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혈풍사-5
- 혈풍사!
뒤에서 들려온 우렁찬 외침에 혈풍사의 두목 혈풍대도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봤다.
온 공간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
여태껏 그가 만난 고수들 중 가장 강력한 내공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놀랐던 것도 잠시, 뒤돌아 설풍과 선우진의 위치를 확인한 혈풍대도의 입은 씨익 호선을 그렸다.
그가 중얼거렸다.
“바보 같은 놈들, 하여간 고수란 작자들은 무공만 높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정작 자기가 불 속에 뛰어드는 불나방이란 생각은 못 하고 말야.”
그러고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기수를 돌려라! 목표가 제 발로 죽을 자리를 찾아왔구나!”
그의 말에 마적들은 광소를 터트리며 말머리를 돌렸다.
“크하하하하! 죽을 자리를 찾아왔으면 죽여 줘야지!”
“저놈들을 죽이면 아까 그 여자들도 잡으러 갈 수 있는 건가?!”
“빨리 끝내고 빨리 쉬자고!”
반원을 그리며 방향을 바꾼 그들이 속도를 높여 돌진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천여 명의 마적들이 전차처럼 돌진했다.
그런 적들을 향해 설풍과 선우진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마치 적들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 듯 여유로운 걸음걸이였다.
그러자 배에 타고 있던 동소운이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아! 저러면 안 되는데! 강가에 붙어서 돌격이라도 막아야 해요! 저렇게 앞으로 나가서는…!”
하지만 그걸 보고 있던 다른 일행들은 그저 태평할 뿐이었다.
연태진이 여전히 피가 살짝 흐르고 있는 자신의 뒷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그냥 지켜보고 있어요. 저 두 사람이 나간 이상 굳이 돌격 같은 거 안 막아도 되니까. 아야야! 에이씨, 아직도 머리가 쑤시잖아!”
진소은은 한술 더 떠서 아예 그쪽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녀는 풀이 죽어 있는 증칠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고 있었다.
“증 선배님. 아까 저들과 싸우기로 결정한 건 우리 모두의 합의였어요. 그러니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진소은은 증칠이 풀이 죽은 이유가 연태진과 그녀가 다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서라고 생각했다.
증칠의 말에 따라 싸웠다가 부상을 입었기에 거기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풀이 죽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은 정확했다.
증칠은 풀이 푹 죽은 표정으로 진소은의 말에 대꾸했다.
“그렇게 좋게 말해 줄 필요 없다. 나도 내 성급함 때문에 너희가 다쳤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우리 막내가 한 말이 틀릴 리가 없는데…. 내가 또 함부로 나섰다가 그만 너희마저….”
“에이, 그때는 어쩔 수 없었잖아요. 선우 공자도 적들이 유인당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 하라는 지침을 알려 준 것도 아니었고요. 그리고 만약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면 저희도 끝까지 말렸을 거예요. 증 선배님 말씀이 맞다고 생각했으니까 함께했던 거죠.”
그러자 연태진도 끼어들었다.
“뭐야, 증 오라버니? 그것 때문에 풀이 죽어 있는 거였어? 에이, 소심하게 왜 이래요? 소은이도 나도 무인인데 싸우다 다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지. 자기가 약해서 다친 거야 자기 탓이지 그걸 왜 증 오라버니가 미안해하고 그래요? 그러지 마요. 안 어울리니까. 아깐 그냥 우리 모두의 판단이 잘못된 거였어요. 역시 우리 똑똑이 선우 공자 말을 들었어야 했다니까. 앞으론 꼭 잘 듣자고요.”
진소은에 연태진까지 나서 그를 다독여 주자 증칠의 표정도 조금 밝아졌다.
“그러게. 역시 막내 얘기를 잘 들었어야 돼. 앞으로 내가 또 막내 말을 안 들으려고 하면 너희가 나를 좀 막아다오. 아예 한 대 쳐 버려도 괜찮다!”
그 말에 연태진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거렸다.
“오, 진짜죠?”
그때였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전장을 보고 있던 동소운이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아아악! 저, 저게 뭐야?!”
