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사왕의 후계자들-1
사왕의 셋째 아들 괴항기는 다음 대의 사왕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하지만 그는 셋째라는 나이 순서처럼 후계 서열 또한 세 번째로 밀려 있는 상태였다.
속을 알 수 없는 첫째 형 괴정기는 현 사왕련의 이인자라고 할 수 있는 진강만가를 외가로 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진강만가의 도움으로 사왕련 내부에서 압도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사왕련의 많은 고위직 무인들은 어떤 이유로든 진강만가와 끈이 닿아 있었고, 그 넓은 인맥이 그대로 괴정기에게 이어져 사왕련 내부에서 그의 위상을 독보적으로 만들어 준 상태였던 것이다.
셋째 괴항기는 그런 첫째 형에게 대항하기 위해 역시 외가의 도움을 받아 이곳저곳에 선을 대 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어디에 선을 대 보려고 해도 이미 만가와 선이 닿은 곳이거나 아예 그런 일엔 관심도 없는 자들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지. 이래서야 어떻게 큰형님과 경쟁을 한단 말인가?!’
게다가 경쟁해야 할 상대는 첫째 형뿐만이 아니었다.
쉽지 않기로는 둘째 형 괴창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첫째 괴정기와는 좀 다른 의미긴 하지만 그 역시 독보적인 위상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괴창기의 외가는 어떤 시대이든 무력에 있어선 늘 사왕련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알려진 철권광웅 지모수의 후손 흑림지가였다.
단순, 무식, 과격의 대명사이자 순수한 투사로 유명했던 지모수의 피를 이었기 때문인지, 괴창기의 개인 무력은 후계자들 사이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또한 싸움을 좋아하는 과격한 성향의 그는 첫째 괴정기처럼 내부를 장악하기보단 외부로 나가 명성을 떨치는 쪽을 선택했다.
그래서 그는 현재 자신의 세력만을 이끌고 안휘성의 남궁세가에게 싸움을 걸고 있는 중이었다.
셋째 괴항기는 그런 둘째 형을 조금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대세가의 수장이라는 남궁세가를 상대로 자신의 추종자들만을 이끌고 싸움을 걸다니. 그게 대체 무슨 무모한 짓이란 말인가?’
사실 이런 생각은 괴항기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왕련 사람들 모두가 괴창기의 시도를 무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속한 곳은 사왕련이었다.
비겁한 승리보단 장렬한 패배가 더 높게 평가받고 칭송받는 곳.
그렇기에 괴항기는 알고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형인 괴창기가 정말로 오대세가의 수장인 남궁세가를 꺾고 안휘성에서 그들을 몰아내기라도 한다면, 그의 위상은 분명 후계자들 사이에서 독보적으로 떠오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마 둘째 형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무모한 도전을 통해 일발 역전을 노리는 거겠지.’
게다가 그는 적어도 무언가 시도할 방법을 찾았고 실행하고 있지 않은가.
그게 분명 무모한 시도이긴 하지만… 적어도 아직 방법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괴항기 자신보단 확실히 낫은 상황이라는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괴항기는 요즘 무척 조급해진 상태였다.
세력이 미약하고 권력에 별로 관심도 없어 보이는 넷째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미 압도적으로 앞서 있는 두 형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경쟁자가 한 명 더 늘어난다고?
그것도 다른 배다른 형제들도 아닌 멸망한 줄 알았던 설가의 자손이?
괴항기로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설가의 자손이라는 놈을 이 자리에서 밟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대의 사왕은 꿈도 꾸지 못하도록.
아주 철저하게 말이다.
그리고 괴항기는 그 일이 그리 어려울 거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외부에서 굴러 들어와 아무런 세력도 없는 설가의 떨거지 따위야. 지금이야 지 주제도 모르고 설친 모양이지만 이 내가 분명한 현실을 깨닫게 해 주마!’
그가 오만한 표정으로 설풍에게 말했다.
“네놈이 다음 대 사왕이 되겠다고? 큭, 웃기는구나. 사왕이 무슨 네놈이 숨어 살던 동네 삼류문파의 수장인 줄 아느냐? 설마 네놈 같은 개돼지가 진짜로 사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설풍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래, 설마 그럴 리가 있을까? 아무리 머리가 텅텅 비었어도 언감생심 그런 꿈까지 꾸지는 않았겠지. 네놈은 아마 사왕의 후보가 되면 한몫 단단히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안 그런가? 근데 어쩌지? 난 네놈 같은 개돼지가 나와 동급으로 불리도록 놔둘 생각이 없는데?”
