 주변으로 날려 버리며 협곡을 천천히 왕복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협곡 안을 가득 메웠던 잔해들이 날아가며 그녀의 모습이 점점 더 협곡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처음엔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곧 어이가 없어져 웃음을 터트렸다.

“하, 세상에….”

기가 막힌 일이었다.

이제 천하삼십육성과도 어느 정도 자웅을 겨룰 수 있게 되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하늘 위의 하늘이란 아직도 저리 높았으니….

예전에 독안괴검 서일의 허공섭물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성녀님은 그와 아예 수준이 다른 듯했다.

괴검이 왜 십오 인의 절대자 중 최하위로 꼽히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잠시 동안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나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용가주 용우신을 바라봤다.

그 또한 넋을 잃은 채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보는 것이 그 광경인지, 그녀 자체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용가주님, 잠시 얘기를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응? 아, 선우 공자. 당연히 괜찮네.”

그는 성녀님의 신위를 계속 볼 수 없는 것이 조금 아쉬운 듯했지만, 이내 환하게 웃으며 구석진 곳으로 나를 따라왔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기에 이렇게 구석진 곳까지 왔는가?”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용건을 꺼냈다.

“이제 마경이 사라졌으니 성녀님은 더 이상 용가에 머무실 필요가 없으신 거겠지요?”

“응?! 아, 그거야….”

내 말을 들은 그의 안색이 순간 창백해졌다.

거기까지는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그에게 물었다.

“어쩌면 지금 당장 떠나셔도 상관이 없으시겠습니다. 사실 마경이 없는 대남도를 정벌하는 데 꼭 성녀님께서 가실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그야 그렇겠지.”

“역시 그렇군요. 그럼 제가 당장 성녀님을 모셔 가도 되겠습니까?”

내 질문에 그는 당장 대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잠시 망설이던 그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님께서 가시기로 결정하셨다면야,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나?”

그의 대답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정말, 진심으로 제가 그러기를 원하십니까?”

그러자 그는 이제야 내 질문에 의도가 있음을 느낀 모양이었다.

약간의 당황과 경계를 담아 내게 물었다.

“…무슨 뜻인가?”

나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향해 말했다.

“누가 그러더군요.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용가주님께 성녀님은 미인이십니까?”

내 질문에 그는 완전히 당황해서는 잠시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다시 질문했다.

“아니면 미인이 아니어서 이제껏 용기를 내지 않으셨던 겁니까?”

“무, 무슨! 그녀는….”

그는 입을 몇 번 달싹거렸지만 결국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마 내 말을 부정해 보려고 했다가 차마 내뱉지 못한 것 같았다.

이건 사실 과한 오지랖일 수도 있었다.

아무리 그의 그릇이 넓더라도 새까만 후배인 내가, 그것도 이제 막 알게 된 내가 하기엔 적당한 말이 아닐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내가 굳이 이런 얘기를 꺼낸 건 지난 생에서의 기억 때문이었다.

지난 생에서 저 두 사람은 내가 죽을 때까지도 이어지지 않았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 혼인을 한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감정은 굳이 묵랑 어르신께서 확인해 주시지 않아도 그저 잠깐 옆에서 지켜본 나도 충분히 눈치챌 수 있을 만큼 깊어 보였다.

그런데 그런 두 사람이 앞으로 거의 십 년이 지나도록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옆에서 지켜본바 그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너무 배려하는 저 거리감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나도 남녀 관계를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저 두 분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그런 내가 다 답답해질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게 내가 주제넘게 나서 보려는 이유였다.

“저는 용가주님께서 왜 망설이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녀님께서 망설이시는 이유는 충분히 알 것 같습니다. 성녀님께선 그저 웃는 표정을 지으시고도 제게 미안하단 말씀을 하시더군요. 자신의 외모에 대해 깊은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계시단 뜻이겠지요. 그러니 언감생심 용가주님에 대한 연심을 표현할 생각도 못 하고 계실 겁니다.”

그러자 용가주님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성녀께서… 내게 연심을 가지고 계시다고?! 그게 정말인가?! 아니, 그게 사실이라 해도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

나는 푹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하아, 원래 연심이란 것은 도저히 감출 수 없는 것인데 세상에서 오직 본인들만 모른다고 하더군요. 용가주님께서 성녀께 연심을 품고 계시단 사실은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는 멍한 표정으로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내 얘기 또한 거기서 끝내야만 했다.

성녀님께서 협곡의 잔해를 다 치우셨기 때문이었다.

나는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이렇게까지 얘기해 줬는데도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게 두 사람의 운명이란 걸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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