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사왕련-2
선우진은 이제껏 이 시대의 절대자라고 할 수 있는 많은 이들을 직접 만나 봤었다.
일제, 이왕, 삼성, 사마, 오괴 중 이왕에 속한 협왕 모용검.
삼성에 속한 검성 해운백과 성녀 시서우.
사마에 속한 색마 손은상, 혈마 전무광, 마경 만학숭.
그리고 오괴에 속한 괴검 서일까지….
그들은 모두 하늘 위의 무인들이었기에 선우진의 실력으로 이들의 수준을 정확하게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껏 한 가지 기준으로 이들을 판단하곤 했었다.
그것은 바로 광검릉에서 사제의 연을 맺은 스승 광협검괴 정명강과의 비교였다.
그리고 그런 기준으로 바라봤을 때 안타깝게도 선우진이 이 시대에 만났던 절대자들 중 광협검괴 정명강보다 더 강력한 존재감을 주는 존재는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색마 손은상, 혈마 전무광, 검성 해운백 정도에게서 그와 비교 가능한 존재감을 느꼈을 뿐, 나머지 절대자들은 모두가 정명강에 비해 훨씬 모자란 존재감만을 보여 줬을 뿐이었다.
그에 비해 선우진이 몽혼대법에서 만난 검신이나 무황총의 환상 속에서 봤던 뇌신, 무황 등에게서는 확실히 정명강을 압도하는 존재감이 느껴졌었다.
현재의 절대자들이 과거의 절대자들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선우진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왕 괴갈현.
천하제이의 고수라고 평가받는 그에게서 스승 광협검괴 정명강에게서나 받았던 거대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로 압도적인 괴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조금 전까지 무료해 보였던 그 괴물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오로지 설풍 한 명에게만 쏠려 있었다.
설풍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을 밝힌 순간부터 일어난 변화였다.
그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동안 설풍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내 후계자의 자리에 도전하고 싶다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설풍의 대답에 사왕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우습구나. 내게 복수를 할지도 모를 너를, 내가 후계자로 허락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당장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설풍을 놀리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 가벼운 말투를 들은 설풍의 일행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 괴물이 손가락 하나만 까닥해도 그들의 목숨은 바로 이 자리에서 끝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설풍은 일행들과 달리 그리 두려워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담담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복수를 하지 않을 거란 걸, 할 수 없다는 걸 아실 테니까요.”
그렇게 대답하는 설풍의 눈에는 짙은 아픔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사왕은 여전히 비웃듯 물음을 이어 갔다.
“복수를 하지 않겠다? 나는 잘 모르겠구나. 왜 복수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네 아버지의, 불구대천의 원수를 갚지 않겠다는 거냐?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그 질문을 들은 설풍은 어금니를 꽉 악물고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사왕을 노려봤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은 침도 크게 삼키지 못한 채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선우진의 일행들은 물론, 사왕 주변의 인물들 또한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선우진의 일행들은 불안한 눈빛과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 대화의 결과에 따라 자신들의 생사가 결정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풍이 분명 사왕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해서 오긴 했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일행들은 이 자리에서 설풍과 함께 저들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었다.
저 사왕이라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는 괴물에게서 말이다.
그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저런 괴물의 공격을 받게 된다니, 그들의 생명은 그 즉시 끝장날 것임에 틀림없었다.
‘으으, 어쩐지 느낌이 별로 안 좋더라니. 아우들 잘 둔 덕에 정말 맹세처럼 한 날, 한 시에 죽겠구나. 젠장.’
‘여기서 풍과 함께 죽는 건가? 죽을 때 죽더라도 풍과 한번 자 봤어야 했는데. 억지로라도 해 볼걸.’
증칠과 연태진이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선우진은 문득 저들의 대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뭐랄까, 사왕이 설풍을 일부러 곤란하게 하고 있는 듯한 느낌?
마치 철없는 남자아이가 누군가를 괴롭히는 행동으로 애정 표현을 하듯 그가 설풍을 일부러 놀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착각이겠지? 설마 저 괴물이 그런 유치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그때였다.
