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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전선 비룡십삼대-268화 (268/359)

268화 빌려 쓴 이름의 무게-1

잠시 후, 성녀님께서 잔해를 모두 치워 주신 덕분에 우리는 결국 협곡 아래쪽에 매몰되어 있던 진태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쉽게 그를 발견했던 우리는 그의 상태를 보고 모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를 발견하기 전까지 사실 나는 그의 얼굴만 알아볼 수 있어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매몰되기 전부터 이미 큰 부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고, 그 후 엄청난 무게의 바위들에 깔려 있었기에 지금쯤은 아예 형태도 남지 않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잔해를 모두 치우고 발견한 그의 모습은 생각보다 너무 멀쩡한 상태였다.

아니, 멀쩡한 걸 넘어 아직도 살아 있었다.

나는 감탄한 나머지 헛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정말 대단한 생명력이로군. 존경스러울 정도야.”

그러자 그가 흐흐 웃으며 대꾸했다.

“흐흐흐흐, 내 앞에 떨어졌던 큰 바위 밑에 틈이 보이더군. 그래서 일단 그 밑으로 들어갔었지. 크흐흐흐. 바보 같은 짓이었어. 이 꼴이 될 줄 알았다면 그냥 들어가지 말았을 것을….”

그의 자조 섞인 말에 나는 차마 대꾸하지 못했다.

내 눈에 보이는 그의 허벅지 아랫부분은 모두 끔찍하게 으깨져 있는 상태였다.

그가 몸을 피했던 바위의 틈이 그리 크지 않았기에 떨어지는 바위들을 피할 수 있는 부분이 상체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살아서 마지막으로 보게 된 얼굴이 하필 네놈이라니…. 정말이지 내 생애 최악의 선택이었음에 틀림없다.”

그 말에도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그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으깨진 허벅지, 그리고 마경에게 당했던 어깨에서는 이제 피가 거의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죽어 가고 있었다.

그나마 천하삼십육성의 고수이기에 아직까지 죽지 않았을 뿐,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미 몇 번이나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가 잠시 침묵하다 문득 입을 열어 내게 물었다.

“그 아이는… 정말 살아 있나?”

그 아이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마도 윤삭의 여자에게서 태어난 놈의 핏줄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고개를 끄덕여 줬다.

“살아 있다.”

그러자 놈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멍청하군. 원수의 아들을 진짜로 살려 두다니.”

그렇게 말한 놈은 몇 번 입술을 딸싹거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기는 한데 차마 꺼내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놈에게 말했다.

“너의 진룡검법은 그 아이가 잇도록 해 주겠다. 혹시 그 아이에게 남길 말이 있거든 해라. 전해주겠다.”

그러자 그가 살짝 흐려진 눈으로 다시 비릿하게 웃음 지었다.

“…멍청한 놈.”

그러곤 잠시 허탈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할 말 따윈 없다. 그저… 네놈처럼 키워다오. 나 같은 실패자 말고… 인파랑, 네놈처럼.”

그의 목소리는 점점 기운 없이 작아지고 있었다.

그가 눈을 천천히 감으며 말했다.

“알고 있나? 해남파의 절반 이상은… 나를 따르던 자들이었다. 자기 이익만 보장되면…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지 않던 쓰레기들…. 너는… 앞으로 그런 놈들을 다스려야….”

힘겨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가던 그는 결국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마침내 그가 죽은 것이었다.

음모를 통해 해남파의 장문인 자리를 차지하고 남해의 패권마저 차지하려 했던 효웅, 남해마검 진태도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

그는 죽을 때까지도 내가 인파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몇 번 말을 해 줄까 했지만, 차마 죽어 가는 그에게 자신을 죽인 자가 사실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얘기를 해 줄 수는 없었다.

그는 분명 죽어 마땅한 자였지만….

어쩐지 그 사실만큼은 미안했다.

다시 한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

아무래도 다른 이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건 이번 인파랑을 마지막으로 해야 할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인 척하며 사람을 죽이는 게 꼭 살인의 무게를 남에게 전가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상대방의 목숨을 끊어야 한다면 그것만큼은 선우진의 이름으로 하고 싶었다.

