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후계전쟁-1
사왕의 셋째 아들 괴항기가 설풍 일행을 따라잡은 위치는 고순인가로 향하고 있는 길 위에서였다.
삼백여 명의 무인들을 이끌고 전속력으로 달리던 괴항기는 탁 트인 지평선 저쪽에서 움직이고 있는 여섯 명의 인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양주동가의 동소운을 포함한 삼남삼녀의 인원들, 설풍 일행이었다.
며칠에 걸친 긴 추격과 헛걸음 끝에 드디어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게 된 것이었다.
괴항기가 급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기다! 놈들이 바로 저기 있다! 쫓아라! 절대 놓치지 마라!”
그의 목소리에 원래도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던 삼백여 무인들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이제야 이 지겨운 추격을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한 효과였다.
그러자 뒤에서 쫓아오는 이들을 발견한 설풍 일행 역시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새로 합류한 동소운 때문인지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신이 난 괴항기가 다시 소리쳤다.
“크하하하! 설풍, 이놈! 어딜 도망가느냐?! 사왕이 되겠다는 놈이 겁쟁이처럼 도망이나 다녀서야 되겠느냐?! 지난번처럼 형님으로 부르라고 꼰대짓이라도 해보지 그러느냐?! 크하하하!”
그 말을 들은 것일까?
설풍의 일행 중 두 명이 갑자기 멈춰 섰다.
삼남삼녀 중 젊은 남자 두 명, 바로 설풍과 선우진이었다.
하지만 그들 두 사람만이 멈췄을 뿐 나머지 일행들은 계속해서 달려 도주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이 뒤에 남아 시간을 끌려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눈을 번뜩인 괴항기가 외쳤다.
“감 노사! 백 노사!”
그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괴항기의 뒤에서 달리던 무인들 중 두 사람이 순간 앞으로 치고 나갔다.
파바박!
그들은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인 삼지신창 감작형과 괴항기의 큰 형인 괴정기에게서 빌려온 고수 귀도 백기량이었다.
두 사람이 쏘아진 화살처럼 압도적인 속도로 설풍과 선우진을 향해 돌진해갔다.
괴항기는 추격을 시작했을 때부터 저들을 만나게 되면 설풍과 선우진을 감작형과 백기량, 두 사람에게 맡아 달라고 부탁해놓은 상태였다.
괴항기가 보유한 무인들 중 가장 강력한 전력인 두 사람이 저들 중 가장 강한 두 명을 상대하는 사이, 남은 전력으로 포위를 완성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저 두 사람이 그대로 설풍 놈을 끝장낼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았다.
어차피 목표는 설풍 한 명뿐, 도주한 네 명은 사실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으니까 말이다.
‘두 미인들이 좀 아쉽긴 하지만, 중요한 건 설풍 놈이니까…. 자, 어쩔 테냐? 네놈들이 설사 천하삼십육성 급 실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진짜 천하삼십육성을 상대로 버틸 수나 있겠느냐?’
괴항기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어느새 무서운 속도로 돌진한 두 사람이 드디어 설풍, 선우진과 충돌했다.
“하아아압!”
두 사람 중 먼저 도착한 사람은 역시 삼지신창 감작형이었다.
허공으로 가볍게 몸을 띄웠던 그의 두꺼운 삼지창이 선우진을 향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츄화아악!
감작형의 삼지창은 어린아이 팔뚝만큼이나 두꺼운 철봉에, 물소의 뿔처럼 커다란 두 개의 창날이 옆으로 튀어나와 있는 거대한 무기였다.
그 길이와 두께가 워낙 크다 보니 아무리 고수라 해도 체격이 크지 않다면 사용하기 힘들 것 같아 보였는데, 감작형은 그리 크지 않은 체격임에도 불구하고 그 커다란 무기를 젓가락처럼 가볍게 찔러 넣고 있었다.
그러자 감작형의 일격을 침착하게 지켜보던 선우진이 신속하게 검을 휘둘러 삼지창을 막아냈다.
따앙!
종이 울리는 듯한 맑은 금속성.
