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전선 비룡십삼대-310화 (310/359)

310화 묵랑의 규칙

증칠이 자명진인에게 달려들자 백골괴마 홍추와 진소은 그보단 한발 늦게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홍추가 모동주, 진소은이 자강진인에게로였다.

형산파의 번강검객 모동주는 백골괴마 홍추를 상대하며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사파의 유명한 마두인 그를 죽이는 건 그리 양심에 찔릴 필요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망설임을 버린 모동주는 백골괴마 홍추와 무서운 기세로 충돌했다.

땅그랑! 땅그랑! 땅그랑!

홍추의 목에 걸린 해골 목걸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는 가운데 두 사람은 각각 백골괴장과 검을 폭풍처럼 교환하기 시작했다.

따다당! 따당! 따다다당!

하지만 병기 부딪치는 소리보다도 그 입이 부딪치는 소리가 더 요란하게 들리고 있었다.

모동주가 검을 휘두르며 홍추에게 소리쳤다.

“백골괴마! 과연 사파의 악적다운 모습이로구나! 네놈의 살을 한 점, 한 점 저며서 네 목에 걸린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겠다!”

“켈켈켈켈! 누가 들으면 네놈은 협의지사인 줄 알겠구나! 내 목에 걸린 해골들의 주인은 다 너 같은 위선자들뿐이니 그들의 원한은 걱정해 줄 필요 없다!”

“누가 위선자라는 거냐? 이 못생긴 대머리 새끼야?!”

“누구긴 누구겠느냐?! 실혼인이나 만드는 형산파의 마두놈이지!”

“마, 마두라고?! 이 문어 같은 새끼가 감히!”

“무, 문어! 이놈이 근데?! 네놈 머리는 영원할 것 같으냐?! 납치강간이나 일삼는 개새끼가!”

아무튼 여러모로 시끄러웠다.

반면 진소은과 자강진인은 한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은 채 격돌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쪽도 결코 조용하지는 않았다.

진소은의 곤과 자강진인의 검이 요란한 소음을 내며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카카캉! 카카캉! 카카카캉!

진소은은 최근 병기를 바꾼 상태였다.

늘 쉽게 구할 수 있는 목봉만 들고 다녔던 진소은은 얼마 전 선우진의 권유로 독문병기를 하나 마련했다.

평상시엔 두 개의 단봉으로 들고 다니다가 조립해서 장봉으로 만들 수 있는 강철봉이었다.

그걸 만들어 준 사람은 선우진이었다.

선우진은 얼마 전 금도무적 초하곤에게 죽은 자경진인의 검이 운철이 섞인 명검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것을 녹여 철곤을 만들어 주었었다.

묵랑의 도움을 받아 은을 섞어 만들어 낸 가볍고 탄성이 강한 은색의 곤이었다.

그 은빛 철곤이 순백의 광채를 뿜어내며 살아 있는 것처럼 진소은의 몸을 휘돌았다.

휘리리리리릭!

백색 강기를 뿜어내는 은빛 곤은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신병이기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신룡처럼 진소은의 몸을 휘돌며 자강진인의 하늘색 검강, 그 검 면을 쳐서 공격을 모두 비껴내고 있었다.

카카카카카캉!

이전까지 부실한 목봉으로도 문제없이 검강을 상대해왔던 진소은이었다.

그런 그녀의 자연곤이 제대로 된 병기를 만나자 기대하지도 않았던 엄청난 상승효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자강진인은 상대가 아직 어려 보이기까지 한 젊은 여인인 것을 보고 빠르게 승부를 끝내기 위해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자신의 공격이 철벽에 부딪힌 듯 모두 막혀버리자 무심코 자신의 검 날을 바라봤던 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음?!”

자강진인은 당황해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고작 몇 호흡의 시간 동안 충돌했을 뿐이었는데, 그 격돌이 끝나고 본 자신의 검에 거미줄 같은 실금이 잔뜩 그어져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렇게 된 이유는 강기까지 두른 철곤이 짧은 순간 검 면을 수십 번이나 두드렸기 때문이었다.

