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혈풍사-1
한두 필의 말이 아닌 대단히 많은 수의 말이 내달리고 있는 소리였다.
심지어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았다.
추제구가 굳은 얼굴로 경고했다.
“후방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놈들인 것 같군.”
“예?”
잠시 당황했던 육두생은 바로 표정을 바꾸고는 침착하게 소리쳤다.
“후방에서 마적단으로 보이는 자들이 접근 중이다! 모든 표사들은 대비하라!”
그러자 육합표국의 표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표두들을 중심으로 후방을 두텁게 감싸면서도 전방 역시 주의를 기울이는 노련한 모습이었다.
추제구는 육합표국 표사들의 능숙한 움직임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고는 후방 쪽으로 천천히 말을 몰아갔다.
일행 중 가장 고수인 자신이 일선에 나서 제일 먼저 적을 맞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후방으로 가는 동안 추제구의 표정은 점점 더 심각해져 가기 시작했다.
‘말발굽 소리가….’
추제구는 아까 말발굽 소리를 듣고는 마적들과의 거리가 꽤 가까울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들과의 거리는 아직 꽤 먼 상태였다.
그 증거로 아직도 적들의 모습이 시야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소리가 들렸다는 건….’
꿀꺽.
추제구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마침내 저 멀리 언덕 너머로 뿌연 흙먼지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두두두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소리.
곧이어 언덕 위로 작은 점들이 드러났다.
마적단이었다.
처음에 하나둘 나타났던 점들이 순식간에 주변으로 좌악 퍼져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육두생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놈들의 수가….”
추제국 또한 눈으로 적들을 훑으며 망연하게 물었다.
“저게… 마적단이라고?”
적들의 수가 지나치게 많았다.
아무리 못해도 천 명 이상은 될 법해 보이는 마적들.
저 정도면 마적이라기보다 기마 병단에 가깝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두두두두두두두!
“이이하!”
“크하하하하!”
“죽여라! 죽여!”
가지각색의 옷차림, 다양한 병기를 든 마적들이 괴성을 지르며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엄청난 속도, 압도적인 기세였다.
추제구가 육두생에게 황급히 소리쳤다.
“가족들을 피신시키게! 어서!”
그러고는 정작 자신은 말을 몰아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랴!”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탁! 탁!
“이히히히힝!”
하지만 앞으로 잠시 움직이던 말은 이내 추제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자꾸 고개를 돌리며 뒤로 도망가려만 하고 있었다.
애초에 군마로 훈련된 말이 아니기에 당연한 모습이었다.
“이런!”
추제구는 결국 말에서 뛰어내리기로 했다.
어떻게든 자신이 저들의 기세를 저지해야만 했다.
다시 전방을 바라보니 적들이 그 짧은 사이 근처까지 도달해 있었다.
두두두두두두두!
“이야하!”
“저 늙은이부터 죽여라!”
근접해 온 적들의 눈높이가 높았다.
마치 거대한 전차들이 달려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를 악문 추제구는 등 뒤에 멨던 거대한 망치를 뽑아 들고는 적들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 나는 육합추가의 추제국이다!
우렁차게 고함을 지른 추제구에게로 마침내 첫 기마가 충돌해 왔다.
“이야하!”
“하아압!”
슈하아악!
추제구는 적이 휘두르는 대도를 고개를 숙여 가볍게 피하고는 오른쪽 옆으로 지나치는 말의 다리를 망치로 후려쳤다.
퍼억!
“히히히히힝!”
그의 일격에 말의 다리는 그야말로 산산조각 나 버렸다.
그리고 말 위의 기수는 달리던 관성으로 앞으로 튕겨 나가며 땅에 처박혔다.
“으아악!”
퍼어억!
비명을 지르며 거꾸로 땅에 처박히는 기수.
충돌음과 함께 비명이 끊긴 것을 봤을 때 즉사인 것 같았다.
하지만 추제구는 그걸 확인할 수 없었다.
말의 다리를 후려치자마자 이번엔 왼쪽의 마적이 그를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장창이었다.
“이하!”
쉬이익!
말의 속도에 창을 내지르는 속도까지 더해지니 하수의 공격임에도 무섭도록 빠르게 느껴지고 있었다.
추제구는 창살을 피하기 위해 가볍게 몸을 띄웠다.
휘익!
그러고는 바로 몸을 회전하며 망치를 휘둘러 기수의 머리를 후려쳤다.
퍼석!
한순간 머리가 사라진 마적이 추제구의 옆으로 지나쳐 갔다.
그는 주인을 잃은 말의 등을 박차며 몸을 한 번 더 띄웠다.
탁!
그러자 그의 발밑으로 투창 몇 개가 스쳐 지나갔다.
쉬익! 쉬이익!
허공에 몸을 띄운 추제구는 많은 적들을 상대로 위로 솟구친 것을 뒤늦게 후회해야 했다.