그러자 설풍이 빙긋이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놔두지 않으면? 아까 사왕께선 강소성 안에서 서로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지 말라고 하시던데?”
분명 그것은 사왕이 정한 후계자들끼리의 규칙이었다.
그러니 괴항기는 최소한 강소성 안에선 절대 설풍을 건드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괴항기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강소성 안에선 그렇겠지. 하지만 네놈을 제압해 강소성 밖으로 끌고 나간다면 다 해결될 문제가 아니더냐? 조금 귀찮긴 하지만 그 정도는 내 충분히 해 줄 생각이다. 어떠냐? 이제 네놈이 어떤 처지인지 좀 이해가 되느냐?”
그러자 설풍은 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하! 그러니까 강소성 안만 아니라면 뭘 해도 상관없다는 거로군. 그래, 잘 알았다.”
설풍의 감사 인사를 들은 괴항기는 눈을 꿈틀거렸다.
너무 평온해 보이는 설풍의 반응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더 참지 못하고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며 사납게 소리쳤다.
화아악!
“개돼지라 그런가? 이렇게까지 말해 줘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모양이로구나. 좋다, 내 쉽게 말해 주지. 죽고 싶지 않거든 당장 무릎을 꿇어라, 이 비천한 놈아!”
괴항기의 기세는 꽤 놀라웠다.
이제 초절정을 눈앞에 둔 그의 무위는 적어도 같은 또래에선 적수를 찾기 힘들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괴항기의 분노한 외침과 흉흉한 기세에도 설풍은 그저 피식 웃음 지을 뿐이었다.
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괴항기에게 물었다.
“근데 너 몇 살이냐?”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설풍의 질문을 들은 괴항기가 눈을 꿈틀했다.
“뭐라고?”
그러자 설풍이 한순간 폭풍 같은 기세를 뿜어내며 소리쳤다.
화아악!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나? 몇 살이냐고 묻지 않느냐, 이 어린놈아!”
설풍의 기세는 압도적이었다.
그 상상도 못 한 기세에 괴항기는 물론 뒤에서 지켜만 보던 다른 이들도 순간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괴항기의 기세를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린 설풍의 기세가 그들의 예상을 훨씬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으윽!”
“저, 저럴 수가!”
물론 사왕과 같은 절대자들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저 정도라면 천하삼십육성급 고수들과는 충분히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설풍은 주먹을 뚜둑! 소리 나도록 꺾고는 괴항기를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내가 알기로 네 녀석의 나이가 스물여섯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같은 집안의 형님에게 그따위 말투를 쓰다니, 버르장머리를 좀 고쳐 줘야겠구나. 집안의 버릇없는 동생에게 예절 교육을 하는데 굳이 강소성을 벗어날 필요까지는 없겠지?”
그의 말에 괴항기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도, 동생이라니! 감히 네놈 따위가 내게…!”
압도적인 기세에 눌리면서도 그의 입은 결코 설풍에게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몸은 아니었다.
반항적인 말과는 달리 괴항기의 몸은 자기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던 것이었다.
설풍의 기세를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던 괴항기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는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저런 비천한 놈에게 겁을 먹다니, 심지어 그 모습을 남들 앞에서 보이다니.
너무나도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였다.
괴항기의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수하 몇 명이 주인의 실책을 만회하려는 듯 앞으로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이놈! 감히 삼 공자님께!”
“용서하지 않겠다!”
“죽어라!”
그들은 괴항기의 직속 부하인 여등삼검이란 자들이었다.
각각 내공 팔십 년 이상의 무위를 가진 무인들로 합공을 펼치면 초절정의 고수들도 상대할 수 있다고 알려진 합격술의 대가들.
그들의 검이 빛살처럼 설풍을 향해 쏘아졌다.
쉬이이익!
하지만 그들이 끼어드는 건 선우진의 머릿속에 이미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다.
설풍의 뒤에서 여유롭게 상황을 살피던 선우진은 그들이 앞으로 뛰어나오는 순간 진소은에게 전음을 보냈다.
- 진 소저.
- 네!
그러자 진소은 역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앞으로 튀어 나갔다.
설풍을 향해 합격술을 펼치려던 여등삼검을 향해서였다.
“하아압!”
그녀의 등장에 기습을 방해받은 여등삼검이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음?!”
“계집 따위가!”
“당장 꺼져라!”
그 순간이었다.
진소은의 목봉이 살아 있는 용처럼 휘돌며 공간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자연곤의 등장이었다.
휘리리리리릭!
그것은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구름 사이로 휘도는 신룡이 또아리를 틀며 앞을 가로막은 듯한 모습.
