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양주동가-2
증칠이 흠칫했다.
진가장이 위치한 광주는 그야말로 물의 도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수로가 발달한 곳이었다.
그러니 그곳 출신인 진소은이 수공에 약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증칠은 연태진의 말을 듣고서야 수공에 약한 자신이 진가장 출신인 진소은에게 물 위의 싸움에 대해 논하는 건 그야말로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쓴 격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리려 했다.
“흠, 흠, 뭐 꼭 수공에 능하다기보다는…. 아 참,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바로 출발해야 하는 거 아니냐? 놈들이 뒤늦게라도 추격해 올 수 있지 않으냐?”
하지만 한번 먹이를 문 연태진은 결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가 증칠에게 말했다.
“어머! 추격 따위가 뭐가 걱정이겠어요? 증 오라버니와 함께 있는데요. 그죠? 오히려 적들이 추격해 오면 증 오라버니의 뛰어난 수공을 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아, 기대되라! 빨리 적들이 추격해 왔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말한 연태진은 두 손을 꼭 모으고는 진짜 적들을 기다리듯 강 너머를 바라봤다.
그러자 마음이 켕긴 증칠이 그녀에게 말했다.
“아, 아니, 뭘 기다리기까지야. 안 싸우면 더 좋은 거지. 수공이야 언젠가 나중에 보여 줄 기회가….”
그때였다.
연태진이 갑자기 소리쳤다.
“아, 적이!”
그 말에 증칠이 화들짝 놀라 강 너머를 살피며 급히 물었다.
“저, 적이라고?! 어디?! 어디에서 온다는 거냐?!”
증칠은 진심으로 당황한 표정이었다.
사실 지난번 해남파의 오익덕에게 당한 이후로 증칠은 수전이라면 치를 떨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하필 이렇게 허풍을 떨었던 상황에 진짜로 적들이 나타났다니.
그로선 끔찍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연태진과 진소은 앞에서 망신을 당할 자신의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증칠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저 헐벗은 계집이 또 나를 얼마나 놀려 댈까? 이 망할 놈들, 왜 하필 지금 나타나는 거냐?!’
그렇게 증칠이 보이지 않는 적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을 때였다.
참다 못한 진소은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연태진의 놀림에 넘어간 증칠의 모습이 너무 웃겼기 때문이었다.
진소은의 웃음에 증칠이 바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연태진이 매혹적으로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저기, 저기가 참 어두워 보이네요. 꼭 귀신이 나올 것 같은 거 있죠?”
‘저기? 적이 아니고 저기?’
잠시 멍해졌던 증칠은 그제야 연태진이 자신을 놀렸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분노한 표정으로 연태진에게 소리치려 했다.
“이, 이 헐벗은 계집, 네가 감히!”
그러자 연태진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증 오라버니는 왜 그러시나요? 수공의 대가이신 증 오라버니가 설마 적을 걱정하셨던 건 아닐 테고, 혹시 오라버니도 귀신이 무서우셨던 건가요?
그녀의 질문에 증칠은 결국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놀린 것을 따지자니 먼저 자신이 수공에 무지하다는 것부터 인정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분노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한 채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증칠의 모습에 진소은은 다시 웃음을 참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만 했다.
연태진은 그런 진소은을 슬쩍 바라보며 눈을 찡긋해 보였다.
같은 여자인 진소은이 봐도 매혹적인 표정이 아닐 수 없었다.
진소은은 문득 맨 처음 연태진과 만났을 때를 떠올려 봤다.
처음엔 사파 출신이라는 점도 그렇고, 저 방만한 옷차림도 그렇고, 도무지 자신과 친해질 수 없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친자매처럼 친해진 지금 진소은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를.
진소은이 아는 어떤 여인도 그녀만큼 당차지 못했고, 그녀만큼 스스로의 삶에 충실하지도 못했다.
물론 아직도 연태진이 설풍에게 보이곤 하는 노골적인 애정표현들은 잘 적응이 안 되긴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젠 알 수 있게 됐다.
그녀의 그런 표현들도 다 그녀가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충실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거라는 걸.
진소은은 그런 그녀가 참 멋있었다.
지금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녀를 닮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였다.
설풍이 갑자기 말했다.
“누군가 진짜 오는군요.”
그 말에 삐져있던 증칠이 다시 화들짝 놀랐다.
