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양주동가-1
모두가 나가고 텅 빈 본전.
사왕 괴갈현은 홀로 가만히 용좌에 앉아 있었다.
눈을 감은 채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피곤해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사실 자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사왕전 안에 있는 그 누구보다 더 명료한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눈을 감은 채 명상을 하는 듯하던 그의 입이 어느새 호선을 그리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제법이군. 그렇지 않은가?”
그러자 아무도 없던 텅 빈 공간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정도라면 천하삼십육성의 말석에 있는 자들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듯하군요. 괴정기 공자보단 확실한 우위, 괴창기 공자와는 호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왕 괴갈현은 지금 자리에 앉은 채 사왕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천하제이인자인 그의 무위라면 사왕전 바깥도 손바닥 보듯 살펴볼 수 있으니 이 정도쯤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자 또한 사왕과 같이 다른 공간에 있는 후계자들을 살피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왕의 그림자였음에도 그랬다.
사왕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휘염, 자네의 감각에는 그렇게 보였나 보군.”
그러자 휘염이라 불린 사왕의 그림자가 잠시 조용히 후계자들을 살펴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 공자 때처럼 제가 못 본 다른 뭔가를 보신 모양이로군요.”
사왕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희미하게 웃음 지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사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아이의 생김새를 보고 느껴지는 건 없던가?”
그러자 휘염이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그의 아버지, 설천후를 많이 닮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괴가의 후예들처럼 체격이 건장하더군요. 다만 이목구비에는 그의 어머니, 동아연 아가씨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그래, 그렇더군.”
휘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사왕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아들들이 다음 대 사왕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하고 있듯, 예전의 사왕 괴갈현에게도 역시 그만큼 간절하게 얻고 싶었던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너무나도 소중하고, 그것 하나만 있다면 다른 것들은 모두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유일한 한 가지가.
그래서 괴갈현은 결국 그것을 얻기 위해 그가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모든 가치들을 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어쩔 수 없었던, 너무나도 당연하고 또 너무나도 쉬웠던 선택이었다.
그때 괴갈현은 알게 되었다.
어떤 것들은 모든 것을 포기해도 얻을 수 없다는 걸.
아무리 애쓰고 발버둥 쳐도 하늘이 허락해 주지 않는 것들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후, 괴갈현은 이를 악물고 결심했었다.
모든 것을 가져 보겠다고.
끝내 하늘이 그걸 허락해 주지 않겠다면, 그 한 가지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은 다 가져 버리겠다고….
그런 괴갈현의 현재 목표는 사왕련의 련주들이 대대로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했던 천하제일인의 명예를 갖는 것이었다.
혈랑검제 반중양을 꺾고 이 시대의 천하제일인으로서 이름을 남기는 것.
그것만이 지금 괴갈현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삶의 목표였다.
그래서 괴갈현은 빠르게 련주의 자리를 아들들에게 넘기고 수련에 매진할 생각이었다.
적어도 오늘 이전까지는 그랬었다.
사왕 괴갈현은 희미하게 웃음 지으며 자신에게 새로운 삶의 활력을 선물해 준 이의 이름을 되뇌어 봤다.
“설풍이라….”
***
선우진 일행들은 바로 서쪽으로 출발했다.
양주동가를 향해서였다.
사왕련이 있는 태주에서 양주동가가 위치한 양주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직선거리로만 따지면 초절정 고수들에겐 고작 하룻길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다만 그 길의 중간엔 장강이 위치해 있었다.
맞은편도 잘 보이지 않는 바다처럼 넓은 강을 건너야 한다는 얘기였다.
선우진이 일행들에게 말했다.
“예전 해남파와의 싸움 때 경험해 보셨겠지만 장강에서의 싸움은 육지에서의 싸움과 전혀 다를 겁니다. 그러니 만약 습격이 있다면 그곳에서겠죠.”
그의 말에 연태진이 물었다.
“습격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 질문에 선우진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반반입니다. 저는 괴정기라는 자가 우리가 강소성을 벗어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주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아마도 분명히 뭔가를 하려 하겠죠. 다만 그게 장강에서일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 장강이라. 그거 골치 아프겠네.”