이를 악문 채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설풍을 비릿한 웃음으로 바라보던 사왕이 문득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좋다. 내 손으로 망가뜨렸던 괴설이가의 전통을 내 손으로 다시 세워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허락하겠다. 너는 지금부터 다음 대 사왕의 후보자다.”
“!”
“!”
그것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선언이었다.
사왕의 그 느닷없는 허락에 주변의 모든 이들은 순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선우진의 일행들이 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사왕의 측근들은 바로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주군! 그건…!”
“주군! 재고해 주십시오! 한번 무너진 이상 괴설이가의 전통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 후환을 제거하셔야만 합니다!”
“안 됩니다, 아버지! 저런 놈이 저희와 같은 후계자 후보라니요?! 저는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선우진은 이의를 제기하는 측근들을 살펴보았다.
지금 후환을 제거하라고 주장하고 있는 이는 아까 선우진 일행을 안내했던 만지성과도 닮아 보이는 중년의 남자였다.
선우진은 그의 신분을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저자가 바로 현 사왕련의 총관인 진강만가의 가주 만성국이겠군.’
그는 괴갈현이 설천후를 죽이고 사왕이 될 때, 이전까지 대대로 사왕련의 이인자였던 양주동가를 밀어내고 총관의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그가 설가의 후예인 설풍에 대해 각을 세우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물론 앞으로도 그들과 협력적인 관계가 되기는 힘들 테고 말이다.
선우진은 다시 시선을 돌려 사왕을 아버지라 부른 청년 쪽을 바라보았다.
사왕을 닮은 건장한 체격과 오만한 눈빛이 인상적인 청년이었다.
그리고 선우진은 문득 그가 어쩐지 설풍과 형제처럼 닮아 보인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달랐지만 적어도 외모로만 봤을 때는 그랬다.
역시 괴가와 설가가 한 핏줄이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또한 선우진은 그의 주변에 역시 설풍과 닮아 보이는 세 명의 청년들이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설풍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이 아마도 소문으로 듣던 사왕의 네 아들들인 모양이었다.
선우진은 그들의 얼굴과 느낌을 빠르게 훑으며 생각했다.
‘저들이 바로 형님의 경쟁자들이겠군.’
지난 생에서도 다음 대 사왕의 후보자는 원래 사왕의 아들 네 명에 설풍을 포함한 다섯 명이었다.
그러니 설풍은 이제부터 저들과의 경쟁을 통해 다음 대의 사왕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선우진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사람들의 성토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주군! 설가의 후계자를 당장…!”
“아버지! 저는 저런 놈을 절대…!”
총관 만성국과 사왕의 아들 한 명이 계속해서 사왕의 선언에 대한 반대 의견을 주장할 때였다.
사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그 순간이었다.
사왕으로부터 엄청난 기세가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다.
화아악!
“크윽!”
“윽!”
그 기세는 폭풍처럼 주변으로 뻗어 나가서는 천 근 바위와 같은 무게로 좌중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압박감에 반대 의견을 주장하던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공력을 모아 자리에 주저앉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으으윽!”
“이, 이런 기세가….”
사왕은 이제 제왕과도 같은 기세로 오연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언제부터 내 결정에 토를 달게 됐지?”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개미에게 발을 올린 코끼리처럼 모두를 짓눌렀다.
이 공간 안에서 그의 존재감은 마치 진짜 절대자, 신과도 같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의 차가운 눈빛이 총관 만성국을 향하자 만성국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털썩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사정하듯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지존. 속하가 감히 지존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그의 항복 선언에 사왕의 시선은 이제 그의 아들에게로 향했다.
설풍을 후보로 삼는 것을 계속해서 반대하고 있던 아들에게로였다.
사왕이 말했다.
“항기, 네가 감히 나의 결정에 토를 다느냐?”
그러자 간신히 버티고 있던 그의 몸이 흔들렸다.
기세가 집중되며 압력이 더 거세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과연 사왕의 아들다웠다.
총관 만성국과 달리 쉽게 굴복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저는, 저따위 놈을, 절대 인정하지….”
그러자 사왕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자신이 없느냐?”
그 질문에 항기라 불린 아들이 눈을 치켜뜨며 반문했다.
“예?!”
“저 녀석과 경쟁할 자신이 없느냔 말이다.”
그러자 사왕의 아들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누가 자신이…!”
