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금도무적 초하곤-3
그녀를 본 자경진인이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호오!”
그녀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악양제일미라는 초서린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눈에 띌 만큼의 미인이었다.
더더구나 노를 저어오느라 그런지 어깨까지 흘러내린 그녀의 방만한 옷차림과 드러난 새하얀 어깨는 남자라면 누구도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의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누군가는 의아한, 누군가는 감탄이 가득한, 또 누군가는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에이, 씨! 왜 이런 구석탱이까지 와 가지고 사람을 힘들게 해?! 늦지 않게 찾느라 죽는 줄 알았잖아?!”
가녀려 보이는 외모, 고운 목소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걸쭉한 말투였다.
그 말투에 이제 그녀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얼빠진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그녀는 낑낑거리며 혼자 노를 저어 섬의 삼 장 앞까지 오더니 배에서 훌쩍 뛰어 섬으로 건너왔다.
그녀가 노를 젓느라 너무 힘들었다는 듯 허리를 툭툭 두드리고는 초하곤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혹시 금도무적 초하곤 대협 되시나요?”
갑작스런 그녀의 말에 초하곤은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연태진은 애초에 그의 대답 따윈 필요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마치 대답을 들은 듯 바로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역시! 듣던 대로 진짜 대협의 풍모가 느껴지는 분이시네요! 안녕하세요, 저는 연태진이라고 합니다! 악양의 금도무적을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이에요.”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환한 인사에 초하곤은 당황한 표정으로 형산파의 도사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 그….”
그러자 자경진인이 얼굴을 드러낸 후 처음으로 표정을 굳히며 그녀에게 물었다.
“소저는 누구시길래 이곳에 오신 거요? 그리고 지금 뭘 하시는 게요?”
자경진인은 방금 전 초하곤의 마음이 거의 무너질 뻔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한꺼번에 그를 압박하지 않고 조금씩 희망을 깎아 갔던 계획의 결실이 보일 뻔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좋았던 분위기가 저 여인의 등장으로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해도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저 미모에 연태진이란 이름이라면….’
자경진인이 그녀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을 때였다.
연태진이 매혹적으로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 제 이름을 듣고, 또 제 얼굴을 보고도 누군지 모르시다니, 좀 실망인데요? 광서성의 하원달기를 모르시나요?”
그녀의 대답에 자경진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과연.’
그녀는 역시 광서성 하원방의 방주인 하원달기 연태진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제가 지금 뭘 하고 있냐고요? 음… 사실은 우리 똑똑이 선우 공자가 시선을 끌어서 시간을 좀 만들어 달라고 하더라고요. 남들의 시선을 끄는 거야 또 제가 제일 잘하는 일이 아니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매혹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는 그녀의 모습은 과연 아름다웠다.
분명 잘난 척을 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그게 더 당차고 귀여워 보이는 모습, 그런 그녀의 모습에 대부분의 무사들이 입을 헤 벌리며 넋을 잃고 있을 때였다.
모두가 그녀의 미모에 주목할 때 자경진인만큼은 그녀의 미모보다 말에 더 주목했다.
그는 특히 그녀의 말 중 시간을 끈다는 얘기에 정신이 번쩍 들고 말았다.
‘설마?!’
자경진인이 불길한 느낌에 초서린을 붙잡고 있는 두 무사들에게로 홱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샤아악!
그 순간 그의 눈에 무사들의 뒤에 서 있는 흑의의 남자가 검을 납검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무사들은 바로 뒤에 그가 서 있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자경진인이 급히 소리쳤다.
“뒤를 봐라!”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무사들이 고개를 돌리려 할 때였다.
갑자기 그들의 목에서 한 줄기 붉은 선이 그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내 분수처럼 피를 뿜어내며 목이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푸화아악!
자경진인은 경악했다.
흑의인이 납검하기 전 빛이 번쩍하는 느낌은 있었지만 검을 휘두르는 궤적은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거리가 멀다 해도 엄청난 쾌검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피가 뿜어져 나오기도 전에 초서린을 데리고 가볍게 뒤로 물러선 상태였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자연스럽고 표홀한지 마치 바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자경진인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리고 있었다.
‘고수다. 저렇게 젊어 보이는데 어찌…?’
거리가 좀 있긴 했지만 흑의인은 너무도 젊고 또 잘생겨 보이는 미청년이었다.
