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전선 비룡십삼대-280화 (280/359)

280화 소주백가-2

선두에서 한참을 달리던 설풍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평온한 표정으로 그를 쫓아오고 있는 다른 일행들과 더불어 곧 쓰러질 듯 헥헥거리고 있는 광견 전석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석구는 지금껏 소주백가 무사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선우진 대신 일행들과 함께 달리고 있던 중이었다.

심지어 그의 등에는 백가의 이 공자 백무호처럼 꾸민 그의 패거리 한 명을 업은 채였다.

그가 한 일이라곤 그저 달리는 것뿐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그건 전석구에게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아직 이류에 불과한 전석구가 대부분 초절정에 달한 설풍 일행과 보조를 맞춰 뛰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설풍들이 최선을 다해 뛰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중간에 낙오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설풍이 그를 향해 빙긋이 웃어 주며 말했다.

“잠시 쉬도록 하겠소. 고생하셨소.”

그러자 바로 무너지듯 땅에 풀썩 주저앉은 전석구가 헥헥거리며 말했다.

“하악, 하악, 뭐, 뭘, 하악, 하악, 이, 이 정도를, 하악, 가지고, 하악, 하악.”

그는 얼굴까지 창백해져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얼굴을 해 놓고도 별일 아니었다는 듯 말하는 전석구를 보며 증칠이 웃음을 터트렸다.

“크헤헤헤헤! 별일 아니기는, 더 말하다가는 내장도 튀어나오겠다, 이놈아!”

그러자 연태진 또한 피식 웃으며 말을 보탰다.

“그래도 제법인걸? 꽤 근성이 있네. 다시 봤어.”

“하아, 하아, 고, 고맙, 하아, 소.”

그때 안쓰러운 눈빛으로 전석구를 바라보고 있던 진소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 협사님께 죄송하긴 한데 저희 이러고 있어도 괜찮은 걸까요? 소주백가의 무사들이 곧 몰려올 텐데요.”

그녀의 말에 설풍이 멀리 소주 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진 아우가 최대한 빠르게 해결해 보겠다고 했으니 믿어 봅시다. 정 안 되면 우리가 전 형과 고 형을 업고 도주하는 방법도 있으니 말이오.”

그러자 증칠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뭐야? 업는다고? 누가 저놈들을 업어야 하는데?”

그의 물음에 연태진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누구겠어요? 설마 연약한 여인인 저와 소은 동생에게 외간 남자들을 업으라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 말에 증칠은 주변을 둘러봤다.

여인들을 제외하면 남는 남자는 설풍과 증칠 자신밖에 없었다.

결국 자신이 업어야 한다는 소리였던 것이다.

그러자 사내놈들을 업는 게 너무 싫었던 증칠은 인상을 팍 찡그리며 코웃음을 쳤다.

“헹, 연약하기는 개뿔! 여인인 너는 안 되고 노인인 나는 된다는 거냐? 헐벗은 계집, 너는 왜 이럴 때만 약한 척이냐?”

“어머, 증 오라버니. 약한 척이라뇨? 제가 얼마나 연약한데요. 보세요. 오죽 연약하면 헐벗고 다니겠어요? 어머, 너무 연약해서 옷이 또 벗겨지려고 하네?”

간드러진 눈웃음과 함께 애교를 부리는 듯한 목소리.

그와 함께 연태진이 가뜩이나 느슨한 어깨의 옷을 슬쩍 흘러내리게 하자 증칠은 더 버티지 못하고 진저리를 치며 소리쳤다.

“아, 됐다, 됐어! 그냥 내가 업을게! 내가 업는다고!”

맨날 떽떽거리기는 하지만 증칠은 연태진과의 말싸움에서 한 번도 이득을 본 적이 없었다.

살아오며 여인들과 대화해 본 경험이 별로 없는 증칠로서는 절대 연태진을 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인이라는 점을 최대한 무기로 사용하곤 했고, 심지어 증칠의 말버릇인 ‘헐벗은 계집’이라는 말조차 기분 나빠하기보단 필요할 때 이용할 수 있는 유연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그러니 사실상 그녀는 증칠에게 있어 가히 난공불락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설풍이 소주 쪽을 바라보며 경고했다.

“모두 대비하시오. 그들이 오는구려.”

설풍의 말에 모두가 소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바로 볼 수 있었다.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엄청난 수의 무인들이 소주에서부터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모습을….

