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소면혈극 동중서
세인들로부터 양주동가의 기둥이라고 불리고 있는 철심냉혈파파 동채원은 근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동쪽 하늘을 바라봤다.
그녀가 아끼는 방계의 손녀 동소운을 미리 보내 놓기는 했지만, 그녀가 설풍과 미리 만나 마적들로부터 그들을 피신시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실 가주인 동중서가 암암리에 마적들을 키워 왔다는 사실도, 그 마적들을 이용해 그녀의 수족들을 쳐 내 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대놓고 동중서에게 반발할 수 없었다.
그녀가 동중서와 대놓고 대립하는 순간, 그게 양주동가의 내분으로 이어질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가주만 쳐 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지. 동가 내부엔 그를 따르는 자들도 적지 않으니까. 가주를 쳐 내려 하면 필연적으로 수많은 동가의 인물들이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야.’
그게 동채원이 벙어리 냉가슴 앓듯 그저 동중서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그녀의 손으로 양주동가를 공중분해 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누구보다 가문을 아끼고 사랑하는 그녀로서는 이미 쇠락해 가고 있는 양주동가를 더 이상 위태롭게 만들 수 없었다.
‘오라버니….’
동채원은 오래전 그녀에게 서신 하나만 남긴 채 설풍을 데리고 잠적해 버렸던 그녀의 오라버니 동규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서신에서 그렇게 얘기했었다.
자신은 절대 괴갈현이 사왕이 되는 것을 인정할 수 없고 괴갈현 또한 자신을 살려 두지 않을 것이기에, 자신이 가문에 남아 있으면 양주동가 전체가 그와 싸우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양주동가의 멸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동채원은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설가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데다,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는 성품인 그녀의 오라비가 계속 가주로 있었다면 양주동가는 결국 현 사왕 괴갈현과 싸우다 장렬히 산화하고 말았을 테니까.
그러니 그녀의 오라버니는 결국 가문을 지키기 위해 가문에서 떠나 준 것이었다.
남은 일들을 그녀와 그의 아들 동중서에게 맡기고 말이다.
하지만 그도 거기까지는 예상할 수 없었으리라.
그의 그늘에서 너무 빨리 벗어난 아들 동중서가 어떤 식으로 성장하게 될지를….
동채원은 눈을 질끈 감고는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그의 오라버니에게 말을 전했다.
‘오라버니,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죽기 전에 가문을 제대로 돌려놔야 할 텐데…. 제 부족한 지혜와 능력으론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동채원은 고뇌했다.
가주인 동중서와 대립하는 순간 가문의 내분이 시작될 것을 알기에, 그를 쳐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놔둘 수도 없었다.
마적들과 손을 잡는 일, 아직 후계자도 아닌 후계자 후보의 수족을 자처하는 일.
그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동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들뿐이기 때문이었다.
동채원 자신마저 없어진다면 동중서가 앞으로 만들어 갈 동가는 더 이상 동가라고 부를 수도 없는 곳이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동채원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인가?’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면 동중서가 극적으로 마음을 돌려 제대로 된 가주가 되어 주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동채원이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그게 가능한 일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사실 설풍에게 보낸 동소운이 일을 잘 처리해 그를 동가로 잘 데리고 온다 해도 문제였다.
가주는 어떻게든 그를 죽이려고 할 테고, 설풍이 만약 가주와 대립하게 된다면 그는 절대 동가의 지원을 얻지 못하게 될 테니까.
만약 그가 가주를 죽이기라도 한다면 더 문제였다.
그 순간 가문은 풍비박산 날 테고, 설풍은 그 순간 양주동가의 원수가 되어 버리고 말 테니까.
아무리 동채원이 애를 써도 동가의 정당한 가주를 죽인 그를 보호해 줄 수는 없을 것이었다.
아마 동가의 마지막 한 명이 남는 순간까지 설풍과 싸우게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후우우우….”
동채원은 깜깜한 밤처럼 해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고민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동소운에게 설풍을 이곳으로 데리고 오지 말도록 지시했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아니, 그게 맞겠구나. 그랬어야만 했어. 설풍, 그 아이를 이곳에 데리고 와 봐야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을 테니 말이야.’
그때였다.
푸드득!
힘찬 날갯짓 소리와 함께 매 한 마리가 그녀를 향해 급강하했다.
설풍에게 보낸 동소운으로부터 온 전서응이었다.
