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대법
“공자! 이 단악패부 고상종이 앞으로 충심을 다하겠소! 부디 공자의 사람으로 써 주시오!”
“공자! 우리 여등삼검, 비록 공자의 사람들에 비해 많이 모자란 실력이나 발탁해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소!”
사왕 괴갈현이 떠난 후 언덕 아래서는 때아닌 충성 서약이 쏟아지고 있었다.
바로 괴정기와 괴항기의 부하였던 이들이 설풍에게 바치는 충성서약이었다.
그들은 사왕이 떠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설풍에게 달려와 무릎을 꿇으며 자신을 받아 줄 것을 간청했다.
이제 사왕의 후계자에서 탈락한 괴씨 형제들 대신 유력한 후계자 후보로 떠오른 설풍을 주인으로 삼으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예전 증칠의 호적수였던 백골괴마 홍추도 있었다.
증칠은 설풍의 앞에 무릎을 꿇은 홍추를 보고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쯧, 쯧, 전 주인을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친 놈들이 참 충성도 바치겠다. 무슨 여포냐? 아버지가 셋이야?”
중얼거렸다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고수들은 이 자리에 없었다.
아니, 애초에 들으라고 한 얘기인 것 같았다.
그 말에 설풍의 앞에 무릎을 꿇었던 고수들이 불편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흠, 흠.”
그중에서도 증칠의 맞수였던 홍추는 고개를 들어 증칠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그러자 증칠이 경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쭈! 째려봐? 째려보면 어쩔 건데? 네가 주인으로 삼겠다는 설풍 아우가 내 의형제라는 건 알고 있냐? 가만있자. 아우의 부하가 되면 내 부하도 되는 거 아닌가? 안 그러냐, 백골아?”
그 말에 홍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분노가 끓어오르긴 하지만 차마 대꾸하지는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흥이 난 증칠이 계속해서 그를 놀리기 시작했다.
“왜? 열 받냐? 더러워서 못 해 먹겠어? 크헤헤헤! 더러우면 때려치워! 포기하면 편해! 그만 포기하고 나랑 다시 한 판 붙자. 응?”
홍추의 얼굴은 이제 터질 듯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조금만 더 하면 정말 때려치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장난기가 돈 증칠이 조금 더 그를 자극해 보려고 할 때였다.
설풍이 난처하게 웃으며 그를 만류했다.
“증 형님, 그만하시지요. 홍 노사, 모욕을 참아내는 모습을 보니 노사의 진심을 알 것 같소. 앞으로 나를 많이 도와주시오.”
그러자 홍추의 얼굴이 언제 분노했냐는 듯 감격으로 가득 찼다.
그러고는 땅에 닿을 듯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감사하오, 공자! 내 이제야 진정한 주인을 만난 듯하구려! 이 홍추, 분골쇄신하여 공자께 충성을 바치겠소!”
그 광경을 본 증칠이 홍추의 목에 걸린 해골 목걸이를 보며 다시 중얼거렸다.
“분골? 뼈를 부순다고? 목걸이에 달고 있는 뼈만 부수겠다는 거 아냐?”
하지만 홍추는 이제 그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그의 목소리가 안 들린다는 듯 고개도 돌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증칠은 솔직히 저런 놈들을 받아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번 배신한 놈들은 또 배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그가 다시 홍추에게 시비를 걸려고 할 때였다.
문득 설풍에게서 전음이 들어왔다.
- 형님,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건 알지만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진 아우도 일단 이런저런 자들을 다 받아 들여 전력부터 높여야 한다고 당부하더군요. 그리고 사왕련이란 곳이 어차피 나쁜 놈들을 모아 관리하려고 만든 곳이 아닙니까?
막내가 당부했다고?
그 말에 증칠은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기로 했다.
막내인 선우진의 말을 따르는 건 이제 증칠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순위의 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흥미를 잃은 증칠은 고개를 돌려 다른 쪽을 바라보았다.
설풍에게 가지 않은 귀도 백기량과 삼지신창 감작형이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꼴에 수준이 다른 고수라고 설풍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고고한 척 외곽에 따로 서 있는 중이었다.
그들을 보며 증칠은 속으로 생각했다.
‘꼴값 떨고 있네.’
애초에 그들이 설풍의 휘하로 들어올 생각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이곳에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저들은 설풍의 휘하에 들어가고 싶기는 하지만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르니 먼저 찾아와 청해 달라는, 뭐 그런 종류의 시위를 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증칠 입장에선 참 같잖은 짓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증칠도 선우진이 슬쩍 얘기해 줘서 알게 된 사실이긴 하지만 아무튼 같잖았다.