목봉을 사용했을 땐 그저 상대의 공격을 쳐내는 것으로만 끝났을 진소은의 방어가 이젠 상대의 검을 부수는 공격이 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게다가 진소은은 이제 방어에서 멈추지 않았다.

“하압!”

슈하악!

은빛 강기가 창날처럼 튀어나온 철곤이 순식간에 공간을 꿰뚫었다.

평상시의 진소은이 잘 보여주지 않았던 찌르기였다.

자강진인은 빛살처럼 찔러오는 철곤을 검으로 쳐내려다 금세 안색이 바뀌어서는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윽!”

파샥!

백색의 송곳 같은 강기에 스친 옷깃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자강진인의 목 바로 옆쪽의 옷깃이었다.

그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자강진인이 철곤을 검으로 쳐내지 못한 이유는 그것이 회오리처럼 회전하며 찔러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직선으로 찔러온 것도 아니었다.

바람을 타고 춤을 추듯 이리저리 흔들리며 찔러왔기에 도저히 경로를 예측해 막아낼 수가 없었다.

이 수법은 사실 삼지신창 감작형의 주특기였다.

지난번 마적단과의 싸움에서 철그물을 절단하지 못해 애를 먹었던 진소은은, 같은 수법에 당하지 않기 위해 대응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강기를 창날처럼 날카롭게 뿜어내는 것으로 해결하려 했었는데, 그때쯤 그녀는 문득 감작형의 싸움을 관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참고해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켰던 것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진소은의 찌르기는 삼지창 같은 창살이 없었기에 공격 범위는 감작형만큼 넓지 않았다.

하지만 회전하며 흔들리는 정도는 오히려 감작형보다 더 변화무쌍해 보였다.

그 찌르기가 살아 있는 것처럼 곤봉을 제어하는 진소은의 자연곤에 딱 맞는 수법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새롭게 개발한 진소은의 찌르기를 힘겹게 피한 자강진인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린 여인임에도 도무지 만만하게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진소은의 공격이 자신을 스쳐간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를 악문 채 바로 돌진했다.

장병인 철곤의 찌르기가 빗나갔으니 허점이 드러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끝이다!”

쉬이익!

자강진인의 검이 빛살이 되어 진소은을 찔러 갔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자연곤의 움직임은 그토록 빠른 찌르기를 구사한 후에도 바로 이어지고 있었다.

휘리리릭!

“!”

어느새 회전하며 진소은에게로 돌아간 은빛 곤이 살아 있는 것처럼 그녀의 몸을 휘돌았다.

그러더니 빛살처럼 찔러온 검의 옆면을 때렸다.

까앙!

“큭!”

자강진인은 순간 자신의 손을 벗어나려는 검을 제어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만 했다.

그 순간, 진소은의 찌르기가 다시 공간을 꿰뚫었다.

슈하아악!

“!”

자강진인의 눈이 크게 확대됐다.

자신은 저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순간이었다.

“하아아압!”

다급한 기합과 함께 그의 온몸에서 푸른 장막이 뿜어져 나왔다.

호신강기였다.

투우웅!

회전하는 송곳 같은 찌르기가 자강진인의 호신강기에 깊숙이 박혔다 뒤로 튕겨 나오자, 진소은은 그 힘을 거스르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곤 다시 은빛 곤봉을 휘돌리며 자강진인의 공격을 기다렸다.

휘리리릭!

자강진인은 호신강기를 바로 거두고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은 채 진소은과 잠시 대치했다.

‘어째서지?’

자강진인은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눈앞의 어린 여인은 아직 초절정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초절정인 자신을 상대로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압도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손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데도 살아 있는 것처럼 몸을 휘돌고 있는 은빛 곤봉.

자강진인은 거기서 어떤 허점도 발견해낼 수가 없었다.

정말 철벽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반면, 지금 현재 진소은의 심장은 쉼 없이 두근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몸은 날아갈 듯 가볍게 느껴졌고, 상쾌한 기분은 이미 하늘을 날고 있는 것만 같았다.

