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광견
“침상 있소?!”
“예, 예! 저쪽입니다!”
“깨끗한 물을 좀 데워 주시오!”
“아, 알겠습니다!”
광견 패거리의 숙소로 들어온 선우진 일행은 급히 중독된 백무호부터 침상에 눕히고는 그의 상세를 살피기 시작했다.
백무호는 이제 피를 토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선우진은 백무호의 손목을 잡고 진맥하기 시작했다.
물론 실제 해석한 사람은 묵랑이었다.
- 처음 봤을 때부터 눈 흰자의 검은 선과 이빨의 청색 선이 눈에 띄었었지. 그래서 독에 중독됐다고 했던 걸세. 그래도 멀쩡히 움직이는 것 같아 아직 초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군.
‘상태가 심각합니까?’
- 음, 많이 심각하군. 승홍이란 약재가 있네. 매독을 치료하는 데 쓰이는데 적당히 사용하면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지만 과다 사용했을 경우엔 무기력증에 빠지고 근육이 파괴되지. 심하면 피를 토하고 생명을 잃을 수도 있고 말일세.
피를 토하고 생명을 잃는다는 말에 선우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백무호가 보여 준 증세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 약재를 잘못 써서 이렇게 된 겁니까?’
- 아니, 승홍은 아니야. 비슷한 광물 독이긴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은밀하고 악독하군. 광물 독의 특징이 천천히 몸에 쌓이다가 갑자기 증세가 나타난다는 걸세. 바로 이렇게 말이지. 이 백무호란 자는 아마도 오랜 기간 누군가에 의해 독을 복용해 왔을 걸세. 그러다 지금 이 순간 증세가 나타난 것이지.
선우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오랜 시간 쌓여 온 독이 하필 진소은과 대결하던 중에 발작하다니, 백무호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너무나도 공교로운 시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옆에서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던 광견 전석구가 말을 걸었다.
“저기, 진짜 여러분이 백 공자를 중독시키신 겁니까?”
그러자 인상을 찌푸린 채 선우진이 진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연태진이 팍 짜증을 내며 되물었다.
“이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우리가 중독시켰으면 왜 데려와서 이러고 있겠어?!”
“아, 죄, 죄송합니다.”
광견 패거리는 연태진의 짜증에 깨갱 하고는 다시 푹 움츠러들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진소은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보며 말했다.
“저희가 갑자기 이런 일을 당해서 연 언니께서도 좀 날카로워지신 것 같아요. 이해해 주세요. 그리고 갑자기 이렇게 불쑥 숙소로 따라와서 정말 죄송해요. 이래저래 폐만 끼치게 되네요.”
그 부드러운 말투와 목소리에 광견 패거리들은 멍한 표정으로 진소은을 바라봤다.
나찰같이 사나운 연태진의 옆에 있는 그녀를 보니 마치 관세음보살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들은 역시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겉모습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깨달을 수 있었다.
백무호 공자를 중독시킨 사람이 이 난초처럼 청초한 소저는 절대 아닐 거라는 사실을….
한편, 백무호를 진맥한 선우진은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자 설풍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우, 그의 상태는 어떠한가?”
그의 물음에 선우진은 퍼뜩 정신이 든 듯 웃으며 대답했다.
“당장 죽을 만큼 위급한 상태까지는 아닙니다. 다만 신경이 쓰이는 점이 좀 있군요.”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광견 전석구에게 물었다.
“소주백가의 가주님이 와병 중이시라고 들었습니다. 혹시 그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아십니까? 그리고 백가의 대공자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백가의 대공자 얘기가 나오자 광견 패거리의 얼굴은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그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는 광견 전석구가 대표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모르고 계셨군요. 백가의 대공자님은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대답에 선우진의 눈이 예리해졌다.
“돌아가셨다고요? 어떻게 말입니까?”
“사왕련의 죄수들을 쫓다가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사왕련의 뇌옥에서 탈출한 비주사괴가 소주 근처를 지나고 있다는 연락을 받으시고 그들을 잡으러 나가셨다가 그만….”
“비주사괴라….”
잠시 예리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겼던 선우진이 다시 물었다.
“그 비주사괴라는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백가의 대공자에 비해 고수들이었습니까?”
“예? 아, 그렇진 않았습니다. 애초에 그랬다면 그 정도 인원으로 나가지도 않았겠지요. 절정의 고수들이긴 하지만 초절정을 앞두고 계시던 대공자라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자들이라고 평가받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을 잡으러 갔다가 오히려 당했다는 거로군요. 그렇다면 소주백가의 가주님은 어떻게 되신 겁니까?”
