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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전선 비룡십삼대-296화 (296/359)

296화 배꽃 아래에서

강소성 태주 사왕련.

사왕의 첫째 아들인 괴정기가 사용하고 있어 소왕전이라고 불리고 있는 건물에서, 괴정기는 지금 부하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동중서가 설풍을 맞이하기 위해 마적들과 싸우다 죽었다고?”

그렇게 묻는 괴정기의 표정은 살짝 구겨져 있었다.

평상시 늘 차가운 표정이었던 그의 얼굴이 요즘 들어 꽤 많은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모두 다 한 명 때문이었다.

괴정기의 질문에 부복한 채 보고를 올렸던 부하가 다시 대답했다.

“예, 그리고 그 마적들을 처리한 게 바로 설풍이랍니다. 그래서 동가의 임시 가주 역할을 맡게 된 철심냉혈파파 동채원이 그를 극진하게 대접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백골괴마 홍추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마적들 동중서가 키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괴정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그러자 홍추가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지 부하들에게 배신당해 죽었다는 겁니까? 생각보다도 더 쓸모없는 자였군요.”

홍추의 말에 괴정기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표면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른 내부 사정이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백골괴마 홍추는 거기까지 생각할 만한 머리는 없는 자였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괴정기는 자신의 곁에 참모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를 따로 키우지 않았었다.

자기 자신의 머리에 자부심이 있었기에 참모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단순 무식한 투사형 무인들이 대부분인 사왕련에서 이제껏 그의 지혜를 넘어서는 일들은 거의 일어난 적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아니었다.

자존심 상하게도 괴정기는 일이 어떻게 이렇게 된 것일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에 더욱 자존심이 상했다.

설풍이란 놈과 관계만 되면 자꾸 자존심 상하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때였다.

홍추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동중서란 놈 때문에 설풍이라는 자의 위상만 키워 준 셈이 됐군요.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 말에 괴정기는 다시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가장 자존심 상하는 일은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이 선택한 동중서로 인해 놈의 위상이 더욱 올라갔다는 것.

그 사실이 괴정기를 참을 수 없이 기분 나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괴정기는 자신의 그런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그저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할 뿐이었다.

“어떻게 하긴? 이번엔 제대로 된 자에게 일을 맡겨야겠지.”

“제대로 된 자?”

“그래, 설풍이란 놈을 죽이고 싶어 하며 그럴 만한 무력도 가지고 있는 자.”

“그런 자가 있습니까?”

홍추의 의문에 괴정기가 무심하게 답했다.

“셋째, 항기에게 잠깐 만나자고 전해 주겠나?”

그러자 홍추가 감탄성을 터트렸다.

“아, 괴항기 공자?! 과연 셋째 공자라면 그를 죽이고 싶어 할 만하겠군요!”

하지만 그렇게 말했던 홍추는 다시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전력으로 놈들을 해치울 수 있겠습니까? 그 설풍이란 자도 그렇지만 귀도 백기량 노사를 물러서게 한 그놈을 당할 자가 셋째 공자의 밑에는 없을 것 같은데요. 아니, 홍해아 놈조차 당할 자가 없을 겁니다.”

그러자 괴정기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내가 전력을 빌려주면 될 일이 아닌가? 항기의 ‘요청’을 받아 전력을 빌려줬는데, 녀석이 그 전력으로 뭘 할지까지야 내 알 바가 아니니 말일세.”

“오오! 과연!”

감탄성을 터트리는 홍추를 보며 괴정기는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자신의 지혜에 감탄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상처받은 자존심이 좀 치유되는 것 같았다.

***

설풍은 홀로 양주동가를 나와 동가의 바로 뒤에 위치한 작은 동산을 거닐고 있는 중이었다.

동가의 뒷동산은 온통 배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그리고 시기를 잘 맞춘 덕인지 그곳은 지금 배꽃이 뒷동산 전체를 하얀빛으로 물들이듯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중이었다.

설풍은 아련한 눈빛으로 눈처럼 피어난 하얀 배꽃들을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눈을 살짝 감고는 배꽃의 달콤한 향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온몸을 가득 채우는 달콤한 내음, 마치 어린 시절의 추억이 향기와 함께 코로 들어오는 듯했다.

설풍의 어머니 동아연은 저 배꽃을 무척 좋아했었다.