최근 어느 때보다도 시야가 선명한 가운데, 자신을 덮고 있는 어떤 장막 같은 것이 금방이라도 뚫릴 듯 간질간질한 느낌이었다.

진소은은 그 설레는 느낌에 스스로에게 질문해봤다.

‘왜지? 선우 공자가 만들어 준 곤봉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일까?’

물론 그런 이유일 수도 있었다.

또는 그냥 기분 탓일 수도 있었다.

사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기분이 좋아 그저 그렇게 느끼고 있을 뿐인지도.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진소은은 문득 그때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혈우련과 싸웠던 그때.’

선우진과 떨어져 혼자서 혈우련과 싸웠던 그 순간, 솟구치는 먼지구름을 밟고 뛰어올랐을 때도 꼭 이런 기분이었다.

자신을 덮고 있는 보이지 않는 장막이 금방이라도 뚫릴 듯한 간질간질한 느낌.

그리고 그때 진소은은 실제로 껍질을 깨고 한 단계 수준을 높여 마침내 혈우련의 초절정 고수를 상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느낌이 어쩐지 그때와 비슷하게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맞아. 그랬어. 그러니 지금 이 느낌이 정말 그때와 같은 느낌이라면…?’

아마도 자신이 또 한 번의 벽을 넘을 수 있는 기로에 서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이번 벽을 넘게 된다면 도달할 수 있는 곳은 아마도….

‘초절정?’

거기까지 생각한 진소은은 눈을 번뜩이며 자세를 더욱 낮췄다.

만에 하나라도 지금의 결론이 사실이라면 절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계속해서 한계를 두드려야만 했다.

바로 눈앞의 저 검수를 이용해서 말이다.

평상시 주변 사람들에게 늘 착하고 순하기만 했던 그녀가 지금 이 순간 광동 진가장 최강의 무인다운 투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때 자강진인은 진소은의 방어를 어떻게 뚫어낼지에 대해서만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진소은이 갑자기 화살처럼 짓쳐들어왔을 때 그의 반응은 한 박자 늦고 말았다.

파박!

“윽?!”

자강진인은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아무리 놀라운 대응을 보여줬다 해도 자신보다 경지가 떨어지는 그녀가 먼저 선공을 가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슈하아악!

용권풍처럼 회전하는 철곤이 춤을 추듯 흔들리며 자신을 향해 찔러오고 있었다.

아까처럼 검으로 어디를 쳐내야 할지 알 수 없는 까다로운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자강진인은 초절정의 무인이었다.

아무리 까다롭다 해도 자신보다 하수의, 그것도 이미 한번 겪어 본 공격에 또다시 당할 수는 없었다.

“흥!”

이를 악물고 코웃음을 친 그는 온 공력을 실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검강이 전방을 향해 화악 분열했다.

푸른 불꽃을 뿜어내는 듯한 모습, 형산파의 절기인 연혼팔검의 절초 창염검화였다.

화아아악!

까가강!

전 방위로 뻗어 나간 검강에 진소은의 은빛 철곤이 튕겨 나갔다.

방어하기 까다롭다면 아예 공력의 우위를 이용해 눌러버리겠다는 자강진인의 의도였다.

그리고 그 의도는 훌륭히 적중한 듯했다.

‘역시!’

자강진인은 사납게 웃음 지었다.

그는 철곤을 튕겨내는 데 그치지 않고 푸른 검화를 계속해서 뻗어냈다.

이글거리는 불꽃이 진소은을 잡아먹을 듯 뿜어져 나가고 있었다.

화아아악!

푸른 불꽃에 진소은이 막 덮이려는 순간이었다.

검강에 튕겨났던 은빛 철곤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으로 돌아와 휘돌며 푸른 검화와 맞부딪쳤다.

까가가가가강!

그것은 마치 은빛 방패와도 같았다.

진소은의 몸 주변을 휘도는 백색 빛무리가 장막이 되어 푸른 불꽃을 막아냈던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마침내 불꽃의 기세를 모두 막아낸 은빛 철곤이 다시 자강진인을 향해 쏘아졌다.

