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절강성-2
선우진 일행은 절강성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북상했다.
목표는 절강성의 중부 지방에 위치한 거대한 산 안탕산이었다.
다만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육합검수들과 따로 움직였기에 그들과 심혼이 소통할 수 있는 거리 안에서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적당히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던 일행들은 계속해서 지나가는 절강성의 무인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맞은편에서 길을 따라 대도를 든 무인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무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 있다면 언제일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무인들은 낯선 무인과 길에서 마주치는 순간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심지어 나보다 강자인지 하수인지조차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대와 길에서 마주치는 그 순간.
무인들의 신경은 가장 뾰족하게 곤두설 수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절강성의 무인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무인은 선우진의 일행들을 보더니만 반갑게 웃으며 포권했다.
“무운을.”
그의 인사에 선우진 일행들 또한 어색하게 포권하며 화답해 줬다.
“무운을.”
그러자 그렇게 인사를 마친 무인은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가던 길로 걸어가 버렸다.
아무런 용무도 없건만 단지 일행들이 무인이기 때문에 반갑게 한 인사였던 모양이었다.
진소은이 그의 뒷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신기해라. 신지 절강성의 분위기는 확실히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그러자 처음엔 경계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던 증칠이나 연태진도 멀어지는 무인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무인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 절강성에 들어온 후부터는 길에서 무인을 만날 때마다 계속해서 이런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전혀 안면도 없는 무인들의 이유를 알 수 없는 호의 가득한 미소와 인사.
마주치는 무인들이 서로를 경계하지 않고 저렇게 인사를 하는 것도, 한발 더 나아가 이유 없이 호의 가득한 미소를 보이는 것도 다른 지역에서는 전혀 겪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선우진은 진소은의 말에 동의하며 말을 더했다.
“게다가 그저 친절하기만 한 게 아니라 한 명 한 명에게 뭔가 자부심과 확신 같은 것이 느껴지는군요. 신지 절강성의 무인이라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는 모양입니다.”
선우진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다들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정파의 성지인 신지 절강성의 분위기는 이렇듯 일행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고 있었다.
여정은 순조로웠다.
딱히 빠르게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사고가 생길 일도 없었고 만나는 모든 이들이 친절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안탕산 기슭까지 아무런 사건 사고도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선우진은 정상이 구름으로 덮여 있는 거대한 산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드디어 도착했군요.”
그러자 마음속에서 묵랑이 대답했다.
- 그래. 정말 이곳에 다시 오고 말았군.
짙은 감회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선우진이 문득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본가가 있는 온주가 아닌 이곳 안탕산에 굳이 진신절기를 남기신 이유가 있습니까?’
그의 질문에 묵랑이 대답했다.
- 있지. 이곳은 우리 선조께서 후인들을 위한 안배를 남겨 놓으셨던 곳이라네.
묵랑의 말에 따르면 그가 어렸을 때 그의 가문도 비전절기를 잃어버리고는 그저 그런 삼류 문파로 전락한 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 과거 세상을 호령했던 가문의 검법도, 비전 내공 심법도 없었지. 그저 기초 무공 몇 가지와 기초 심법만 남아 있었다네. 그래서 절강성은커녕 절강성의 촌구석인 온주에서도 그리 대단치 않은 위치였었는데….
그랬던 가문을 검신의 친형님인 뇌신이 밑바닥에서부터 부활시켰던 것이었다.
이곳 안탕산에 숨겨져 있던 가문의 비전절기 또한 그가 되찾았었고 말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당시 검신의 가문에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묵랑이 그의 형님을 떠올리며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세인들이 형님과 나 두 사람 중 누가 더 위대한 무인인지로 언쟁을 벌이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군. 하지만 사실 그건 전혀 비교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라네. 형님께서 죽어 가던 나무를 되살려 주셨다면 나는 그저 그 나무에 열린 과실을 따 먹었을 뿐이니 말일세. 나라는 존재 자체가 형님께서 이루신 업적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으니 누가 더 훌륭한 무인인지는 굳이 따질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니겠나.
