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여론전-1
설풍의 일행들이 형산파 도사들을 모두 처리하고 뒤처리를 하는 동안, 사람들이 부산해진 틈을 타 진소은은 살짝 선우진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선우 공자, 저 질문이 있어요.”
선우진은 쭈뼛쭈뼛 말을 거는 그녀를 보며 빙긋이 웃음 지었다.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진 소저.”
그러자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음, 그러니까…. 아! 집중되지 못하고 분산되어 있다는 형산파의 첫 번째 약점은 저도 이제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요.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 약점은 무슨 얘기인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선우진은 아무래도 지금 막 궁금해진 게 아닌가 싶은 그녀의 질문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머금었다.
문득 생각해 보니 일행들과 함께 다니게 된 후 그녀와 단둘이 얘기해 볼 만한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래서 그녀도 억지로 질문을 짜낸 모양이었다.
선우진은 배시시 웃으며 슬쩍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그녀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스윽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흠, 거기에 대한 설명을 하려면 얘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잠시 같이 걸으시겠소?”
그러자 그녀의 눈이 순간 동그래지더니만 크게 소리쳤다.
“네! 좋아요!”
그러고는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작게 속삭였다.
“아, 아니 저는 그러니까, 설명을 듣는 게 좋다는… 그런 얘기였어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선우진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 지나치게 귀여운 게 아닌가 싶었다.
선우진은 진소은과 함께 수변가를 거닐며 그녀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간과하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 중 하나가 바로 명분이란 것이오.”
그러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이해가 된 눈치는 아니었다.
선우진은 조금 더 말을 풀어서 설명해 주기로 했다.
“소저는 호남성의 정파들이 처음에 왜 형산파의 지배를 받아들였고, 여러 불의한 일들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지금도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음, 그들이 너무 강하니까요?”
그녀의 반문에 선우진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도 물론 이유 중 하나인 것은 맞소.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청해성의 정파들은 무림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인 천마신교를 상대로도 곤륜파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대항하고 있지 않소? 분명 세력의 힘으로만 따졌을 땐 전혀 상대도 되지 않을 텐데도 말이오.”
“그야 그렇지만, 그들은 마교잖아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묻던 진소은은 갑자기 퍼뜩 생각을 떠올리고는 다시 소리쳤다.
“아! 형산파가 정파이기 때문인가요?”
그 물음에 선우진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맞소. 정확히는 구대문파이기 때문이오. 구대문파에 속한 형산파이기에 정파들이 그들의 권위에 굴복했고, 수많은 불의한 일들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신뢰받고 있는 것이오.”
“아아.”
진소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무림에서 구대문파의 일원이란 간판은 엄청난 위력을 갖고 있었다.
단지 그들이 구대문파라는 이유만으로도 더 높게 평가되고, 절대 잘못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어지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때 선우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오. 만약 그들이 구대문파가 아니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소?”
“네? 형산파가 구대문파가 아니게 된다고요? 어떻게요?”
“이유야 뭐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 않겠소? 예를 들면….”
선우진과 진소은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수변가를 거닐고 있을 때였다.
연태진은 수하들과 함께 뒷정리를 하고 있던 설풍에게로 다가가 그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어때요? 잘 어울리지 않아요?”
설풍은 의아한 눈빛으로 연태진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그러다 선우진과 진소은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려. 보기 좋소.”
그러자 연태진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설풍에게 말했다.
“아마 풍의 선택 덕분일 거예요. 선우 공자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 건.”
그 말에 설풍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 선택 덕분이라니, 뭐가 말이오?”
그러자 연태진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인연도 거부하지 않겠다는 풍의 선택 덕분에 선우 공자의 마음에도 변화가 생겼을 거라고요.”
그 말에 설풍은 다시 선우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예전처럼 진소은을 밀어낸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나 소저 이외의 여인과도 혼인할 수 있다는 자신의 선택이 저 똑똑한 아우에게도 영향을 줬을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설풍은 잠시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잘됐다는 생각을 했다.
진소은의 진실한 마음과 헌신은 옆에 있는 사람들이 더 명확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그렇기에 선우진이 그녀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려는 이유를 알면서도 솔직히 좀 안타까워 보였던 것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설풍은 문득 피식 웃음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진 소저와 정이 많이 들었나 보군.’
확실히 그런 것 같긴 했다.
설풍은 요즘 그녀를 보면 마치 여동생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따뜻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설풍은 문득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려 연태진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연태진이 휙 고개를 돌려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보기엔 나도 진 아우와 똑같아 보였을까?’
아마도 그럴 것 같았다.
설풍은 다시 피식 웃음 짓고는 연태진에게 말했다.
“이제 곧 대충 정리가 될 것 같은데 우리도 잠시 걷지 않겠소?”
그러자 연태진의 눈이 순간 움찔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에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연태진은 진소은처럼 바로 속마음을 내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딴청을 피우며 관심 없다는 듯 대답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설풍은 그런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옆얼굴, 귀와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만난 후 처음 보여주는 수줍어하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설풍은 잠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다시 말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적당한 말을 찾아내기엔 그의 여자 경험이 너무 일천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연태진이 다른 곳을 보며 슬쩍 입을 열었다.
“예쁘다고 해 줘요.”
“…예?”