얼핏 봐도 몇백 명은 될 법한 숫자였다.

게다가 선두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자들은 분명 초절정에 이른 고수들로 보였다.

설풍이 말했다.

“초절정으로 보이는 고수만 일곱 명. 구대문파도 아닌 사왕련에 속한 일개 가문에서 저 정도의 숫자라니, 과연 사왕십삼가는 대단한 곳이구려.”

그의 말에 일행들은 긴장된 눈빛으로 무인들을 바라봤다.

초절정 고수가 일곱 명에, 뒤따라오는 절정의 무인들도 몇십 명은 될 것 같았다.

도저히 일행들이 정면으로 맞붙을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진소은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도주할까요?”

그러자 잠시 그들 쪽을 바라보던 설풍이 입을 열었다.

“도주할 준비를 하고 계시오. 일단은… 내가 한번 부딪쳐 보겠소.”

설풍의 말에 일행들은 놀란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무려 일곱 명의 초절정 고수에 수십 명의 절정 무인들을 상대로 혼자 부딪쳐 보겠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들은 설풍을 만류할 수 없었다.

설풍의 눈에서 일렁거리는 투지와 자신감이 너무도 듬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연태진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래서 풍에게서 헤어 나올 수가 없다니까.”

잠시 후, 질풍처럼 달려온 초절정 고수들이 먼저 일행의 바로 근처까지 접근해 왔다.

그러자 설풍이 홀로 목을 뚜둑! 꺾으며 그들을 향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맹호가 걸어 나가는 듯한 오연한 기세였다.

그를 본 소주백가의 초절정 고수들은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설풍이 뿜어내고 있는 무형의 기세가 유형의 압박감으로 화해 그들의 피부를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주백가의 초절정 고수들 중 가장 연장자인 대장로 연위백이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천하삼십육성에 필적하는 자가 있다고 하여 과장일 거라고 생각했거늘…. 그대와 같이 젊은 고수에 대해선 들어 본 적이 없다! 대체 누구냐?! 누구길래 그 실력을 가지고 고작 이 공자를 해하였는가?!”

그러자 설풍이 대답했다.

“우리는 백무호 이 공자를 해한 적이 없소. 이미 만성 독에 중독되어 있던 그가 대결 중 발작을 일으킨 것뿐이오.”

수많은 고수들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도 여유가 느껴질 정도로 차분한 대답이었다.

그러자 성질이 급해 보이는 삼 장로 추가익이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헛소리하지 마라! 이 공자가 왜 만성 독에 중독되어 있었다는 거냐?!”

그 말에 설풍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왜 만성 독에 중독되어 있었는지는 내가 어찌 알겠소? 그 이유는 대공자와 가주님을 연달아 잃었던 당신들이 이미 알고 있었어야 하는 거 아니오?”

“그게 무슨 망발…!”

삼 장로 추가익은 분노한 목소리로 설풍의 말에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경악한 대장로의 목소리에 끊기고 말았다.

“설마! 그대는 지금 그 모든 일이 연관되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러자 설풍의 뒤에 있던 연태진이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촉망받던 대공자가 훨씬 하수에게 패해 사망하고, 무려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이라던 가주가 고작 마음의 충격을 입고 반년이 넘게 쓰러져 있었다며? 근데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고? 그게 더 충격인데? 게다가 이젠 이 공자가 공개된 대결에서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졌어. 예전에 가주가 쓰러질 때도 마찬가지였다며? 그런데도 느껴지는 게 없나? 다들 바보 아냐?”

그 말에 삼 장로 추가익이 말을 더듬으며 반박했다.

“그, 그거야 너희가 독으로 암습을….”

연태진은 비웃듯 반박했다.

“우리가 독으로 암습을 한다고? 소주백가의 영역인 소주 안에서? 그것도 공개된 대결에? 대체 왜? 지금 당신들 앞에 선 풍을 보고도 느껴지는 게 없어? 우리가 그를 죽이고 싶었다면 대체 왜 암습을 해야 하지? 설마 실력으로 죽일 수 없어서 그랬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녀의 말에 소주백가의 초절정 고수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그들의 앞에 선 설풍의 기세만으로도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 장로 추가익이 억지로 목소리를 짜내듯 소리쳤다.