설풍의 앞을 가로막은 철벽과도 같은 자연곤의 위용에 여등삼검의 검들은 설풍에게 닿기는커녕 속절없이 튕겨 나갈 수밖에 없었다.
타다다다다당!
“크윽!”
“이, 이런?!”
“무슨 곤법이?!”
그러자 그 광경을 본 괴항기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일그러졌다.
자신의 직속 수하들인 여등삼검이 너무도 무력하게 튕겨 나가는 모습에 수치심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괴항기의 뒤에서 다시 한 명이 튀어나왔다.
커다란 체격의 털북숭이 무인이었다.
“제법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그는 괴항기의 직속 수하 중 유일한 초절정의 무인인 단악패부 고상종이란 자였다.
괴항기의 가장 강력한 무력이라 할 수 있는 자.
그의 대부가 바위라도 단숨에 쪼갤 듯한 기세로 진소은이 만든 방벽을 찍어 갔다.
슈하악!
그를 본 사왕련의 무인들이 소리쳤다.
“단악패부!”
“고 노사가 나왔다!”
“드디어!”
그러자 괴항기의 표정이 약간 밝아졌다.
초절정의 고수인 고상종이 나선 이상 설풍의 부하들 따위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선우진이 다시 전음을 보냈다.
- 연 소저.
그러자 전음을 들은 연태진이 생긋 웃으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맡겨 둬!”
다음 순간, 고상종의 대부가 연태진의 정권과 충돌했다.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충돌음, 마치 포탄이 폭발한 것만 같은 굉음이었다.
고상종은 눈에 이채를 띤 채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자신의 대부를 정면으로 튕겨 내다니, 심지어 그 상대가 저렇게 가녀려 보이는 여인이라니.
이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세 걸음 뒤로 물러섰던 연태진이 남자처럼 씨익 웃으며 자신의 양 주먹을 꽝 부딪쳤다.
쾅!
“이야! 짜릿한데?! 못생긴 주제에 생각보다 제법이야? 자, 이제 제대로 붙어 볼까, 털보?!”
“…뭐라고?”
고상종이 이를 갈며 반문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다시 함부로 달려들지 못했다.
얼핏 두 사람의 물러난 거리만 보면 두 걸음을 물러선 고상종이 세 걸음을 물러난 연태진보다 조금 더 우위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체격이 훨씬 더 작은 연태진이 고작 한 걸음밖에 더 물러서지 않았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무인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고상종의 공력은 연태진에 비해 열세였다.
그때였다.
연태진이 고상종과 대치하고 있는 사이, 이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설풍이 뚜벅뚜벅 걸어 마침내 괴항기의 앞까지 도달했다.
그가 괴항기를 향해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더 방해할 사람이 없나 보지? 그럼 일단 좀 맞고 얘기할까?”
괴항기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설풍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비슷한 체격을 지닌 설풍이건만 마치 거대한 산맥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느낌은 마치….’
그는 문득 지금의 설풍과 비슷한 느낌을 줬던 몇 명의 사람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육 숙부나 맹 숙부?’
무심코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던 괴항기는 문득 그들이 모두 천하삼십육성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고수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괴항기의 본능이 설풍을 천하삼십육성급 고수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가 질린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 그럴 리가 없다. 너 따위가 그런 경지에 올랐을 리가….”
그러자 설풍이 괴항기의 눈앞으로 천천히 주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뭐가 그럴 리 없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놈의 말버릇은 고쳐지지를 않는군. 역시 좀 맞아야 쓰겠어.”
괴항기는 창백해진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 위로 올린 설풍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의 주먹과 비슷한 크기일진대 마치 거인의 그것처럼 거대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왕의 아들 중 한 명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거기까지만 하지.”
조용한 목소리, 하지만 강력한 힘과 분위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순간 장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러자 목소리의 주인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사왕의 아들들 중에서도 가장 뒤쪽에 서 있던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였다.
그를 본 괴항기가 구원을 받은 듯한 표정으로 이름을 외쳤다.
“저, 정기 형님!”
괴항기의 말을 통해 설풍은 그가 괴정기임을 알 수 있었다.
괴정기라면 사왕의 첫째 아들로 형제들 중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평가받고 있는 자였다.
‘나이가 아마 스물여덟, 나와 동갑이었지.’
그의 나이를 잠시 떠올렸던 설풍이 피식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내가 왜?”
그러자 잠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설풍을 바라보던 그가 대답했다.
“못난 동생이지만 다른 자에게 얻어맞는 걸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만약 계속 하겠다면 너는 나를 먼저 상대해야 할 거다.”
괴정기.
