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고발
호남성 상음.
남정방.
상음은 동정호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도시였다.
그래서 형산파의 초절정 고수들은 동정호의 북동쪽에 위치한 악양으로 가기 위해 상음에 위치한 형산파의 괴뢰문파 남정방에서 모이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그들 중 님정방의 접객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자망진인이 문득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외부에 나가 있는 사제들의 기강이 해이해져 있다는 사실이야 어제오늘 일도 아니지만, 이건 좀 심각한 수준이로군. 이 일이 끝나면 아무래도 제대로 기강을 좀 잡아야겠어.”
자망진인은 형산파 본산에서도 문도들의 계율을 담당하는 계율각의 부각주로서, 고집이 세고 사형제 간의 위계를 중시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러자 그와 함께 계율각에서 일하고 있는 형산파의 초절정 고수 공추동이 그를 달래듯 말했다.
“다들 멀리서 오고 있지 않습니까, 사형? 그들도 절대 일부러 늦는 건 아닐 겁니다.”
그 말에 자망진인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말했다.
“사제는 이 사형이 고작 늦은 것 하나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한다고 생각하나?! 길이 멀면 당연히 늦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미리 전서구라도 보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이러해서 늦게 되었으니 죄송하다고 말일세! 그게 바로 사형제 간의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공추동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하지만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듣고 보니 사형의 말씀이 다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전서구 한 마리 정도는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게 공추동이 자신의 말을 동조해주자 자망진인은 그제야 슬쩍 웃음을 지었다.
“그래, 사제도 이제야 내 깊은 뜻을 이해했나 보군. 아무튼 두고 보게. 내 이번 기회에 외부에 나가 있던 사제들의 기강을 단단히 잡아놓을 테니.”
“예, 예, 사형.”
공추동은 웃으며 그의 비위를 맞춰주고는 내심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자망진인의 저런 성품 때문에 그가 다른 사형제들로부터 경원시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지금 오고 있을 번강검객 모동주같이 자유분방한 성격의 사제들은 자망진인의 말을 들어주는 척하고는 오히려 골탕을 먹이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모 사제가 있었을 땐 재미는 있었는데.’
공추동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형산파의 당면한 문제는 자망진인 같은 자들이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자망진인처럼 꽉 막힌 소인배들이 그나마 형산파 본산에서 정감이 가는 사람들이라는 점에 있었다.
공추동은 슬쩍 고개를 돌려 주변에 있는 다른 사형제들을 둘러봤다.
그러자 나머지 일곱 명의 사형제들은 자망진인이야 뭐라고 하든 별 상관없다는 듯 시선도 주지 않고 있었다.
사형제는커녕 처음 만난 사람들도 이렇게까지 무관심하지는 않을 것 같은 모습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본 공추동은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의도적으로 자망 사형의 말을 무시하고 있군.’
지금 이 광경은 작금의 형산파 본산, 그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광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최근의 형산파 본산의 사형제들 사이에선 다른 이들에겐 신경 쓰지 않고 자기 몫만 챙기면 된다는 생각들이 팽배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 최근의 일만은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는 현 장문인 위정국이 취임하며 무한 경쟁을 통해 형산파의 힘을 강화시키겠다고 선언한 순간부터 계속해서 진행되어 왔던 일이었다.
장문인 위정국은 사형제 간은 물론 사숙질 간의 위계나 배분 같은 것도 전혀 중요시하지 않았다.
오직 실력만을 중요시하여 무위가 높은 자와 낮은 자를 철저히 차별하겠다고 선언했다.
마치 정파가 아닌 사파처럼 재능과 무위가 높을수록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무위와 발전 속도가 낮은 자들은 완전히 도태시켜 버리겠다고 말했던 것이었다.
배분과 위계, 그리고 사형제들 간의 정을 중시하는 정파인들에게는 너무도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진짜 문제는 아니었다.
공추동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생각했다.
‘진정한 문제는 장문인과 장문인의 측근들은 그 경쟁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지.’
위정국은 자신과 자신의 측근들은 성역으로 남겨놓은 채 나머지 인물들에게만 무한 경쟁을 강요했다.
그리고 그의 측근이 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보이던가, 아니면 어마어마하게 그의 비위를 잘 맞춰야만 했다.
둘 중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쉽고 눈에 띌 확률이 높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후자의 방법을 선택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도 말이다.