그 책임을 지는 것도, 원한과 복수를 감당하는 것도 말이다.

***

해남파의 사람들이 찾아온 것은 남해성녀 시서우와 복건용가의 인원들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찾아온 사람들은 해남자가의 가주 자개추와 해남유가의 가주 유해응, 그리고 지난번에 만났던 해남인가와 해남사가의 무사들이었다.

선우진은 솔직히 조금 놀랐다.

그들이 찾아온 시기가 생각보다 너무 빨랐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진태도가 출발한 지 하루 이틀 만에 출발한 게 아닌가 싶었다.

“진태도가 해전 대원들을 모두 끌고 가 버리는 바람에 해남파에 남아 있는 놈의 추종자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 추종자들도 소주께서 주신 합산파와 백교방의 증거 자료들, 그리고 과거 놈의 악행들에 대해 듣자 바로 대항하는 것을 포기했고요. 지금은 일단 그들의 신병을 구속한 채 해남오가의 오익덕 가주님께서 그들을 감시하고 계십니다.”

해남인가 무사들의 우두머리인 현청군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해 준 말이었다.

일전에도 인파랑에 대한 깊은 충성심을 보였던 그는, 선우진이 무사한 모습을 보자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감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선우진은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씁쓸하게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진실을 밝힐 시간이 됐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와 인가의 무사들을 실망시켜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너무도 미안했다.

하지만 더 미룰 수는 없었다.

그들도 이제 진실을 알아야만 했으니까.

선우진은 유해응, 자개추, 현청군, 그리고 부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한 묘아란의 네 사람이 모여 있는 앞에서 등짐을 풀어 인파랑이 남긴 일지를 꺼냈다.

그러곤 그들에게 그것을 내밀며 말했다.

“이건 인파랑, 인 공자가 남긴 일지와 남십자검의 비급입니다.”

“…예?”

“……?”

선우진의 갑작스러운 말에 묘아란을 제외한 그들은 잠시 무슨 뜻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묘아란은 그들의 옆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선우진은 그들을 향해 깊이 포권하며 말했다.

“그간 여러분을 속인 것을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저는 인파랑이 아닙니다. 인파랑 공자의 마지막 유지를 이뤄 주기 위해 그를 연기하고 있었던 선우진이라고 합니다.”

“…예에?!”

“그, 그게 무슨?!”

그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선우진을 바라봤다.

선우진은 그런 그들에게 인파랑과의 만남과 그 후에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해남파의 사람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의 얘기를 경청했다.

“…그렇게 된 일입니다. 비록 인 공자의 유언을 이뤄 주기 위해 했던 일이라 해도, 여러분을 속인 일이나 해남파의 남십자검을 함부로 익힌 일이 합리화될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말을 마치고 다시 한번 깊이 포권한 선우진은 고개를 들어 그들의 표정을 바라봤다.

모두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멍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가장 충격이 커 보이는 사람은 당연히도 해남인가 무사들의 우두머리인 현청군이었다.

그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럼, 그럼 소주, 인 공자는….”

그의 눈에서 결국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간신히 찾았다고 생각한 주인이 사실은 가짜였고, 진짜 주인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이 그에게 너무도 큰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소주, 소주! 으흐흐흑!”

무너지듯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에 모두가 어두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선우진의 표정 또한 무척 어두워진 상태였다.

안쓰럽고, 또 미안했다.

그 후, 잠시 동안 다섯 명 사이엔 현청군의 울음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도 말을 꺼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자가의 가주 자개추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후우우우. 선우… 공자라고 하셨소? 먼저 감사 인사를 드리겠소. 공자 덕분에 십 년 전 일의 진상을 알게 되었고, 또한 그 일을 저지른 악적 진태도도 처단할 수 있었소.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남십자검과 백호검을 다시 찾게 된 것 또한 공자 덕분이고 말이오. 그러니 죄송하다는 말은 당치 않소. 오히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가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해남유가의 가주인 용왕지궁 유해응이 그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음?”

그 말을 들은 자개추가 의아한 눈빛으로 유해응을 바라봤다.

