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금도무적 초하곤-2
금도무적 초하곤은 이를 악문 채 동정호를 향해 달려갔다.
그가 생각하기에 절정 초입에 달한 그의 아들 초상현이 수적 따위에게 당해 잡혀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절정의 무인을 생포할 수 있는 실력자가 수적 따위를 하고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수적이 아니라면 그 정체는 한 가지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형산파….’
초하곤은 그 이름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아무리 평이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정파이며 구대문파에 속한 곳이 설마 이런 짓을 할 리가….
하지만 그런 생각을 했던 초하곤의 머리에 문득 이십여 년 전 악양에서 싸웠던 사파의 무리들이 떠올랐다.
그때의 사파 무리들은 초하곤을 해치우기 위해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었다.
당시의 초하곤은 늘 하루하루 목숨을 걸어야 했고, 결국 수많은 악전고투를 치른 끝에 그들을 물리쳐낼 수 있었다.
그나마 당시엔 지켜야 할 것들이 없는 혈혈단신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초하곤은 문득 탄식했다.
‘내가 방심했었구나.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겁해질 수 있는 존재인지 이미 겪어 보고도 그들이 정파라는 이유만으로 그걸 간과했어.’
그리고 그 이유는 너무 오랜 시간 겪어온 평화 때문일 것이었다.
친절한 이웃들과 소중한 가족.
그 속에서 행복을 만끽하느라 지나치게 물러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초하곤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깊은 심호흡을 내쉬었다.
“후우우우우.”
잠시 후, 눈을 뜬 그의 눈빛은 방금 전과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
인자하고 온화한 금도장 장주의 눈빛은 사라지고, 사파의 고수들과 수없이 악전고투를 치렀던 백전노장의 눈빛만이 남아 있었다.
그가 다시 몸을 날리며 생각했다.
파박!
‘놈들이 정말 형산파이고 나를 협박하기 위해 상현이를 잡아간 것이라면 아직 녀석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초하곤이 냉정하게 내린 판단이었다.
그리고 만약 이 판단이 맞다면 그는 조만간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의 아들을 포기한다는 선택을 말이다.
이십여 년 전, 가족이 없었던 그는 지킬 것이 없기에 거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적들과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주변엔 이제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진 상태였다.
그리고 초하곤은 과거 많은 것들을 지키려던 자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는지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상현아….’
최선을 다해 몸을 날리는 그의 눈은 짙은 망설임과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초하곤은 동정호에 도착한 후 일단 배를 구해 바로 호수로 나갔다.
저들이 바다처럼 넓은 동정호의 어디로 향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초하곤의 생각이 맞다면 그들이 알아서 자신을 데리러 올 거란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정확했다.
먼 호수로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마치 그를 기다렸다는 듯 호수 한가운데에 정지해 있는 수적선 한 척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눈을 번뜩인 초하곤이 사공에게 말했다.
“저걸세! 저 배를 쫓아 주게!”
수적선은 초하곤의 배가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주하고 있다기보단 마치 길을 안내하는 듯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채 계속해서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맏아들인 초상현을 생각하던 초하곤의 가슴이 몇 번은 타들어 갔을 때였다.
수적선은 마침내 동정호 중간에 있는 작은 무인도로 향했다.
이미 네 척의 수적선이 주변에 정박되어 있는 돌섬이었다.
그걸 본 사공이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수적들이 저 안에 모여서 기다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정말 저기로 가실 겁니까, 어르신?”
초하곤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까지만 가 주게. 그다음은 내가 알아서 하겠네.”
잠시 후, 배를 타고 돌섬의 십 장 근처까지 접근한 초하곤은 사공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자네는 어서 돌아가게. 혹시 내가 돌아가지 못하거든 서린이에게 복건용가를 찾아가라고 전해 주게나.”
그러고는 배를 박차고 가볍게 날아올랐다.
투웅!
삼 장쯤 날아갔던 그는 몸이 아래로 점점 떨어지자 건장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제비처럼 가볍게 호수를 박차고 다시 날아올랐다.
촤악!
그런 식으로 두 번 물을 박찬 그는 드디어 돌섬의 수변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작은 자갈들이 깔려있는 수변가였다.
초하곤은 섬을 주욱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초대 장소가 무척 비루하군. 초대자들이 비루해서 그런가?”
