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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전선 비룡십삼대-274화 (274/359)

274화 설풍

“이렇게 된 이상 강소성으로 먼저 갑시다.”

안탕산에 위치한 검제의 거처에서 나온 후 선우진이 일행들에게 한 말이었다.

그러자 설풍이 물었다.

“검제 어르신을 만나지 않고 그냥 가도 되겠나? 자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어차피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으니까요. 다행히 강소성이 절강성의 바로 북쪽이니 다시 돌아올 때를 노려 보도록 하지요.”

빙긋이 웃으며 그렇게 말한 선우진은 심안으로 주변을 살피며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는 이렇게 드러난 채가 아닌 숨어서 들어가 봐야만 할 것 같군요.’

선우진은 심안으로 감지되는 누군가의 존재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검제의 거처에서 나온 후부터 은신한 누군가가 자신들을 따라붙은 상태였다.

은신술의 경지를 봤을 때 초일류 살수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은 자.

선우진은 심안으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생각했다.

‘아마도 검제의 둘째 아들, 반대하의 짓이겠지.’

상황과 시기를 봤을 때 다른 자의 짓일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 또한 선할 리가 없었고 말이다.

선우진이 탄식하며 묵랑에게 말했다.

‘역시 아버지가 협객이라고 그 아들도 협객이라는 법은 없나 봅니다. 안타까운 일이로군요.’

그러자 묵랑이 대꾸했다.

- 그 아버지도 여전히 협객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네. 그를 너무 믿지 말게나.

묵랑의 말에 선우진의 표정이 순간 심각해졌다.

묵랑의 말은 현 무림의 최강자인 혈랑검제가 더 이상 협객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경고에 선우진이 물었다.

‘…그가 어르신께서 선택하신 사람인데도 말입니까?’

그러자 묵랑이 다시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 사람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리고 변화의 방향은 항상 좋은 쪽보다 나쁜 쪽인 경우가 훨씬 더 쉽다네.

‘…….’

그의 말에 선우진은 고민에 잠겼다.

만약 현 무림의 최강자인 혈랑검제가 정말 더 이상 협객이 아니게 된 거라면, 또는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만약 그가 검신의 유진을 혼자 독차지하려고 한다면 그건 심각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방해를 뚫고 검신의 유진을 찾는 일이란 너무도 지난한 일이 될 테니까 말이다.

‘만약 진짜 그렇게 된다면 혈마보다 더욱 무서운 적을 갖게 되는 건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선우진은 곧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 냈다.

지금 그런 고민을 해 봐야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지금은 먼저 지금 할 수 있는 일들부터 정리해야만 했다.

선우진은 주변에 은신한 채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육합검수 파천조원들에게 마음속으로 의지를 보냈다.

반대하가 보냈을 추적자들을 잡아 오라는 의지였다.

***

이틀 후, 선우진 일행은 절강성의 북쪽에 위치한 강소성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천마신교, 무림맹과 함께 무림삼대 세력 중 하나인 사왕련이 위치한 바로 그 강소성이었다.

일행들은 저 멀리 강소성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도시 소주의 성벽을 바라보며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태호의 아름다운 풍광과 더불어 천하에서 가장 번화한 유흥가라는 소주에 도착한 것이었다.

일행 중 설풍이 문득 그곳을 바라보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

그러자 선우진이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마음이 좀 복잡하십니까, 형님?”

그의 물음에 설풍이 피식 웃었다.

“솔직히 그렇다네. 이제 마음을 다잡았다고 큰소리를 쳐 놓고는…. 아우 보기가 좀 민망하군.”

조금 씁쓸하게 느껴지는 그의 말에 선우진은 따뜻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잘 해내실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단지 그를 위로하기 위해 한 빈말만은 아니었다.

지난 삶에서도 설풍은 강소성으로 갔었고, 그땐 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인정받았었다는 걸 소문으로 들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를 도와줄 자신들까지 함께한 지금 절대 실패할 리가 없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하원달기 연태진이 인상을 팍 찡그리며 끼어들었다.

“풍의 개인사라니 이제껏 잠자코 있긴 했는데 말이야.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말 좀 해 주면 안 될까? 나는 모르는데 둘만 알고 있는 비밀이라니 질투 나거든? 게다가 풍과 관련된 곳이라며 하필 강소성에 오다니, 설마 풍이 사왕련과 관계가 있었던 거야?”

그녀의 말에 다른 이들 또한 설풍을 슬쩍 바라봤다.

모두들 차마 묻지 못했을 뿐 설풍의 사연이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선우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설풍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선우진 또한 설풍의 모든 상황은 알지 못하지만 그가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면 먼저 재촉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자 잠시 태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멍하니 바라보던 설풍이 천천히 입을 열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꺼낸 담담한 첫마디에 모두의 눈은 튀어나올 듯 크게 확대되고 말았다.