“풍이 예쁘다고 해 주는 말, 듣고 싶어요.”
그녀의 말에 살짝 당황한 설풍은 멍하니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그러자 평소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던 그녀가 지금만큼은 불안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던 설풍은 이내 다시 웃음 짓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름답소, 연 소저. 정말 아름답구려.”
그러자 연태진의 입꼬리가 더 참지 못하고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말았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좋아요. 함께 걸어 줄게요.”
설풍은 연태진과 함께 걸으며 잔뜩 신이 난 듯 재잘거리는 그녀의 얘기를 들어줬다.
그들이 걷고 있는 호수 너머로 노을이 빨갛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
중원 오악 중 남악이라 불리고 있는 형산.
그 형산에 위치한 형산파의 장문인 위정국은 이른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자신의 옆에 잠들어 있는 여인의 나신을 스윽 훑어봤다.
사파 오대미녀 중 한 명인 선무우희 우난설, 그녀의 나신은 언제 봐도 아름다웠다.
위정국은 그녀를 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최근 형산파가 몇 번의 큰 실패를 경험했기에 요즘 위정국의 마음을 완벽하게 만족시켜주는 건 오직 그녀뿐이었다.
위정국은 예전부터 늘 천하제일을 추구하곤 했다.
그래서 자신이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고자 했고, 형산파를 천하제일의 문파로 만들고자 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천하제일의 미인이라고 믿고 있는 우난설이 자신의 여인이라는 건 그의 자부심을 십 할 충족시켜 주는 만족스러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가 다른 사파 오대미녀들이나 각 성의 제일미라고 불리는 이들을 만나본 적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부할 수 있었다.
세상의 어떤 여인도 이 우난설만큼 아름답기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그렇고말고. 절대 불가능하지.”
위정국은 흐뭇한 표정으로 그녀의 유려한 나신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몸을 일으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제는 형산파를 천하제일의 문파로 만들기 위해 일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그가 방에서 나간 후 천천히 눈을 뜬 우난설의 표정이 너무나도 차갑게 식어 있다는 사실을….
***
위정국은 한 시진 정도 아침 수련을 한 후 집무실로 가 얼마 전 새롭게 외당 당주 직을 맡은 자광진인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어제 천자검문을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천자산이 완전한 형산의 영역이 되었으니 호북성으로의 진출도 쉬워질 것입니다.”
“오기종, 오 대주가 일을 잘 처리했나 보군.”
“예, 아무래도 천자검문에는 오기종 대주를 상대할 만한 초절정 고수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평강 또한 접수했습니다. 평강의 제일세인 송강회를 지워버리고 이인자였던 수장문을 괴뢰로 만들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흐음, 송강회 놈들, 그렇게 뻣뻣하게 굴더니만, 역시 초절정 두 명 정도 파견하니 쉽게 해결되는군. 자홍과 하태숭이었나?”
“예, 그렇습니다.”
위정국은 보고를 들으며 집무실 중앙에 설치된 지형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앞엔 실물처럼 만든 호남성과 그 인근 성의 지형도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중 호남성의 영역엔 하늘색의 작은 깃발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위정국은 호남성의 서북쪽 천자산과 동북쪽 끝의 평강에 새롭게 작은 하늘색 깃발을 꽂으며 비릿하게 웃음 지었다.
이제 호남성 전체에서 하늘색 깃발이 비어있는 자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태였다.
그는 문득 아직 깃발이 꽂혀 있지 않은 북쪽 지역을 바라보며 물었다.
“악양은 어떻게 됐나? 아직도 복속하지 못한 건가?”
그러자 자광진인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어제 악양의 금도무적 초하곤을 회유하기 위해 추가로 파견했던 자경진인으로부터 보고가 있었습니다. 일을 시작하겠다고 하더군요. 아마 오늘내일 중으로 결과 보고가 올 것입니다.”
그러자 위정국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금도무적 초하곤은 오래전부터 협객으로 이름을 떨치던 자였다. 그런 자가 과연 회유가 될까? 그냥 깔끔하게 처리하는 게 낫지 않겠나?”
그 물음에 자광진인은 자신 있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의 그야 홀몸이었지만, 지금은 가족이 생겼지 않습니까? 가족이 생긴 협객이 예전 같을 수는 없을 겁니다. 또한 그쪽으로 지원을 간 사람이 자경진인이 아닙니까? 그는 그런 일에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믿고 기다려 보시지요, 장문인.”
위정국은 그리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광진인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알아서 잘 처리할 거라 믿겠네. 전 외당주도 이 정도 수준의 일에서 실패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 말을 들은 자광진인은 살짝 굳은 얼굴로 푹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장문인.”
이전의 외당 당주였던 좌가균은 육합검수 파천조를 파견했던 해남파와 복건용가에서 실패한 후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어 버렸었다.
하지만 그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가족들까지도 동시에 사라졌다는 점, 그 후 장문인인 위정국이 한 번도 그를 찾지 않았다는 점을 볼 때 그가 어떻게 됐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출가제자와 속가제자가 함께 활동하는 종남파에서 속자제자로서 외당 당주까지 올라간 그를 질투했던 이들이 많았기에 그의 실종을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하는 이도 많았다.
현 외당 당주인 자광진인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