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후계전쟁-4
장내에 있는 몇백 명의 무인들이 한꺼번에 무릎을 꿇으며 크게 사왕의 이름을 외치는 광경은 가히 장관이라 할 만했다.
무릎을 꿇지 않은 이들은 선우진 일행과 사왕의 아들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외부에서 영입된 고수들뿐이었다.
하지만 무릎을 꿇지 않은 그들 또한 주변의 광경을 둘러보며 침만 꿀꺽 삼켜야 했다.
마치 신처럼 공중에 떠 있는 사왕도, 그 사왕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는 사왕련 무인들의 모습도 모두 너무나도 압도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팔짱을 낀 채 지상을 내려다보던 사왕이 깃털이 내려오듯 천천히 아래로 하강했다.
바로 괴정기가 있는 곳으로였다.
“아, 아버지께서 어떻게….”
괴정기는 덜덜 떨리는 눈으로 허공에서 내려오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떨림이 더 심해지고 있었다.
자신을 보고 있는 사왕의 눈빛, 마치 무생물을 보고 있는 듯한 그 무심한 눈빛이 너무도 두려웠다.
괴정기는 예전부터 사왕과 자신들의 관계가 부자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주 정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로서 자식들을 바라보기보단 사왕의 자리를 물려줄 후계자로서만 자식들을 바라보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 사왕이 후계자로서 실책을 범한 자신을 가만히 둘 리 없었다.
뭔가 변명을 해야만 했다.
그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 아버지, 이, 이건….”
평상시 그에게선 절대 볼 수 없었던 공포에 질린 표정과 말을 더듬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어린아이처럼 겁먹은 그의 모습에 그의 부하들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괴정기를 바라봤다.
그 순간, 사왕 괴갈현이 입을 열었다.
“네가 사왕십삼가의 형제들에게 독을 썼느냐?”
아무런 감정도 찾아볼 수 없는 평이한 말투, 마치 식사는 했냐고 물어보듯 듯한 가벼운 어조였다.
그 말에 괴정기는 서둘러 변명하려 했다.
“아, 아닙니다. 소자는 그저….”
하지만 괴갈현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초대 사왕께서도 건드리지 말라고 했던 사왕십삼가를, 그것도 독을 써서 해하려 했단 말이지?”
역시 가볍고 평이한 말투, 하지만 괴정기는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아버지는 자신의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그리고 들어줄 생각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괴정기가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려 했다.
“아, 아버…!”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뭔가에 목이 꽉 막힌 듯, 그리고 온몸이 속박된 듯 몸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끄…!”
무형지기였다.
어느새 흘러나온 사왕의 무형지기가 그를 완전히 옭아맸던 것이었다.
괴정기가 어떻게든 자신의 목을 쥐어짜 목소리를 내보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때였다.
사왕 괴갈현이 무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독 따위를 사용해 사왕십삼가의 형제들을 해하려한 아들을 둔 적이 없다. 그러니 너는 더 이상 사왕의 후계자 후보도, 사왕의 아들도 아니다.”
그 말과 함께 사왕은 검지손가락으로 괴정기의 단전을 가볍게 툭 건드렸다.
그러자 그 순간.
괴정기에게 끔찍한 격통이 찾아왔다.
화아악!
“끄어…!”
끔찍한 열기와 고통.
온몸이 불구덩이에서 타고 있는 듯한 고통이었다.
온몸의 근육이 갈가리 찢기는 듯한 느낌에 괴정기의 눈동자가 뒤집혔다.
“끄으으으…!”
하지만 그런 고통 속에서도 그는 몸을 움직일 수도,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그저 벌린 입에서 침만 줄줄 흘린 채 온몸을 떨며 눈깔을 뒤집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끔찍했던 격통이 사라지자 그는 드디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을 수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정신없이 숨을 헐떡이던 괴정기는 잠시 후에야 문득 자신의 속에서 뭔가가 사라졌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 내공이…?”
몸속에서 내공이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단전이 파괴되어 버린 것이었다.
“!”
무인으로서의 생명이 끝났다는 그 끔찍한 사실에 경악한 괴정기가 막 비명을 지르려 할 때였다.
“컥!”
그는 입을 벌린 채로 또 속박되어 버리고 말았다.
목에서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자 무형지기로 그를 옭아맨 사왕이 지나가듯 말했다.
“아, 깜빡할 뻔했구나. 너는 이제 나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다.”