동채원은 어두운 얼굴로 전서응의 다리에 묶인 편지를 풀어 읽었다.
하지만 그걸 읽어가는 동안, 그녀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 담긴 감정이 짧은 순간 몇 번이나 급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전서를 다 읽은 그녀가 천천히 중얼거렸다.
“선우진이라고?”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전서에는 설풍과 함께 왔다는 선우진이라는 청년의 제안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제안은 그녀에게 큰 결심 하나를 강요하고 있었다.
그녀가 침을 꿀꺽 삼키고 중얼거렸다.
“만약 그의 말대로만 된다면야….”
어쩌면 꽉 막힌 지금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마침내 결심을 굳힌 동채원이 급히 답신을 적고는 전서응에 묶어 날렸다.
방금 전까지 너무나 답답해 보였던 그녀의 눈이 예리한 정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
양주동가의 가주 동중서는 혈풍사의 두목 혈풍대도로부터 올 전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전서가 약간 늦어지는 것 같긴 했지만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가 실패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혈풍대도는 원래 형도구라는 이름을 지닌 자로 예전부터 동중서가 비밀리에 키운 제자였다.
동중서는 예전 어린 낭인이었던 형도구의 재능을 알아보고는 그에게 영약과 무공을 공급해 줬다.
남들이 모르는 그의 칼로 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는 동중서의 기대를 훌륭히 충족시켜 주었다.
아니, 오히려 마적들을 규합해 거대한 세력을 만든 그의 지도력은 기대를 훨씬 뛰어 넘어섰다고도 할 수 있었다.
동중서로선 그를 떠올릴 때마다 항상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흐흐흐, 그야말로 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격이지.”
그리고 그 진주는 한 번도 자신이 준 임무를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고작 다섯 명밖에 되지 않는 젊은 놈들이 천 명도 넘는 무공을 익힌 기마대에게서 살아남을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때였다.
푸드드득!
동중서에게로 전서응이 날아들었다.
혈풍대도 형도구에게서 온 전서응이었다.
동중서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서신을 꺼내 확인했다.
“어디.”
하지만 흐뭇한 표정으로 서신을 읽어 나가던 동중서의 표정은 어느새 살짝 굳어져 있었다.
그는 잠시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흐음, 하긴 마적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이라면야….”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는 마침내 결심한 듯 큰소리로 외쳤다.
“빙혈일대에서 삼 대까지는 지금 즉시 출정을 준비하라! 마적들을 토벌하러 간다!”
빙혈일대, 이 대, 삼 대는 동중서가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심복들만을 꽉꽉 채워 넣은, 그야말로 그의 친위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들과 함께라면 동중서가 무슨 짓을 하든 절대 외부로 발설될 염려가 없었다.
예를 들어 마적들을 토벌하러 나가서는 그들과 협력해 설풍이란 놈을 죽인다고 해도 말이다.
동중서는 최대한 빨리 그의 친위대를 준비시켰다.
시간을 맞추려면 서둘러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동중서가 드디어 마적들을 토벌하러 간다는 소식을 들은 동채원이 그를 찾아왔다.
“드디어 결심을 하셨구려! 잘하셨소, 가주! 하지만 빙혈일, 이, 삼 대만 데리고 가다니, 너무 병력이 적은 것이 아니오? 사 대와 오 대, 그리고 장로들도 모두 데려가시지 그러시오?”
그러자 동중서가 소면혈극이란 별호대로 푸근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모님.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 정도도 해내지 못한다면야 제가 어디 동가의 가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꼭 마적들을 완전히 토벌하고 올 테니 부디 기다려 주십시오.”
그 말에 동채원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가주. 가주가 자랑스럽구려. 하늘에 계신 오라버니도 기뻐하실 게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고모님.”
그 말을 끝으로 동중서는 무인들을 이끌고 동가의 밖으로 나갔다.
동채원으로부터 고개를 돌린 그의 얼굴은 소면이란 별호에 어울리지 않게도 너무도 냉랭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렸기에 그는 볼 수 없었다.
그의 뒤에서 배웅하고 있는 동채원의 얼굴 또한 그의 얼굴과 비슷하게 냉랭해졌음을.
***
동중서는 빙혈일이삼대를 이끌고 빠르게 양주를 벗어났다.
