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후계전쟁-2
“쫓아라! 놓치지 마라!”
설풍 일행이 배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고 좌절하던 것도 잠시, 괴항기는 그 강폭이 그리 넓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시간은 좀 더 걸리겠지만 추격이 완전히 좌절된 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설풍 일행은 맞은편으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강의 상류 쪽으로 배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강물의 흐름을 거스르는 쪽.
괴항기와 무인들은 강변을 따라 그런 설풍들을 계속 쫓아갔다.
괴항기가 문득 자신의 부관에게 물었다.
“이 방향으로 가면 어디가 나오지?”
“아마 고순 근처로 갈 것 같습니다.”
“흥, 역시 그랬군.”
설풍 일행이 원래 향하고 있던 곳이 고순인가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괴항기는 다시 부관에게 말했다.
“고순인가로 사람을 보내라! 가서 이 상황은 정기 형님께서도 신경 쓰고 계신 일이니 절대 상관하지 말라고 전해!”
“예! 알겠습니다!”
부관이 바로 사람을 보내는 모습을 본 괴항기는 다시 강물 위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유유히 강물 위로 떠가는 배를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럼에도 괴항기는 비릿하게 웃음 지을 수 있었다.
고순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놈들은 지금 그저 강소성의 외곽을 향해 가고 있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설풍 놈을 죽여도 상관없는 강소성의 바깥쪽으로 말이다.
괴항기로선 오히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으흐흐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지금은 좋겠지. 멀리, 아주 멀리까지 가 보려무나, 크흐흐흐!”
강소성은 장강과 회하라는 두 개의 거대한 강이 만나는 성이기도 했지만, 그곳이 아니더라도 태호를 비롯한 수많은 크고 작은 호수와 작은 강들이 얼기설기 얽혀 있는 지역이었다.
선우진 일행은 지금 그 작은 강 중 하나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때문에 아무리 유속이 느린 강이라고 해도 흐름을 거스르는 배의 속도는 전혀 빠를 수가 없었다.
그들을 계속해서 따라가다 괴항기가 문득 부관에게 다시 물었다.
“저 정도면 우리가 상류로 먼저 올라갈 수도 있지 않겠나?”
그 말에 부관이 바로 대답했다.
“예,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상류로 먼저 올라갔다 저들이 배에서 내려 도주한다면 오히려 더 잡기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괴항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앞쪽을 막을 수 있는 놈들을 한번 수배해 보도록. 수적이든, 낭인이든. 그리고 우리가 탈 배도 한번 구해보고.”
“예, 알겠습니다!”
너무나도 여유로운 추격에 괴항기는 이런저런 수단을 강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괴항기의 부관이 섭외한 수적들이 상류 쪽에서 나타났다.
세 척의 배, 각각 삼십여 명씩 모두 구십 명 정도의 수적들이 탄 꽤나 커다란 배였다.
드디어 자신이 섭외한 세 척의 배가 설풍이 탄 배를 향해 맹렬히 접근하는 것을 보자, 괴항기는 신이 난 듯 웃으며 소리쳤다.
“하하하하! 설풍, 이놈! 배를 타고 있으면 안전할 줄 알았더냐?! 네놈이 그래 봐야…!”
하지만 그는 말을 하다 만 채로 그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배에서 훌쩍 몸을 날린 선우진이 허공에 뜬 채로 배를 향해 검을 그었기 때문이었다.
촤아아아악!
그의 검격이 허공을 갈랐다.
마치 공간 자체를 찢어 그 사이의 심연을 드러나게 하는 듯한 검격이었다.
그러자 그 공간에 걸쳐 있던 모든 것들이 갈라졌다.
허공도, 강물도, 배와 수적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본 괴항기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저게 무슨?”
다음 순간, 선우진의 일격에 두 동강 난 배 위에서 수적들이 물로 쏟아져 떨어지고 있었다.
모두가 혼비백산한 얼굴과 공포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는 채로였다.
“으아아아악!”
“사, 살려줘!”
“괴물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두 동강 난 배를 가볍게 밟고 다시 허공으로 날아오른 선우진은 한 번에 한 척씩 다른 두 척의 배도 마찬가지 모습으로 만들어줬다.
배에 탄 선원들이 어떻게든 배를 돌리려 해봤지만 그럴 시간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촤아아아악!
촤아아아악!
“요, 용왕님!”
“살려줘!”
“대협! 제발!”