공간을 꿰뚫는 빛살 같은 찌르기였다.

슈하악!

하지만 자강진인은 다시 코웃음 쳤다.

“흥!”

이미 그 찌르기의 파훼법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검을 휘둘러 연혼팔검의 다음 초식 만정천천을 펼쳐냈다.

“하아압!”

그러자 하늘색 검강이 수백 개의 송곳으로 화했다.

그러곤 찔러오는 철곤을 무시한 채 진소은의 온몸을 뒤덮을 듯 쏘아졌다.

어차피 공력에서 차이가 나는 찌르기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도가 드러나는 대응이었다.

깡!

이번에도 진소은의 찌르기는 다시 무력하게 튕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공력으론 역시 자강진인의 검초를 뚫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자연곤을 깰 수 없는 건 자강진인도 마찬가지였다.

튕겨 나온 철곤은 자연스럽게 돌아왔고 다시 진소은의 몸을 휘돌며 방패가 되어 주었다.

까가가가강!

그리고 또 공격.

자강진인과 진소은은 계속해서 번갈아 가며 공방을 주고받았다.

마치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초고속의 공방이었다.

그 정신없는 공방 속에서 진소은은 점점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점의 흔들림도 없는 맑은 호수에 밤하늘의 별빛이 그대로 비쳐서 빛나듯, 세상 모든 것이 그녀의 고요한 마음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다.

진소은이 문득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잡히지 않은 곤 또한 함께 앞으로 회전하며 뻗어 나갔다.

그에 대응하는 자강진인의 검은 이번에도 푸른 불꽃이 되어 철곤을 덮쳐오고 있었다.

두 번째로 보게 된 연혼팔검의 창염검화였다.

그 격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진소은은 문득 생각했다.

‘왜 이렇게 느리지?’

그리고 살짝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살아 있는 물고기처럼 갑자기 불가사의한 궤도로 펄떡인 은빛 철곤이 자강진인의 검 면을 강하게 두드렸다.

지금 진소은의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검 면의 실금들, 그중에서도 가장 진한 실금이 있던 곳이었다.

까아앙!

두 병기가 부딪친 순간, 진소은은 바로 결과를 알 수 있었다.

‘부서져!’

다음 순간, 자강진인의 검이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그녀가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파삭!

그러자 진소은의 시야에 자강진인의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확대되는 모습이 들어왔다.

한순간 무기를 잃어버린 그의 얼굴 가득 당황의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진소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가슴에 철곤을 찔러 넣었다.

계속해서 막혀왔던 바로 그 찌르기였다.

푸우욱!

진소은은 이번엔 철곤이 어떤 저항도 없이 그의 몸속으로 쑤욱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싸움이 끝났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또 한 번 벽을 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바로 초절정의 벽이었다.

***

싸움에 참가하지 않고 있던 선우진과 감작형, 백기량, 초하곤은 각각 사방의 지붕과 담장 위에서 주변을 경계하며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선우진의 마음속에서 묵랑이 입을 열었다.

- 호오! 진 소저가 또 벽을 넘었군.

그 말에 선우진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기쁘긴 한데 너무 쉽게 벽을 넘는 것 같아 질투도 나는군요. 진짜 천재는 천재인가 봅니다.’

묵랑은 그 말에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 …늘 말하지만 진 소저 나이가 자네보다 많다네. 어디 가서 그런 얘기는 하지 말게나. 재수 없다고 돌 맞을 수도 있다네.

하지만 선우진은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저야 어르신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지금도 계속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녀완 조건이 좀 다르지요.’

묵랑은 영 고집을 꺾지 않는 선우진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내가 살아 있을 때 꽤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줬지만 그중에서도 자네처럼 빨리 경지가 오르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네. 그러니 겸손한 척은 그만하게. 나도 좀 얄미워지려고 하니까.

그 말에 선우진은 피식 웃음 지었다.