삼지창과 검을 부딪친 선우진이 뒤로 가볍게 튕겨 나갔다.
“헛!”
마치 멧돼지에 치인 생쥐를 보는 것만 같았다.
너무도 가볍게 튕겨 나가는 모습.
그 광경이 꼭 두 사람의 압도적인 실력 차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자 눈을 크게 뜨고 두 사람의 충돌을 지켜보고 있던 괴항기가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했다.
“역시!”
하지만 가볍게 튕겨 나간 선우진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땅에 사뿐히 착지했다.
타닥!
멀리서 보기엔 힘없이 튕겨 나간 것 같았지만, 드러난 그의 행색은 전혀 손해를 본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걸 본 감작형이 살짝 감탄한 듯 말했다.
“호오, 놀라운 신법이로군. 듣던 대로 제법 괜찮은 실력이야.”
감작형은 자신의 삼지창에 걸렸던 느낌이 매우 가벼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옆에서 보기엔 튕겨 나간 것 같았지만 사실은 선우진이 스스로 뒤로 물러서며 충격을 대부분 상쇄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런 수법은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인 감작형이 보기에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감작형의 방금 일격이 공중에 떠 있는 바위도 그 자리에서 꿰뚫었을 법한 쾌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빠른 공격을 그런 식으로 흘려 내다니, 극한에 달한 신법이 아니면 흉내도 낼 수 없는 묘기였다.
그러자 씨익 웃은 선우진이 대꾸했다.
“그 거대한 삼지창을 보아하니 삼지신창으로 유명한 감작형 노사이신 모양이군요. 그런데 괴항기 따위의 지시를 들으시다니, 듣던 것과는 좀 다른 분이신 모양입니다.”
그 말에 감작형의 눈이 살짝 일그러졌다.
본래 그가 다혈질로 유명한 무인이었던 데다, 아무리 번해채가와의 관계 때문이라고는 하나 천하삼십육성인 그가 괴항기 따위의 지시를 듣는 건 역시 전혀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감작형이 굳은 얼굴로 대꾸했다.
“…어린놈이 혀가 길구나. 좀 잘라줄 필요가 있겠군.”
그러자 선우진이 다시 웃으며 맞받아쳤다.
“나이도 꽤 드신 분이 나잇값을 못 하시는군요. 아무래도 철이 좀 더 드셔야겠습니다.”
그리 강력한 도발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래 다혈질이던 감작형을 불타오르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눈을 꿈틀한 감작형이 바로 달려들었다.
“이놈!”
슈하악!
이번 공격은 아까보다 훨씬 더 위력적이었다.
삼지창이 회오리처럼 회전하며 찔러졌기 때문이었다.
용권풍처럼 회전하는 창날이 심지어 직선도 아닌 불규칙한 궤도로 흔들리며 찔러오고 있었다.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다 부숴버릴 것만 같은 강격이었다.
하지만 선우진은 그 강력한 일격을 향해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따당! 땅!
그러자 다음 순간 다시 아까처럼 가볍게 뒤로 튕겨 나가는 선우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짧은 순간 창날을 세 번이나 두드리며 다시 뒤로 물러섰던 것이었다.
“이놈이, 또!”
감작형은 분노한 함성을 토해내며 계속해서 앞으로 돌진했다.
이번엔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아압!”
하지만 선우진은 빙긋이 웃으며 가볍게 검을 휘둘러 창날을 두드릴 뿐이었다.
따다당!
***
감작형의 공격에 선우진이 계속해서 뒤로 튕겨 나가기만 하는 이상한 싸움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설풍과 백기량이 드디어 충돌했다.
“훕!”
샤아악!
빛살처럼 발도한 백기량의 협도가 허공에 얇은 선을 그렸다.
도는 보이지 않고 그 궤적만이 남은 쾌도, 그러면서도 직선이 아닌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삭풍 같은 도격이었다.
차앙!
도가 지나간 곳에 맑은 쇳소리만 남아 울려 퍼졌다.