그가 고백한 사실이 모두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초대 사왕 괴자운의 후손입니다. 또한 전대 사왕 설모수의 손자이기도 하지요.”

“!”

“!”

사왕.

천마신교, 무림맹과 더불어 천하 삼 대 세력의 하나인 사왕련의 련주이자 열다섯 명의 절대자 중 협왕과 더불어 천하이왕에 꼽히는 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게다가 당금의 협왕 모용검의 실력은 과대평가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실질적으로 현 사왕 괴갈현이 검제에 이은 천하제이인자라고 해도 무방한 상황, 설풍은 지금 자신이 그런 사왕의 일족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에엑?! 설 아우가 사왕의 일족이라고?!”

“역시! 나와 같은 사파일 줄 알았다니까? 그냥 사파인도 아니고 사파 중에서도 완전 귀족이잖아?!”

“우와! 사왕이라니, 그래서 설 공자가 그렇게 강하셨던 거군요?!”

차례로 증칠, 연태진, 진소은의 반응이었다.

설풍은 그들의 반응에 쓴웃음을 지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확실히 사왕의 일족이긴 하지요. 숙청당한 일족이어서 그렇지….”

과거 검신, 뇌신과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사왕 괴자운은 자신의 첫째 아들의 성은 자신과 같은 ‘괴’씨로 짓고는, 둘째 아들의 성은 아내의 성인 ‘설’씨를 잇도록 했었다.

당시 전 무림에서도 애처가로 유명했던 사왕의 고집 때문이었다.

그 후 사왕은 둘 중 더 무공이 강했던 둘째에게 사왕련주의 자리를 물려주며 그 후로도 괴씨, 설씨 상관없이 더 무공이 강한 자가 련주의 자리를 물려받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었다.

백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사왕련의 전통을 만들게 된 말이었다.

그의 유언은 나름대로 잘 지켜졌었다.

원래 한 핏줄인 괴씨와 설씨들은 서로 반목하지 않고 선의의 경쟁을 통해 스스로를 단련했고, 양쪽의 후예들 중 더 강한 자에게 미련 없이 련주의 자리를 넘겨주곤 했었으니까.

적어도 이십여 년 전까지는 그랬다.

설풍이 살짝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내… 아버지인 설가의 후예 설천후는 당시 경쟁자였던 괴가의 후예 괴갈현보다 뛰어난 무위를 지니고 있었다고 하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다음 사왕이 당연히 그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더구려.”

그의 말을 들은 일행들은 자기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괴갈현.

그 이름이 현 사왕련주인 당대 사왕의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괴갈현보다 뛰어났던 설가의 후예 설천후.

하지만 현재 사왕이 된 자는 괴가의 후예 괴갈현.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진 설풍의 이야기는 역시 모두의 예상대로였다.

“아버지가… 다음 사왕련주로 내정되고 곧 그 자리를 물려받게 될 어느 날, 괴갈현은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을 이끌고 우리 가족들을 습격했었소. 그때 내 부모님 두 분이 다 돌아가셨지. 그리고 나는 외조부의 손에 이끌려 도주했었소. 그 후 산에서 그분께 무공을 배우며 살았었고 말이오.”

설풍은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도 담담하고 간단하게 끝맺었다.

하지만 부모를 잃고 숨어 살아야 했던 그의 삶이 그 말처럼 단순할 리가 없었다.

증칠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설풍의 손을 꽉 붙잡았다.

“설 아우! 아우에게 그런 아픈 사연이 있었다니! 이 우형은 그것도 모르고…. 미안하네, 아우! 이 무심한 우형을 용서하게!”

눈물을 글썽거리는 것은 연태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불쌍해라! 풍은 정말 전설 속에 나오는 비운의 주인공 같은 사람이었군요! 이제 외로워 말아요! 내가 언제나 함께할게요!”

그러자 함께 눈물을 글썽거리려던 진소은은 연태진의 위로인지 고백인지 모를 말에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그런 일행들과는 달리 선우진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히 설풍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 삶에서 설풍이 다음 대 사왕의 후보 중 한 명이 됐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가 사왕의 혈족일 거라는 사실까지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선우진 또한 지금의 얘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듣게 된 지금도 선우진은 여전히 설풍이 아직 하지 않은 얘기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들은 사실만으론 그가 사왕의 후계자 중 한 명이 됐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행 중 그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선우진만이 아니었다.

