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역천귀혼대법-2
해청연은 다시 그녀의 거처로 돌아왔다.
구유상이 부활한 뒤 혈마가 감격한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물렸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와 단둘이 대화를 나눠 보려는 모양이었다.
세상을 다 얻은 듯했던 혈마와 달리, 거처로 돌아온 해청연은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하고 연무장을 서성여야만 했다.
늘 차분히 자신의 할 일만을 해 왔던 그녀가 좀처럼 보여 주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녀는 지금 매우 당황하고 조급해진 상태였다.
‘그게,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게 진짜 가능한 일이었어. 어쩌지? 어쩌면 좋지?’
비록 혈교의 중심부에 갇혀 있었지만 그간 그녀는 약간의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죽은 사람을 되살렸다는 혈교의 전설이 그저 전설에 불과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견문이 넓은 아버지 검성의 지식과 그녀가 수없이 해 온 독서.
그것들을 통해 세상 곳곳에 숨은 기인은 물론 온갖 기이한 영수와 영초에 대해서 들어 봤던 그녀였지만, 이제껏 단 한 번도 죽은 사람이 되살아났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은 없었다.
그건 불가능한 얘기였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일이 불가능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는 건 역천혈마를 되살렸다는 전설 또한 사실이라는 얘기였다.
‘역대 최악의 혈마라는 역천혈마가 되살아난다. 그것도 내 몸을 이용해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진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차라리 지금 자결해 버리는 것이 현명한 일일 수도 있었다.
해청연은 거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
‘자결을 할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내키지 않았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지금 너무 성급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해청연의 계획은 최대한 빨리 무위를 높여 이곳을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최선을 다해 수련에 매진해 왔었다.
혈교의 무공들을 익히고 사람의 피까지 빨면서 말이다.
그런 자신의 성장 속도가 엄청나다는 건 그녀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구유음마의 눈을 속이고 탈출할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까지도 기다릴 수 없을 것 같다는 거지.’
혈마는 대법에 필요한 재료를 제갈지강이 구해 올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해청연이 아는 제갈지강의 영향력이라면 그것들을 구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할 리가 없었다.
본인이 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만약 발 벗고 나서게 된다면 무림맹의 군사인 그가 천하에 구하지 못할 것들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시간이 결코 많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런 사실들을 종합해 봤을 때 해청연의 결론은 결국 한 가지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탈출해야 해. 최대한 빨리.’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
해청연이 마침내 탈출의 기회가 왔다고 느낀 순간은 의외로 그 끔찍한 대법으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늘 그녀의 주변을 따라다녔던 감시의 눈길이 갑자기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구유음마 지기음의 부하들이 아닌 지기음 자신이 주변에 와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해청연은 언제 그가 자신을 직접 감시하는지 이미 파악한 후였다.
‘혈마가 다시 밖으로 나갔구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얼마 전 되살아난 구유상이라는 자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제갈지강으로부터 ‘재료’를 받아 와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만약 후자의 이유라면 아마도 이번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후우우.”
해청연은 심호흡을 하며 다시 정신을 집중해 봤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감각에 지기음의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그녀의 실력으론 지기음을 잡아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음에도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역시 이렇게 짧은 시간 만에 천하삼십육성의 성취를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해청연은 그 모든 감정들을 겉으론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검을 들고는 연무장으로 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기수식을 펼쳤다.
성라검법이 아닌 혈뢰검결의 기수식이었다.
파지지직!
그녀의 검에서 자홍색 뇌기가 파직거리기 시작했다.
지난번 초웅삼마를 참했을 때보다 훨씬 더 거세진 뇌기가 그녀의 빠른 발전 속도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해청연은 잠시 그 상태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그녀의 뇌기만이 파직거리며 계속해서 주변 대기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한순간이었다.
무표정했던 해청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웁!”
그녀가 움직인 것은 오른손에 든 검이 아니었다.
비어 있는 왼손이었다.
화아악!