자경진인이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저런 고수에 대한 소문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인질인 초서린을 잃은 이상 아들인 초상현이라도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자경진인은 초상현을 붙잡고 있는 이십여 명의 무사들에게 소리쳤다.
“조심…!”
하지만 그 또한 늦은 경고였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사들 사이에서 갑자기 작은 돌개바람 같은 것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푸화악!
“크아아악!”
“아아아악!”
“끄아악!”
그것은 정말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사들 사이에서 갑자기 붉은색의 뭔가가 나타나 용권풍처럼 맹렬히 회전하자, 주변의 무사들이 진짜 폭풍에 휘말린 듯 허공으로 튕겨 나가 버렸던 것이었다.
그것도 중심에 있던 초상현은 멀쩡한데 다른 무사들만 날려버리는 이상한 용권풍이었다.
잠시 후, 붉은 용권풍이 회전을 멈추자 자경진인은 그것의 정체가 붉은 무복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남자였음을 알 수 있었다.
저 뒤쪽의 흑의인과 비슷해 보이는 젊은 청년, 역시 비슷해 보이는 압도적인 무위였다.
자경진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젊은 고수들의 등장에 침을 꿀꺽 삼켰다.
저들의 정체도 궁금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한순간 자신들이 인질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자경진인은 어금니를 한번 꽉 깨물고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표정에서 이젠 득도한 도인 같은 여유로움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누구냐?! 너희가 지금 형산파의 행사에 간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냐?!”
그러자 연태진이 생긋 웃으며 대꾸했다.
“에이, 이 외딴 섬에서 벌어진 일을 누가 알겠어요? 당사자들만 죽으면 아무도 모를걸요?”
자경진인은 그 말이 초하곤을 이 섬으로 끌어들인 자신들의 생각과 동일한 생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분노가 끓어올랐다.
“죽인다고? 네년 따위가 감히 우리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냐?!”
하지만 그의 분노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연태진이 역시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하고 싶기는 한데, 한 명은 초 대협께 드려야 할 것 같고 다른 두 명은 저 뒤에 힘들게 숨어 있던 분들한테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이죠.”
연태진은 그 말과 함께 자신이 타고 온 작은 배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자경진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그는 배 아래에서부터 몇 명의 사람들이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신법과 은신술이 뛰어난 선우진과 설풍이 인질들을 구하러 가고, 연태진이 시선을 끄는 동안 배 밑바닥에 엎드려 숨어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중 몸을 일으킨 삼지신창 감작형이 흐흐 웃으며 말했다.
“역시 연 소저는 배려심이 있군. 고맙소. 자, 한 명은 내 차지다!”
그가 몸을 훌쩍 날려 섬으로 날아왔다.
배 밑에 어떻게 숨겼었는지 그의 거대한 삼지창을 든 채였다.
그러자 그와 삼지창을 본 형산파의 세 도인들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서, 설마…! 삼지신창?!”
“감작형이라고?”
무림인으로서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인 그를 몰라볼 수는 없었다.
갑자기 천하삼십육성이 나타나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때 배에서 한 명이 더 섬으로 건너왔다.
날이 얇은 직도를 든 걍팍한 인상의 흑의노인이었다.
세 명의 형산파 도사 중 그를 알아본 자경진인이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귀도 백기량?”
그러자 백기량은 자신의 이름을 부른 자경진인을 힐끗 쳐다봤다.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 말이 맞다는 뜻의 시선이라는 건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의 정체를 알게 된 다른 두 명의 도사들이 신음 같은 목소리를 흘렸다.
“그, 그런….”
“삼지신창에 귀도라니, 저들이 왜?”
그때였다.
연태진이 정신이 나간 듯 멍해져 있는 초하곤을 향해 말을 걸었다.
“초 대협, 먼저 한 명 고르세요. 자녀분들이 안전해졌으니 이제 복수의 시간을 가지셔야죠.”
그 말을 들은 초하곤은 본능적으로 먼저 자신의 자식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적의청년의 옆에서 점혈이 풀린 채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들의 모습과, 흑의청년에 의해 구해져 큰 천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곧 초하곤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사나운 투기를 뿜어내며 형산파의 도인들을 노려봤다.
그리고 물었다.
“나는 저 자경이란 도사를 죽이고 싶구려. 그래도 되겠소?”
그의 물음은 삼지신창 감작형과 귀도 백기량에게 한 것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경진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각각 다른 한 명씩의 도사를 바라봤다.