그녀의 목소리에 일행들은 다시 전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달려오는 마적 떼 위로 떠 있는 거대한 흑자색 날개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의 연보랏빛 봉황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의 거대한 날개였다.
***
두두두두두두!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오는 마적들을 보며 선우진이 먼저 설풍에게 말했다.
“제가 먼저 갈까요, 형님?”
그러자 빙긋이 웃은 설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겠나?”
선우진은 설풍을 뒤로한 채 몇 걸음 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곤 한 번 심호흡을 하고는 허공을 향해 훌쩍 뛰어올랐다.
슈욱!
마치 무게가 없는 듯한 너무나도 가벼운 도약이었다.
선우진의 몸이 새처럼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펼치듯 묵랑검을 휘둘렀다.
“하아압!”
화아아아악!
그 순간이었다.
그의 검로를 따라 흑자색 검강이 장막처럼 펼쳐져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낮의 영역을 갑자기 어두운 밤이 침범한 듯 불길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묵랑검법 이 초.
비상.
선우진의 검에서 뻗어 나간 흑자색 검강은 거대한 날개가 되어 상공을 뒤덮었다.
지옥에서 강림한 마왕의 등 뒤에나 달렸을 법한 불길한 흑자색 날개였다.
그 괴이한 광경에 달려오던 몇몇 마적들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러 댈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아아!”
“저, 저게 뭐야?!”
“괴, 괴물이다!”
그러자 두목인 혈풍대도가 소리를 지르며 부하들을 단속하려 했다.
“두려워 마라! 놈이 펼친 사술일 뿐이다! 어차피 환상에 불과한…!”
그때였다.
흑자색 날개가 한순간 무너지듯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스러진 날개는 곧 거대한 검기의 비가 되어 지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쏴아아아아아아아!
“뭐, 뭐야?!”
“우아아아악!”
푸화아아아악!
“끄아아아악!”
“사, 살려 줘!”
검강도 아닌 검기로 폭격을 가하는 묵랑검법의 이 초 ‘비상’은 사실 초절정 이상의 고수들에게는 그다지 위협적인 수법이 아니었다.
삼 초 ‘멸천’에 도달하지 못한 ‘비상’은 워낙 공력을 분산시켜 넓게 뿌리는 공격이기에 처음 본 사람들에게나 환검으로서의 효과를 가질 뿐, 작정하고 막으려 하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위력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초절정 이상의 고수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였다.
본래 실력보단 기마의 위력과 많은 숫자를 이용해 고수들을 죽여 왔던 마적들에게 있어서, ‘비상’은 최악의 상성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악몽과 같은 초식이었다.
지옥에서 내리는 비가 이러할까.
검기의 비가 넓게 흩뿌려지자 그것을 방어하지 못한 마적들과 기마들이 검기에 난자당해 쓰러져 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피와 살육으로 점철된 지옥의 장맛비와도 같은 풍경이었다.
푸화아아아악!
“크아아아악!”
“아아아악!”
“어, 어머니이이!”
혈풍사의 두목인 혈풍대도는 그나마 전력을 다해 대도를 휘둘러 검기의 비를 막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비상’의 범위에 들어간 자 중 그럴 수 있었던 이는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
혈풍대도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주변을 바라봤다.
단 한 초식만이었다.
단 한 초식만으로 그의 주변에 있던 백여 명 이상의 마적들이 말과 함께 난자당해 쓰러져 있었던 것이었다.
즉사한 이보다 살아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이가 더 많다는 것이 오히려 더 끔찍했다.
“으으으….”
“사, 살려 줘….”
“내 배, 내 배가….”
“내 파알!”
하지만 잠시 주변을 바라보던 혈풍대도는 이를 악물고 다시 소리쳤다.
“저런 수법을 여러 번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돌격! 돌격하라! 다시 그 수법을 쓸 수 없을 때 놈을 쳐야만 한다!”
그 말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는 말이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수법을 여러 번 쓸 수 있다면 그건 너무 불공평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직도 남은 마적들의 수는 구백 정도.
혈풍대도의 독려를 들은 마적들은 이를 악물고 다시 말의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놈이 다시 저 초식을 쓸 수 있게 되기 전에 반드시 죽여야만 했다.