위에서 보니 자신을 노리고 있는 수많은 눈빛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후회를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차라리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해야만 했다.
추제구는 적들이 투창과 암기를 던지기 전에 자신이 먼저 몸을 휘돌리며 손을 흩뿌렸다.
“하아압!”
츄하아아악!
그의 손에서 다섯 개의 강환이 뿌려졌다.
일단 바로 눈에 보이는 가까운 곳의 적들에게로였다.
빛나는 강환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그들을 폭격했다.
콰아아아아앙!
“크아아아악!”
“으아아아악!”
다섯 개의 강환이 각각 폭발을 일으키며 목표물이었던 자들은 물론 그 주변에 있던 두세 기의 마적들까지 날려 보냈다.
그사이 추제구는 다시 안전하게 땅으로 착지할 수 있었다.
타닥!
강환의 폭격으로 만든 적들의 공백 덕분에 짧게 숨을 돌린 추제구는 순식간에 다시 빈 자리를 채우며 돌진해 오는 마적들을 바라봤다.
“으하하하하!”
“늙은이, 제법이구나!”
일다경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추제구가 보여 준 무위는 무척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십여 명.
밀려오는 파도의 물 몇 방울을 덜어낸 격이었다.
추제구는 벌써 몸이 뻐근해 오는 것을 느꼈다.
짧은 시간 지나치게 격렬한 움직임으로 내공을 소모했기 때문이었다.
‘벌써….’
문득 비관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를 악물며 그 생각을 털어 낸 추제구는 우렁차게 기합을 지르며 다시 달려오는 기마를 향해 망치를 정신없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야아아아압!”
퍼석!
“크아아아악!”
“하아아압!”
“끄아아악!”
추제구가 보여 준 활약은 놀라웠다.
격렬한 급류가 바위에 부딪쳐 양쪽으로 갈라지듯 그를 중심으로 마적들이 쓰러지며 적들의 무리가 양쪽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추제구는 드디어 천 명도 넘는 마적들을 완전히 갈라놓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추제구의 한참 뒤에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싸움을 지켜보던 육합표국 사람들은 그 놀라운 광경에 환호성을 터트렸다.
“우와아아아아아!”
“역시 추 어르신이시다!”
“추 어르신, 대단하십니다!”
추제구에 의해 양쪽으로 갈라진 마적들은 반원을 그리며 다시 뒤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걸 본 육합표국의 사람들은 다시 한번 환호성을 질렀다.
“적들이 도주한다!”
“이겼다! 추 어르신께서 적들을 물리치셨다!”
“우와아아아아!”
홀로 천 명도 넘는 마적들을 돌려세운 추제구의 엄청난 활약에 표사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양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뒤로 돌아갔던 마적들은 삼십여 장쯤 후방에서 다시 합류했다.
그리고 추제구를 향해 다시 한번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
“이야하!”
“크하하하하! 늙은이! 좋은 꿈을 꿨느냐?!”
“또 한번 해 봐라! 크하하하!”
그들은 뒤로 후퇴한 것이 아니었다.
추진력을 얻기 위해 다시 뒤로 돌아갔던 것을 기마병들의 전법에 무지했던 표사들이 착각했던 것이었다.
두두두두두두두!
추제구는 다시 한번 자신을 향해 휘몰아쳐 오는 기마의 해일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문득 주변의 땅을 바라보니 자신이 죽인 적들이 쓰러져 있었다.
수많은 적들을 물리쳤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쓰러져 있는 마적들의 숫자는 겨우 삼십여 명 정도였다.
아직도 천 명 이상의 적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의 눈이 아득해졌다.
내공은 벌써 절반이 넘게 사라진 상태였고 체력은 더 심각했다.
바닥 난 체력과 여기저기 쑤셔 오는 온몸.
단 한 번 저들이 지나갔을 뿐인데 몸이 이미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다시 한번 저 파도를 넘을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추제구는 이를 악물었다.
저걸 넘지 못한다면 죽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뒤에 있는 육합표국의 표사들, 그리고 마차를 타고 달아나고 있는 아이들까지도.
그는 최후의 최후까지 버텨 보리라고 다짐했다.
달려오는 기마를 향해 기합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압! 오너라!”
그 순간이었다.
삼 장 앞까지 돌진해 온 두 기의 기마가 갑자기 양쪽으로 확 벌어졌다.
“?!”
추제구는 아까는 보여 주지 않았던 갑작스러운 그들의 행동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를 지나쳐 뒤로 갈 셈인가?’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양쪽으로 갈라진 기마 사이에 펼쳐진 쇠 그물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놈들이 양쪽에서 말을 달리며 마치 고기를 잡듯 추제구를 향해 그물을 몰아오고 있었다.
“감히!”
추제구는 자신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물을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하아압!”