‘저 봐. 저 봐. 이왕 고고한 척을 할 거면 삼고초려까진 버텨보든가. 저렇게 금방 넘어올 걸 뭐하러. 에잉!’
귀도 백기량은 조금 전까지 먼저 그를 찾아간 선우진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얘기가 잘됐는지 선우진이 설풍 쪽을 바라보자 설풍이 그에게로 다가갔고, 백기량은 바로 무릎을 꿇으며 충성을 맹세했다.
증칠이 보기엔 저게 무슨 경극 같은 짓인가 싶었다.
‘짜고 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증칠은 다시 선우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똑똑한 아우는 이번엔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인 삼지신창 감작형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걸 본 증칠은 문득 호기심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천하삼십육성의 하나인 저자도 과연 설풍에게 충성을 맹세할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괴항기의 부하였던 자도 아니었고, 무려 천하삼십육성씩이나 된 자가 설마 그럴 것 같지 않긴 했다.
하지만 또 생각하면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럴 의향이 없는 자가 왜 지금껏 이곳에 남아 있단 말인가?
아까 떠났으면 됐지.
‘흠, 궁금한데?’
흥미가 생긴 증칠은 슬쩍 그들에게로 다가가 대화를 엿들어 보기로 했다.
‘어디.’
그래서 슬금슬금 다가간 증칠의 귀에 감작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협과 못다 한 승부를 내고 싶네. 이제 이런 상황이 되었으니 훨씬 더 공정하게 승부를 낼 수 있겠지.”
막내와 싸우고 싶다고?
증칠은 갑자기 흥미가 확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림인에게 있어 최고의 구경거리는 역시 싸움 구경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그의 눈에 선우진이 대답 없이 빙긋이 웃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 웃음을 본 증칠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
‘저 웃음, 저거.’
증칠은 저 웃음이 어떨 때 나오는 웃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선우진이 사기를 칠 때 짓곤 했던 의뭉스러운 웃음이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저 똑똑한 막내는 천하삼십육성인 감작형을 등쳐먹으려는 모양이었다.
증칠은 아까보다 조금 더 흥미진진해진 눈빛으로 그들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선우진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승부가 나지 않았다라…. 죄송합니다만 저와는 생각이 좀 다르신 것 같습니다. 그때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이번엔 살려 드릴 테니 목숨을 소중히 하시라고. 승부는 그때 이미 났습니다, 감 대협.”
그 말을 들은 감작형이 발끈해 소리쳤다.
“그건 그저 자네의 주장일 뿐이지 않나?! 내가 이렇게 멀쩡한데 그게 사실임을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다시 붙어보세! 이번엔 제대로! 정말 승부가 날 때까지 붙어보잔 말일세!”
그러자 선우진은 잠시 감작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뭐, 뭐?!”
“이미 이겼던 사람과 다시 싸워줄 이유 따윈 없습니다. 귀찮군요. 제가 뭣 때문에 그래야 한다는 겁니까?”
선우진은 정말 귀찮아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역시 다혈질로 유명한 감작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귀찮다니! 감히 내게?!”
그 모습을 본 증칠이 탄성을 터트렸다.
“오오!”
아무래도 그가 이제 더 참지 못하고 손을 쓸 것만 같았다.
드디어 싸움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하지만 증칠의 기대와는 달리 싸움은 쉽게 시작되지 않았다.
그를 향해 선우진이 피식 웃으며 말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감히라고요? 무슨 사왕이라도 되십니까?”
“뭐, 뭐?”
사왕의 이름이 나오자 감작형은 화들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아까 본 사왕의 압도적인 무위가 뇌리에 깊게 새겨진 모양이었다.
그때 선우진이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가 감 대협과 싸워서 이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또 찾아와 진 적이 없다고 우기실 게 아닙니까?”
“아니, 애초에 나는 진 게…!”
감작형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주장할 때였다.
선우진이 귀찮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말했다.
“하아,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그러자 감작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응? 어떻게 말인가?”
선우진은 팔짱을 낀 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너무너무 귀찮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제가 굳이 감 대협과 대결을 해 줄 이유는 없습니다. 인정하십니까?”
그 귀찮은 표정에 감작형이 살짝 기가 죽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그야 뭐….”
그러자 선우진이 감작형을 봐준다는 듯 제안했다.
“그러니까 대결을 할 이유를 하나 만들어 보죠.”
“대결을 할 이유? 그걸 만든다고? 어떻게 말인가?”
감작형은 이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선우진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증칠은 속으로 혀를 찼다.
‘쯧, 쯧. 완전히 낚였구만. 천하삼십육성이라는 사람이 저렇게 순진해서야.’
사실 자신 또한 별다를 것 없었지만, 증칠의 생각은 거기에까지 미치지 않았다.
역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건 힘든 일이었다.