“그, 그렇다 해도 마찬가지! 그럼 왜 억울함을 밝히지 않고 도주한 것이냐?! 또 우리 무사들을 해한 것은 어떻게 해명할 거냐?!”

그러자 연태진이 팍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상황을 밝히기는커녕 다짜고짜 독습을 가했다며 공격해 와 놓고 왜 도주했냐고?! 그럼 눈앞에서 덤비는 족족 다 쳐 죽여 버렸어야 했다는 거야?! 우리가 무사들을 해했다고?! 누가 죽었는데?! 그 와중에도 한 명도 죽이지 않고 피해 줬건만 대체 무슨 해를 입혔다는 건데?! 앙?! 진짜 다 죽여 줄까?!”

추가익은 그녀의 말에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반박할 말이 없는 것과 기분이 나쁜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그가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런 건방진 계집 같으니! 네년은 대체 누군데 감히…!”

“감히?! 가암히! 내가 바로 하원방의 방주 하원달기 연태진이다! 그러는 너는 어디서 빌어먹던 돼지 새끼냐?!”

추가익은 그녀의 모욕적인 말에 너무 분노해 목이 다 막혀 버렸다.

어디서도 이런 대접을 받아 보지 못했던 그로선 도저히 연태진을 말로써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러자 증칠이 실실 웃으며 중얼거렸다.

“크하! 우리 편이 되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구먼.”

그때 대장로 연위백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연태진?! 그대가 바로 하원달기 연태진이란 말이오?!”

그의 물음에 연태진이 오만하게 웃으며 반문했다.

“딱 보면 알 수 있지 않나요? 이 얼굴이 연태진이 아니면 대체 누구겠어요?”

또다시 표출된 그녀의 자기애에 일행들이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내쉴 때였다.

대장로 연위백은 다른 의미의 무거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사파 오대미녀인 하원달기 연태진의 명성은 연위백 또한 익히 들어 봤었다.

하지만 연위백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의 미모나 무위에만 주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일반 백성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다는 하원방의 행보에 더욱 주목했었다.

사왕련과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 그녀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가 정말 하원달기 연태진이라면…. 모든 일이 정말 오해일 수도 있겠구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렇게 그대들을 보내 줄 수는 없소.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그대들을 억류해야 하는 우리를 이해해 주시오.”

그 말에 연태진이 설풍을 바라봤다.

어떻게 하겠냐는 의미의 눈빛이었다.

그러자 설풍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저희도 이렇게 오해를 풀지 못한 채로 떠날 생각은 없습니다. 소주백가로 함께 가시지요. 아마 지금쯤이면 모든 일이 끝나 있을 것입니다.”

“음? 모든 일? 그게 무슨 말이오?”

대장로의 의문 섞인 눈빛에 설풍은 그저 빙긋이 웃어 줄 뿐이었다.

***

“양 노사! 양 노사!”

소주백가의 현 안주인인 변 부인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양 의원을 찾아 의방 안으로 들어갔다.

의방 사람들에게 듣기에 그는 늘 그렇듯 백가주가 누워 있는 방에서 그의 상태를 살피고 있다고 했다.

변 부인이 방문을 확 열고 들어가며 소리쳤다.

“양 노사! 큰일 났습니다! 둘째가…!”

하지만 그렇게 들어가던 변 부인은 방 안에 누워 있는 가주 백청광, 의원인 양 노사 이외에도 두 명의 사람들이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심지어 두 명 중 한 명은 가주 백청광의 옆에 나란히 누워 있는 상태였다.

가주 혼자 치료를 받는 독실에 다른 누가 같이 누워 있다니, 그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변 부인은 놀라서 물었다.

“아니! 누가 감히…!”

하지만 변 부인은 그 말도 끝까지 마칠 수 없었다.

누워 있는 사람이 그녀에게 익숙한 얼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경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두, 둘째?! 둘째가 왜 여기에?!”

변 부인은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주 백청광의 옆에 누워 있는 이가 바로 흉수들에 의해 업혀 소주 밖으로 나갔다던 이 공자 백무호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이제껏 가장 주목하지 않았던 인물, 양 의원의 옆에 앉아 있던 잘생긴 얼굴의 젊은 남자 선우진이 빙긋이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는 다른 일행들로 하여금 백가의 무인들을 유인하게 하고는, 자신은 오히려 가장 비어 있을 적의 본진으로 백무호 이 공자를 데려와 치료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제 올 사람은 다 온 것 같군요. 부인께서도 앉으시지요.”