그러자 그의 맞은편 바위에 앉아 있던 형산파의 자종진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그보단 초대받은 사람의 수준을 맞춰 준 게 아니겠소? 물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다음 초대 장소는 훨씬 더 좋은 곳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오.”
그의 말에 초하곤은 자종진인의 옆쪽에서 이십여 명 정도의 무사들에게 붙들려 있는 그의 아들 초상현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선택?”
예상대로 그의 아들은 무사했다.
점혈을 당했는지 꼼짝도 못 하는 채로 분한 눈빛을 하고 있긴 했지만, 별로 다친 곳은 없는 듯 무사해 보였다.
초하곤을 회유하기 위해 일부러 더 멀쩡하게 놔둔 모양이었다.
그러자 자종진인이 비릿하게 웃음 짓고는 역시 초상현 쪽으로 시선을 보내며 대답했다.
“아주 간단한 선택이요. 초 대협과 초 대협의 가족들이 모두 이 동정호 바닥으로 조용히 사라지게 될 것인지, 아니면….”
거기까지 말한 자종진인의 눈이 비열하게 빛나며 초하곤을 향했다.
“우리 형산파의 개가 될 것인지를 고르는 선택 말이오.”
그 말을 들은 초하곤의 눈이 꿈틀거렸다.
어휘 선택이 생각보다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아마도 저들은 자신들에 대한 처우를 어떻게 할지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초하곤이 굳은 표정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회유하려는 말투치고는 매우 무례하군. 그래서야 회유가 되겠소?”
그렇게 물으며 초하곤은 자종진인의 상태, 그리고 아들을 붙잡고 있는 자들의 수준을 가늠해 봤다.
자종진인이 대답했다.
“어설픈 복종 따위는 이제 필요 없으니까. 그러니 진작 내 말대로 하시지 그러셨소. 그랬다면 이런 꼴까진 안 보게 됐을 것이 아니오.”
이미 이런 상황까지 온 이상 완전한 굴복이 아니면 차라리 죽이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초하곤의 마음이 실망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건 자종진인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아들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종진인은 초하곤 자신도 승부를 예측하기 힘든 초절정의 고수였다.
게다가 아들을 붙잡고 있는 스무 명의 무사들도 악양에서 보기 힘든 정예들로 보였다.
대부분 일류 최상급에 절정도 섞여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힘만으로 저들을 순식간에 물리치고 아들을 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니 이젠 진짜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인 것 같았다.
초하곤은 고민에 잠긴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자종진인의 눈에는 선택을 고민하는 걸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초하곤은 사실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그리고 자종진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들에게 전음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 상현아, 잘 듣거라. 이 아비가 과거 악적들과 싸우며 얻게 된 교훈이 있단다. 그건 바로 악적들에게 약점을 잡혀 한 가지를 양보하기 시작하면, 그 후 모든 것을 잃을 때까지 양보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음을 들은 초상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버지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을 예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었다.
그러니 적들에게 혹시 약점을 잡히게 되거든 반드시 그 약점을 제거하라고….
초상현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을 때였다.
초하곤의 전음이 이어졌다.
- 저들이 지금 너를 인질로 삼아 내게 복종하라고 협박하고 있구나. 내 생각으로는 저들은 내가 저들에게 복종한다고 해도 결코 너를 풀어주지 않을 것이다. 저런 모습까지 보여줘 놓고 어찌 저들이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 오히려 너를 이용해 내게 차마 못 할 짓들을 시키려 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거기까지 말한 초하곤은 차마 더 이상 전음을 잇지 못했다.
최대한 냉정해지려는 그의 마음과는 달리 그의 심장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다시 아들의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다.
나이 사십이 넘어 혼인을 하고 얻게 된 아들이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함께 한 그 한순간 한순간이 너무도 소중해 절대로 잊고 싶지 않았던.
그런 소중한 아들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초하곤은 눈을 떠 아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아들 초상현이 결연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들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옳다고 생각하시는 대로 행하라고.
자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금도무적 초하곤의 아들은 그렇게 아버지와 꼭 닮아 있었다.
그런 아들을 보며 초하곤이 부러질 듯 이를 꽉 악물었다.
가슴이 저며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자종진인이 약간 짜증 난 듯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초 대협, 우리는 많은 시간을 기다려 줄 수 없소. 이제 슬슬 결정을 내리셔야 하지 않겠소?”
그러자 초하곤은 괴로운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아들과 얘기를 나누게 해 주시오.”