선우진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감작형에게 물었다.
“음… 만약 감 대협께서 이번에도 패하면 제게 뭘 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자 감작형이 억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나는 애초에 패한 게….”
하지만 선우진은 그의 얘기를 듣고 있지 않았다.
그가 감작형의 말을 끊으며 바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하시죠. 이번에도 저와 대결해 패하시면 일 년간 저를 위해 일해 주시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그 제안을 들은 감작형은 눈을 껌뻑거리며 반문했다.
“응? 일 년간?”
“예, 그런 이득도 없다면 제가 굳이 감 대협과 다시 대결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감작형이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일 년이라….’
그 정도라면 진짜 패한다 해도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고작 일 년 동안 무슨 별일이라도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일 년 정도라면야.”
그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을 번뜩인 선우진이 씨익 웃으며 못을 박았다.
“좋습니다. 역시 시원시원하시군요. 그럼 바로 대결을 시작해 볼까요?”
그러자 잠시 오싹한 느낌을 받았던 감작형의 얼굴이 바로 환하게 밝아졌다.
“지금?! 좋네! 이제 제대로 붙어보세!”
그런 그를 향해 증칠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쯧쯧, 그 일 년간 뭘 할지를 물어봤어야지.’
증칠이 알기로 선우진과 설풍은 사왕련에서의 일만 해결하면 바로 혈교와 결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그러니 감작형의 일 년은 아마도 그것을 위한 일 년이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혈교와의 생사결을 위한 일 년 말이다.
그 일 년 때문에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르고 덜컥 자신의 생사를 맡기다니, 안쓰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선우진을 이기면 되는 것 아니냐고?
물론 그건 그랬다.
하지만 증칠의 생각으로는 절대 그럴 리는 없을 것 같았다.
세간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막냇동생인 선우진은 천하삼십육성들 중에서도 상위권에 꼽히는 해남마검 진태도를 꺾은 남자가 아니던가.
그런 막내를 천하삼십육성의 하위권에 속하는 감작형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문득 증칠의 눈에 혈교와 피터지게 싸우다 장렬히 전사할 감작형의 미래가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증칠은 곧 고개를 저었다.
‘뭐, 나랑 상관없지.’
증칠은 왜 선우진이 나쁜 놈들도 상관없이 다 모으라고 말했는지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역시 막내의 말은 언제나 옳다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 증칠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감작형과 선우진의 대결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
운남성.
점창산 중턱.
혈마 전무광은 자신의 손에 잡혀 있는 어린 여자아이를 무심하게 바라봤다.
혈도가 점해져 몸을 움직이지도, 말을 하지도 못하는 여자아이가 온통 공포로 가득 찬, 부디 살려 달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혈마는 잠시 그 아이를 바라보다 무심하게 그 가슴에 손을 박아 넣었다.
푸욱!
“!”
그러자 한순간 크게 확대됐던 어린아이의 눈에서 빠르게 빛이 사라졌다.
혈마는 숨이 끊어진 아이의 가슴에서 심장을 뽑아내 천천히 쥐어짰다.
쯔으읍!
그러자 심장이 으스러지며 나온 피와 살점이 제단 위에 누워 있는 여인의 나신 위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혈마는 제단에 누워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피와 심장 조각으로 범벅이 되었음에도 요사스러운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나신.
혈마가 천하제일의 미녀라고 인정한 검성의 딸 해청연의 모습이었다.
혈마는 신, 또는 악마가 조각한 듯 극상의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는 그녀의 나신을 바라보다 문득 마른 침을 삼켰다.
꿀꺽!
‘너무도 아름답군.’
혈마는 화경에 오른 후 한 번도 여인 때문에 평정심이 흔들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난번 그녀의 머리카락을 올려 검고 푸른 그 요요한 눈동자를 바라봤을 때만큼은 도저히 음욕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혈마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범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그때 그를 막은 것은 바로 해청연의 웃음이었다.
자신을 범하려는 혈마를 바라보며 차라리 잘됐다는 듯 웃고 있는 그녀의 눈빛.
그 눈빛을 본 혈마는 순간 번쩍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안 되지, 안 돼.’
해청연은 역천혈마 과염의 육신이 되어 줘야 할 귀중한 재료였다.
그래서 이제껏 무공 수준도 높여 주며 애지중지 대해 왔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순간의 음욕을 참지 못하고 그녀를 건드린다면 대법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자신에게 범해졌다는 이유로 만약 대법에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혈마는 도저히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혈마는 손을 멈출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드디어 제갈지강이 모아온 재료로 대법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혈마가 오랜 시간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역천혈마 과염의 귀환을 위한 역천귀혼대법이었다.