그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들을 멈춰 세우고 진정한 목적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지금 내 지시를 받는 마적들이 설풍이란 놈을 추격해 몰아오고 있다! 보고에 따르면 이쪽 방향으로 오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목표는 마적들과 협력해 놈을 죽이는 것이다! 물론! 놈을 죽인 자들은 대외적으로 마적인 것으로 알려져야만 할 것이다! 알겠느냐?!”
동중서의 설명과 지시에 빙혈대원들은 처음엔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다시 무표정한 얼굴을 회복했다.
동중서가 무슨 짓을 하든 그들은 명령에만 따르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의 반응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은 동중서는 다시 그들을 출발시켰다.
“자! 가자! 놈을 죽이는 자에게 큰상을 내리겠다!”
동중서와 빙혈대원들은 경공을 사용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 시진 정도 지났을 때였다.
그들은 드디어 지평선 너머로 뿌연 흙먼지가 솟아오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적들이 오고 있는 것이었다.
동중서가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저쪽이다! 모두 발도하라!”
그러자 질주하고 있던 빙혈대원들이 속도를 늦추지 않은 상태로 일사불란하게 도를 발도했다.
채챙!
그리고 다음 순간, 그들은 지평선에서부터 이쪽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고 있는 붉은 무복의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설풍이었다.
그를 본 동중서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혈풍대도 형도구의 전서에 적힌 대로, 놈이 일행들을 모두 잃고 그 혼자만 남은 채로 마적들에게 쫓기고 있는 중이었다.
동중서가 흐흐 웃으며 빙혈대원들에게 소리쳤다.
“역시 저놈 혼자 남았구나! 빙혈대원들은 목표를 확인하라!”
그의 명령에 빙혈대원들이 눈을 번뜩이며 설풍에게 집중했다.
그러자 설풍은 이제야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동중서와 빙혈대를 발견했는지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주춤거리며 도주하던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사실 그것은 좀 이상한 반응이었다.
동중서가 그를 돕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걸 그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동중서의 생각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그저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을 뿐이었다.
“가라! 놈을 죽여라!”
그러자 잠시 후, 제자리에 멈춘 설풍을 중심으로 기마를 탄 마적 떼와 도를 뽑아 든 빙혈대가 양쪽에서 해일처럼 그를 덮쳤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동중서의 입가에 흐뭇한 웃음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푸화악!
“으아아악!”
“크아아악!”
동중서의 흐뭇한 웃음이 그대로 굳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가고 있는 자들이 설풍이 아닌 빙혈대원들이기 때문이었다.
“뭐, 뭐냐, 저건?”
동중서는 지금 눈에 보이는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눈을 의심했을 정도였다.
맹렬하게 돌진해 온 마적들이 제자리에 멈춰 선 설풍을 덮친 것이 아니라, 동중서의 부하인 빙혈대를 들이받아 버린 것이었다.
그러자 그들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던 빙혈대원들은 일방적으로 학살당할 수밖에 없었다.
푸화악!
“으아악!”
츄학!
“끄아아악!”
잠시 입을 뻐끔거리며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동중서는 이내 분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 이 바보 같은 놈들! 적은 그쪽이 아니다! 너희 적은 저 설풍 놈 하나뿐이란 말이다!
그는 지금의 사태가 멍청한 마적들이 적을 착각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해석했다.
그래서 내공을 실어 놈들에게 소리를 쳤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소리쳐도 마적들은 전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마치 죽음을 각오한 듯 절박한 눈빛으로 여전히 빙혈대원들을 향해 필사적으로 돌격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동중서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 도구! 형도구는 어디 있느냐?! 이놈! 네 부하들을 어서 단속하지 못하겠느냐?!
형도구를 찾으려 여기저기 고개를 돌리던 그는 곧 마적들의 맨 뒤에서 여유 있는 태도로 천천히 말을 몰고 오는 붉은 복면의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비밀리에 키운 제자인 혈풍대도 형도구였다.
“음?”
동중서는 뭔가가 이상함을 느꼈다.
형도구의 여유 있는 태도가 아무래도 불길한 느낌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단 그를 향해 소리쳤다.
- 이놈!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어서 부하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하겠느냐?!
하지만 형도구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도를 치켜들고는 말을 앞으로 맹렬히 돌진시키는 모습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오오!”
동중서는 그가 이제야 제대로 설풍을 죽일 거라는 생각에 감탄성을 터트렸다.
그래서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의 행동을 지켜봤다.
하지만 형도구는 동중서의 기대에 부흥하지 않았다.