그의 말에 변 부인은 인상을 팍 찡그리며 소리쳤다.

“네놈은 누구냐?! 대체 누구길래 감히 이곳에 들어와 내게 앉으라 마라 명령을…!”

그 순간이었다.

앉아 있던 잘생긴 남자, 선우진의 눈빛이 한순간 황금빛 광채를 발했다.

화아악!

그리고 그 눈빛을 본 순간 변 부인은 목이 꽉 막히는 느낌에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커다란 칼날이 날아와 자신의 목을 날려 버릴 듯한 섬뜩한 느낌이었다.

선우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시는 것 같군요, 부인. 저는 지금 당장 부인의 목을 쳐도 그다지 아쉬울 게 없습니다. 조용히 앉기 싫으시다면 그렇게 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변 부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맹수의 아가리 속에 얼굴을 들이민 듯 온몸이 덜덜 떨려 오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잘생긴 청년일 뿐인데, 그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몸이 마치 지옥의 사신을 본 듯 공포에 질려버린 것이다.

이대로 계속 그를 보고 있다가는 오줌마저 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변 부인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쓰러지려는 것을 간신히 버텨 내며 선우진에게 말했다.

“가, 감히 소주백가 안에서 내게….”

그 순간이었다.

선우진은 짜증이 난 듯 인상을 찡그렸다.

동시에 방 안에는 한 줄기 빛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변 부인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를 눈으로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청년이 검은색 검을 검집 안에 천천히 납검하고 있는 모습만큼은 분명히 눈에 들어왔다.

언제 뽑혔는지도 알 수 없는 검이었다.

이미 공포에 질려있던 변 부인은 그가 저 검으로 대체 무엇을 했을지를 생각해 보려 했다.

그때였다.

그녀의 왼팔이 갑자기 스르륵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잘린 단면에선 그제야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푸화아악!

변 부인의 눈이 튀어나올 듯 확대됐다.

자신의 팔이 떨어져 나가는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한 것이었다.

공포에 질린 그녀가 마침내 비명을 질러 댔다.

“꺄아아아악!”

마치 인형의 팔처럼 아무 감각도 없이 떨어져 나간 자신의 팔, 뿜어져 나오는 피, 그리고 이제야 느껴지는 격렬한 통증.

이대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귀에 선우진의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럽군. 역시 머리를 떼어 버려야 하나?”

그 말을 들은 순간이었다.

변 부인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에 거짓말처럼 비명을 멈출 수 있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필사적으로 비명을 참았기 때문이었다.

극도의 공포심이 만든 효과였다.

그녀의 마음은 이제 완전히 꺾여버린 상태였다.

여태껏 늘 떠받들어지며 살아왔던 그녀에게 이런 일을 견뎌낼 정신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의 팔은 물론 머리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잘라 버릴 것 같은 무도함, 게다가 이렇게 비명을 질렀는데도 아무도 달려오지 않는다는 현실에 그녀는 더 이상 반항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선우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앉아.”

그러자 변 부인은 덜덜 떨며 양 의원의 옆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그녀의 잘린 어깨에선 언제 혈도를 짚었는지 더 이상 피가 뿜어져 나오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정말 귀신 같은 자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문득 옆에 앉아 있던 양 의원을 힐끗 바라본 변 부인은 또한 깨달을 수 있었다.

백지장처럼 창백한 양 의원의 얼굴에서 한쪽 귀와 코가 사라져 있다는 사실을.

아마 그녀가 오기 전 이미 당했던 모양이었다.

그걸 본 변 부인은 더욱 공포에 질리고 말았다.

자신의 얼굴 또한 저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여인인 그녀에게 팔과 얼굴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때였다.

선우진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들에게 입을 열었다.

“너희가 중독시켜 놓고는 우리에게 누명을 씌웠으니 억울함은 없을 거라 믿는다.”

그 말에 변 부인과 양 노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억울함이 없을 수야 없었지만 차마 그렇게 대답할 순 없었다.

방금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사지를 자르던 자가 부드럽게 웃고 있으니 그게 더 무서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선우진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궁금한 게 있어서다. 백무호라는 자를 보니 맹은 독에 중독됐더군. 여기 백청광 가주 또한 마찬가지고.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그 말을 들은 변 부인과 양 노사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슬쩍 서로의 눈치를 봤다.