은근슬쩍 증칠처럼 설풍에게 다가가 그를 안아 주려다 거부당한 연태진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차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쳇, 실패로군. 응? 근데 좀 이상한데? 지금 풍의 얘기대로라면 우리는 사왕련으로 가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그가 풍의 존재를 알게 되면 안 되는 거잖아? 설마 지금 우리들만으로 사왕에게 복수하려는 게 아닌 다음에야… 혹시, 그 설마가 설마인 건가?”

연태진은 문득 떠오른 상상에 경악한 표정으로 설풍을 바라보았다.

천하제이인자인 사왕에게, 그것도 그의 본진인 강소성에서 그에게 복수를 한다는 건 아무리 담대한 연태진이라 해도 도저히 시도할 엄두가 안 나는 무모한 짓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설풍이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눈빛으로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안심하셔도 되오, 연 소저. 그런 무모한 짓을 할 생각은 없으니 말이오.”

그의 대답에 연태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역시 그렇지? 깜짝 놀랐네. 근데… 그러면 강소성에는 왜 온 거야?”

그러자 설풍이 사왕련의 본진이 있을 북쪽 하늘을 쓸쓸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다음 대 사왕련주의 후보가 되기 위해서요.”

그 대답에 연태진은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응? 다음 대 사왕의 후보가 된다고?”

“사왕의 후보가 된다니, 어떻게 말인가?”

선우진을 제외한 일행들은 설풍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모의 원수인 사왕 괴갈현이 이끌고 있는 사왕련으로 찾아가 다음 대 련주의 후보가 되겠다니.

차라리 그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말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만 같았다.

그러자 설풍이 일행들을 향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내가 다음 대 사왕련주의 후보가 되는 걸 반대하지 않을 거요. 그것만큼은 나를 믿으셔도 좋소. 그리고… 그 이유는 부디 묻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구려. 가능하면 밝히고 싶지 않소.”

일행들은 그의 말을 듣고 차마 더 묻지 못했다.

빙긋이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 있는 설풍의 눈빛이 너무도 씁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일행들은 다시 향락의 도시 소주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태호의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일행들은 설풍의 무거운 분위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묵랑이 문득 선우진에게 말을 걸었다.

- 진, 자네는 혹시 그의 사연을 알고 있는가?

그 또한 설풍의 사연이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선우진 또한 더 이상의 이야기는 알지 못했다.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 다만?

‘설 형님이 지난번에 언급했던 어머님에 대한 회한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 흐음.

확실치 않은 듯 말하기는 했지만 선우진은 마음속으로 그게 사실일 거라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얼마 전까지 지독했던 설풍의 여성 공포증을 봐도 그렇고, 아마 그 사건은 설풍의 어머니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묵랑이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 저 아이가 사왕련이 아닌 전선에 있는 걸 봤을 때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괴 형님의 자손들도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모양이군. 그렇게 금슬이 좋았던 부부셨는데, 저승에서도 슬퍼하시겠어.

그의 말에 선우진이 문득 물었다.

‘형님이 사왕의 자손이라는 걸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그러자 묵랑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 물론이네. 적안광혈공에 야수권을 쓰는 설씨 청년이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지. 초대 사왕인 괴 형님은 우리 형님의 절친한 친우셨네. 그 형님이 설 소저와 혼인하실 수 있었던 것도 사실 우리 형님 덕분이었지. 그래서 두 아이들도 조카처럼 귀여워하곤 했었는데….

거기까지 말한 묵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에게 귀여운 조카로 기억되고 있는 괴가와 설가의 후예들이 서로 피를 흘리게 된 비사라니.

당연히 기분이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선우진은 묵랑에게 더 말을 걸지 않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 봤다.

지난 삶에서 선우진이 들은 소식은 설풍이 다음 대 사왕련주 후보가 되었다는 것까지였다.

하지만 그때 사왕련주 후보는 모두 다섯 명이었다.

설풍의 장담대로 후보가 되는 것까지야 어렵지 않다 하더라도 그 다섯 명 사이에서의 경쟁을 이겨 내고 사왕련주가 되는 건 또 다른 얘기라는 뜻이었다.

선우진은 눈을 번뜩이며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삶에선 내가 이렇게 형님과 함께 왔고, 또 든든한 지원군들도 데리고 왔는데 이번에도 고작 후보가 되는 걸로 만족할 수야 없지. 이번에는 반드시 형님을 다음 대 사왕련주로 만들고 만다.’

이게 바로 선우진이 예전부터 생각해 왔던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 계획을 위해 사왕련에 관한 정보도 이전부터 틈틈이 모아 놨었다.

귀주성과 광서성의 하오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선우진으로선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선우진은 문득 사왕련의 련주가 되어 세력을 이끌고 전선으로 돌아갈 설풍의 모습을 상상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혈교와 무림맹의 세력이 아무리 강대하다 해도….’

그들의 세를 압도할 미래를 상상하며 선우진은 문득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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