초하곤은 그런 그들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인 감작형과 그에 못지않은 고수라는 백기량이 왜 이곳에 온 것인지.
그리고 유명한 고수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선인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들이 왜 자신을 도와주는 것인지.
그때였다.
자경진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들에게 물었다.
“대체, 대체 당신들이 왜 형산파의 행사에 간섭하는 것이오? 정말 형산파와 적대하고 싶은 게요?”
초하곤은 문득 실소했다.
아마 그들이 자신보다 더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그들의 음모가 완전히 박살났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때였다.
적의무복의 청년, 설풍이 뚜벅뚜벅 걸어오며 말했다.
“감 노사, 백 노사. 초 대협이야 원한이 있으시니 어쩔 수 없겠지만 다른 두 사람은 죽이지 마시오. 진 아우가 저들을 이용해 알아낼 것이 더 있다고 하더구려.”
그러자 형산파의 도사들은 물론 초하곤 또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 청년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그 청년의 말에 감작형과 백기량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알겠소, 공자.”
“…….”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천하삼십육성과 그 동급의 고수 두 명이 저 이름 모를 청년의 수하처럼 행동했던 것이었다.
자경진인이 경악해 물었다.
“누, 누구시오? 설마… 천마신교의 소교주라도 되신단 말이오?”
그 말에 설풍이 헛웃음을 지었다.
말도 안 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초하곤은 자경진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천마신교의 소교주라도 되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천하삼십육성급 고수 두 명을 수하로 거느릴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설풍은 더 이상 자신에 대해 말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감작형과 백기량을 보며 말했다.
“말이 길어지는구려.”
그러자 으흐흐 웃음 지은 감작형이 자종진인을 보며 말했다.
“자, 한번 놀아보자꾸나. 요즘 맨날 지기만 했으니 이번엔 제대로 기분을 좀 풀어봐야겠다.”
백기량 또한 말없이 몸을 돌려 또 한 명의 형산파 도인, 자국진인에게로 몸을 향했다.
그의 살기가 칼날처럼 날카롭게 집중되고 있었다.
그러자 초하곤 역시 자경진인을 바라보며 투기를 집중시켰다.
저들의 정체와 의도가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보단 복수가 우선이었다.
***
삼지신창 감작형이 자종진인, 귀도 백기량이 자국진인, 금도무적 초하곤이 자경진인을 덮쳐갈 때였다.
선우진 일행들이 타고 온 배 위에선 진소은이 웃으며 두 노인을 달래고 있었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다음번엔 두 분도 싸우실 수 있을 거예요.”
그들은 홍해아 증칠과 백골괴마 홍추였다.
사실 아까 전 삼지신창 감작형이 먼저 섬으로 몸을 날렸을 때, 그다음으로 두 사람도 몸을 날리려고 했다.
하지만 귀도 백기량이 스산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스윽 훑어보자 그들은 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감작형 다음 차례는 자신이니 끼어들지 말라는 뜻의 눈빛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증칠이 풀 죽은 얼굴로 진소은에게 하소연했다.
“아니, 저 백골 놈이야 그렇다 치고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저 귀도 놈이 모시는 주인이 내 아우인 풍이인데, 그러면 서열상 내가 먼저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 내가 아우의 부하한테까지 무시당하며 살아야 하는 거냐? 응? 싸움 좀 잘하면 다냔 말이다.”
그런 증칠의 하소연에 진소은은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백기량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그를 다독였다.
“그러게 말이에요. 백 노사님께서 너무 하셨어요.”
다만 증칠의 목소리 역시 작은 걸 보니 그 또한 백기량에게 들리도록 말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다행인 동시에 좀 우스웠다.
진소은은 고개를 돌려 섬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 곳의 싸움을 바라봤다.
금도무적 초하곤과 자경진인이 여전히 피 튀기는 싸움을 하고 있는 가운데 다른 두 곳의 싸움은 벌써 정리되어 가는 중이었다.
역시 삼지신창 감작형과 귀도 백기량이었다.
아무리 형산파의 힘이 강하다고 하지만 일대일로 붙어 그들을 이길 수 있는 자들은 장문인인 호남제일검 위정국을 제외하고는 아마도 거의 없을 것 같았다.
진소은은 문득 설풍과 뭔가를 얘기하고 있는 선우진을 바라봤다.
그가 말한 첫 번째 형산파의 약점, 저들의 힘은 강하지만 분산되어 있다는 얘기를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