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전선 비룡십삼대-315화 (315/359)

315화 침투-1

구석에 몰린 형산파 장문인 위정국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극단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머릿속에 항복이란 단어 따위는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건 위정국으로서 당연한 얘기이기도 했다.

비록 상황이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구대문파에서도 수위를 차지하는 강자 형산파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이 사황도 아닌 고작 사황의 후계자와 호남성의 중소문파들이 모인 떨거지들 따위에게 패배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적어도 위정국은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다.

그가 분노한 목소리로 외당주 자광진인에게 명령했다.

“지금 즉시, 모든 무인들을 연무장으로 집결시켜라. 초절정, 절정은 물론 일류, 이류 모두 다! 초절정 고수들이 좀 줄어들었다 해서 우리가 약해지지 않았음을 보여 주마! 놈들에게 형산파의 진정한 힘을 보여줄 것이다!”

그의 명령에 자광진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결사항전이라니.

자칫 잘못하면 형산파가 입을 피해가 지나치게 커질 수도 있었다.

그로선 결코 동의하고 싶지 않은 대응방법이었다.

자광진인이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그보단 수뇌부들끼리의 대결이 낫지 않겠습니까? 협상만 잘한다면 소수 정예끼리의 대결로 끌고 갈 수도….”

물론 그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장문인 위정국이 모든 책임을 지고 일대일로 대결하거나, 아니면 항복하는 것이었다.

이긴다면 당연히 좋은 일이고, 만약 진다 해도 장문인이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 되니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장문인 위정국이 모든 책임을 지고 항복하는 것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광진인이 생각하기에 형산파가 지금까지 잃어버린 전력만 해도 거의 전력의 오 할 이상이었다.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야 다시 복구할 수 있을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최대한 피해를 줄이는 방향으로 결정해야만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위정국의 생각은 그와 다른 모양이었다.

그가 위험하게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반문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의 질문에 자광진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예? 그, 그야 우리 형산파의 존속을 위해….”

그러자 위정국이 갑자기 자광진인의 멱살을 와락 움켜잡더니 자기 앞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러더니 사나운 표정으로 속삭였다.

“그게 아니겠지. 내가 네놈의 속셈을 모를 줄 아느냐? 나를 제물로 삼아 이 상황을 빠져나갈 생각이란 걸 말이다. 그렇지 않느냐?”

“예, 예?”

그 말에 자광진인은 차마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관점이 다르긴 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위정국이 사납게 웃으며 다시 속삭였다.

“안 되지, 안 돼. 형산파의 모든 것은 내 것이다. 내가 너희를 구대문파로 만들어 줬고, 내가 너희를 호남성의 지배자로 만들어 줬다. 그러니 내가 몰락한다면 너희 또한 그래야 공평할 터. 허튼 생각은 하지 마라. 반드시 이길 생각만 해야 할 것이다. 만약 내가 사라진다면 그 후엔 형산파도, 또한 너희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자광진인은 위정국의 눈빛을 바라보며 두려운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켜야만 했다.

그의 눈 속에서 번들거리는 위험한 빛, 그것이 광기라는 걸 이제야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위정국이 자광진인의 멱살을 확 밀치며 명령했다.

“뭐 하고 있나?! 당장 모든 문도들을 집결시켜라!”

그 명령에 자광진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 명령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지만, 그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아니 형산파의 수뇌부 모두는 위정국의 말을 절대 어길 수 없었으니까.

그는 결국 고개를 숙여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 장문인. 알겠습니다.”

***

자광진인이 모든 문도들을 집결시키기 위해 집무실을 나섰을 때였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위정국은 그가 나가자마자 바로 몸을 일으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절대 놈들에게 져 줄 마음 따위는 없었고 지금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는 확신하지만, 그래도 만약 자신이 죽게 된다면 함께 저승으로 데려가야 할 소중한 것들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없는 세상에 자신의 소유물들을 단 하나도 남겨 놓을 수는 없었다.

그는 거처로 서둘러 돌아가서는 근처에서부터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우희! 어디 있소?! 우희!”

그가 찾고 있는 절대 두고 갈 수 없는 소유물은 바로 그의 여자인 선무우희 우난설이었다.

아까 자광진인에게 자신이 죽으면 형산파 또한 존속할 수 없다고 말하며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이 바로 우난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그녀를 자신이 없는 세상에 남겨둘 수는 없었다.

만약이라도 그녀가 홀로 남아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기라도 한다면….

그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우난설을 데려가고자 했다.

그래서 만약 정말 자신이 몰락하게 된다면 그녀부터 먼저 죽일 생각으로 말이다.

“우희! 어디 있소, 우희!”

그 시각, 선무우희 우난설은 자신의 방에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제 위정국의 여자가 되어 정보를 캐내는 더러운 임무도 끝이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설풍과의 승부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결과와 상관없이 형산파의 몰락은 이제 거의 기정사실이 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악행이 천하에 알려진 이상 그들은 더 이상 구대문파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 뻔했다.

그리고 구대문파가 아닌, 모두에게 비난받는 형산파라면 이제까지처럼 힘든 싸움만은 아닐 것이라는 게 그녀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위정국이 설풍과 결전을 치르기 위해 나서는 대로 바로 형산파를 떠날 생각이었다.

‘오래 견뎠지. 이젠 이 더러운 임무에서도 벗어날 때가 됐어.’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문득 그녀의 죽은 의자매를 떠올렸다.

‘령매….’