그 광경을 본 괴항기는 자기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바로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흠칫한 괴항기는 이내 억지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잔재주를 부리는군. 저런 배 하나쯤 동강내는 건 감 노사나 백 노사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안 그렇소?”
그렇게 말한 괴항기는 거만한 표정으로 삼지신창 감작형과 귀도 백기량을 바라봤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두운 표정으로 선우진이 다시 자신의 배로 돌아가는 모습만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민망해진 괴항기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흠, 흠!”
그 후로 괴항기는 어쩔 수 없이 물에서 놈들을 막겠다는 생각을 달리해야만 했다.
아무래도 물 위에서 놈들을 상대하는 게 위험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그에게 부관이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
“공자! 조금만 더 가면 강폭이 확 좁아지는 구간이 나온다고 합니다! 폭이 삼 장 정도에 불과하다고 하니 그곳에선 땅 위에 선 채로 놈들을 칠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괴항기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폭이 삼 장 정도라면 그 중간에 있을 배까지의 거리는 일 장 정도밖에 안 될 거라는 뜻이었다.
그 정도라면 배를 타고 있는 게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의 거리일 터.
그때가 바로 다시 놈들을 공격할 절호의 기회일 것이었다.
“그래? 크흐흐흐, 놈들도 이젠 끝이로구나.”
그리고 잠시 후, 부관이 말했던 그 구간이 나왔다.
강폭이 확 줄어들며 흐름 또한 빨라지는 구간.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설풍의 배로는 통과할 수 없을 것 같은 구간이었다.
괴항기는 강 상류를 바라보며 눈을 번뜩였다.
놈들도 이젠 어쩔 수 없이 배에서 내릴 것임에 틀림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아니나 다를까, 배에 타고 있던 설풍과 일행들이 강 건너편으로 훌쩍 건너뛰어 다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준비하고 있던 괴항기 또한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잡아라! 이번에야말로 절대 놓치지 마라!”
괴항기의 무사들은 좁아진 강폭을 이용해 강을 건너 설풍 일행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삼 장의 거리를 순수하게 건너뛸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지만, 모두가 고수들이기에 약간 몸을 적시더라도 강을 건너지 못하는 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잠시 후, 강을 건너느라 약간 시간이 지체됐음에도 괴항기는 다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예상대로 도주하는 설풍 일행의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새로 합류한 동소운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게 점점 시간이 갈수록 양쪽 간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을 때였다.
양쪽은 평야지대를 지나쳐 구릉지대에 진입했고, 설풍 일행은 언덕 사이로 난 길 쪽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설풍 일행은 갑자기 도주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도주하고 있던 언덕 사이에 무인들로 보이는 한 집단의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백여 명 이상은 될 법한 인원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본 괴항기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음? 저놈들은 또 뭐냐?”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설풍이 멈춘 것을 봤을 때 저들의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그리고 거리가 가까워지자 괴항기는 마침내 그들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저쪽 무리의 사람들 앞에 익숙한 얼굴의 남자 한 명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발견한 괴항기가 경악해 소리쳤다.
“저, 정기 형님?! 어떻게?!”
그는 사왕의 첫째아들인 괴정기였다.
그가 무인들을 이끌고 설풍이 도주하는 경로에 미리 매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예상 못 했던 일이라 해서 그게 꼭 나쁜 일일 이유는 없었다.
괴항기는 곧 멈춰선 설풍들을 따라잡아 그들의 뒤를 포위할 수 있었다.
설풍 일행은 앞으로 괴정기와 백여 명의 무인들, 뒤로는 괴항기와 삼백여 무사들에게 포위되어 버린 상태가 된 것이었다.
사왕의 첫째 아들 괴정기가 무표정한 얼굴로 설풍에게 말했다.
“안휘성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덕분에 내가 직접 너의 목숨을 거둬줄 수 있게 되었구나.”
그 말에 괴항기가 새삼 주변을 둘러봤다.
어쩐지 강소성에서 보기 힘든 구릉지대라고 했더니만 어느새 그 옆 안휘성까지 넘어온 모양이었다.
그때 괴정기가 문득 고개를 돌려 괴항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까지 놈들을 몰아오느라 고생했다, 항기. 너의 노고를 잊지 않겠다.”
그 말에 괴항기는 순간 이를 악물었다.
이제부터 자기가 할 테니 알아서 그만 빠지라는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형님.”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두려워하는 형인 괴정기와 부딪칠 수는 없는데다 삼지신창 감작형만 제외한다면 어차피 자신이 데리고 있는 가장 강한 무인들이 다 괴정기의 부하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괴정기는 어차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그에게서 다시 시선을 거두고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절정 이상의 무인들은 모두 나서라.”