전석구는 선우진의 질문에 대답하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그 당시엔 그저 슬픈 일이라 여기며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이 지금 다시 생각하니 뭔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가주님께서는 대공자께서 돌아가시자 큰 충격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피를 토하시고 쓰러지셔서는…. 어?!”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하고 있던 전석구는 순간 떠오른 생각에 깜짝 놀란 얼굴로 백무호를 바라봤다.
그 또한 피를 토하며 쓰러지지 않았던가.
물론 갑자기 쓰러진 백무호와는 달리 백가의 가주는 충분히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 있기는 했었다.
그래서 당시 아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었고 말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충분히 이상한 일이었다.
소주백가의 가주인 풍운굉곤 백청광은 무려 천하삼십육성에 속하는 고수였다.
그런데 그런 고수가 고작 충격을 좀 받았다고 반년 가까이 자리에 누워 있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전석구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설마….”
그의 머릿속에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무서운 가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자 전석구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부정했다.
“아, 아니. 그, 그럴 리가 없소! 백가엔 대풍양가에서 오신 양 노사께서 항상 상주하고 계시단 말이오! 명의로 유명하신 양 노사께서 계신데 가주님의 중독 여부를 모를 리가 없지 않소!”
대풍에 위치한 양가는 사왕십삼가 중 하나로 뛰어난 의술로 유명한 의가였다.
‘대풍양가라….’
선우진은 마음속으로 그 이름을 곱씹고는 겉으론 빙긋이 웃으며 되물었다.
“전 그저 가주님께서 쓰러지신 경위를 물었을 뿐입니다만, 뭐가 그럴 리가 없다는 얘기십니까?”
“에?”
선우진의 반문에 전석구는 순간 멍해졌다.
그리고 깨달을 수 있었다.
선우진은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방금 생각한 것들은 모두 다 전석구 자신이 혼자 속으로 추측하고 내린 결론이었던 것이다.
전석구가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했다.
“아, 아니, 저는 그저….”
그러자 선우진이 다 이해한다는 듯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이 공자를 치료하기 위해 약재가 좀 필요합니다. 전 형께서 좀 사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돈은 당연히 저희가 지불하겠습니다.”
그러자 전석구가 인상을 찡그리며 호기롭게 소리쳤다.
“소주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소주백가의 공자를 치료하는 데 외부인의 돈을 쓸 순 없소! 말만 하시오! 내가 다 사 오리다!”
그때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연태진이 삐딱한 말투로 끼어들었다.
“저 녀석을 밖으로 내보내겠다고?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너무 무른 거 아냐? 만약 저 녀석이 나가서 백가의 무인들에게 우리를 제보한다면 어떻게 할 건데?”
그 말에 전석구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여러분이 흉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내가 그딴 짓을 할 리 없지 않소?!”
그는 너무도 억울한 얘기를 들었다는 듯 눈까지 치켜뜨고 있었다.
하지만 연태진은 그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누구도 그딴 짓을 하겠다고 예고하며 하지는 않잖아? 그러니 실제로 어떨지는 알 수 없지.”
“이익!”
열이 뻗친 전석구가 두려움마저 잊고 연태진에게 소리를 지르려 할 때였다.
문득 선우진이 조용히 말했다.
“그만하시지요, 연 소저. 저는 전 형을 믿습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 두 사람은 동시에 선우진을 쳐다봤다.
연태진은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으로 인상을 찡그린 채였고, 전석구는 자신을 믿어 준다는 말에 감격스러운 표정이었다.
연태진이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무 무르다고 했지? 대체 뭘 보고 저자를 믿겠다는 건데?”
선우진이 그를 믿는 이유는 사실 묵랑이 그의 마음을 확인해 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태진에게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기에 선우진은 그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비록 이류의 무인이라곤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한 번도 남자답지 못한 행동을 보여 준 적이 없었습니다. 힘을 앞세워 무례하게 굴지도 않았고, 약자를 괴롭히지도 않았죠. 심지어 오늘 봤던 무인들 중에선 일반 백성들과도 가장 친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라면 충분히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그를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저 백무호 공자를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럼 결국 그를 독으로 암습했다는 누명도 벗을 수 없게 되겠죠.”
그 말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연태진은 여전히 인상을 구긴 채였다.
하지만 반박할 말은 찾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결국 전석구를 한번 째려보고는 코웃음을 치며 외면했다.
“흥!”
그러자 이번엔 전석구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호기롭게 큰소리쳤다.
“잘 보셨소, 형장! 내 비록 흔한 이류 무인에 불과하지만 단 한 번도 소주 무인으로서 부끄러울 행동을 한 적은 없소이다! 맡겨 주시오! 절대 형장의 믿음에 어긋나지 않으리다!”
그의 말에 선우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감사를 전했다.
“고맙소. 그럼 부탁드리겠소. 지금부터 불러드리는 약재들을 좀 사다 주시오. 청계, 토복….”