선우진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묵랑은 이렇듯 그의 형인 뇌신의 이야기를 할 때면 늘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낮추곤 했었다.
그래서 그때마다 궁금해지곤 했다.
고금제일인이라는 검신이 이렇게 절대적인 존경을 보내는 그의 형 뇌신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지….
문득 무황총의 환영에서 봤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자다운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던 그의 표정이 아직도 선우진의 뇌리에 깊게 남아 있었다.
***
잠시 후, 일행들은 근처의 객잔에서 대충 식사를 하고는 안탕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길은 넓고 편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 그것도 대부분 무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마치 번화한 거리를 오가듯 산길을 수없이 오가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들은 서로를 전혀 경계하지 않는지 무방비 상태의 지근거리에서 서로를 스쳐 지나가고 있기도 했다.
여기저기 영업 중인 객잔들과 넓은 산길, 그곳을 오가는 많은 무인들, 외딴 산지여야 할 안탕산 주변은 이렇듯 예상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일행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원달기 연태진이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무슨 산구석이 하원의 번화가보다도 무인들이 많아 보인데? 이게 다 검제 때문인가?”
그녀의 말에 선우진이 대답했다.
“아마 그런 것 같군요. 검제님을 추종하는 무인들이 안탕산 주변에 잔뜩 모여들어 도시를 만들 정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분명히 과장된 소문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 정도면 전혀 과장이 아니었군요.”
일행들은 산길을 걷는 내내 그곳을 지나다니는 무인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정파인으로 보였고 모두가 친절한 미소로 포권하며 일행들에게 인사를 보내곤 했다.
가끔 흑표 삭월과 연태진에게 눈길을 주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저 흥미 어린 시선이었을 뿐 아무도 시비를 거는 이는 없었다.
진소은이 문득 감탄하며 말했다.
“이런 곳이 진짜 존재할 수 있는 거였군요. 저도 본가로 돌아가면 꼭 광동성을 이런 곳으로 만들고 싶어요. 무인들이 서로를 경계하지 않고 웃으며 생활할 수 있는 곳으로요.”
그녀의 말에 증칠과 설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일행 대부분은 이곳의 분위기에 감탄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이 광경은 절강성에 들어오면서부터 느꼈던 분위기의 연장이긴 했다.
하지만 어쩌다 한두 명이 아닌 이렇게 많은 무인들이 오가고 있는데도 이 분위기가 유지된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인이란 작자들은 원래 타인을 보는 순간 상대방을 어떻게 쓰러뜨릴지부터 고민하는 족속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다른 무인이란 현재의 적수이거나, 아니면 앞으로 적수가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본능적으로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 무인들이 이렇게 서로 아무런 경계심도 보이지 않고 평화롭게 지낸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일임에 틀림없었다.
설풍이 탄식하듯 말했다.
“이게 가능하다는 건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서로 적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의 말에 선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신지 절강성에서, 그것도 검제 어르신의 영역에서 상대가 무도한 짓을 할 리 없다는 믿음인 것 같습니다. 천하제일인의 영향력이란 정말 놀랍군요.”
그러자 연태진이 불퉁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런 맹목적인 믿음으로 상대를 경계하지 않는다는 건 너무 무모한 거 아닌가? 무인들이 자신이 아닌 남을 신뢰해 경계심을 버리다니 말이야. 저 중에 단 한 명이라도 나쁜 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이 있다면? 그래서 그들이 저렇게 무방비한 자들을 노려 습격한다면? 원래 모든 규칙은 그것을 깨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무용해지기 마련이잖아? 난 너무 허술해 보이는 것 같아 좀 그런데?”
역시 사파인인 연태진에게는 이런 분위기가 그리 좋게 보이지만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감정적인 부분을 떠나서도 그녀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는 얘기였다.