백기량의 쾌도가 어느새 발톱을 드러낸 설풍의 맹호조와 부딪친 소리였다.
한번 부딪친 후 약간 물러선 백기량은 설풍이 빙긋이 웃음 짓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 자신을 상대하며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훕!”
백기량이 다시 달려들어 질풍처럼 도를 휘둘렀다.
그의 눈이 살기 가득 흉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챠챠챠챵!
설풍의 맹호조와 백기량의 쾌도가 얽히며 사방으로 불꽃을 만들어냈다.
수없이 병기를 교환하는 두 사람이 빙글빙글 돌며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들을 향해 달려가던 괴항기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양쪽을 번갈아 바라봤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투를 벌이고 있는 양쪽의 전장이 서로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작형과 백기량이 싸우는 사이 포위를 완성하려던 괴항기의 의도와는 맞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괴항기가 소리쳤다.
“설풍 쪽으로 가라! 검사 놈은 상관하지 말고 설풍 놈을 포위해!”
괴항기로선 당연한 선택이었다.
괴항기에게 있어서 선우진을 포함한 다른 모든 이들은 그저 설풍을 잡기 위한 방해물에 불과했으니까.
그의 명령에 모든 무인들이 설풍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감작형의 공격에 계속해서 가볍게 튕겨 나가고 있던 선우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감 노사, 심지어 곁가지셨구려? 괴항기 놈은 우리 싸움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모양이오. 그냥 이만하고 좀 쉬는 건 어떻겠소? 그렇게 해도 괴항기 놈은 전혀 모를 것 같은데 말이오?”
그 말에 안 그래도 속이 끓어오르고 있던 감작형은 벌컥 분노를 터트렸다.
“닥쳐라, 이놈!”
감작형은 아무리 잡으려 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 바람처럼 그저 뒤로 빠져나가기만 하는 선우진을 상대하며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완전히 농락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 그가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으로 등극한 이후로는 처음 겪어보는 이 갈리는 상황이었다.
따당!
분노해 휘두른 일격에 선우진이 또다시 저 멀리 튕겨 나가자 감작형이 견디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놈! 너도 무인이라면 제대로 싸워라!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셈이냐?!”
그러자 씨익 웃은 선우진이 대꾸했다.
“아, 그걸 바라셨소? 진작 말씀을 하시지.”
그 순간이었다.
이제까지 계속 물러서기만 했던 선우진의 신형이 갑자기 땅을 박차고는 화살처럼 쏘아졌다.
파박!
“!”
감작형은 깜짝 놀랐다.
놈을 어떻게든 잡는 것에만 신경 쓰고 있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방어를 소홀히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제야 놈의 도발에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선우진의 신형은 이미 그의 간격 안까지 들어온 상태였다.
장병기인 삼지창의 간격 안쪽. 단병인 검을 상대하기에 절대적으로 불리해지는 거리였다.
그 거리에서 선우진의 검이 빛살이 되어 쏘아졌다.
사일검법 구초
후예사구일
슈하아악!
빛살 그 자체가 된 아홉 개의 일시사일이 감작형을 향해 쏘아졌다.
몇백 년 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완전한 후예사구일이었다.
“윽!”
감작형은 자신이 그 검을 도저히 막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이제 단 한 가지뿐이었다.
“하아아압!”
발작적으로 소리친 그의 온몸에서 강기로 된 장막이 뿜어져 나왔다.
호신강기였다.
아홉 개의 빛살이 그를 덮친 건 그 바로 직후였다.
푸푸푸푸푹!
“!”
감작형은 호신강기를 꿰뚫을 듯 파고 들어와 자신의 바로 눈앞에서 간신히 멈춘 검끝을 바라봤다.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
딱 한 치만 더 들어왔다면 자신의 몸에 아홉 개의 구멍이 뚫렸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꿀꺽!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던 죽음에 감작형이 아주 잠시 굳어져 있을 때였다.