그는 설풍을 향해 돌진하는 듯하더니만 그대로 쌩! 그를 지나쳐 버렸던 것이었다.
그러고는 다른 마적들처럼 빙혈대원들을 향해 돌진해서는 그들을 향해 대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푸화악!
“크아아아악!”
“으아아아악!”
형도구의 대도는 위력적이었다.
그가 빙혈대원들을 향해 대도를 휘두르자 마치 삼국지의 조자룡을 보는 듯했다.
빙혈대원들이 잡초 베어지듯 피를 뿌리며 죽어 가고 있었다.
동중서가 마침내 피를 토하듯 소리 질렀다.
“도구, 이노옴!”
그는 공들여 키운 제자 형도구가 자신을 배신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놈의 활약에 이제 간신히 마적들을 막아 내고 우세해지기 시작했던 빙혈대원들이 속수무책으로 학살당하고 있었다.
간신히 맞춰 놓은 균형이 놈에 의해 다시 완전히 기울어진 것이었다.
“이놈!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동중서가 도저히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놈은 대도를 휘둘러 무인지경처럼 빙혈대원들을 학살하더니 이제 동중서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이노옴….”
동중서는 이제 완전히 인정했다.
자신이 놈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동중서가 이를 갈며 공력을 끌어올려 소리쳤다.
“이놈! 기껏 주워서 키워 놨더니만, 네놈을 내 손으로 반드시 죽여 주마!”
그 목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서 핏줄기가 화악 뿜어져 나왔다.
그러고는 뿜어진 그대로 얼어붙어 긴 창을 만들었다.
양주동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절기인 냉혈조형공, 그리고 그의 별호를 만들어 준 혈극이었다.
동중서는 자신에게 돌진해 오는 형도구를 향해 혈극을 겨눴다.
“이놈! 죽여 버리…?!”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동중서는 문득 복면을 쓴 놈의 얼굴형이 형도구와 약간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붉은 복면에 붉은 말을 탔고, 형도구와 비슷한 체형에 대도까지 사용해 당연히 놈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동중서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놈! 너는 누구냐?! 대체 누구길래…?!”
그때였다.
그의 귀에 누군가의 전음이 들려왔다.
- 궁금하십니까, 가주?
익숙한 목소리, 하지만 지금 이곳에선 절대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였다.
동중서가 경악한 얼굴로 홱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그러자 그는 볼 수 있었다.
저 멀리 장로들과 다른 빙혈대를 거느리고 서 있는 그의 고모 철심냉혈파파 동채원의 모습을….
동가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그녀가 어째서인지 저 뒤쪽에서 냉랭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중서가 경악해 소리쳤다.
“고, 고모님?! 다, 당신이 어떻게?!”
동중서는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가 부하들을 향해 다급하게 소리치려 할 때였다.
“모두…!”
그 순간, 순식간에 그의 뒤까지 돌진해 온 적의복면인이 대도를 내리그었다.
“하아압!”
슈하아악!
동중서는 곁눈으로 그의 공격을 확인하고는 일단 혈극을 들어 그것을 막으려 했다.
혈풍대도 형도구의 무위를 잘 알기에 그의 일격 정도는 그 정도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중서는 상대가 혈풍대도 형도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했어야만 했다.
혼란에 빠진 동중서는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했고, 형도구로 화한 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강의 일격을 동중서에게 선사했다.
묵랑검법 일 초.
개천.
촤아아아악!
적의복면인, 축골공을 이용해 혈풍대도로 위장한 선우진의 대도는 동중서의 혈극을 막힘없이 부숴 버리고는 그의 몸까지 찢어 버렸다.
단 일격만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자 몸이 두 동강 나 버린 동중서의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확대됐다.
그가 마지막 말도 내뱉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릴 때 동채원은 그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 불쌍한 가주, 마적을 물리치려다 본인이 희생되어 버리고 마셨구려. 고맙소.
그 말을 들은 동중서는 눈도 감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그러자 동채원이 크게 소리쳤다.
- 저 마적 놈들에게 가주가 돌아가셨다! 동가의 인원들은 목숨을 걸고 마적들을 토벌하라!
그러자 동채원이 데려온 동가의 무인들이 마적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동중서가 데려왔던 빙혈대원들은 혈풍대도로 화한 선우진과 마적들에 의해 거의 전멸된 상태였지만, 동채원이 데려온 인원들이 돌진하자 마적들은 모든 힘을 다한 듯 스러져 가기 시작했다.