현 사왕련의 이인자인 만성국의 외손자로 사왕의 아들들 중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이였다.
미리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의 세력은 벌써부터 사왕련 내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괴정기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무인들의 질과 수도 사왕련의 무력대와 필적했고,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무인들은 아예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무공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세력과 무공 모든 면에 있어서 다음 대 사왕에 가장 가까이 위치해 있다고 알려진 자.
그게 바로 괴정기였던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그와 대립하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만약 그에게 찍힐 경우 자칫 잘못하면 사왕련에서 자리를 잡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괴정기의 경고를 들은 설풍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래? 너를 상대해야 한다고?”
그 순간이었다.
설풍의 입가에 갑자기 씨익 웃음이 맺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설풍의 주먹은 괴항기를 가차 없이 후려쳤다.
퍼어억!
“크어어어억!”
쿠당탕탕탕!
방어조차 하지 못한 괴항기는 설풍의 일격에 뒤로 튕겨 나가 꼴사납게 땅을 뒹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저, 저…!”
“헉!”
“!”
아까부터 괴항기를 압도하고 있던 설풍이 그를 때렸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괴정기의 경고를 무시했다는 건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다.
사왕의 아들들 중 가장 영향력이 큰 그와 정면으로 대립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늘 무표정했던 괴정기의 얼굴에 드디어 하나의 감정이 떠올랐다.
바로 분노라는 감정이었다.
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설풍을 쏘아볼 때였다.
설풍이 비릿하게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자, 이제 너를 상대하면 되나?”
그 말에 괴정기의 눈이 움찔했다.
자신과 적대하는 것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상대하고 싶어 일부러 괴항기를 때리다니.
늘 남들에게 두려움을 사기만 해왔던 그로선 여태껏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 순간 설풍의 귀에 선우진의 전음이 들어왔다.
- 아주 시원한 말이었습니다, 형님.
그 목소리를 들은 설풍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사실 조금 전, 자신을 상대해야 할 거라는 괴정기의 경고에 설풍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도 선우진의 전음이 들려왔었다.
‘동생을 대신해 형님을 상대하겠다니, 미친놈이로군요.’라는 전음이었다.
설풍은 선우진의 그 말이 망설일 필요가 없다는 뜻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성질대로 과감하게 나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였다.
괴정기의 뒤에 서 있던 자가 설풍의 행동에 참지 못하고 튀어 나가며 외쳤다.
“이놈! 감히!”
그는 괴정기의 수하 중 두 번째의 실력자인 초절정 고수 백골괴장 홍추였다.
사람의 두개골을 엮어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무기인 괴장에도 큰 두개골을 장식한 그는 오래전부터 악명을 떨쳐 왔던 사파의 거두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백골 괴장이 설풍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휘둘러졌다.
부아아아아앙!
하지만 그의 괴장은 설풍에게 닿을 수 없었다.
어느새 그사이에 나타난 증칠이 허공에서 빙글 회전하며 그의 괴장을 후려 차 버렸기 때문이었다.
콰아아아아앙!
“크윽!”
백골괴장 홍추는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뒷걸음질 쳐야만 했다.
반면 공중에서 그를 후려 차고도 안정되게 착지한 증칠은 경박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크헤헤헤헤! 홍가 놈아, 안 그래도 흉물스러운 상판대기에 흉물스러운 무기까지 들고 다니는 건 여전하구나!”
그러자 증칠의 얼굴을 알아본 홍추가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홍해아?! 네놈이 어떻게!”
홍해아 증칠과 백골괴장 홍추는 예전에도 몇 번 붙어 본 적이 있었던 사이였다.
그때 두 사람은 끝까지 승부를 내지 못하고는 동귀어진 직전에 서로 손을 멈춰야 했었다.
하지만 십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맞붙어 본 두 사람의 표정은 극명한 온도 차이를 보여 주고 있었다.
선우진에게서 뇌신의 무공이었던 풍룡퇴법을 배운 데다 수많은 고수들을 만나며 사선을 넘어온 증칠의 실력이 과거보다 훨씬 진보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단 한 순간의 부딪침이었지만 백골괴장 홍추는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중간에 끼어들어 자신의 괴장을 너무 쉽게, 그리고 정확하게 후려 찬 증칠의 실력이 자신보다 확실히 위라는 것을.
그래서 홍추가 분노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다시 달려드는 것을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괴정기의 눈은 이제 자신의 뒤에 가만히 서 있는 노인에게로 향했다.
뱀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한 채 긴 직도를 들고 있는 깡마른 흑의노인이었다.
괴정기가 입을 열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백 노사.”