그렇게 말한 그의 눈이 살짝 번뜩였다.
찌지직!
“꺼…!”
괴정기는 다시 찾아온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쳐야만 했다.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무력한 몸부림이었다.
괴정기는 자신의 옆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분홍빛 물체를 절망에 가득 찬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 분홍빛 물체는 바로 괴정기의 혀였다.
사왕이 무형지기로 괴정기의 혀를 뜯어내 허공에 띄워놓았던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의 괴정기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혀가 땅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툭!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사왕은 괴정기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괴정기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자신의 앞에 떨어진 혀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사왕은 그런 그를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무심한 표정으로 주변을 스윽 둘러봤다.
그러자 경악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모든 이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여 그의 눈을 피했다.
오랜만에 보게 됐지만 사왕련의 모두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왕 괴갈현의 행사가 얼마나 잔인하고 무정한지를.
그렇게 모두가 부복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가운데, 괴갈현은 문득 그 자리에 뻣뻣이 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설풍과 시선을 마주쳤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무심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 시선교환이 지속되자 다른 일행들의 마음속에 설풍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깃들기 시작했다.
저러다 설풍 또한 그에게 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그때였다.
사왕 괴갈현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이번엔 괴항기에게로였다.
그가 역시 무심한 표정으로 괴항기에게 말했다.
“항기, 너는 내게 할 말이 없느냐?”
그러자 화들짝 놀란 괴항기가 소리쳤다.
“저,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독으로 사왕십삼가를 암습하다니! 절대 모르는 일입니다!”
그 말에 괴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항기, 너는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만큼 대담한 아이가 아니지.”
얼핏 배짱이 없다고 들릴 수도 있는 얘기였지만, 괴항기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괴정기와 한패로 몰려 자신 또한 저런 꼴을 당하지만 않는다면 어찌 됐건 다 상관없었다.
하지만 괴갈현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강소성에서 다른 후계자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말은 왜 어긴 것이냐?”
그 말에 괴항기의 숨이 턱 막혔다.
“예, 예?!”
그러고는 본능적으로 정신없이 대답했다.
“저, 저는 강소성 안에서 해를 끼친 적이 없습니다! 저것 보십시오! 저 설풍 놈도 멀쩡하지 않습니까?! 저는 다만 놈을 강소성 바깥으로 몰아내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것도 제가 아닌 제 부하들이….”
그 순간 괴갈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러자 괴항기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괴갈현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지금 나와 말장난을 하겠다는 것이냐? 공격은 했지만 해는 끼친 적이 없다? 네가 아닌 네 부하들이 했으니 너와는 관계없다?”
“아, 아니 그건…!”
그 순간이었다.
사왕 괴갈현이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그러자 뭔가 찢기는 소리와 함께 괴항기가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찌지직!
“끄아아아악!”
괴창기는 끔찍한 고통에 오른손으로 왼 어깨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그의 오른손에는 더 이상 어깨가 잡히지 않았다.
이미 뜯긴 그의 팔이 피를 뿌리며 허공에 둥둥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왕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에게 해를 입힌 적이 없다. 그저 너의 팔을 뜯었을 뿐이니까 말이다. 그렇지 않느냐?”
그 광경을 지켜보던 주변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지금 사왕의 행동이 괴항기의 억지를 반박하기 위함이라는 건 충분히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친아들이자 사왕의 후보 중 한 명의 팔을 뜯어버린다는 건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과격한 처벌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아예 무인으로서의 생명을 끝내 버린 괴정기보다는 당연히 나았다.
하지만 사왕련에서 그토록 금지하는 독을 이용해 사왕십삼가를 노렸던 괴정기의 죄와 괴항기의 죄가 같을 수는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지금 사왕의 행동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다.
적어도 괴항기를 여전히 사왕 후보라고 생각한다면 절대 줄 수 없는 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사왕은 비명을 지르고 있는 괴항기에게서 미련 없이 시선을 돌리더니 주변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선포했다.
“오늘부로 첫째 괴정기와 셋째 괴항기의 후계자로서의 자격을 박탈한다.”
역시.
그의 말에 주변인들은 입술을 깨물며 자신들의 생각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사왕은 곧이어 그 이유에 대해서도 말했다.