물론 그것도 그나마 장문인 근처에 있어야만 가질 수 있는 기회이기에 측근들 사이의 파벌이 강화됐다는 사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형산파의 사람들은 점점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었다.
- 각자도생(各自圖生)
이 말보다 요즘 형산파의 분위기를 잘 설명해주는 사자성어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외부에서 활동하는 제자들보다는 본산에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유독 더 강했다.
공추동이 그런 생각들을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문득 접객실의 문을 열고 남정방의 총관이 들어왔다.
“저, 저기 본산의 고수분들께 드릴 말씀이 좀 있습니다.”
그러자 아홉 명의 초절정 고수가 모두 말없이 그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총관은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 침을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북쪽에서 백 명이 훨씬 넘는 무인들이 상음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아마 우리 남정방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말에 공추동이 대표로 그에게 물었다.
“백 명이 훨씬 넘는 무인? 그들의 정체는?”
그러자 총관은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것까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몇몇 초절정 고수들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초절정 고수인 그들에게 웬만한 무인 백여 명은 그리 신경 쓸 가치조차 없는 인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총관의 다음 말이 이어지자 그들은 다시 총관에게로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총관이 말했다.
“그런데 그들 중 금도무적 초하곤이 섞여 있는 것 같답니다.”
“음?”
“초하곤이?”
그 말은 모두에게 너무나 의외인 말이었다.
그를 잡기 위해 함께 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는 정작 이쪽으로 오고 있다니.
묘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공추동이 다시 물었다.
“그럼 그 백여 명의 무인들이란 게 혹시 다 반형회 놈들인 건가?”
“저, 저도 거기까지는 잘….”
그러자 거기까지 들은 형산파 고수들은 서로 슬쩍 시선을 교환하고는 묵묵히 차를 마셨다.
뭔가 속에 생각들은 있는 것 같았지만 딱히 나서서 얘기하지는 않겠다는 듯한 모습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에 공추동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앞으로 나서 가장 서열이 높은 자망진인에게 물었다.
“사형,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의 질문에 자망진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거만하게 대답했다.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들이 알아서 우리가 찾아갈 수고를 덜어준다면야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당연히 마중을 나가줘야겠지. 열심히 이쪽으로 오고 있을 사제들에게야 미안하지만,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다 그들이 늑장을 부린 탓인데.”
그러자 공추동은 그의 말에 감탄했다는 듯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렇군요. 이 사제 또한 그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럼 바로 일어나시겠습니까?”
“응? 지금 바로? 뭐, 그러도록 하세.”
자신을 가장 웃어른으로 대접해주는 듯한 공추동의 말에 자망진인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공추동은 그제야 다른 사형제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도 함께 움직이자고 압박하는 시선이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다른 초절정 고수들은 슬쩍 분위기를 보더니만 두 사람을 따라 묵묵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굳이 그 말을 거부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공추동은 사람들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곧 모두 함께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러자 접객실에 혼자 남은 총관의 머릿속에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초하곤이 무인들을 이끄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는 얘기를 했어야 했나?’
보고에 따르면 무인들을 선두에서 이끌고 있는 이는 금도무적 초하곤이 아닌 붉은 무복을 입은 건장한 청년 무인이었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총관이 밖으로 나갔을 땐 이미 초절정 고수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
자망진인을 비롯한 아홉 명의 초절정 고수들이 무인들과 조우한 곳은 상음의 성문 바로 앞이었다.
백오십 명쯤 되어 보이는 그들이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성문 밖에서 진을 치며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들에 관한 소문은 상음 성내에 좌악 퍼졌고, 상음의 백성들은 성문 밖과 주변에 구름처럼 모여들어 불안함과 호기심이 공존하는 눈빛으로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홉 명의 초절정 고수들은 그런 상음의 백성들 사이를 당당하게 걸어 성 밖으로 빠져나갔다.
백성들과 수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좌우로 갈라져 그들에게 길을 만들어 주고는 크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백의 무복에 푸른 영웅건! 형산파의 고수들이야!”
“근데 아홉 명밖에 안 되잖아? 저 밖에 있는 자들은 백오십 명이나 되던데? 아무리 형산파라도 수가 너무 적은 거 아니야?”
“모르는 소리! 내가 들었는데 저들 모두가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이라더군. 웬만한 무인들은 백오십 명은커녕 천오백 명이 있어도 안 될걸?”
“뭐라고?! 저 아홉 명이 다 초절정이라고?! 세상에,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허어! 역시 형산파로군!”