일행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모두가 해전에서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만약 장강에서 적들이 집단적으로 습격해 온다면 무척 곤란할 것임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며 선우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차라리 습격이 있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지. 습격이 없다는 건 아마도….’
선우진은 양주동가가 있을 서쪽 하늘을 바라봤다.
태양이 중천에서부터 중간쯤 내려와 있었다.
시간을 봤을 때 아마 장강에 도착할 때쯤엔 저 태양도 지평선에 도달할 것 같았다.
장강 너머로 지고 있는 태양을 보게 될 거란 얘기였다.
‘지고 있는 태양이라.’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연 현상에 굳이 의미를 찾을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느낌을 신뢰하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느낌은 때로 머리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을 때가 있으니 말이다.
선우진은 일행들에게 말했다.
“최대한 빠르게 이동하죠. 해가 지기 전에 장강에 도착하고 싶군요. 어쩌면 저들이 손을 쓰기 전에 장강을 건널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의 말에 일행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장강에서의 수전을 피할 수 있다면 고작 달리는 것 정도가 어려울 리 없었다.
***
바람처럼 내달린 일행들이 장강에 도착한 시각은 선우진이 말한 것처럼 아직 해가 장강 위에 도달하지 않았을 때였다.
진소은은 맞은편 너머에 육지가 아닌 수평선이 보이는 장강의 거대함에 탄성을 터트렸다.
마치 진짜 바다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와아아! 저게 진짜 강이라고요?!”
언뜻언뜻 맞은 편 육지가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강 건너편이라기 보단 바다위의 섬처럼 보이고 있었다.
소주에서 태주로 이동하며 이미 장강을 한 번 넘어보긴 했었지만, 이쪽은 그곳에 비해 강폭이 훨씬 넓은 모양이었다.
바다를 떠올리게 해주는 광활한 장강을 바라보며 진소은은 문득 광주를 떠올렸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번도 떠난 적이 없었던 그녀의 고향을 말이다.
태어날 때는 광주의 진가장에서, 아홉 살 때부턴 광주의 외딴 산에서 무공을 익히며 한번도 그곳을 벗어난 적 없었던 그녀는, 불과 한두 달이라는 시간 만에 사왕련의 소굴인 강소성으로 건너 와 바다처럼 넓은 장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생각하니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된 거지?’
그뿐인가?
자연곤을 부활시키는 것만이 삶의 목적이었던 자신이 어느새 당연하게도 자연곤을 익혀서는 해남마검 진태도의 해남파와 싸우고 마경과 성녀를 만나더니, 이젠 천하제이인자인 사왕까지 만나지 않았던가.
그것도 사왕의 후계자 후보 한 명과 함께 말이다.
우물에 살던 개구리를 바다에 던진다고 해도 자신만큼이나 삶의 규모가 달라졌을까 싶을 정도였다.
‘이런 걸 상전벽해라고 하는 건가?’
하지만 상전벽해도 시간이 흐른 후의 일이지 자신처럼 순식간에 변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진소은은 문득 이 모든 변화를 만들어준 원인을 바라보았다.
‘선우 공자.’
그는 장강에 도착하자마자 강을 건널 수 있는 배를 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큰 배 하나를 빌리기 위해 가격을 흥정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늘 그랬듯 놀라웠다.
저 사람이 할 수 없는 게 과연 있기나 할까 싶을 정도였다.
선우진은 곧 사공과 흥정을 끝내고는 환하게 웃으며 일행들에게 돌아와 말했다.
“얘기가 잘 됐습니다. 야간에 강을 건너는 것도 가능하다는군요. 바로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배 크기도 꽤 크니 육합검수들도 모두 함께 강을 건널 수 있겠군요.”
육합검수들과 흑표 삭월은 사왕련이 있는 태주로 들어갔을 때부터 다시 일행과 떨어져 은신한 채 따라오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강을 건널 땐 그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기에 일부러 큰 배를 빌린 것이었다.
진소은은 자신의 어깨에 탄 채 늘어져 있는 운묘 백아의 털을 긁어주며 설풍과 대화하고 있는 선우진을 멍하니 바라봤다.