전석구는 진중한 표정으로 선우진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기 시작했다.
미친개라는 별호에 어울리지 않는 꽤 듬직한 모습이었다.
***
소주백가.
향락의 도시 소주에서도 가장 중심부에 위치해 있고, 또한 가장 커다란 규모의 장원으로 되어 있는 그곳은 현재 발칵 뒤집어진 상태였다.
“당장 모든 무사들을 출동시켜 소주를 샅샅이 뒤지게 하시오! 절대 흉수들을 놓쳐서는 안 되오!”
“예! 부인! 걱정 마십시오!”
소주백가는 지난 백 년간 소주 안에서 아무런 사건 사고도 없이 평화롭게 지내 왔었다.
소주백가의 시조인 여의곤 백동성이 워낙 소탈한 성격의 무인이기도 했고, 그의 후손들 또한 선조의 성품을 그대로 이어받아 권력이나 재물을 탐하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소주를 무인들과 일반 백성들이 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이상향처럼 만들 수 있었다.
소주의 무인들과 백성들 또한 그런 소주백가를 존경하고 사랑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난 일 년간은 아니었다.
아무 일 없이 평화로웠던 백 년의 세월이 무색하게도 지난 일 년간은 백가의 사람들에게 있어 악몽 같은 시간의 반복이었다.
일 년 전, 가장 완벽한 후계자감이라고 불리던 대공자 백무룡이 사망했다.
그러자 큰 충격을 받은 가주 백청광마저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대공자의 아버지로서 백청광이 받았을 충격을 이해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날 거라는 것도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가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인 극강의 고수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 년이 다 되도록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소문마저 떠돌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이제 소주백가에 남은 사람은 이 공자인 백무호와 삼 공자인 백무작뿐이었다.
하지만 이 공자 백무호는 본인 자체가 세가의 후계자 자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자유분방한 낭인 같은 기질의 사람이었고, 삼 공자 백무작은 한발 더 나아가 야망은 있었으나 능력과 심성이 모두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이 공자 백무호까지도 흉수의 암습에 당해 버린 것이었다.
그러니 소주백가 무인들이 지금 느끼고 있는 분노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놈들을 찾아! 미녀 두 명과 늙은이 하나, 젊은 놈 둘로 구성된 삼남이녀다!”
“이 개자식들! 갈가리 찢어 버리고 말겠다!”
소주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소주백가의 무사들이 총출동해서는 성문을 꽉 틀어막은 채 소주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백가의 정예인 절정의 무사들은 물론 평상시 쉽게 볼 수 없었던 초절정의 장로들까지도 총출동한 상태였다.
그 흉흉한 분위기에 늘 자유분방했던 소주의 백성들도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뭐야? 왜 이렇게 백가의 무인들이 쫙 깔린 거야? 어라? 대장로님까지 나오셨네?”
“자네 아직도 그 소문을 못 들었나? 백무호 공자를 독으로 암습한 놈들이 있다는군.”
“뭐라고?! 백무호 공자를?! 감히 어떤 놈들이?!”
“듣기엔 삼남이녀의 외부인들이라는데?”
“삼남이녀라고?! 이 처죽일 놈들! 나한테 걸리기만 해 봐라!”
그렇게 평상시 소주백가를 아끼던 소주의 모든 사람들은 순식간에 들끓어 올랐다.
그러자 그 순간, 역설적이게도 가장 조용한 곳은 바로 소주백가의 안쪽이었다.
무사들의 총출동을 명령한 소주백가의 안주인 변 부인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무사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다 문득 내원 쪽으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향한 곳은 의방 쪽이었다.
잠시 후, 의방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곧 대풍양가에서 온 양 의원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가주 백청광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복잡한 눈빛으로 가주의 모습을 바라보다 양 의원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그러자 양 의원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마 일어나시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음으로 그녀에게 다시 말을 전했다.
- 그러니 곧 삼 공자가 가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변 부인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얼굴에 묘하게도 잘 어울리는 너무나도 잔인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변 부인, 그녀는 소주백가의 삼 공자 백무작의 친모였던 것이었다.
변 부인이 전음으로 양 의원에게 물었다.
- 둘째는 이번 일로 확실히 죽은 거겠죠?
그러자 양 의원은 잠시 침음성을 흘렸다.
“흐으음.”
그러고는 다시 전음을 전했다.
- 아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라고 장담할 순 없습니다. 그러니 만약을 대비해 약방에도 사람을 보내도록 하시지요.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약재를 사 가는 자가 있다면 그 뒤를 쫓도록 하십시오. 청계, 토복…….
그의 전음을 듣는 변 부인의 눈이 탐욕과 야망의 빛으로 번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