설풍이 자기를 놀리기 위해 장난을 칠 리 없었다.
그가 왔다고 말하면 진짜 온 것이었다.
“누, 누가 온다는 건가?! 어디?! 어디에 있는데?!”
그때 진소은은 문득 주변이 아닌 설풍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랬다.
그가 누군가 왔다고 말했다면 정말 누군가 온 것이었고, 설사 수많은 초절정 고수가 포위하고 있다고 해도 그가 상대할 수 있다고 말하면 상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설풍은 그런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선우진 같은 사람이 다시는 없을 거라고 믿고 있었던 진소은은 설풍을 만나고 나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선우진과 같은 사람이야 또 없겠지만 선우진만큼 멋있는 사람은 또 있을 수 있다는 걸.
설풍의 엄청난 무위와 놀라운 출생의 비밀은 그야말로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법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매력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가 늘 보여주는 진중함, 때때로 보여 주는 부드러운 미소와 배려, 결정을 내렸을 때 보여 주곤 하는 야수 같은 박력.
연태진이 그에게 반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진소은 또한 만약 선우진 이전에 그를 먼저 만났다면 그녀 역시 설풍에게 반하지 않았을까 생각될 정도였다.
‘물론 그랬다면 언니와 연적이 됬겠지?’
문득 그런 생각에 진소은은 피식 웃음 지었다.
하지만 설풍 공자에게 정인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도 그다지 상관하지 않는 연태진을 보면 설사 그랬다 해도 잘 지낼 수 있었을 것 같기도 했다.
‘언니는 또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내게 그렇게 말했겠지?’
- 소은이 너보단 내가 더 예쁘잖아? 내가 더 강하고 능력 있지. 그러니까 풍에게도 내가 더 도움이 될 거야. 안 그래?
만약 그랬다면 진소은 자신은 또 아무 말도 못한 채 기가 엄청 죽었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어두운 강물을 향해 휙휙 고개를 돌리고 있는 증칠과 달리 선우진이 뒤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쪽이 아니라 이쪽입니다. 여러 명이로군요. 짙은 피 냄새도 풍기고 있습니다.”
“엥?”
증칠은 그제야 설풍과 선우진의 시선이 강 쪽이 아닌 등 뒤의 육지 쪽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깊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의 모습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그는 진짜로 수전이 많이 부담됐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증칠은 역시 증칠이었다.
언제 걱정을 했냐는 듯 다시 호기로운 목소리로 큰소리쳤다.
“이 기회에 내 수공 실력을 보여 주려고 했더니만 아쉽게 됐구나! 어쩔 수 없이 이 증 어르신의 육전 실력을 또 보여 줘야겠군! 그래서 어떤 놈들인가, 아우? 어떤 놈들이 또 죽고 싶어서 우리를 공격한다는 건가?”
그러자 설풍과 선우진이 시선을 교환했다.
어쩐지 그들의 표정이 아까보다 훨씬 무거워 보이고 있었다.
선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적은 아닌 것 같군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설풍 또한 말했다.
“일단 가 보지요. 가서 상황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머지 일행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선우진과 설풍을 따라 몸을 날렸다.
그들은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을 따라 약간 움직인 일행들은 곧 아까 선우진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증칠이 인상을 팍 찡그리며 말했다.
“뭐야, 이 피 냄새는? 뭐 전쟁이라도 난 거야?”
지독한 피 냄새였다.
바람의 방향을 제대로 탄 역한 피 냄새가 일행들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땅에 착지한 일행들은 눈앞에 보이는 지독한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으으으으.”
“누가 좀… 우리를….”
“제발, 제발 도와주시오.”
그들이 목격한 광경은 온통 피칠갑을 한 사람들이 기어가듯 장강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모두가 이미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끔찍한 부상을 입은 모습들.
그런 부상을 입고도 앞으로 기어가는 이들의 모습은 너무도 처절했다.
선우진은 이를 악물었다.
처음 부상당한 듯한 사람들의 기척을 느꼈을 땐 그들이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일부러 부상당한 척 경계를 풀고 기습하려는 속셈일 수도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실제 그들을 보니 절대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모두 일곱 명인 그들은 두 다리만 붙어 있을 뿐 팔 한 짝이 떨어진 자, 등에 깊은 칼자국이 나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자 등 누구 하나 멀쩡한 자가 없었다.