그의 말에 자종진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되오.”
하지만 초하곤은 자존심을 버린 듯 간절하게 매달렸다.
“부탁이오. 단 한 번만이라도 목소리를 듣게 해 주시오.”
그 말에 자종진인이 인상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깐 목소리만 듣게 해 주고 바로 다시 마혈을 점한다면 별다른 수작을 부릴 수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무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혈을…!”
그때였다.
자종진인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떨어진 아주 짧은 시간, 초하곤이 벼락처럼 뛰쳐나갔다.
파박!
“무슨?!”
바로 그의 기척을 느낀 자종진인이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발검했다.
챙!
하지만 그가 시선을 돌렸을 때는 이미 초하곤의 금도가 그의 머리를 쪼갤 듯 찍어오고 있었다.
그가 황급히 뽑은 검이 바로 초하곤의 금도와 맞부딪쳤다.
쩌엉!
“크윽!”
단 한 번의 부딪침만으로 팔 전체가 떨려오고 있었다.
초반 기세에서 밀린 것이었다.
게다가 초하곤의 금도는 휘황한 빛을 뿜어내며 계속해서 그를 찍어오고 있었다.
쩌정! 쩡! 쩌저정! 쩌엉!
초하곤의 연이은 공격을 자종진인이 형편없이 뒤로 밀려나며 간신히 방어했다.
강격을 위주로 하는 초하곤의 도법에 선공까지 빼앗긴 탓이었다.
자종진인은 좀처럼 반전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빠르고 날렵한 쾌검을 특기로 하는 그의 검법은, 강격을 위주로 하는 초하곤을 상대하기 위해선 먼저 선공을 가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미 선기를 빼앗긴 데다 지나치게 근접한 거리를 허락한 상태였다.
쩡! 쩌정! 쩌저정!
매서운 강격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이대로라면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초하곤의 도에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몰랐다.
자종진인은 분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이익!’
반면 초하곤의 마음엔 희망의 빛이 떠오른 상태였다.
아들의 목숨까지 도외시하며 기습을 가했는데 놈이 아들을 죽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빠르게 놈을 죽일 수만 있다면, 잘하면 아들을 무사히 구해 내는 것도 꿈만은 아닐 것 같았다.
초하곤은 온 힘과 마음을 집중해 자종진인에게 일격을 가했다.
“하아아압!”
쩌어엉!
“크윽!”
그러자 초하곤의 혼신을 다한 강격에 자종진인의 검이 그의 몸 앞에서 살짝 벗어났다.
검을 놓치진 않았지만 경력을 해소하지 못해 제어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됐다!’
눈을 번뜩인 초하곤이 그 틈을 향해 도를 내리쳤다.
이 일격으로 그를 두 동강 낼 듯한 기세였다.
그때였다.
슈하악!
하늘빛의 구체 하나가 초하곤을 향해 날아들었다.
강환이었다.
“!”
초하곤의 눈이 경악해 크게 확대됐다.
이대로 도를 내리치면 자종진인은 분명히 죽일 수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저 강환을 정통으로 맞아야만 했다.
초하곤은 어쩔 수 없이 도의 진로를 틀어 강환을 내리쳤다.
츄하아악!
파스스슥!
하늘빛 강환이 그의 도에 갈라져 소멸했다.
하지만 그 순간 드디어 물러설 기회를 얻은 자종진인이 황급히 뒤로 훌쩍 뛰어 물러섰다.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었다.
초하곤이 안타까움에 이를 악물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그러게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초절정씩이나 된 사람이 방심이나 하다니 어디 어린 제자들 볼 면목이 서겠는가?”
“으으음.”
그의 목소리에 자종진인은 불편한 표정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초하곤은 시선을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봤다.
강환이 날아왔을 때부터 이미 그쪽에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기에 새삼 놀랍지는 않았다.
그곳엔 마르고 큰 키를 가진 중년의 도사 한 명이 서 있었다.
아마 바위 뒤에 숨어 있다 나온 모양이었다.
역시 형산파의 상징인 하얀 무복과 푸른빛 영웅건을 착용한 상태였다.
초하곤이 사나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새로 나타난 자가 진짜 도인처럼 소탈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형산의 자경이라 하오. 금도무적 초 대협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오.”