“사왕이 고작 싸움을 잘하는 자에 불과했다면 우리 사왕련은 결코 천하제일을 다투는 세력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지금껏 유지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왕’의 호칭을 이으려는 자가 규칙을 어기는 것을 우습게 알고 그저 억지 같은 변명만 늘어놓는다면 누가 그를 진심으로 따르겠는가? 나는 사왕이란 이름을 우습게 만들 후계자 따위는 둘 생각이 없다.”
그의 말에 사왕련에 속한 모두가 더욱 고개를 푹 숙여 복종의 뜻을 표했다.
그 말에 모두가 납득한 것은 아니었지만 누구도 반론의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
그 후, 괴정기와 괴항기는 사왕의 허락하에 바로 부하들에게 부축되어 돌아갔다.
눈에 띄는 점은 귀도 백기량, 백골괴마 홍추, 단악패부 고상종으로 대표되는 외부에서 영입된 그들의 수하들은 따라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비단 따라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아예 떨어져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이제 사왕의 후계자에서 탈락한 그들과는 더 볼 일이 없다는 듯한 냉랭한 태도였다.
그런 그들이 무슨 용무에선지 근처에서 서성거리며 근방에서 완전히 떠나지 않고 있을 때, 사왕십삼가의 인원들은 환한 표정으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표범처럼 날래고 강맹한 도법, 흑표도법으로 유명한 비주맹가의 가주 맹도후가 고순인가의 가주 연창빙랑 인교화에게 반갑게 말을 걸었다.
“화매! 아니, 인 가주! 정말 오랜만이로군. 그 미모는 어떻게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아름다운가?!”
그러자 실제 나이 사십 대임에도 불구하고 삼십 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얼음 같은 미녀 인교화가 도도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후후, 다 늙어 주름만 가득한데 미모는요. 맹 오라버니야말로 여전히 몸이 좋으신데요?”
그녀의 말에 맹도후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대꾸했다.
“하하하! 무인의 몸이 안 좋으면 쓰나? 수련을 멈추지 않았으니 몸은 계속 좋아질 수밖에.”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몸은 과연 표범처럼 탄력 있고 날렵해 보였다.
맹표도객이라는 별호다운 야수처럼 단련된 모습이었다.
그러자 거대한 살집에 파묻힌 남자, 태창저가의 가주 저황우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으허허허! 그럼, 그럼. 무인의 몸이 안 좋아지면 쓰나? 늘 평소와 같아야지.”
그 말에 인교화가 뜨악한 눈빛으로 그의 출렁거리는 살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질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오라버니의 몸도 여전하시군요. 지금도 젊었을 때처럼 많이 드시나 보죠?”
그러자 저황우가 볼살을 출렁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으허허허! 아냐, 아냐.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식사량이 계속 줄더라고. 나도 어쩔 수 없이 소식하고 있다니까.”
“…네?”
같은 세대인 고순인가, 비주맹가, 태창저가의 가주들이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그 옆에선 젊은 또래의 무인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특히 소주백가의 백무호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진소은에게로 바로 달려가 소리쳤다.
“진 소저! 그간 잘 지내셨소?! 정말 보고 싶었소! 소생은 그간 진 소저를 다시 만날 날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오!”
“네, 네? 아, 네, 가, 감사합니다.”
백무호의 저돌적인 인사에 진소은은 애써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고는 선우진의 뒤로 살짝 숨었다.
그는 이전 소주백가의 일이 해결되고 몸을 회복한 뒤부터 진소은에게 노돌적으로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었다.
함께 봉을 부딪칠 때부터 진소은에게 반해버렸다는 얘기였다.
그의 근거지인 소주는 물론 강소성 전체에서도 호쾌한 성격으로 유명한 그는 자신의 감정을 조금도 숨기려하지 않았다.
만약 선우진이 그에게 강소성 남쪽 가문들의 치료와 규합을 부탁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그때부터 소주백가를 떠나 일행들을 따라왔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정확히는 진소은을 말이다.
선우진은 한발자국을 옆으로 움직여 진소은을 더 가려주고는 백무호에게 웃으며 포권했다.
“백 공자,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부탁을 드리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잘 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자 아쉬운 얼굴로 진소은 쪽을 힐끗 바라본 백무호가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하! 선우 공자께서 계획도 다 짜주시고, 치료 방법까지 다 가르쳐 주셨는데 그걸 따라 하는 것조차 못한다면 그야말로 사람이 아닌 원숭이가 아니겠소? 아, 인사하시오. 이쪽은 여동육가의 첫째인 육대우, 육 소가주라오.”