***
동가의 무인들과 마적들의 싸움이 진행되고 있던 평야에서 한참 떨어진 언덕 위, 죽립을 쓴 사내 하나가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언덕 위에 자란 나무 꼭대기, 그 위에 달린 얇은 나뭇가지의 나뭇잎 위였다.
벌레가 그 위에 있어도 구부러질 것 같은 나뭇잎 위에서 그는 마치 아무 무게도 없는 듯 편안히 선 채 전투를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한참 싸움을 구경하던 죽립인이 문득 허공을 향해 물었다.
“근데 저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나는 봐도 잘 모르겠군.”
그러자 아무도 없던 허공에서 대답소리가 들려왔다.
“저 마적들은 동가의 현 가주 동중서가 비밀리에 키우던 칼입니다. 동중서는 저들을 이용해서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철심냉혈파파 동채원의 수족들을 쳐 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이번에 마적들이 설풍 공자를 공격했던 것도 아마 동중서의 명령이겠지요. 아마 괴정기 공자와 뭔가 밀약이 있었을 겁니다.”
그 설명을 들은 죽립인은 이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동가의 가주가 별로라는 얘기는 전부터 들어 왔었지. 그럼 동중서는 지금 자기 부하들에게 죽은 셈이 되는 건가?”
“그보다는 마적들을 소탕하려다 사망한 게 되는 거겠죠. 동채원이 그동안 동중서와 대놓고 대립하지 못했던 이유는 동가의 내분을 막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그런데 저렇게 동중서가 마적들에게 죽어 준다면야 동채원 입장에선 손도 안 대고 코를 푼 격이 아니겠습니까?”
“흠, 내분도 막고 마음에 안 드는 가주도 쳐 낸다?”
“그렇지요. 설명이야 간단했지만 상당한 묘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설명을 들은 죽립인은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전장을 바라봤다.
이제 동가 무사들과 마적들의 싸움은 동가 무사들 쪽으로 완전히 무게 추가 기운 상태였다.
저대로라면 마적들이 완전히 전멸하기까지도 얼마 걸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까까지 마적들을 우세하게 만든 이유였던 혈풍대도는 어느새 전장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언제 사라졌는지, 어디로 사라졌는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죽립인만큼은 그가 지금 설풍의 옆에서 대충 검을 휘두르고 있는 흑의청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풍기는 기도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죽립인이 그를 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풍이 놈에게 그 정도의 머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저놈의 수완인가?”
그러자 다시 허공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아마 그럴 겁니다. 비천흑랑 선우진. 외부에 알려진 명성은 그리 대단치 않지만 그의 행적을 추적하다 보니 재밌는 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재밌는 점?”
“사천성에서 정협방을 만들고 숨어 있던 소면마군 사원양이 죽었을 때, 귀주성에서 선우세가를 노리던 염라혈승 축호탁이 죽었을 때, 그리고 얼마 전 해남파의 해남마검 진태도가 죽었을 때. 선우진이란 자의 행적이 그들의 위치와 거의 일치하더군요. 근데 묘하게도 정작 거기서 선우진이 무얼 했는지는 세상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건 선우진과 함께 움직였던 설풍 공자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죽립인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그것참 재밌는 일이로군. 아주 재밌는 일이야.”
그러자 허공의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물론 그들이 그 일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말 그대로 그냥 지나갔을 수도 있겠지요.”
그의 말에 죽립인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난번 귀도 백기량을 압박하던 걸 보면 해남마검 진태도도 충분히 잡아먹을 만하지. 아마 맞을 걸세. 근데 그런 무위에 더해 머리까지 좋단 말이지? 풍이 놈이 좋은 조력자를 얻었군.”
그렇게 말하며 웃는 죽립인의 입은 어쩐지 흐뭇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은신해 있던 암중인은 신기한 눈빛으로 그의 주인을 몰래 지켜봤다.
그의 주인이 저렇게 웃는 모습은 좀처럼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죽립인이 문득 다시 입을 열었다.
“싸움이 끝났군.”
그 말에 다시 시선을 돌리자 마지막 한 명의 마적까지 쓰러뜨린 동가의 무사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자 철심냉혈파파 동채원이 천천히 가주 동중서의 시신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에선 남들에게 슬픔으로 보일, 하지만 사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