하지만 초하곤은 그처럼 웃음을 짓지도, 그의 인사에 대꾸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사나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을 뿐이었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지금 초하곤의 심정은 매우 참담한 상태였다.
자종진인을 죽일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도 모자라 적이 더 늘어 버린 것이었다.
기세를 보건대 초절정의 실력자임에 틀림이 없어 보이는 적이었다.
‘초절정의 고수 두 명을 동원하다니, 역시 형산파로구나.’
그 저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아들을 구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또한 다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새로 나타난 자경진인이 그의 표정을 보며 말했다.
“흐음, 아들의 목숨을 포기하고서라도 끝까지 싸우겠다는 표정이로구려. 역시 홀로 사파 문파 다섯을 초토화시키고 악양을 구해 낸 초 대협답소.”
자신을 인정해주는 듯한 자경진인의 말에 초하곤은 코웃음을 쳤다.
이젠 뭐가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싸우다 죽게 된다면 그 또한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투기를 뿜어내며 다시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다시 소탈한 웃음을 지은 자경진인이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말이오. 포기해야 할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난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오? 그래도 다 포기하시겠소?”
그 말에 초하곤의 눈이 꿈틀거렸을 때였다.
자경진인이 뒤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초 대협께 따님의 모습을 보여드리거라!”
그 말에 경악한 초하곤이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에 저 뒤쪽, 두 명의 남자가 바위 뒤에서 나오는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붙잡혀 있는 여인은 분명히 초하곤이 아는 얼굴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의 딸, 악양제일미 또는 금도선자라고 불리는 초서린임에 틀림없었다.
초하곤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서, 서린아! 네가 어찌!”
그러자 자경진인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초 대협의 딸 사랑이 남다르다고 하더니만, 과연 아까와는 다른 표정이 되셨구려!”
초하곤은 이를 악물고는 자경진인을 노려봤다.
그러자 자경진인이 여전히 득도한 도인 같은 표정으로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 들어보시오. 지금부터 나는 저 아이들에게 초 대협의 딸을 범하라고 명할 것이오. 그러니 초 대협은 우리와 싸우는 동안 범해지는 딸의 모습을 구경하게 되겠지요. 아, 마혈을 풀어주라고 할 것이니 목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이요. 무척 흥미진진하지 않겠소? 딸이 범해지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하는 전투라니 말이오.”
그 말을 듣는 초하곤의 표정은 점점 창백해져 갔다.
그 순간, 저들이 마혈을 풀어줬는지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그러자 자경진인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자, 그녀를 범하거라.”
그 말이 끝나자마자 두 명의 남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초서린의 앞섶을 찢었다.
찌지직!
“꺄아아악!”
그 모습을 본 초하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딸의 앞섶이 찢어져 젖가슴이 드러나 있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멈춰라, 이놈들!”
그러자 자경진인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잠시만 멈추거라. 초 대협께도 기회는 드려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어떻게 하시겠소, 초 대협? 이제 그만 우리에게 무릎을 꿇으시겠소, 아니면….”
그렇게 말한 그가 옆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초절정의 무인 세 명과 싸우며 딸이 범해지는 모습을 구경하시겠소?”
그 말에 초하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세 명이라고?
초하곤은 돌처럼 굳어진 얼굴로 자경진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러자 그곳에서 또 한 명의 사람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자종진인, 자경진인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도사였다.
‘이럴… 수가….’
초하곤은 절망했다.
처음부터 승산 따위는 전혀 없었던 것이었다.
초절정 고수 세 명을 동시에 파견할 수 있다니, 도저히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적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자경진인이 소탈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펴 보였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다섯을 세겠소. 숫자를 다 세면 저 아이들이 초 대협의 딸을 범하기 시작할 것이오. 다섯.”
그 말에 초하곤은 황급히 딸 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딸을 붙잡고 있는 두 명의 사내가 탐욕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딸을 덮칠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넷.”
초하곤은 심장이 끓어올라 증발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차라리 이대로 숨을 멈추는 것이 더 편할 것만 같았다.
“셋.”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했다.
자신의 눈앞에서 딸이 겁탈당하는 끔찍한 광경만큼은 도저히 지켜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둘.”
그는 더 견디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젠 어쩔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나!”
초하곤은 마침내 힘없이 입을 열었다.
“잠….”
그때였다.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잠까안!”
웬 여인의 느닷없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은 모든 이들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들의 눈에 작은 배를 타고 섬으로 오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