그래서 설풍이 살았던 어린 시절의 집 뒤뜰에도 제철이 되면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곤 했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어린 설풍의 손을 잡고 그 하얀 꽃향기 속을 거닐었다.

설풍에게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눈을 뜬 설풍은 깊이 들이마셨던 숨을 내뱉었다.

“후우우우우….”

그러나 그 날숨은 어쩐지 한숨과 닮아 있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나왔건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배꽃 향기에 어쩐지 더 답답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의 마음이 답답해진 이유는 고모할머니인 동채원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녀는 선우진과 앞으로의 일들에 관한 의논을 마친 후 설풍을 보며 한 가지를 간곡히 부탁했었다.

‘풍아야, 지금 동가에 앞으로 가주가 될 수 있는 아이는 죽은 동중서의 아들인 동지감이란 아이란다. 아직 아홉 살짜리 어린아이지.’

그녀가 왜 그 아이에 대한 말을 꺼냈는지 모르는 설풍은 그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동채원이 진중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 할미가 보기에 그 아이는 동중서보다 못하면 못했지 결코 더 나은 가주가 될 수 없는 아이다. 할미는 그게 걱정이로구나.’

‘…….’

‘그래서 너에게 부탁하고 싶구나. 너희를 이곳에 데려왔던 아이 동소운은 내가 아끼는 방계의 아이란다. 네가 그 아이와 혼인해 주지 않겠느냐? 정처로 삼아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너의 씨앗을 동가에 남겨 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는 부탁이란다.’

‘…예?!’

설풍으로선 청천벽력 같은 부탁이 아닐 수 없었다.

나서유 때문에 연태진의 마음도 밀어내고 있는 중이었건만 이제 고작 한 번 본 사람과의 혼인이라니, 절대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부탁을 한 사람이 오직 설풍만을 위해서 살다 돌아가신 외조부의 여동생이자 간신히 다시 만난 혈육이라는 점에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가 그런 부탁을 하는 이유 또한 외면하기 힘들었다.

설풍이 당황한 표정을 짓자 동채원이 다시 급히 말했다.

‘물론 네가 곤란해하는 일을 억지로 부탁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만약 그 아이가 커서 또 동중서와 같은 가주가 된다면, 그땐 나도 없을 이 동가가 어떻게 될지 막막한 마음에서 한 부탁이란다. 그러니 한 번만이라도 생각해봐 줬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말한 동채원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방에서 서둘러 나갔다.

그러자 설풍은 물론 일행들도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억지로 강요를 했다면 차라리 반감이라도 들었을 텐데, 저렇게 미안해하며 얘기하시니 오히려 더 부담감이 가중되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 명분이 양주동가의 미래와 관련된 일이니 그냥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어떤 난관에서든 늘 명쾌한 해법을 제시하곤 했던 선우진마저도 난감한 표정을 보였을 정도였다.

그때 진소은은 슬쩍 연태진의 눈치를 살폈다.

이 중 그녀의 마음이 제일 복잡할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소은의 눈에 들어온 연태진의 표정은 의외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인상을 살짝 찌푸리긴 했지만 생각보다 매우 담담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제일 먼저 입을 연 사람 또한 그녀였다.

연태진이 설풍에게 말했다.

‘난 풍이 고모할머님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 말에 깜짝 놀란 일행들이 뒤늦게 반문했다.

‘…예?!’

‘…연 소저?!’

그러자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한 명의 사랑하는 여인만 부인으로 얻고 싶어요? 만약 그렇다면 세력을 거느리지 않고 홀로 살아가면 돼요. 하지만 풍은 지금 다음 대 사왕이 되려는 거잖아요? 천하 삼 대 세력의 수장인 사왕 말이에요. 그렇다면 어차피 어떤 이유에서든 처를 늘리게 될 거예요. 동맹을 맺기 위해서든, 세력을 아우르기 위해서든, 아니면 후계자를 갖기 위해서든. 내 말이 틀린가요?’

그녀의 말에 일행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현실적으로 그녀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거대 세력의 수장으로서 사랑하는 한 명과만 혼인하겠다고 말하는 게 현실을 외면하는 말일 수도 있었다.

연태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사왕이 되고 나서도 반드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뭐 어쩔 수 없겠죠.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나중에 정말 어쩔 수 없이 혼인을 해야만 할 상황이 온다면 지금 거절한 것을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요. 아니, 아마 반드시 후회하게 되겠죠. 어차피 이럴 걸 차라리 그때 해 놓을 걸 그랬다고 말이에요.’