타인을 신뢰한다는 게 아름다운 이유는 그게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타인이란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존재이고 그렇기에 그런 존재를 신뢰할 때는 그가 내 상식과 다를 수 있다는, 더 나아가 배신당할 수 있다는 위험 또한 염두에 둬야만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위험 부담을 모두 검제라는 외부의 존재에 대한 믿음으로 무시해 버린다면 그건 분명히 매우 위험하고 또 바보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묵랑이 문득 입을 열었다.
- 사실 이런 분위기를 만들기 시작한 사람은 나와 형님이라네. 우리는 일반 백성들이 무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그가 누구든 상대를 존중해야 한다는 상식이 살아 있는 곳을 만들고 싶었지. 그런데 지금은 거기서 더 나아가 무인끼리도 서로를 두려워하지 않는 지역이 되어 버린 모양이로군.
그 말을 들은 선우진은 그에게 물었다.
‘뿌듯하시겠습니다. 두 분께서 만드신 문화가 백 년의 시간을 넘어 전통으로 발전했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러자 묵랑이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글쎄. 잘 모르겠군. 그때 형님과 내가 했던 얘기가 있다네. 만약 늘 평화로운 세상에 햇빛과 물만 있어도 살 수 있는 동물들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얘기였지. 마치 식물들처럼 말일세. 그런 동물들이 실제로 있다면 그것들은 영원토록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식물처럼 자기 스스로 영양을 보충해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이라….
선우진은 그런 동물의 모습에 대해 문득 상상해 봤다.
묵랑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만약 그런 동물이 있다면 그 동물은 굳이 다른 곳으로 움직일 필요가 없을 것일세. 가만히 있어도 살아가는 데 전혀 지장이 없을 테니까 말일세. 눈코입도 굳이 필요 없을지도 모르지. 천적도 없고 먹이를 찾을 필요도 없는 그들에게 그런 게 왜 필요하겠나? 어쩌면 그냥 물 위에 둥둥 떠 있기만 할지도 모르네.
선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탄식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들은 먹고 살기 위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던가.
만약 그것을 할 필요가 없다면 묵랑의 말대로 감각도, 운동도, 소통도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
묵랑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그런데 말일세. 만약 그렇게 살고 있던 동물들이 다른 육식 동물들을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아!’
그 말을 들은 순간 선우진의 머릿속엔 오직 한 단어만이 떠올랐다.
바로 ‘멸종’이라는 단어였다.
- 형님과 나는 우리가 만든 세상이 혹시 그런 자들이 사는 곳이 되는 건 아닐까 무척 경계했다네. 똑같이 인의가 상식이 되는 세상이라 해도 스스로가 만들어 낸 세상과 남이 만들어 준 세상은 전혀 다를 것이기 때문이었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인의를 강조하는 동시에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힘 또한 강조했었지. 그런데….
묵랑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선우진은 묵랑의 다음 말이 무엇인지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눈앞에서 아무 경계심 없이 지나다니는 무인들 중에선 아무리 잘 쳐줘도 일류 이상의 무인들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런 곳을 혈교의 마두 몇 명이 습격한다면 순식간에 초토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설사 검제의 추종자들이 도와주러 온다 해도 그 전에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죽은 후일 것이고 말이다.
어쩐지 복잡한 기분이었다.
얼마 전까지 지상 낙원이라고 생각했던 이곳이 갑자기 사상누각으로 보이는 기분이었다.
선우진이 문득 떠오른 의문을 묵랑에게 물었다.
‘검제는 이런 사실을 모르는 걸까요?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우리도 파악한 사실을 말입니다.’
- 글쎄….
일행들은 이제 묵묵히 산길을 올라 검제가 머물고 있는 곳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
검제가 머물고 있는 곳은 산 중턱의 장원이었다.
천하제일인이 머물고 있는 곳치곤 크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산 중턱의 좁은 공간을 한계까지 꽉꽉 채워 만든 장원은 웬만한 중급 문파 정도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곳을 본 묵랑이 살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 여기를 이렇게 만들어 놨군. 원래는 작은 암자 하나만 있던 곳이었는데 말일세.
묵랑의 말에 따르면 이곳엔 원래 작은 암자가 하나 있었고, 그 암자 뒤에는 은밀하게 숨겨진 동굴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묵랑은 그 동굴 속에 자신의 진신절기를 남겨 놨다고 했다.