함정은커녕 오히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아 보였다.
아니, 그런 상처를 입고 움직이고 있는 게 더 신기할 지경이었다.
일행들은 급히 그들에게 달려갔다.
“이보시오! 대체 무슨 일이요?!”
“괜찮으세요?!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이봐! 정신 차려! 지금 의식을 잃으면 죽어!”
그러자 처음엔 흠칫 놀란 기색을 보였던 그들은 곧 일행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사정하기 시작했다.
“도, 도와주시오. 뒤에, 뒤에 아이들이….”
“부탁하오. 제발 아이들을….”
일행은 이렇게 심한 부상을 입고도 그들이 움직였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도와줄 사람을 찾아 죽을힘을 다해 강가의 포구 쪽으로 기어왔던 모양이었다.
선우진은 이를 악물고는 상태가 심각한 사람들부터 급히 응급 처치를 시작했다.
잘만 치료하면 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들 중 그나마 상태가 나은 이를 치료하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누가 이런 겁니까?”
그러자 한쪽 팔이 잘린 남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마, 마적단이오. 마적단이 우리를….”
그 말에 일행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마적단이라고요?”
그건 일행들에게 있어 무척 낯선 단어였다.
대부분 산지와 밀림으로 되어 있는 운남성과 귀주성 출신의 설풍과 선우진도, 온통 수로가 가득한 광서성 출신의 진소은과 연태진도 산적이나 해적이면 모를까 마적은 아직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남부 지방일수록 말이 귀하고 비싸기도 했다.
게다가 무림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고작 마적떼들에게 이런 꼴이 되었다는 것도 이상했다.
일곱 명 중 다섯 명은 일류 최상급, 심지어 두 명은 절정 초입으로 보이고 있었다.
이 정도 수준의 무인들을 이런 꼴로 만든 마적떼라니, 어떤 놈들인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일행들은 일단 거기까지만 듣고 먼저 사람들을 구하는 일부터 집중하기로 했다.
이대로 뒀다간 대부분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의술을 펼칠 수 있는 선우진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시점이었다.
선우진이 설풍과 증칠을 보며 급히 말했다.
“이들이 온 방향 쪽으로 가서 살펴 주십시오! 아이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알았네!”
“이 형님께 맡기거라!”
설풍과 증칠이 빛살처럼 튀어 나가자, 선우진은 이제 진소은과 연태진에게 말했다.
“두 분은 독한 술과 깨끗한 천을 좀 준비해 주십시오! 술은 증칠 형님의 등짐에 있을 겁니다!”
“알았어!”
“네! 알겠어요!”
선우진을 도와 사람들을 지혈하고 치료하며 진소은은 문득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는 선우진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이야 이미 그를 연모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설사 그렇지 않았다 해도 저 모습을 봤다면 다시 반했을 것만 같았다.
비록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그의 진실된 눈빛도, 엄청난 무위를 가진 무사이면서 동시에 능숙하게 침을 놓고 있는 그의 의술도 모두 너무 멋있었다.
잘생긴 외모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후우우우.”
진소은은 자기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욱신거리고 있었다.
진소은은 얼마 전 설풍에게 정인이 있어도 상관없다는 연태진의 말을 듣고는, 그녀를 전보다 더 존경하게 되고 말았다.
자신은 그녀처럼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우 공자에겐 이미 약혼자가 있다.’
이젠 그 사실을 그냥 담담히 받아들일 때도 됐건만, 아직도 문득 그 사실을 떠올릴 때면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파오고 눈에 눈물이 맺히곤 했다.
예전처럼 바보같이 넋을 놓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좀처럼 냉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연태진처럼 되는 건, 아무래도 진소은에게 너무 힘든 일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좀 지나 약이 되어 준 건지, 진소은은 요즘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의 사랑을 받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 아니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 덕분에 이런 즐거운 여정을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말이다.
그렇기에 진소은은 늘 감사한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했다.
그와 만나며 얻게 된 많은 것들에.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에.
그리고 그냥 그의 존재 그 자체에….
선우진의 옆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진소은은 문득 스스로를 향해 기원했다.
‘부끄러운 열등감에 움츠러들지 않기를. 추악한 질투심에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기를. 그리고 언제까지나 지금의 감사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기를….’
그게 지금 진소은이 스스로에게 바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