선두에 서서 성문 밖으로 걸어 나가던 자망진인은 주변의 웅성거림을 듣고는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늘 고수들이 가득한 본산에 있어 다른 이들의 찬사를 받을 일이 별로 없었는데, 이렇게 주변의 뜨거운 반응을 느끼게 되니 심장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성문 밖으로 나가자마자 백오십여 명의 무인들이 좌우로 주욱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본 자망진인은 코웃음을 쳤다.
“흥! 겨우 백오십 명?”
백성들이 말한 것처럼 저 정도의 인원수로는 어림도 없었다.
아홉 명의 초절정 고수들에게는 눈에 차지도 않는 인원수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저들의 중심에 서 있는 붉은 무복의 청년 또한 눈에 안 들어오긴 마찬가지였다.
자망진인은 거만한 표정으로 무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본도는 형산의 자망이라고 한다!”
그러고는 거만한 표정으로 그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자망진인의 예상으론 자신이 형산파의 초절정 고수인 자망진인이라는 사실을 알기만 해도 저들이 기겁한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그의 기대와 전혀 달랐다.
늘어선 무인들은 잠시 그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하다, 자망진인이 거기서 말을 끊고 가만히 있자 헛웃음을 지으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특히 붉은 무복의 청년 바로 옆에 서 있던 아름다운 여인은 어이없다는 듯한 말투로 소리쳤다.
“당신이 자망진인이라서 뭐?! 지금 자기소개하자는 거냐?! 왜?! 나이랑 취미도 얘기해주지 그래?!”
그녀의 거침없는 말에 사람들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심지어 자망진인의 뒤에 서 있던 사형제들마저도 피식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자망진인의 얼굴이 분노와 창피함으로 시뻘게지고 말았다.
“이, 이 계집이! 가, 감히!”
그 말을 들은 여인은 짜증 난다는 듯 외쳤다.
“감히는 무슨 감히! 우리가 놀러 온 줄 아냐?! 네가 이름을 말하면 ‘아이쿠! 대단한 분이시군요!’라고 감탄이라도 해줄 줄 알았어?! 형산파엔 대화를 할 만한 놈이 없나?! 저런 모자란 놈밖에 앞으로 나설 자가 없는 거야?!”
모자란 놈이라니.
자망진인은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초절정은 물론 절정의 경지를 넘은 이후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폭언이기 때문이었다.
그간 형산파 본산에서 장로이자 초절정 고수로서 늘 대우만 받고 살아왔던 자망진인은 저런 종류의 인신공격에 도무지 대응할 수가 없었다.
“이, 이…!”
자망진인이 너무 화가 나 시뻘게진 얼굴로 말도 잇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보다 못한 공추동이 앞으로 나섰다.
“본인은 형산파 계율각의 공추동이라고 한다! 너희는 대체 누구인데 이렇게 무리를 지어 상음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것이냐?! 너희가 감히 우리 형산파에 대항한다는 반형회의 악적들이냐?!”
그러자 아름다운 여인이 인상을 팍 찡그리더니 그에게 소리치려 했다.
“무…!”
하지만 붉은 무복의 청년이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아 만류했다.
그러고는 앞으로 나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강력한 내공이 담긴, 상음 전체에 울려 퍼질 것만 같은 우렁찬 목소리였다.
- 나는 사왕의 후계자 중 한 명인 설풍이라고 한다!
그러자 상음의 백성들과 형산파 무인들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달은 상음의 백성들은 바로 경악한 표정이 되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 사왕의 후계자라고?!”
“사왕의 후계자가 왜?!”
“거, 거짓말 아닐까? 설풍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아니야. 내가 이번에 들었는데 원래 다음 대 사왕의 가장 유력한 후보자였던 괴정기를 침몰시킨 후계자의 이름이 바로 설풍이라고 했었어!”
“그, 그런! 근데 그가 왜 이곳에?!”
당황한 건 백성들뿐만이 아니었다.
형산파의 무인들 또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공추동이 떨리는 목소리로 되뇌었다.
“사, 사왕의 후계자라고?”
구대문파에서 욱일승천 중인 형산파라 해도 건드릴 수 없는 곳이 최소한 세 곳은 있었다.
천마신교, 사왕련, 무림맹.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는 이 삼대 세력 앞에서는 형산파의 이름도 그저 좀 괜찮은 문파에 불과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왕련의 주인인 사왕의 후계자가 갑자기 이곳에 나타나다니.