이미 해청연이나 청성의 이건 같은 진짜 천재들을 만나봤기에, 묵랑이 없는 자신은 감히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찌 됐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묵랑이 다시 물었다.

- 그나저나 이번 형산파와의 싸움에서도 계속 장막 뒤의 실세로만 남을 생각인가?

선우진은 수많은 강적들을 꺾는 와중에도 굳이 자신의 이름을 밝혀 명성을 높이지 않았었다.

그래서 무림에 알려진 비천흑랑 선우진의 무위는 고작 아직 절정에 도달하지 못했으면서도 운 좋게 절정을 잡은 무사 정도로만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묵랑은 이번 형산파와의 싸움에서도 역시 명성을 높이지 않을 거냐고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 질문에 선우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이번 형산파와의 일전은 오로지 설풍 형님을 위한 것입니다. 차기 사왕이 되기 위한 명성을 쌓는 일에 굳이 제가 이름을 드러내 명성을 나눠 먹을 필요가 없죠. 게다가 이후에 있을 혈교와의 일전을 위해서도 제 존재는 알리지 않는 쪽이 낫습니다.’

그러자 묵랑이 못 말리겠다는 듯 살짝 웃음 띤 목소리로 말했다.

- 자네도 참 어지간하군. 나도 재물 욕심이나 다른 욕심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명성을 높이는 일만큼은 마다하지 않았었는데. 자네는 그것마저도 관심이 없으니 자네가 나보다 어른스러운 모양일세.

그 말에 선우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라고 명성을 높이는 것이 싫기야 하겠습니까? 다만 지금은 숨어 있는 쪽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제가 그렇게 대단한 놈이 아니라는 건 늘 지켜보시는 어르신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묵랑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선우진이 대단하지 않았다면 백 년 만에 묵랑검의 봉인을 깨고 자신과 만났을 수도, 이제 고작 스물두 살이란 젊디젊은 나이에 저런 경지에 올랐을 수도 없었을 거란 말도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수많은 거대 문파들을 농락해 왔던 그의 지모 역시도 말이다.

묵랑이 보기엔 이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선우진이 가장 대단한 건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점인 것 같았다.

‘자신에 대해 자만하지 않으니 한순간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지. 놀랍게도 말이야.’

그리고 그런 이유로 묵랑은 기대가 됐다.

자신이 살아 있을 땐 결국 누구에게도 전해줄 수 없었던 망아공을 그가 완성해줄 거라는 기대가….

물론 그가 망아공을 완성하거나, 혹은 마지막 한 번 남은 세 번째 빙의를 쓸 경우 자신은 그의 옆에서 사라져야만 할 것이었다.

그게 묵랑검을 만들 때 자신이 설정해 놓은 규칙이었으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묵랑은 드디어 이 길고 길었던 기다림에서 벗어나, 마침내 안식에 들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백 년…. 정말 길었지.’

물론 이 기특하고 사랑스러운 제자를 계속 지켜볼 수 없다는 건 좀 아쉽긴 했다.

‘그가 혈교를 물리치는 숙원을 이루는 것까지만 지켜볼 수 있어도 참 좋을 텐데…. 아니, 조금만 더 가능하다면 좋은 소저들과 혼인해 아이를 낳는 것까지도….’

하지만 그럼에도 묵랑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간 그와 함께하며 지켜봤던 즐거운 시간만으로도 지난 백여 년간의 기다림은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묵랑은 자신이 떠나게 될 거란 얘기만큼은 선우진에게 끝까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신의 착한 제자가 혹시라도 자신을 보내지 않기 위해 위급한 상황에서도 세 번째 빙의를 쓰지 않으려 하거나, 또는 망아공을 익히지 않으려 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묵랑은 문득 그런 바람을 가져봤다.

가능하다면 선우진이 세 번째 빙의 없이 혈교를 물리쳐 주기를.

그리고 그 후 망아공을 완성해 주기를….

지난 백여 년간 제대로 된 후계자를 만나는 것만을 바라왔던 그가 처음으로 가지게 된 작은 바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