그 또한 맞는 말이었다.

만약 지금 혼인을 거절했다가 나중에라도 어쩔 수 없이 두 명 이상의 여인과 혼인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땐 동가와의 관계가 애매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탁을 거절한 설풍에게 원망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설풍은 그들의 어려움을 외면했다는 죄책감을 갖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러니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어차피 풍, 당신은 결국 거절할 수 없을 거예요. 당신, 동가에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잖아요? 당신 성격에 그걸 외면하고 살 수는 없어요.’

그녀의 말에 설풍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

하나같이 정곡을 찌르는 말들이었다.

심정적으로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머리에선 도저히 반박할 만한 논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진소은이 조심스럽게 연태진에게 물었다.

‘저기, 근데 언니는 그래도 괜찮아요?’

그 물음에 모두가 깜짝 놀라 연태진을 바라봤다.

생각해 보면 설풍이 다른 사람과 혼인했을 때 가장 상처받을 사람이 연태진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연태진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뭐, 유쾌하진 않겠지. 하지만 괜찮아. 그 동소운이라는 애, 꽤 예쁘긴 해도 나보단 한참 못하던데? 무공도 훨씬 아래고. 그러니 그런 애가 혼인을 한다고 나보다 풍의 마음을 더 차지할 수 있겠어? 그럼 됐지, 뭐.’

‘아아아….’

그녀의 대답에 일행들은 아까와 다른 의미에서 역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역시 연태진의 자신감은… 연태진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난 풍 정도의 남자를 나 혼자 독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현실을 모르지는 않아. 지금도 그런데 사왕이 된다면 더욱 그렇게 되겠지. 그걸 인정하는 건 풍과 함께하고 싶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해.’

그 말을 끝으로 연태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답게 말하긴 했지만,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음을 모두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 후 설풍은 생각을 좀 해 보겠다며 동가의 후문으로 나온 상태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배꽃 향기에 오히려 더 마음이 답답해져 버렸다.

어머니와의 마지막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얗게 피었던 배꽃과 빨갛게 타오르던 설가의 장원.

어머니와 설풍에게 어서 도망가라고 소리치며 적들을 향해 달려 나가시던 아버지 설천후의 뒷모습.

그리고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가 귓속말로 해 주셨던 마지막 말.

하얗게 흐드러진 배꽃을 보며 설풍은 마치 그날의 풍경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어지러웠다.

눈을 질끈 감고는 호흡을 정돈했다.

그리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해 봤다.

“후우우우.”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눈을 떠서 동산을 바라봤을 때, 설풍은 동산 위의 배나무 앞에 죽립인 한 명이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던 것인지 알 수 없는 편안한 자세였다.

설풍은 순간 당황했다.

이 정도 거리에 있는 사람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던 게 이십 대 이후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상대가 딱히 기척을 숨기고 있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헛웃음을 지었다.

‘아주 정신이 나갔었군.’

천하삼십육성급 고수라고 자부하던 자가 삼류 무사처럼 허점을 보이다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때였다.

죽립인이 문득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부터 지켜봤네만, 뭔가 마음이 복잡한 일이 있나 보군, 젊은이.”

설풍은 그를 바라봤다.

죽립을 쓰고 있어 생김새는 알 수 없었지만 무림인임엔 분명한 것 같았다.

경지도 최소 절정 이상인 것 같긴 하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자신에게 적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사실이었다.

적의가 있었다면 방금처럼 무방비 상태인 자신을 그냥 뒀을 리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때 그가 다시 말했다.

“아, 무례했다고 느꼈다면 사과하겠네. 하지만 여기 온 건 자네보다 내가 먼저였다네. 이곳은 젊은 시절 내가 사랑했던 여인과 종종 만나곤 했던 곳이었거든. 그래서 근처에 온 김에 들렀던 거였는데 자네가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오더군. 너무 심각해 보이기에 내 존재를 알려 줄 기회를 놓쳤다네.”

설풍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은 사실일 것 같았다.

아무리 자신이 무방비 상태였어도 그가 움직임을 보였다면 몰랐을 리 없었을 테니 말이다.