불길한 붉은 강기가 해청연의 왼손을 뒤덮고, 잠시 힘을 집중했던 해청연은 갑작스럽게 휙 뒤돌아 그것을 뻗어냈다.
그러자 용 모양의 붉은 강기가 세 방향으로 쏘아져 나갔다.
구천혈룡마공이었다.
크롸라라라라라!
엄청난 속도로 세 방향을 향해 쏘아졌던 강기는 순식간에 곡선을 그리며 방향을 바꿔 한 곳을 향해 짓쳐 들었다.
바로 구유음마 지기음이 은신해 있던 곳이었다.
그녀는 방금 전 지기음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기척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주변에 흩뿌린 뇌기로 지기음의 위치를 알아냈던 것이었다.
그간 한참을 고민해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
지기음은 경악했다.
그녀가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잡아내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을 향해 짓쳐 들고 있는 혈룡들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였다.
완벽한 은신을 위해서는 신체 능력도 거의 정지시켜야 하는 법, 지기음은 은신 중인 지금 자신의 상태론 저것들을 완벽히 막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피해야만 했다.
파박!
지기음이 은신을 풀고 황급히 몸을 날렸다.
그러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혈룡들이 한순간 방향을 바꿔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역시 혈교 최강의 무공,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지기음은 이번엔 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은신을 풀고 몸 상태를 되돌렸기에 이젠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흐읍!’
마음속으로 기합을 내지른 지기음이 앞으로 힘차게 손을 뻗어 냈다.
그러자 그의 손 밖으로 거대한 방패와도 같은 붉은 강기의 막이 방출됐다.
화아악!
호신강기였다.
다음 순간, 세 마리의 혈룡이 울부짖으며 호신강기를 들이받았다.
크롸롸롸라라라라!
콰아아아아아앙!
“크윽!”
엄청난 충격이었다.
지기음은 뒤로 정신없이 밀려나며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몇십 년 만에 내뱉는 신음 소리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화아아아악!
갑자기 찬란한 빛무리가 지기음의 눈앞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의 은하수가 눈앞까지 다가온 듯 화려한 빛무리였다.
‘저건?!’
지기음은 전에도 이런 광경을 한번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바로 검성과 혈마가 싸웠을 때였다.
해청연이 지금 펼친 검초는 성라검법의 십팔 초인 은하서천이었다.
검성의 성라검법 중 최강을 자랑하는 절초가 딸인 그녀의 손에서 펼쳐진 것이었다.
푸른 검강의 빛무리들이 미처 방비하지 못한 지기음의 몸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
구천혈룡마공을 막느라 미처 다음 대비를 하지 못했던 지기음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은하서천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를 보며 해청연은 성공을 확신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최강의 수법들을 조합해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인 지기음을 정말 잡아낸 것이었다.
‘됐다!’
사실 지금 그녀의 능력으로 성라검법 최강의 절초인 은하서천을 펼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니 지금 이 초식을 펼칠 수 있었던 건 몸을 망가뜨려서라도 한계 이상으로 잠력을 격발시킬 수 있는 혈교의 무공 덕분이었다.
해청연은 지기음을 처리하고 바로 점창산을 빠져나갈 생각을 했다.
몸 상태가 매우 안 좋겠지만 그것을 추스를 시간 따위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그녀의 영민한 머리가 이후의 계획을 떠올리고 있던 순간이었다.
슈아아아앙!
어디선가 날아온 거대한 강환이 지기음의 앞에서 은하서천과 충돌했다.
콰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그 엄청난 반발력에 해청연은 뒤로 튕겨 나갈 수밖에 없었다.
“으윽?!”
그리고 간신히 땅에 착지해 뒤로 밀려나는 것을 멈춘 해청연의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훌륭하오. 역시 대단한 재능이구려.”
그 순간 해청연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대견하다는 듯 부드럽게 그녀를 칭찬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혈마였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멍하니 바라본 허공에서 혈마가 천천히 날아 내리고 있었다.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해청연의 머리는 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빠르게 회전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함정이었구나.’
혈마는 외출하지 않았었다.