그때였다.
사왕의 눈이 번쩍 광채를 내뿜자 아들을 누른 기세가 한순간 가중됐다.
그러자 그는 더 이상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찌그러지듯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크으윽!”
털썩!
사왕은 바닥에 짓눌린 아들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잘 들어라. 나는 경쟁을 두려워하는 후계자 따위는 필요 없다. 밖에서 굴러 들어와 기반 하나 없는 경쟁자 따위가 두렵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때려치우도록 해라.”
그렇게 말하는 그의 시선은 무릎을 꿇은 아들뿐 아니라 다른 세 명의 아들들 또한 차갑게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다른 세 명의 아들들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복종의 뜻을 표했다.
사왕이 압도적인 무위로 자신의 뜻을 관철한 것이었다.
이제 아무도 반대 의사를 표하지 않게 되자 사왕은 기세를 거둬들이며 선언했다.
“다시 말하겠다. 설가의 후예 설풍은 지금 이 시간부터 다음 대 사왕의 후보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의 선언에 이제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반대하는 자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러자 사왕은 다시 설풍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이제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네가 다음 대 사왕에 적합한 자임을 증명해야만 할 것이다. 다음 대 사왕에 걸맞은 무위, 다음 대 사왕에 걸맞은 업적. 네가 그것을 보일 수 있다면 너는 너의 성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다음 대 사왕의 자리에 앉을 수 있을 것이다.”
설풍은 아무 대답 없이 사왕을 바라봤다.
그러자 허공에서 두 사람의 눈빛이 잠시 얽혔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사왕은 다시 고개를 돌려 다른 아들들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들은 이제부터 네가 압도해야 할 너의 경쟁자들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상대를 꺾되 강소성 안에서 서로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것만큼은 허락할 수 없다. 이해했느냐?”
설풍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한 경쟁을 펼치되 강소성 안에서 서로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지는 않는다.’
다음 대 사왕이 되기 위한 규칙은 설풍 역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풍이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자 사왕은 비릿하게 웃으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럼 무운을 빈다.”
사왕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설풍과 선우진 일행들은 다시 대전의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일행들은 마치 죽다 살아난 듯한 기분에 안도의 한숨을 깊이 내쉬어야만 했다.
“후아아아아! 죽는 줄 알았네!”
“저도요. 사람이 기세에 눌려서 죽을 수도 있는 거였군요.”
“나도야. 하마터면 풍과 한번 자 보지도 못하고 죽을 뻔했잖아? 풍, 여기서 나가면 빨리 나와….”
그때였다.
그들을 따라 다른 후계자 후보들, 사왕의 아들들이 바로 따라 나왔다.
아직 상황이 끝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들 모두가 차가운 눈빛으로 설풍을 바라보는 가운데 아까부터 계속 나서서 반대해 왔던 괴항기라는 자가 제일 먼저 오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비천한 놈. 아무리 아버지께서 명하셨다고 해도 나는 너 따위를 우리와 동급인 후계자 후보로 인정할 수 없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후보 자격을 반납하고 우리 앞에 무릎을 꿇도록 해라.”
그는 설풍에 대한 적의와 비하를 전혀 숨기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설풍은 그를 비롯해 그의 뒤에서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나머지 세 형제들을 주욱 둘러봤다.
저 괴항기처럼 앞으로 나서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 중 누구에게서도 호의적인 표정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설풍은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않은데 저들이 먼저 알아서 시비를 걸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활화산같이 터지려는 분노를 간신히 억눌렀다.
이곳이 그들의 본부인 사왕련만 아니라면 이 자리에서 놈을 부숴 버리고 싶었지만, 혹시 그런 짓을 했다가 자신의 일행들에게까지 피해가 갈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설풍의 귀에 선우진의 전음이 들려왔다.
-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셔도 됩니다, 형님.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는 존재감을 드러내시는 게 좋습니다. 오히려 지금 이 자리에서 참으시면 이곳 사람들은 형님을 우습게 볼 테니까요. 여기가 사왕련이라는 걸, 이곳의 유일한 철칙이 ‘힘’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그 전음을 들은 설풍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마치 사냥을 앞둔 맹수와도 같은 사나운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