그가 가리킨 곳에는 과묵한 인상을 한 커다란 체격의 청년이 묵묵히 서 있었다.
근육질의 거대한 체격과 험상궂은 얼굴, 하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는 순박해 보이는 눈망울이 그야말로 커다란 황소를 연상시키는 인상이었다.
그는 백무호가 자신을 소개하자 정중하게 포권하며 인사했다.
“공자께서 알려 주신 덕분에 나도, 아버지도 심각한 상황까지 가지 않을 수 있었소. 감사하오. 앞으로 우리 육가의 은인으로 모시겠소.”
그러자 백무호가 다시 말을 덧붙였다.
“같은 양가의 의원들이라 해도 모두 다 같은 생각을 가진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소. 다른 가문으로 파견된 양가 의원들은 우리 백가에서만큼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중독시키지는 않았더구려. 그래서 치료가 수월했소. 물론 여동육가의 가주님은 그중에서도 조금 상세가 심했지만 말이오.”
그 말에 선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도 돌아가신 분이 없다니 다행입니다.”
“그러게 말이오. 우리 형님도 조금만 더 일찍 발견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백무호가 몇 개월 전에 죽은 그의 형 백무룡을 떠올리며 침울한 표정을 짓자 일행들은 숙연한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췄다.
선우진은 그사이 설풍 쪽을 힐끗 바라봤다.
그는 일행들과 좀 떨어진 곳에서 사왕 괴갈현과 독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
괴갈현이 무심한 표정으로 설풍에게 말했다.
“축하한다. 두 명의 경쟁자를 탈락시키고 많은 가문들의 지지를 얻었구나.”
설풍은 축하한다는 말과 달리 전혀 축하하는 것 같지 않은 무심한 표정의 괴갈현을 잠시 바라보다 물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그들이 한 짓에 대해선 전부터 이미 알고 계셨을 텐데요? 그리고 그들 모두… 련주님의 아들이 아닙니까?”
그 말에 괴갈현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알고 있었다라…. 선우진이란 녀석이 말해 주더냐?”
“예, 괴항기가 한 짓은 물론이고 괴정기가 대풍양가를 통해 꾸미던 일도 아마 이미 알고 계셨을 거라고 하더군요.”
애초에 사왕련 자체가 나쁜 놈들을 모아서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였다.
때문에 강소성 내부의 감찰을 위한 사왕련의 정보망은 전 무림에서도 유명했다.
그러니 그 모든 정보를 쥐고 있을 사왕이 사왕십삼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던 이상 현상을 몰랐을 리가 없다는 것이 선우진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사왕은 거기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희미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글쎄.”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정기가 꾸미던 일이 네게 발각됐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성공했다면 모를까 실패했다면 당연히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지.”
그 일이 잘못된 일이기 때문이 아닌 실패했기 때문에 대가를 받았다는 얘기인 것 같았다.
사왕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자 설풍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에게 물었다.
“오직 결과만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모양이로군요?”
날카로운 설풍의 질문에 괴갈현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반문했다.
“의형을 죽이고 사왕의 자리를 찬탈한 자가 가질 법한 생각이 아니더냐?”
그 말에 설풍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그저 희미한 웃음이었지만 설풍은 그의 표정에서 짙은 자조의 감정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규칙을 깨트리고 사왕이 되었다는 그의 원죄가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규칙을 적용할 수 없게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할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닌, 설풍이 하고 싶은 말을 망설였기 때문이었다.
설풍은 한참을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고, 사왕은 그런 설풍을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그러자 잠시 후 간신히 입을 연 설풍이 사왕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어떻게 되신 겁니까?”
설풍은 어머니 동아연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다.
설가가 무너질 때 그녀가 설풍을 외조부 동규람에게 맡기고는 괴갈현을 찾아갔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야 소문을 통해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괴갈현을 찾아간 그녀가 어떻게 지냈는지, 왜 죽었는지는 설풍으로선 알 수 없었다.
그러자 괴갈현은 말없이 먼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아연은, 네 어머니는 내게 너에 관한 얘기를 해 주고는 바로 자결했었다. 스스로 혈맥을 터트렸기에 도저히 살릴 수가 없었지.”
“…그랬군요.”
설풍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큰 놀라움은 없었다.
다만 그저 씁쓸할 뿐이었다.
괴갈현이 문득 입을 열어 물었다.
“나를 원망하느냐?”