혈마는 정신을 잃은 채 누워 있는 해청연의 위로 마지막 여자아이의 심장을 쥐어짰다.
쯔으읍!
그러고는 정신을 집중해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도락 스라오 무코….”
잠시 후, 마침내 그의 주문이 끝났을 때였다.
혈마는 지난번 구유상을 되살렸을 때처럼 주변의 공기가 확 무거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다르다.’
혈마는 지금의 공기가 그때보다 훨씬 더 무겁게 느껴지고 있음을 깨닫고는 문득 주변을 둘러봤다.
지난번의 공기가 물먹은 솜같이 무겁게 느껴졌다면, 이번엔 공기를 가장한 무언가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거대한 악의를 지닌 무언가가 주변에 가득 차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릴 것만 같은 느낌.
오랜 시간 두려움을 잊은 혈마였지만 지금만큼은 그도 긴장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펴야 했다.
그때였다.
부글부글부글!
제단 주변에 고여 있던 피의 늪이 부글거리며 끓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또한 지난번과 달랐다.
지난번엔 온도가 높아진 용암이 끓고 있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엔 피의 늪 속에서 살아 있는 무언가가 손을 뻗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언가가 그곳에서 빠져나오려는 듯, 또는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 손을 뻗고 있는 듯한 모습.
그 괴기스러운 모습에 주변의 사람들은 물론 혈마마저도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려야만 했다.
‘마치 무언가를 잡아먹으려는 것처럼 보이는군.’
혈마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는 그 생각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촤아악!
“으, 으아아악!”
“이, 이게 뭐야?! 지, 지존!”
혈마는 순간 확 솟구쳐 자신의 몸을 덮치려는 핏덩어리를 무형지기로 밀어냈다.
그리고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그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피의 늪이 그 자체로 살아 있는 것처럼 핏덩어리들을 뻗어 혈마의 부하들을 덮치고 있었다.
마치 끈적하고 붉은 혓바닥이 그들을 감싸듯, 핏덩어리에 붙잡힌 부하들이 속절없이 피의 늪 속으로 끌려들어 가고 있었다.
“지, 지존!”
“사, 살려… 끄아아악!”
으드드득!
피의 늪에 빨려 들어간 부하들은 마치 거대한 뱀에 휘감긴 듯 핏덩어리에 의해 조여졌다.
그들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러자 호신강기를 뿜어내 핏덩어리의 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던 몇몇 부하들.
그중 구유음마 지기음이 질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지, 지존, 이, 이건….”
혈마는 그의 부름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침을 꿀꺽 삼키며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핏덩어리에 빨려 들어간 부하들은 이미 사람의 형상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들을 구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음을 확인한 혈마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천혈마께서 피가 모자라신 모양이로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의 말에 살아남은 자들은 질린 눈빛으로 피의 늪에서 거리를 둔 채 계속해서 그 괴물을 지켜봐야 했다.
그러자 부하들을 삼킨 피가 드디어 제단의 측면을 타고 그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꾸물꾸물 올라갔던 지난번과는 달리, 마치 홍수가 범람해 제단 위의 해청연을 삼켜 버리듯 격렬한 움직임이었다.
화아악!
그러자 그 모습을 본 혈마의 부하들은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 저런!”
“지, 지존! 저러다 해 소저마저 삼켜 버리는 게 아닙니까?!”
그 질문에 혈마도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보기에도 불안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핏덩어리의 기세가 지나치게 격렬해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해청연을 거칠게 덮쳤던 핏덩어리는 지난번과 같이 그녀의 주변을 두툼하게 둘러싸더니 고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난번과 동일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드디어 고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끔찍하게 부풀어 올랐다가 다시 천천히 가라앉는 모습, 거대한 고치가 심장이 박동하듯 호흡을 시작하고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혈마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
아무래도 지금까지는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혈마는 새삼 구유상에게 먼저 대법을 펼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한번 해봤기에 진행되는 과정이 눈에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한순간이었다.
해청연을 감싸고 있던 핏물이 드디어 확 무너지듯 흘러내렸다.
촤아아악!
점성을 잃고 묽어진 피가 깔끔하게 씻겨 내려가는 모습, 그러자 놀랍게도 해청연의 눈부신 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몸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걸 본 혈마의 부하들이 탄성을 터트렸다.
“오오오!”
실로 아름다운 나신이 아닐 수 없었다.
분명 같은 사람일진대 마치 온몸에서 빛을 뿜어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혈마와 그의 부하들은 넋을 잃고 해청연의 눈부신 나신을 감상했다.
그때였다.
번쩍!
한순간 그녀가 눈을 떴다.
검은색과 푸른색이었던 그녀의 두 눈동자가 각각 붉고 푸른 요요한 광채로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