그러자 흑의노인이 귀찮은 듯한 눈빛으로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만 결국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장내에 있던 사왕련의 인물들이 모두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귀도.”
“백 어르신께서….”
그러자 괴정기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맺혔다.
한번 움직이게 하기는 힘들지만 일단 그가 손을 쓰기로 한 이상 장내에 있는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몇십 년 전부터 동해의 살인귀로 유명했던 귀도 백기량이란 자였다.
또한 천하삼십육성은 아니지만 천하삼십육성에 가장 근접한 이들을 뽑을 때 절대 빠지지 않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런 그보다 우위에 있는 무인은 천하삼대세력인 사왕련 내에서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니 괴정기는 전혀 의심치 않았다.
늘 그랬듯 그가 괴정기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걸.
하지만 그런 백기량이 설풍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동시에 설풍의 뒤에서도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그는 설풍의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백기량의 진로 앞에서 비스듬히 선 채로 걸음을 멈췄다.
감히 동해의 살인귀이자 천하삼십육성에 근접한 고수 귀도 백기량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노골적으로 백기량의 앞을 막은 것에 한 번 경악하고, 그런 그가 아직 이십 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빼어난 외모의 청년이라는 사실에 두 번 경악했다.
꿀꺽!
그는 바로 선우진이었다.
백기량과 설풍 사이를 가로막은 선우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귀도 백기량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음 지었다.
그러자 걸음을 멈춘 백기량의 눈이 살짝 꿈틀거렸다.
백기량은 금방이라도 도를 뽑을 듯 천천히 손을 올려 도파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선우진 역시 검집을 잡고 있던 왼손 엄지손가락만 살짝 움직여 묵랑검을 검집 밖으로 밀어 올렸다.
스릉!
허공에서 백기량과 선우진의 눈빛이 충돌했다.
뱀처럼 예리하게 빛나는 백기량의 눈과 여전히 여유 있게 웃음 짓고 있는 선우진의 눈이었다.
그 모습을 본 사왕련의 사람들이 속삭였다.
“바로 죽겠군.”
“아아, 무모한 놈이야.”
사람들은 주제도 모르고 끼어든 젊은 놈이 단칼에 죽게 될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가 누군지도 모르는 데다 지나치게 젊은 선우진이 상대하기엔 귀도 백기량이라는 자가 너무 엄청난 괴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왕련의 모든 무사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백기량은 어째서인지 도를 뽑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멈춰선 채 선우진과 눈빛만을 교환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이상한 상황이 지속되자 괴정기가 눈살을 찌푸린 채 다시 입을 열었다.
“백 노사?”
하지만 백기량은 그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답은커녕 괴정기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선우진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일생의 대적을 만난 듯한 표정이었다.
“설마….”
“저, 저게….”
사람들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백기량이 도를 뽑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를 뽑지 못하고 있음을.
모두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저, 저럴 수가!”
“대체 저자가 누구기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기량이 도를 뽑는 대신 입을 열어 선우진에게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젊은 놈들 중 너 같은 놈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그의 물음에 선우진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노인장의 얘기를 많이 들어 봤소. 근데… 듣던 것보단 별로구려. 무척 실망했소.”
그 건방진 말에 모두가 경악했다.
극강의 고수이자 살인귀인 귀도 백기량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목숨이 몇 개라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 보게 된 광경은 더욱 놀라웠다.
선우진의 무례한 말에 이를 악문 백기량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를 뽑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
백기량은 당장이라도 도를 뽑아 놈을 베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칠십이 넘도록 피바다를 뒹군 그의 감이 말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를 뽑으면 죽게 된다.’
백기량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여유 있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젊은 놈이 마치 한 자루의 검처럼 보이고 있었다.
백기량은 결코 약한 자가 아니었다.
수십 년을 피바다에서 뒹군 그의 무공은 분명 무척 고강한 수준이었다.
선우진이 만난 고수들 중에선 그를 무척 힘들게 했던 혈해마도 윤삭과도 비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지금의 선우진에게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혈해마도 윤삭을 죽이고 다시 한번 벽을 넘어 천하삼십육성 중 한 명인 해남마검 진태도마저 잡아냈던 선우진에게 있어서, 그는 언제라도 죽일 수 있는 하수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백기량이 지독한 치욕을 느끼면서도 차마 도를 뽑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설풍이 괴정기에게 뚜벅뚜벅 걸어가며 물었다.
“자, 이제는 직접 나올 생각이 드나?”
그의 말에 괴정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언제 어디서든 늘 무표정했던 그의 얼굴이 오늘따라 드물게 많은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