자신의 삶은 그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었다.
그를 만난 이후 삶의 종류와 규모가 갑자기 극단적으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마치 커다란 폭풍에 휩쓸려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것처럼 말이지.’
그를 만난 이후 그녀의 삶은 늘 바빴고, 늘 위험했으며, 늘 새로웠다.
한마디로 역동적이었다.
그건 사실 다소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인 진소은에게 있어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도 보라.
배를 타고 출발했지만 장강을 건너는 내내 습격을 경계하고 있지 않은가?
선우 공자가 습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했기에 일행 중 누구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해가 지고 주변에 불을 켠 배가 일행들의 배밖에 없음에도 그랬다.
지금 당장 잔잔하고 어두운 강물 저 너머에서 습격자들이 조용히 다가오고 있다고 해도 일행 중 누구도 놀라지 않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선우 공자가 이미 그렇게 말했으니까 말이다.
계속 긴장하며 경계하고 있던 모두는 맞은편 강 너머의 불빛이 보이는 곳까지 왔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연태진, 연 언니가 그제야 웃으며 말했다.
“어째 진짜 아무 일도 없이 건너갈 모양인데? 우리 똑똑이 선우 공자의 예상이 틀릴 때도 있네?”
그 말에 선우 공자 또한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다행이로군요.”
이게 바로 지금 진소은의 일상이었다.
늘 습격을 경계해야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감사해야 하는 그런 생활.
하지만 그래서 지금이 싫으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진소은은 자신 있게 고개를 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의 진소은 자신에겐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조부와 산속의 동식물들 뿐.
그녀에겐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육지에 발을 디딘 진소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행들에게 말했다.
“휴우, 솔직히 많이 긴장했는데 다행이네요. 예전 해남파 때처럼 물 한가운데에서 수십 척의 배에 둘러싸이면 어떻게 하지 싶었거든요.”
그러자 증칠이 코웃음을 치며 큰소리를 쳤다.
“헹! 이 증 어르신이 있는데 수십 척의 배 따위가 뭐가 무섭단 말이냐?! 짧은 머리 계집아, 너는 좀 더 네 일행들을 믿을 필요가 있다!”
진소은은 그 말을 들은 설풍과 선우진이 슬쩍 시선을 교환하며 웃음 짓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웃음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예전 증칠이 해남파의 오익덕에게 물 위로 공처럼 튕겨지며 희롱당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소은은 굳이 그 얘기를 꺼내 증칠을 무안주려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네, 그럴게요. 증 선배님.”
증칠은 자기는 진소은을 짧은 머리 계집이라고 부르는 주제에 늘 진소은에게는 자신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라고 요구하곤 했다.
하지만 진소은은 아직 그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오라버니라는 말이 어쩐지 어색하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었다.
그건 진짜 어색해서일 뿐 결코 그가 부담스러워서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한다면 진소은은 사실 증칠을 좋아했다.
늘 경박하게 웃고 생각 없는 말만 하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다른 어떤 누구보다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란 사실을….
사람이 조금 경박하면 어떻단 말인가?
그가 없었다면 일행들의 여정은 지금보다 훨씬 조용하고, 훨씬 더 심심해졌을 것이었다.
약간의 짠 맛이 더해져 고기의 맛이 살아나듯 그가 있어 일행의 여정은 훨씬 더 즐겁고 역동적이 될 수 있었다.
진소은이 그렇게 증칠을 배려해 주고 있을 때였다.
연태진이 문득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더니만 매혹적인 표정으로 다가와 증칠의 말에 대꾸했다.
“어머, 증 오라버니께서 소은 동생에게 물 위에서의 싸움을 자신할 정도로 수공에 능하신 건 처음 알았네요. 무려 광동 진가장 출신인 소은 동생에게 말이에요. 역시 대단하세요.”
아름다운 얼굴과 사람을 유혹하는 듯한 매혹적인 표정이었지만, 일행들은 그녀의 눈이 장난기 가득한 고양이 같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증칠의 허풍을 받아 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