그러자 설풍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이 당신을 원망하지도, 당신에게 복수하지도 말아 달라는 거였습니다. 모든 건 어머니 자신의 욕심과 잘못 때문이라고 하셨죠.”
설풍은 문득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하얀 배꽃과 빨갛게 불타오르던 설가, 그리고 아버지인 설천후가 모두 빨리 도망치라고 소리치며 습격자들을 향해 달려가셨던 그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며 어렸던 설풍을 꼭 안고는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귓속말로 말씀하셨다.
‘풍아, 풍아. 내 소중한 아가야. 지금 이 일은 모두 다 이 어미의 욕심 때문에 일어난 일이란다. 모두가 다 어미의 잘못 때문이야. 지금 설가에 쳐들어온 괴 숙부는 사실 너의 친아버지란다. 내가, 내가 너를 임신하고도 사왕의 아내가 되고 싶은 욕심에 설가로 시집을 왔기 때문에, 그래서 벌어진 일이야.’
당시 설풍은 어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멍하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직 너는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아무런 욕심도 없던, 그래서 사왕의 자리도 의형에게 양보할 만큼 너무도 순수하고 선했던 그를 이렇게 만든 건 바로 나란다. 그러니 부디 이 어미에게 약속해 다오. 절대 그를 원망하지 않겠다고. 네 친부인 그에게 복수하지 않겠다고.’
어머니의 말대로 그때의 설풍은 모든 상황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다.
그저 너무도 서럽게 눈물을 흘리시는 어머니의 부탁에 알겠다고, 꼭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 후, 어머니는 설풍을 외조부인 동규람에게 맡기고 괴갈현을 찾아갔었다.
자신이 그에게 가야 설풍이 살아남을 수 있으니, 그사이 어서 도망치라는 말을 남긴 채였다.
그때 마지막까지 눈물을 흘리며 설풍이 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의 모습이 설풍이 기억하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후 어린 시절 내내 설풍을 괴롭히던 기억이기도 했다.
괴갈현이 문득 물었다.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면… 네가 굳이 설풍일 이유가 있느냐?”
그 질문에 설풍은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 괴갈현을 바라봤다.
그의 무심해 보이는 눈 속에는 어쩐지 전에 보지 못했던 어떤 열망 같은 것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이전에는 왜 볼 수 없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은 열망이었다.
그 눈을 바라보며 설풍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를 낳으신 분은 어머니시지만, 저를 키우신 분은 외조부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저를 키우시는 내내, 심지어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신에게 복수할 것을 부탁하셨었지요.”
설풍이 괴갈현의 핏줄임을 알지 못했던 외조부 동규람은 설풍을 키우던 내내 괴갈현에 대한 복수심을 강요했었다.
그는 늘 자신의 사위와 딸을 죽인 괴갈현에 대한 증오를 쏟아냈고, 자신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설풍에게 복수할 것을 맹세하게 했었다.
설풍은 그런 외조부에게 진실을 말해 줄 수도, 그렇다고 그의 부탁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저 외조부의 앞에서는 복수를 맹세하고는 뒤에서 눈물을 흘리며 죄책감에 몸부림쳤을 뿐이었다.
그래서 설풍은 이런 상황을 만든, 자신을 이런 상황에 몰아넣은 어머니를 늘 원망하고, 또 한편으론 그리워했었다.
그가 얼마 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여자란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를 갖게 된 이유였다.
설풍은 괴갈현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어머니 앞에선 당신에게 복수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고, 외조부님께는 당신에게 복수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그런 제가 설사 당신에게 복수를 하지 않는다 해도 괴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저를 키우신 외조부님께 씻을 수 없는 죄일 테니까요. 저는… 언제까지나 설풍일 것입니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을 것 같은 단호한 선언이었다.
괴갈현은 설풍의 확고한 눈빛을 잠시 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그러고는 다시 얼음처럼 차가워진 눈빛으로 입을 열어 한 마디를 뱉었다.
“…그런가?”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였다.
그를 향해 설풍이 급히 말했다.
“지난번 조언… 감사했습니다.”
그러자 괴갈현이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는 되물었다.
“조언?”
설풍은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닌 다른 인연들 또한 소중히 여기라는 조언 말입니다.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 말을 들은 괴갈현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다가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등을 돌렸기에 설풍은 볼 수 없는 그의 얼굴에는 이제까지 중 가장 선명한 웃음이 맺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