그러니 그 앞에 저런 장원을 만들어 놓은 이상, 검신의 진신절기를 찾으려면 이제 저 장원의 심처까지 들어가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선우진 일행은 정문의 수문 무사에게 가서 방문을 신청했다.
“검제님을 뵙고 싶어 왔습니다.”
그러자 조장 수문 무사가 정중히 물었다.
“그러시군요. 혹시 약속이 되어 있으십니까?”
그의 물음에 선우진은 묵랑검을 보여 주며 대답했다.
“그렇진 않습니다. 하지만 묵랑검의 주인이 왔다고 말씀드리면 검제께서도 만남을 거절하시진 않을 것입니다.”
조장 무사를 비롯한 수문 무사들은 선우진의 묵랑검을 보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검제의 혈랑검과 똑같이 생긴 검을 봤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조장 무사가 검을 들고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즉시 안에다 전달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말을 마친 조장 무사는 바로 안쪽으로 날아가듯 뛰어 들어갔다.
흠잡을 데라곤 하나도 없는 무척이나 성실한 태도였다.
문득 묵랑이 물었다.
- 묵랑검을 너무 쉽게 공개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검제가 나쁜 마음을 먹을 수도 있지 않나?
‘…전에 말씀드렸듯 저는 검제는 믿지 않지만 검제와 함께 있을 어르신은 믿고 있습니다. 혈랑검의 봉인을 푼 그라면 사심을 품고 저를 해하지는 않을 거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는 선우진에게도 마유겸 때만큼의 확신은 없었다.
아마도 검제의 명성에 기대 경계심을 버린 안탕산 부근의 무인들을 봤기 때문인 것 같았다.
직접 검제를 보지 않고 과거의 그가 혈랑검의 봉인을 풀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믿을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선우진 일행은 바로 밖으로 나온 총관에 의해 안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귀한 손님들을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전혀 오래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로 검제 어르신께 가는 것입니까?”
모든 일이 너무나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현 천하제일인이라는 검제를 이렇게 쉽게 만나게 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선우진은 총관이 한 대답에 ‘역시’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총관이 이렇게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검제 어르신께선 지금 폐관 수련 중이십니다. 그래서 귀한 손님분들은 어르신의 둘째 아드님이신 적랑검협 반대하 공자께서 접대하고 계십니다.”
“폐관… 수련 중이시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선우진으로선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폐관 중이라면 억지로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묵랑이 말했다.
- 검제가 폐관을 하고 있다면 그 장소는 아마도 그곳이겠군.
‘그렇겠지요?’
게다가 검제가 폐관 수련을 하고 있는 장소는 분명 검신의 유진이 숨겨진 곳일 터였다.
그러니 몰래 그곳으로 숨어 들어갈 수도 없다는 얘기였다.
선우진이 다시 총관에게 물었다.
“검제 어르신께서 언제 폐관에서 나오실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총관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제가 감히 대답하기 힘든 얘기인 것 같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이 공자를 만나서 들으시지요.”
그의 태도는 정중했지만 동시에 철벽같았다.
선우진들에게 아무 말도 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선우진이 난감함을 느끼는 가운데 일행들은 접객실로 안내됐다.
그곳에는 삼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귀공자 한 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로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반대하라고 합니다. 혈랑검의 형제 검을 지니신 분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는 오만까지는 아니어도 무척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였다.
눈빛 하나, 말 한마디에서도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흘러넘치고 있는 것 같았다.
또한 그는 처음 인사를 하고 난 이후부터는 노골적으로 묵랑검을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정말 색만 다를 뿐 혈랑검과 완전히 똑같이 생겼군요. 형태도 재질도 완전히 동일합니다. 신기하군요.”
선우진은 문득 반대하의 허리에 찬 검을 바라보았다.
그 검 또한 묵랑검과 비슷해 보이는 외양을 한 붉은색의 검이었다.