어느새 모습이 사라져 버린 선우진의 전음이 그의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 다음번엔 거기서 멈춰 주지 않겠소. 이번에 살아난 것이 본인의 능력 때문이 아님을 안다면 목숨을 소중히 여기시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선우진의 신형이 어느새 설풍 쪽으로 간 무인들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질풍 그 자체가 된 듯한 신법, 확실히 신법만 따진다면 감작형 자신보다 몇 수는 위임에 틀림없었다.
‘어쩌면… 신법만이 아니란 건가?’
감작형은 조금 전 선우진이 보낸 전음을 떠올렸다.
‘거기서 멈춰주지 않겠다고?’
그 말은 아마도 호신강기를 뚫을 수 있었지만 일부러 뚫지 않았다는 얘기인 것 같았다.
놈이 자신의 목숨을 한번 살려줬다는 얘기, 그런 생각을 하자 감작형의 마음속에서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건방진!’
자신은 천하삼십육성으로 불린지 벌써 십 년이 훨씬 넘은 고수였다.
그런 자신이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새파랗게 젊은 놈보다 하수라는 건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기습을 가했음에도 실패한 주제에, 꼭 한 수 위인 듯 허세를 부리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그렇게 결론을 낸 감작형은 다시 눈을 부릅뜨고는 선우진의 뒤를 따라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파박!
“이놈!”
***
귀도 백기량은 최근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수치심 때문이었다.
천하삼십육성에 근접한, 어쩌면 그들과 대등할지도 모른다는 명성을 떨치고 있던 그가 새파랗게 젊은 놈 앞에서 도를 뽑지도 못했다는 수치심.
그건 무인에게 있어 정말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나 비겁한 승리자보단 용감한 패배자를 더 인정해 주는 사왕련의 무인들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날 이후 백기량은 선우진을 다시 만나기만을 기다려왔다.
그를 다시 만나 그날의 치욕을 되갚아주는 것.
그것만이 최근 백기량이 가진 유일한 바람이었다.
‘그랬는데….’
채챙! 채채채챙! 채채챙!
설풍과 회오리처럼 휘돌며 병기를 부딪치던 백기량은 자기도 모르게 이를 갈고 있었다.
으드득!
그가 분노한 이유는 선우진이 아닌 설풍과 붙게 되었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고수인 감작형이 먼저 선우진을 노렸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 마음속에선 놈이 아닌 설풍과 붙게 된다는 사실에 약간 안도하기도 했었으니까.
그를 분노하게 하는 건 다름 아닌 자신과 불꽃 튀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설풍의 표정이었다.
지금 두 사람이 벌이고 있는 싸움은 분명 무척이나 치열했다.
백기량 자신도 최선을 다해 도를 휘두르고 있었고, 설풍 또한 막상막하로 자신과 맞부딪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설풍의 표정이 전혀 치열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재밌는 구경을 한다는 듯 아주 편안한 얼굴.
어디까지 할 수 있나 지켜보는 듯한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표정이 지금 백기량을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이노옴!”
채채채채챙!
백기량은 미친 듯이 도를 휘둘렀다.
삭풍 같았던 그의 도격이 광풍이 되어 설풍을 휘몰아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엄청난 도격도 설풍의 표정을 굳게 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백기량의 모든 도격을 부드럽게 방어한 설풍의 시선은 백기량이 아닌 그의 뒤로 향해 있었다.
“흠.”
백기량은 이제 심지어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쳐다보는 설풍의 행동에 심장이 타버릴 것만 같은 분노를 느꼈다.
“으아아아아!”
그때였다.
문득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놈을 붙잡아 놓으시오, 백 노사!”
괴항기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백기량은 괴항기와 무인들이 자신들 쪽으로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주변을 살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였다.
설풍이 중얼거렸다.
“자, 그럼 다시 움직여볼까?”
그 중얼거림을 들은 백기량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고 말았다.
아마도 놈이 다시 도주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백기량은 이를 악물고 설풍에게 달려들었다.
설사 놈이 자신보다 강하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놈에게 달라붙어 도주하지 못하게 막을 수는 있을 테니까.
“훕!”
하지만 그때였다.