부아아앙!
출렁!
“허어억!”
“으허억!”
추제구의 망치가 그물을 후려치자 양쪽에서 그물을 잡고 있던 마적들이 오히려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말에서 뒤로 튕겨 나갔다.
일류 무사들의 힘에 말이 달리는 힘까지 더했음에도 초절정 고수인 추제구의 일격을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 뒤로 또 한 겹의 그물이 추제구를 향해 덮쳐오고 있었다.
추제구는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망치를 휘둘러야 했다.
“으아아압!”
퍼어억! 출렁!
한 겹, 또 한 겹.
추제구가 네 번째 그물을 후려쳤을 때였다.
출렁!
“!”
추제구는 망치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아까와 다름을 깨닫고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번 마적들이 그물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추제구의 일격을 버텨 낸 그물이 그의 온몸을 덮쳐 오고 있었다.
‘무위가 다르다!’
그는 마적들 사이에 무위가 높은 놈들이 섞여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끌려가게 될 것이었다.
“하아아압!”
추제구는 급한 대로 손에 강기를 씌워 쇠 그물을 내리쳤다.
촤아아아악!
강기에 의해 찢긴 그물이 양쪽으로 스쳐 지나갔다.
간신히 위기를 넘긴 것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눈에 철곤 하나가 들어왔다.
부아아아앙!
그물의 바로 뒤에서 쇠몽둥이가 후려쳐 오고 있었다.
“헉!”
초절정인 그의 눈으로 보기에도 치명적인 속도였다.
추제구는 몸을 옆으로 날려 그것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완벽히 피하기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퍼어어억!
“크으으윽!”
쇠몽둥이가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고작 스쳤음에도 기마 돌격과 함께 휘둘러진 철곤의 충격은 바위를 부술 정도의 위력이었다.
추제구는 어깨가 박살 나는 듯한 고통에 눈앞이 새하얘져 버렸다.
“허억!”
그렇기에 그는 볼 수 없었다.
바로 다음으로 날아든 대도의 궤적을.
푸하아악!
붉은 복면인이 탄 기마 한 기가 그를 스쳐 갈 때 그의 왼팔도 함께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는 고통을 느낄 새가 없었다.
다음으로 날아든 곡도가 그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푸화아악!
추제구의 머리가 하늘 높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 밑으로 스쳐 지나간 마적들의 병장기가 목을 잃은 그의 몸을 수없이 베고 지나갔다.
촤아아아악!
난자당한 그의 몸이 원래의 모습을 잃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초절정의 고수였던 추제구의 육신이 수십, 수백 개의 육편으로 분쇄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를 죽이는 데 성공한 마적들은 광소를 터트리며 계속해서 말을 달려나갔다.
추제구의 후방에서 지켜보고 있던 육합표국의 표사들을 향해서였다.
“이이하!”
“키하하하하!”
“다음은 너희 차례다!”
두두두두두두!
육합표국의 국주 육구생은 이것이 마지막임을 예감할 수 있었다.
초절정고수인 추제구마저 당하지 못한 저들을 자신들이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힘껏 이를 악물고는 표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충돌에 대비하라! 그리고 첫 충돌 후 살아남은 자는 흩어져 도주하라! 한 명이라도 목숨을 건져야만 한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살아남는 것.
그게 지금 육구생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설사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 하더라도 흩어져 시간을 끌 수만 있으면 도망간 아이들이 살아날 확률은 높일 수 있으리라.
육구생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문득 그의 눈앞까지 돌진해 온 마적 하나가 말 위에서 대도를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아까 추제구의 팔을 베어 낸 붉은 복면의 남자였다.
말 위에 있기에 저 높이 보이는 놈의 머리 위로 햇살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그리고 부서진 햇살과 함께 대도가 떨어져 내렸다.
육구생이 미처 반응할 수 없는 빛살 같은 속도였다.
푸화아아악!
“안 돼!”
“국주님!”
육합표국의 표사들이 펼쳤던 방어진은 단 한 번의 기마 돌진에 갈가리 찢기고 말았다.
육구생의 목이 일격에 떨어져 나간 것을 시작으로 마적들이 괴성을 지르며 스쳐 갈 때마다 표사 한 명씩의 목숨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몇 명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려 했지만, 애초에 말을 탄 마적들을 상대로 멀리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적들은 표사들을 모두 척살하고는 아이들이 탄 마차마저 끝까지 따라가 산산조각 내 버리고 말았다.
처참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육합표국의 표사들을 모두 척살하고는 다시 말을 달려 바람처럼 사라졌다.
애초에 그들을 죽이는 것이 목표였다는 것처럼 표국을 습격했음에도 표물조차 수거해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양주와 장강 사이의 평야를 달리며 또 다른 제물을 찾기 시작했다.
혈풍사라는 이름답게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오직 피바람만이 가득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