원래 말을 잘 못하는 자망진인은 물론 공추동 역시도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자망진인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이런 반응은 그가 아까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나오길 기대했던 반응이었다.
그가 바랐던 그 반응을 정작 지금 자신이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설풍은 잠시 웅성거림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다시 말을 이었다.
-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내 친우들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친우들의 원한?
대체 누가 사왕의 후계자와 사귄 친우들을 건드렸단 말인가?
사람들은 긴장된 눈빛으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설풍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 얼마 전, 사악하고 무도한 자들이 평생을 악양의 협객으로 살아오셨던 금도무적 초하곤 대협의 자식들을 납치하고는, 자신들의 주구가 되지 않으면 초 대협이 보는 눈앞에서 아들을 죽이고 딸을 범하겠다고 협박한 일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상음의 백성들은 크게 웅성거렸다.
“초하곤 대협이라면 악양의 유명한 협객이시잖아?”
“그렇지. 근데 그런 초 대협에게 그렇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 놈들이 있다고?!”
그들의 웅성거림을 들은 형산파 무인들은 당황했다.
그게 누구의 이야기인지 바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얘기를 하필 이렇게 많은 백성들 앞에서 하고 있다니.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들로서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무공은 높았던 반면 무림에서 경험을 쌓을 기회는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초절정 고수들 중 가장 경험이 많다는 공추동 또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설풍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 그뿐이 아니다! 그 무도한 자들은 육 개월 전 누정 성가표국의 국주셨던 성찬국 대협을 협박하기 위해 산적을 가장하여 표물을 강탈하였다. 그러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대협이 굽히지 않자 성 대협의 부인과 세 살배기 어린 딸을 납치하여 대협의 앞에서 간살하였다! 또한 팔 개월 전엔 원릉의 원릉검문을 차지하기 위해…!
설풍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가 말하는 악적들의 끔찍한 행위는 끝이 없었고, 그걸 듣고 있던 상음의 백성들은 세상에 그런 나쁜 놈들이 있냐며 공분했다.
그리고 그들은 설풍의 말이 끝날 때마다 주변에서 한 명씩 앞으로 걸어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의아해했다.
“근데 저 사람들은 누구지? 왜 저렇게 서럽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거래?”
“글쎄. 지금 말한 일들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인가?”
“아니?! 저, 저! 난 알겠네! 저분은 성찬국 대협이 아닌가?! 누정 성가표국의 국주셨던 분 말일세! 아! 그러고 보니 그 옆의 분은 원릉검문의 문주셨던 원 대협?!”
“어엉?! 그럼 저분들이 지금 말하고 있는 저 사연들의 실제 피해자들이란 말인가?!”
“허어! 그래서 저리도 서럽게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거였군!”
“아이고, 저걸 어째!”
상음의 백성들은 분루를 흘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그들을 동정하는 목소리와 그 악적들을 욕하는 목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고, 반대로 형산파 고수들의 안색은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득 누군가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데 저 설풍이란 사람은 저 얘기를 왜 여기서 하고 있는 거지?”
“응? 그러게. 혹시 이 상음에 관련된 사람들이라도 있는 거 아냐?”
“에이, 설마….”
“저, 저기, 근데 말이야.”
“응?”
“지금 저 사람이 말한 지역들이 전부 형산파에게 복속된 지역들 아냐?”
“…응?”
시간이 갈수록 상음의 백성들이 내는 목소리도 점점 잦아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들도 이젠 그런 악독한 짓들을 저지른 악적이 누구를 말하는지를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잠시 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성문 부근은 이제 쥐 죽은 듯 고요해진 상태였다.
백성들은 얼굴이 시뻘게진 형산파 무인들의 눈치를 살피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드디어 설풍의 고발이 끝났다.
그는 형산파가 저지른 죄악들을 모두 나열하고는 이제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 이 모든 일을 저지른 악적들이 누구를 말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형산파! 내 비록 사파에 몸을 담고 있지만 사파인 사왕련에서도 너희 같은 악적들은 본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나는 나의 친우들이 당한 이 모든 일에 대한 죗값을 너희와 위정국에게서 받아낼 것이다!
그러자 자망진인이 더 참지 못하고 앞으로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닥쳐라! 감히 본파를 모욕하다니! 설사 네놈이 사왕의 후계자라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그러고는 바로 설풍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일단 설풍을 죽여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