그러자 그 순간 선우진의 기도가 다시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샤아악!

그 차가운 기세에 안 그래도 공포에 질려 있던 두 사람은 진저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선우진이 얼음 같은 목소리로 변 부인을 향해 말했다.

“말하지 않겠다면 그것도 좋다. 셋을 셀 때까지 말하지 않는다면 노인을 먼저 죽이겠다. 그리고 네 앞에서 셋째 백무작을 죽여 주지. 어디 아들의 사지가 조각나는 광경을 보고도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을지….”

그러자 변 부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 안 돼요! 내 아들은! 내 아들만은!”

그 말에 선우진이 짜증 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게 싫으면 빨리 대답하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아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에 변 부인은 다시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양 의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이자 때문이에요! 이자가 아무 생각도 없던 저를 유혹했어요! 어느 날 갑자기 내 아들 무작이를 가주로 만들어 주겠다고…. 저, 저는 그저 생각해 보겠다고만 대답했었어요! 근데 이자가 가주님과 첫째, 둘째를 이미 중독시켰으니 이젠 어쩔 수 없다고 해서….”

양 노사는 변 부인의 말을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이 상황이 되어서도 아무 말도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선우진은 이번엔 양 노사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런 짓을 했지?”

하지만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도 양 노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다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확실히 변 부인과는 달라 보였다.

자기 친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겠다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편과 의붓아들들을 중독시켰던 그녀와는 결이 다른 자인 것이었다.

오히려 그의 표정에선 자신이 희생되어도 상관없다는 듯한 초탈함마저 보이고 있었다.

어쩐지 자신이 숭고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믿는 순교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습에 선우진은 오히려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가정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양 의원에게 물었다.

“대풍양가에서 온 의원이 혼자만의 의지로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 묻겠다. 양가에서 왜 백가를 노린 거지? 너희는 맹우 아니었던가?”

그 말을 들은 양 의원의 눈동자가 순간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선우진은 살짝 고민이 됐다.

섭혼술을 써서 저자의 입을 열게 만들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사실 지금 두 사람이 공포에 질린 건 단지 선우진의 기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묵랑심법, 원래 천마신공의 안법인 지존신안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지존신안은 굳이 섭혼술로 사용하지 않아도 그것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 공포심을 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정신력이 약한 변 부인이 차마 견디지 못하고 진실을 밝혔던 것인데, 저 양 의원에게 진실을 듣기 위해선 아마 다른 방법이 필요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선우진은 결국 그러지 않기로 결심했다.

육합검수들을 치료하는 이외의 목적으로 섭혼술을 쓰는 건 묵랑 어르신의 의지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나중에 분근착골술을 이용해 고문해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선우진이 그렇게 마음을 결정했을 때였다.

양 의원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대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짓을 벌이고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오. 백가의 무인들은 물론 사왕련의 무인들도 모두 당신들을 쫓게 될 테니 말이오.”

그러자 선우진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걱정을 해 주다니 고맙긴 한데 왜 나를 쫓는다는 거지? 가주와 이 공자를 중독시킨 것도, 예전에 대공자를 죽인 것도 모두 너희들이 한 짓인데?”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빙글빙글 웃음 짓는 선우진을 향해 양 의원이 이를 악물고는 다시 말했다.

“그걸 누가 안단 말이오. 누구도 당신 말을 믿어 주지 않을 텐데.”

그러자 선우진은 그의 말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 말을 믿어 주진 않겠지. 하지만… 당신 말이라면 믿어 주지 않을까?”

그 말에 양 의원은 코웃음을 쳤다.

“흥! 내가 그들의 앞에서 말할 것 같소? 나는 절대…!”

그때였다.

선우진이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만 옆방의 방문을 활짝 열고는 빙긋이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실망시켜서 미안한데, 이미 당신이 말했어.”

양 의원은 문을 열자마자 바로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 옆방에 총관과 의방의 식구들, 몇몇 백가에 남아 있던 무사들이 점혈이 된 듯 눈만 대굴대굴 굴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점혈이 됐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듯했지만 그들의 표정을 본 양 의원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제껏 했던 모든 얘기를 그들이 다 들었음을.

선우진이 그를 향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 끝났소, 양 의원.”

그러자 양 의원은 이제 절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떨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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