그의 말이 끝났을 때였다.
괴정기와 괴항기의 부하들 쪽에서 몇몇 무인들이 여유 있게 웃으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모두 사, 오십 명 정도는 될 법한 수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을 스윽 둘러본 괴정기는 다시 고개를 돌려 괴항기 쪽에 있는 감작형과 백기량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감 노사와 백 노사께서도 손을 거들어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백기량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감작형 또한 못마땅한 얼굴로 잠시 망설이다 마침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저 검사와 나 혼자 결판을 내게 해준다면 돕겠소.”
그런 그의 시선은 선우진을 향하고 있었다.
아까 결론짓지 못했다고 생각한 승부를 지금 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겨루는 승부가 공정할 리 없다는 걸.
적들에게 사방을 압박받고 있는 상황에서의 대결이라니, 자신의 승리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었다.
그러자 그의 부탁을 들은 괴정기가 바로 대답하려다가 잠시 멈칫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그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소?”
그는 다시 설풍 주변의 인물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와 함께하지 않겠나? 그대들이 내게 온다면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겠다. 저 설풍 따위의 옆에 있는 것보단 훨씬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도록 해주지. 바로 사왕련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로 말이다.”
영입제안이었다.
괴정기 자신이 사왕의 자리에 올라 그들을 측근으로 써 주겠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괴항기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모습이 보였지만 굳이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다음 대 사왕이 되는 건 기정사실과도 같은 일이었으니까.
괴정기는 처음 설풍의 일행을 봤을 때부터 그들이 탐났었다.
귀도 백기량을 굳어 버리게 만든 젊은 검사 선우진은 물론, 초절정에 이른 아름다운 여인 하원달기 연태진, 자연곤 진소은, 이미 명성이 높은 홍해아 증칠까지.
하나같이 자신의 휘하에 들이고 싶은 인물들뿐이었다.
그리고 괴정기는 그들이 자신의 제안에 흔들릴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저 정도 능력을 지닌 인물들이 고작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더군다나 사왕련의 높은 자리까지 약속했으니 절대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설풍 일행의 대답을 기다릴 때였다.
인상을 팍 찡그린 증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뭐라고? 저거 미친 거 아니냐? 감히 이 홍해아 님을 데려가고 싶다면서 일인지하 만인지상? 그 일인이 혹시 나를 말하는 거냐? 그렇다면 고민은 해주지. 뭐… 한 일 다경 정도?”
그 말에 괴정기의 눈이 꿈틀거렸다.
자신을 주인으로 섬긴다면 고민은 해주겠다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연태진 또한 매혹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흐음, 미안해서 어쩌지? 그쪽이 나를 탐내는 건 이해하지만 풍을 버리고 가기엔… 그쪽이 너무 약하고 못생겨서 말이야. 어머, 내가 또 진심을 말해 버렸네? 미안해. 너무 상처받진 말고.”
이번에는 괴정기도 이를 악물었다.
증칠의 말은 그저 어이가 없었지만 연태진의 말은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었다.
설풍보다 약하고 못생겼다니, 더군다나 그 말을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의 입으로 듣다니.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진소은이 슬쩍 그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 저기. 미안해요.”
괴정기의 부탁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게 정말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너무 진심으로 보여서 오히려 더 자존심이 상하고 있었다.
일행들이 차례로 보인 반응에 괴정기가 더 이상 평정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을 때였다.
마지막으로 선우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주제 파악을 전혀 못 하는 놈이로군. 너야말로 혹시 내 밑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나?”
뭐라고?
다음 대 사왕이 될 자신에게 감히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고?
실로 어처구니없는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평상시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괴정기마저도 입을 떡 벌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선우진의 말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물은 후 바로 다시 말을 덧붙였다.
“아, 미안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군. 너 정도 수준의 남자를 받아주기엔 아무래도 영 마음이 내키지 않거든. 그냥 못 들은 걸로 해다오.”
그러자 괴정기가 드디어 폭발했다.
그가 드물게 붉어진 얼굴로 설풍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나같이 네놈처럼 멍청한 놈들뿐이로구나. 그래, 그게 소원이라면 다 같이 저승으로 보내주마!”
그때였다.
설풍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혹시 내가 왜 여기로 왔는지는 생각해 본 적 있나?”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그 느닷없는 질문에 괴정기는 잠시 하려던 말을 멈추고 설풍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