자신의 행동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지기음을 붙였던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이전부터 혈마가 외출할 때마다 지기음이 자신을 담당하게 한 것도 지금 이 순간을 노린 것이었다는 뜻이었다.
얼마 전 일부러 대법을 보여 줘 역천혈마를 빙의시키는 게 가능하다는 걸 보여 준 것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고 말이다.
이 모든 게 자신을 조급하게 만들기 위한 함정이었던 것이다.
‘이런 단순한 함정에 빠지다니….’
해청연은 혈마의 함정을 간파하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함과 동시에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아무리 구석에 몰렸다 해도 자신이 이런 함정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급해하고 있었다니.
너무도 이상했다.
‘설마….’
잠시 후 그 이유를 깨달은 해청연은 탄식하듯 혈마에게 물었다.
“…내게 암시를 걸었군요. 조급해지도록.”
그러지 않고선 지금 이 상황이 설명될 수 없었다.
혈마는 그때 자신에게 대법을 보여 주며 동시에 조급해지도록 암시도 걸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도출한 결론에 혈마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가는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역시 해 소저는 지혜롭구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해청연은 번개처럼 검을 찔렀다.
하지만 그 목표는 혈마가 아니었다.
바로 그녀 자신의 가슴을 향해서였다.
해청연은 죽기로 결심했다.
이제 모든 희망이 사라진 이상 자결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역천혈마가 자신에게 빙의되어 되살아난다면 천하에 큰 해악이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성공할 수 없었다.
“!”
해청연은 무언가에 붙잡힌 듯 꼼짝도 하지 않는 자신의 검과 그저 편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혈마를 바라봤다.
혈마는 그저 허공으로 손을 뻗었을 뿐인데 자신은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의 무형지기가 온몸을 꽁꽁 묶어 버린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수준 차이였다.
그러자 혈마는 천천히 다가와 온 힘을 다하고 있는 해청연의 혈도를 간단히 짚었다.
투둑!
해청연은 절망했다.
모든 일이 끝나 버린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이 이토록 허무하게 끝났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암시는… 이번에만 걸린 게 아니었어.’
아마 처음 자신을 만났을 때부터였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자신에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놔둔 것도 그 때문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아마 그때 그가 자신에게 건 암시는 ‘희망’이었을 것이고 말이다.
‘…완전히 당했구나.’
절망스러웠다.
혈마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지기음이 소저의 성장에 대해 말했을 때는 솔직히 믿지 않았다오. 아무리 그래도 이 짧은 시간에 그렇게까지 성장하는 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지기음이 본 것조차도 삼 할을 감춘 것이었구려. 대단하오. 역시 역천혈마의 그릇이 될 만한 자격이 있소.”
역천혈마의 그릇.
해청연은 머리카락 아래에 감춰진 눈을 질끈 감았다.
혈마에게 자신은 처음부터 그런 존재일 뿐이었던 것이다.
혈마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소저의 자유를 구속해야 하겠구려. 이 모든 건 소저의 성장이 너무 빨랐기 때문이니 부디 원망치 마시오.”
마치 정파의 대협처럼 인자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혈마는 문득 손을 뻗어 해청연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예전부터 앞머리에 감춰진 그녀의 눈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의 손을 따라 그녀의 오뚝한 코와 별빛 같은 눈동자, 볼록한 이마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녀의 보석처럼 빛나는 검고 푸른 눈동자를 본 순간, 혈마는 그대로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
그녀의 양쪽 눈동자 색이 다르다는 건 혈마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직접 그걸 보는 느낌은 말로 전해 듣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아름다웠다.
아니, 신비로웠다.
요사스러움이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미(美)가 마력과도 같은 매력을 흩뿌리고 있었다.
혈마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저 해청연의 눈에 맺힌 광기를 확인해 보고 싶어 보게 된 그녀의 맨얼굴에, 이미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맹렬하게 들끓어 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탐욕이었다.
혈마는 탐심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해청연의 볼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 끔찍한 느낌에 해청연은 진저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