아마도 그는 아까부터 저 자리에 앉아 있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설풍이 그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옛 추억을 즐기시는 중에 제가 방해를 한 것 같군요.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죽립인이 문득 물었다.

“여자 문제인가?”

“…예?”

그의 느닷없는 질문에 설풍은 살짝 당황했다.

그러자 죽립 밑으로 보이는 그의 입이 빙긋이 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나도 예전에 이곳을 자네처럼 복잡한 표정으로 걸은 적이 있다네. 여자 문제였지. 그래서 물은 걸세.”

처음 만났음에도 무척 격의 없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오지랖이라고 느껴지기보단 어쩐지 친근한 느낌이 드는….

그의 질문에 설풍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글쎄요. 이게 여자 문제가… 정확히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군요. 혼인 문제이긴 합니다만.”

그러자 그가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아아, 여자 문제는 아닌데 혼인 문제라. 아마 원치 않는 혼인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인가 보군. 그거참 골치 아픈 문제지.”

그의 말에 설풍은 살짝 놀랐다.

그가 마치 경험담처럼 말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그의 얘기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풍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혹 그런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러자 죽립인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후우우, 있다뿐이겠는가?”

그의 대답에 설풍이 의아한 눈으로 되물었다.

“아까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도 말입니까?”

그러자 그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

그러고는 설풍에게 물었다.

“좀 긴 얘기가 될 텐데, 혹시 바쁘지 않다면 여기 앉아서 나와 얘기 좀 하겠나?”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자신이 앉아 있는 풀밭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설풍은 잠깐 망설이다 결국 그의 옆으로 가 앉았다.

그러자 그가 아련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그래, 무척 사랑하던 여인이 있었다네. 내 자신보다도 더 사랑하던 여인이었지. 그녀만 내 옆에 있어 준다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하지만 그녀는 결국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네. 그것도 내가 무척 존경하고 따르던 형님에게 말일세.”

설풍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형님… 에게 말입니까? 이유는…?”

그러자 그의 입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유라…. 그땐 뭔가 여러 가지 변명 같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네만, 결국 그런 거 아니겠나? 내게 가장 중요한 건 그녀였지만,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겠지.”

남의 일을 말하는 듯한 달관한 말투였다.

하지만 설풍에겐 오히려 그래서 그의 목소리가 더욱 쓸쓸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그 이후로 다른 부인을 얻으신 겁니까?”

“정확히는 부인들을 얻었네. 혼인이란 게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거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지.”

설풍은 잠시 망설이다 결국 그에게 물었다.

“…행복하십니까? 아니,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하는 혼인이 행복할지, 그것을 나중에 후회하게 되지 않을지.

설풍으로선 가장 궁금한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자 그가 천천히 대답했다.

“행복하냐라…. 글쎄, 행복하기 위해서 한 혼인이 아니었기에 그건 중요한 게 아닌 것 같군. 그리고 후회하지 않느냐라….”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설풍에게 물었다.

“자넨 사랑하는 여인이 있나?”

그 질문에 설풍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그러자 그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내 충고를 새겨 두게. 내 후회는 사랑하지 않는 이와 결혼했다는 것에 있지 않네. 오히려 사랑했던 여인을 너무 지나치게 사랑했다는 데 있다네.”

“…너무 사랑해서 후회하신단 말씀입니까?”

“그래, 그걸 후회하네. 나는 그때 그녀만큼 나를 더 사랑했어야 했네. 나와 관계된 다른 인연들을 더 소중히 여겼어야만 했네. 그때 사랑했던 여인을 위해 다른 모든 인연을 포기했던 대가로 그녀와 나는 결국 모두가 불행해져 버리고 말았으니까 말일세.”

깊은 회한이 느껴지는 말,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설풍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죽립인이 다시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삶의 얘기이기에 자네 삶에서도 똑같을 거라고는 보장할 수 없네. 그러니 그냥 이런 의견도 있다고만 들어 두게나. 그리고… 사실 나도 잘 모르겠네. 만약 그때 내가 반대의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 후회하지 않았을까? 그녀와 내가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 물은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는가? 가 보지 않은 길인걸. 다만… 자네만큼은 나처럼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군. 그냥 그렇다는 말일세.”

그리고 그는 설풍에게 손을 흔들고는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대화 즐거웠네. 그리고… 고맙네.”

설풍은 바람처럼 가볍게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을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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