설풍의 시선이 문득 자신에게 돌진해 오던 백기량에게로 향했다.
동시에 그의 맹호조는 하늘을 찢는 뇌전으로 화한 상태였다.
쉬이이이익!
“윽!”
그야말로 벼락같은 공격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공간을 찢어오는 맹호조에 백기량은 황급히 도를 회수해 자신의 몸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그 순간, 진짜 뇌전을 맞은 듯한 거대한 충격이 그의 팔로 쏟아졌다.
쩌어어엉!
“크윽!”
엄청난 경력이었다.
그 강력한 공격에 백기량은 속절없이 뒤로 튕겨 나갈 수밖에 없었다.
단 한 번의 공격을 받아냈을 뿐인데 팔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백기량은 자신의 눈에서 멀어지는 설풍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놓쳤다….’
그는 짙은 좌절감에 또 한 번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적수를 찾기 힘들었던 자신이 저 젊은 놈을 그저 붙들고 있는 것조차 실패한 것이었다.
자신을 튕겨낸 놈은 이제 다시 도주해 버릴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백기량은 설풍이 도주하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오히려 당황하고 말았다.
설풍의 시선은 달려오고 있는 수백의 무인들 쪽을 향해 있었다.
‘설마 저 인원과 정면으로 맞붙을 셈인가?’
백기량이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크아아아악!”
“아아아악!”
“뒤, 뒤다!”
“기, 기습…! 아아악!”
달려오고 있던 무인들의 후방에서 갑자기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설풍이 바라보고 있는 바로 그쪽 방향이었다.
‘무슨?!’
백기량은 놀란 눈으로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곧 한 줄기 빛살이 된 선우진이 무인들 사이를 무인지경으로 달려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엄청난 속도, 너무 빠른 나머지 그가 지나가고 난 이후에야 무인들의 비명과 피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푸화악!
“크아아악!”
“으아아악!”
백기량은 이를 악물었다.
‘저놈!’
그때였다.
선우진의 시선 또한 백기량을 향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 순간이었다.
그를 향해 한번 씨익 웃어 준 선우진의 신형이 무인들 사이로 파묻히듯 사라졌다.
스스슥!
“!”
지켜보고 있던 백기량은 물론 주변에 있는 무인들조차도 그의 종적을 찾을 수 없는 감쪽같은 은신이었다.
‘어디로?!’
백기량이 그를 찾아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무인들 한 가운데에서 강렬한 검광이 번뜩이며 그곳에서 선우진이 뛰쳐나왔다.
촤아아아악!
“끄아아아악!”
“으아아악!”
폭뢰가 폭발하는 듯한 검격, 그 주변에 있던 십여 명의 무인들은 모두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피 또한 선우진을 적시지는 못했다.
그저 무의미하게 허공을 수놓고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선우진이 이미 설풍의 옆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시죠, 형님!”
“알았네!”
파박!
한곳에 모인 설풍과 선우진이 아까 그들의 일행들이 향한 방향으로 다시 도주하기 시작했다.
괴항기 측의 무인들로선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속도의 도주였다.
그러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 그 광경을 지켜봐야만 했던 괴항기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
“대체 뭐하는 거냐?! 놓치지 마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괴항기를 따르는 무인들은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쫓아보려 했다.
하지만 양쪽의 신법 수준 차이가 너무 심했다.
거리가 순식간에 벌어지고 있었다.
괴항기가 다시 외쳤다.
“포기하지 마라! 놈들이 일행과 만나는 순간 다시 느려질 것이다!”
아까도 그들이 동소운과 함께 있을 때 그리 빠르지 못했음을 생각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외쳤을 때였다.
그의 시야에 문득 작은 강이 하나 들어왔다.
설풍과 선우진이 향하고 있는 작은 강.
그리고 그 강기슭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배를 타고 있는 설풍의 일행들이 설풍과 선우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괴항기가 자기도 모르게 신음처럼 내뱉었다.
“아, 안 돼….”
괴항기는 일행들과 배를 타고 유유히 멀어지기 시작한 설풍 일행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