아마도 노골적으로 혈랑검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문득 그의 별호가 적랑검협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아버지인 검제의 뒤를 잇고 싶은 모양이었다.
선우진이 빙긋이 웃으며 그의 말에 대꾸했다.
“같은 사람이 만든 검이니까요. 혹시 검제 어르신께 이 묵랑검에 대한 얘기를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반대하가 묵랑검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기 위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묵랑검이라…. 형제 검이 있을 거라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흠, 그렇군요.”
선우진은 다시 한번 난감함을 느껴야 했다.
그가 묵랑검의 비밀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검제를 만나야 하는 이유도 설명하기가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저희는 검제 어르신을 뵈러 왔습니다. 혹시 어르신께서 언제 폐관을 마치고 나오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반대하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아버님께선 기간을 정해 놓고 폐관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언제라고 말씀드리기가 좀 그렇군요. 그리고… 폐관을 마치신다 해도 여러분을 만나려 하실지도 장담할 수 없고 말입니다.”
묘한 말이었다.
폐관과 상관없이 검제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 이제껏 보여 준 정중한 태도와는 상반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말에 선우진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말씀은…?”
그러자 반대하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님께선 천하제일인이십니다. 아무리 혈랑검의 형제 검을 가지셨다 해도 고작 그런 이유로 천하제일인을 쉽게 만나 뵐 수야 있겠습니까? 아, 혹시 그 검을 아버님께 선물하시려는 겁니까?”
묵랑검을 선물한다면 혹시 만날 수도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의 말에 일행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말이 좋아 선물이지 무인의 생명인 검을 바칠 거냐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선우진은 기분이 표정에 드러나지 않도록 관리하며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검제님께 혈랑검이 소중하듯 제게도 묵랑검이 소중하니까요. 그리고… 제 생각엔 묵랑검의 얘기를 들으신다면 검제께선 분명히 지금이라도 저를 보자고 하실 것 같습니다만.”
그러자 반대하가 다시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가요? 뭐, 일단 폐관을 마치시면 말씀은 드려 보겠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불가능한 얘기로군요.”
그렇게 말한 반대하는 빙긋이 웃는 얼굴로 선우진을 바라봤다.
다른 용건이 또 있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선우진은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음을 인정했다.
지금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검제의 아들과 세력에게 시비를 걸 생각이 없는 이상 여기서 소란을 피울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들에게 시비를 걸게 된다면 절강성에 있는 모든 무인들의 적이 되어 버릴지도 몰랐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쩔 수 없군요. 그럼 다음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반대하 역시 기다렸다는 듯 포권하며 말했다.
“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부디 살펴 가시길.”
아무런 소득도 없이 접객실에서 나오며 선우진은 검신의 진신절기를 찾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까지는 그것을 익히는 어려움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난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접객실에서 나올 때였다.
묵랑이 그에게 말했다.
- 저자, 아까 거짓말을 했네.
‘예? 검제가 폐관 중이라는 말이 거짓이란 말입니까?’
- 아니, 그건 사실이네. 다만 저자가 묵랑검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한 말은 거짓이었네. 저자는 아무래도 묵랑검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더군.
묵랑의 말에 선우진의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묵랑의 말대로라면 저 반대하라는 자는 묵랑검의 비밀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 의도가 결코 좋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비밀을 알고 있기에 더 만나게 해 주지 않으려고 한 건지도 몰랐다.
선우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묵랑검을 공개한 건 확실히 성급한 일이었군요. 검제는 그렇다 쳐도 그 주변인들이 어떤 사람일지는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말입니다.’
- 그렇군. 난감한 상황이야.
***
반대하는 선우진 일행이 접객실에서 나가자 얼굴에 짓고 있던 웃음을 싹 지웠다.
그리고 총관을 불러 말했다.
“저 선우진이란 자에 대해 샅샅이 조사해 주게.”
“알겠습니다.”
총관이 그의 명령을 듣고 접객실을 나가자 반대하는 다시 선우진 일행이 나간 문 쪽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 가득 차 있는 감정은 바로 적의와 탐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