거리를 좁힐 수만 있다면 충분히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랴! 이랴!”
“이이하!”
두두두두두두두두두!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선우진이 빙긋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흠, 더 쓸 수 있는데. 바로 한 번 더 해 줄까?”
그러자 설풍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진 아우 혼자서만 다 처리하면 내가 너무 민망하지 않겠는가? 이번엔 내가 해 보겠네.”
그렇게 말한 혈풍의 손에선 오랜만에 맹호조의 긴 은빛 손톱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걸 본 선우진이 팔짱을 끼고는 빙긋이 웃음 지었다.
설풍은 선우진과 같은 범위 공격이 가능한 수법을 알지 못했다.
사왕 가문의 무공이자 특기인 야수권도, 선우진에게서 배운 전륜박도 모두 근거리 전용의 박투술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연태진이 그랬듯 사실 설풍과 마적들과의 상성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준 차이가 웬만큼 났을 때의 얘기였다.
설풍과 마적들의 수준은 그런 상성을 따질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
두두두두두!
“이놈! 죽어…!”
촤아악!
한순간 허공에 네 줄기 섬광이 그어졌다.
그러자 설풍에게 철곤을 휘두르려던 마적은 말과 함께 네 줄기 발톱 자국으로 피를 뿜어내며 찢겨져 버렸다.
설풍의 맹호조에서 뻗어 나온 붉은 조강에 그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본인은 죽는 순간까지도 그것을 인지할 수 없었다.
“하아압…!”
촤아아악!
“무, 무슨…!”
촤아아악!
“으, 으아아아!”
촤아아아악!
설풍이 서 있는 공간은 마치 절대 통과할 수 없는 죽음의 지대가 된 것만 같았다.
그를 지나는 모든 마적들이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한 채 그저 찢기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설풍의 움직임은커녕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조차 인지할 수 없었다.
촤아아아악!
촤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사, 살려, 끄아아악!”
마치 지옥의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설풍을 통과하는 모든 마적들이 갈가리 찢겨져 분쇄되었다.
그러자 죽을힘을 다해 돌진하고 있던 마적들의 눈이 드디어 공포로 가득 찼다.
“으으으으!”
“저, 저럴 수가!”
저건 도저히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수가 천 명이든 만 명이든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저렇게 아무것도 못 하고 다 찢겨져 죽을 텐데.
“아, 안 돼! 난 더 못 해!”
“도망, 도망가자!”
“살려 줘!”
“아아아악!”
돌격하던 마적들이 절반쯤 분쇄되어 버리자 나머지 절반은 드디어 설풍을 공격하는 걸 포기하고는 말 머리를 돌렸다.
설풍에게서 달아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말머리를 돌린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어느새 그쪽에 선 채 묵랑검을 천천히 치켜드는 선우진의 모습이었다.
선우진이 어느새 그들이 도망가려는 쪽으로 먼저 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가 빙긋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안 되지. 어딜 감히 살아서 돌아갈 생각을.”
그리고 훌쩍 몸을 솟구친 그의 검에서 다시 거대한 흑자색 날개가 뿜어져 나왔다.
다시 한번 펼쳐진 묵랑검법의 이 초 ‘비상’이었다.
화아아아악!
마적들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머리 위의 흑자색 날개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한번 쏟아지는 비를 맞았다.
죽음과 살육의 비를….
쏴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악!”
“살려 줘!”
“끄아아아아!”
앞에는 선우진, 뒤에는 설풍.
신법 또한 천하에서 손꼽히는 그들이기에 마적들은 아무도 도주할 수 없었다.
그저 공포에 질린 채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다.
혈풍사의 두목 혈풍대도는 더 이상 말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그 모든 참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자 마적들에게 죽음의 비를 뿌리며 천천히 걸어온 선우진이 그를 보고 빙긋이 웃음 지었다.
그런 그의 눈은 어느새 황금빛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눈을 본 혈풍대도와, 그를 포함한 아직 죽지 않은 모든 마적들의 눈이 견딜 수 없는 공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