그러자 유해응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선우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황이 어찌 됐든 외인이 해남파의 무학을 함부로 익혔습니다. 그것도 과거 검왕께서 남기신 남십자검을 말입니다. 또한 그가 인파랑이 아니라면 진태도를 죽인 일 또한 문제가 됩니다. 진태도가 어떤 사람이었든 일단은 외인이 해남파의 장문인을 죽인 것이 되니까요. 그러니 어떤 은혜를 입었다 해도 이런 일들을 그냥 넘어가 줄 수는 없습니다.”

그의 말에 자개추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 그거야 그렇지만 유가주, 그 일을 그렇게 해석하기엔….”

유해응은 무거운 표정으로 선우진을 보며 물었다.

“공자께서 아까 우리에게 사과하신 것도 아마 거기에 생각이 미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오. 그렇지 않소?”

선우진은 잠시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유해응을 바라봤다.

처음 봤을 때부터 바위처럼 진중해 보였던 그의 얼굴은 지금 진짜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선우진은 그런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실제 그 부분을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해응은 사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되면 자파의 장문인이었던 진태도와도 대립할 수 있었던 남자였다.

그러니 단지 은혜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좋게 좋게 넘어가 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의 말은 표면적으로만 봤을 땐 분명 맞는 말이기도 했다.

외인이 타 문파의 무공을 함부로 익히는 것도, 장문인을 해하는 행위도 그 문파에서 척살령을 내려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때였다.

묘아란이 끼어들었다.

“유가주님의 말씀은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해도 선후 관계를 살폈을 땐 전혀 말이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남십자검은 선우 공자가 아니었다면 해남파에 돌아올 수도 없는 무공이었고, 진태도 또한 그의 악행이 밝혀졌다면 절대 장문인이 될 수 없었을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선우 공자가 나서 주지 않았고, 그래서 진태도가 자신의 뜻대로 행동했다면 과연 지금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저는 유가주님의 말씀이 억지라고 생각합니다.”

묘아란의 말에 유해응은 무거운 표정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음.”

그러자 자개추 또한 묘아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묘 소저의 말에 동감하오. 역시 신묘검봉, 핵심을 잘 정리해 주셨구려.”

선우진은 묘아란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 또한 묘아란이 말한 그 사실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이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당사자가 말하는 것과 해남파 사람이 말해 주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유해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묘 소저의 말씀은 물론 맞는 말이오. 또한 나 역시 선우 공자에게 무척 감사하고 있소. 하지만 해남파 최고의 무공이라고 할 수 있는 남십자검을 외인이 익히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큰 문제인 것 같소. 더구나 그것을 전수받을 수 있는 해남인가의 후손들이 이제 한 명도 남지 않은 상황이 아니오?”

그의 말에 자개추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유해응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해남파 최고의 무공이라 할 수 있는 남십자검을 외인인 선우진이 익히고 있는데 정작 해남파에는 이제 정당하게 그것을 계승할 사람이 마땅히 없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진태도의 악행을 밝혀내고 그를 참한 것이야 잘된 일이지만, 이번 일로 해남파가 입은 피해가 너무 컸다.

해남파는 현재 해남인가, 해남사가뿐 아니라 해남진가의 피도 끊어져 버린 상태였다.

진태도 이외의 다른 후계자가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진태도에게 동조했던 다른 가주들에게도 책임을 묻는다면 그들의 가문들 또한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최악의 경우, 이번 일이 다 정리되면 해남십이가 중 다섯 개의 가문만 남아버리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해남파를 위해 진태도에게 반기를 들었던 자개추로선 참담한 심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물론 진태도와 싸우게 될 경우 이런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긴 했었지만….’

얼마 전까진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설사 그런 피해를 입는다 하더라도 해남파의 진정한 후계자를 찾았으니 얻은 것이 더 많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그 생각이 착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야 말았다.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였다.

묘아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일에 대해 제가 생각한 해결책이 하나 있습니다.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 와중에 해결책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니 어떤 방법일지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묘아란은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선우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선우진은 그런 그녀의 눈빛이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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