선무우희 우난설이 처음 반형회에 가입했던 이유는 그녀의 의자매와 그 가족들이 형산파에 의해 처절하게 몰락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의자매는 호남성 신전에 위치한 의령장에 살고 있었다.

우난설은 그녀와 친자매 이상으로 우애가 좋았지만, 정파인인 그녀의 입장을 배려해 세상 사람들에겐 사파인인 자신과 의자매를 맺었음을 알리지 않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형산파가 신전을 복속하기 위해 의령장을 습격한 사건이….

그때 우난설이 의령장에 도착해 보게 된 광경은 불에 타 전소된 의령장과 그 근처에서 처참하게 간살당한 의자매의 시신이었다.

‘령매! 령매! 안 돼애애애!’

의자매의 시신을 품에 안고 오열해야 했던 그날, 우난설은 복수를 맹세하고 바로 반형회에 가입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의 의지로 위정국의 눈에 띄어 그녀의 여자가 되었다.

사파인인 그녀에게 정조 따위는 복수를 위해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는 사소한 것에 불과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자 노력했다.

복수만 할 수 있다면 그런 것 따위는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물론 그건 절대 사실이 아니었다.

여인의 몸으로 증오하는 남자의 노리개가 되어 산다는 건 너무도 지옥 같은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지금껏 이를 악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견뎌내 왔었다.

그랬는데.

그래서 마침내 놈이 몰락하는 광경을 볼 날이 눈앞까지 다가왔다고 생각했는데….

“우희! 어디 있소?! 우희!”

밖에서 들리는 위정국의 거친 목소리에 우난설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시녀가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가서 몸이 안 좋다고 알리겠습니다.”

그 시녀는 우난설이 밖에서 데리고 함께 형산으로 들어온 정미희란 여인으로, 역시 반형회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우난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오. 설사 진짜 몸이 안 좋다고 해도 그가 저를 그냥 둘 리가 없습니다. 저자의 집착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저를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옆에 두려고 할 거예요.”

그러고는 품속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며 조용히 당부했다.

“정 소저야말로 제가 그와 함께 가거든 이걸 가지고 먼저 몰래 빠져나가세요. 새로운 육합검수들을 양성하고 있는 장소를 적어놨습니다. 제가 없는 이곳에서 정 소저 혼자 사 대협을 기다리고 있다간 험한 일을 당하게 될지도 몰라요. 아직 그가 올 시기가 꽤 남아 있기도 하고요. 그러니 부디 조심히 빠져나가 이걸 꼭 동지들에게 전달해 주세요.”

우난설의 배려에 시녀 역할을 하고 있던 정미희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우 소저….”

그러자 우난설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땐 꼭 언니 동생으로 만나도록 해요.”

우난설은 정미희의 손을 굳게 잡은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우아하게 방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고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위정국에게 물었다.

“여기 있어요. 왜 그렇게 부르는 거죠?”

그러자 그녀를 발견한 위정국의 얼굴에 환한, 하지만 광기 어린 웃음이 떠올랐다.

“여기 있었구려, 우희! 나와 함께 갑시다. 영원히!”

우난설은 잠시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래요. 함께 가죠.”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대답하며, 그녀는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부디 저 ‘영원히’라는 말이 저주가 되지 않기를….

***

위정국이 싸울 수 있는 모든 문도들을 집결시켜 마침내 형산을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형산의 반대편에서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선우진과 일행들이었다.

선우진은 설풍이 대규모 일행들을 이끌고 천천히 형산으로 다가가고 있을 동안, 먼저 빠르게 형산에 도착해 기회가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때가 왔다.

그가 함께 온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자, 이제 빈집털이를 할 시간이로군요.”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증칠이 으흐흐 웃으며 손바닥을 비볐다.

“크흐흐흐, 천하의 형산파를 상대로 빈집털이라니. 아주 흥미진진하구나.”

반면 얼마 전에 항복한 형산파의 초절정 고수 번강검객 모동주는 복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본산을 빈집털이하게 되다니, 원래부터 사고뭉치로 유명하긴 했지만 이런 사고까지 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구려.”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허탈해 보였다.

그러자 역시 옆에 있던 중년인이 그를 노려보며 대꾸했다.

“나도 형산파의 개잡놈과 함께 움직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는 동정수귀 사우림이라는 자로 원래 동정호에서 활동하던 반형회의 고수였다.

또한 그는 뛰어난 수공 실력으로 형산파 안쪽을 오가며 선무우희 우난설로부터 정보를 받아오는 역할을 맡아 왔던 자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그는 형산파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수로를 꿰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임무를 위해서는 그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선우진이 이번에 형산파 안쪽으로 침투하려는 이유는 이제껏 여러 가지 계략을 통해 형산파의 전력을 많이 낮춰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승산이 높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북부 지역의 초절정 고수들과 본산에서 온 아홉 명의 초절정 고수들을 각개격파로 제거하고, 복건용가와 해남파에게 연락해 남부 지역의 초절정 고수들을 묶어놨음에도 그랬다.

‘형님에게 수많은 무인들이 몰려들고 있지만, 절정 이상의 정예 무인들의 수가 너무 부족해. 이대로 정면으로 붙게 된다면 승패와 상관없이 그들 대부분이 몰살당하고 말겠지.’

그게 선우진이 예상하는 이번 싸움의 결말이었다.

그러니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몇 개의 강력한 계략이 더 필요했다.

적들의 전력을 깎고 우리 쪽의 전력을 높일 수 있는 획기적인 계략이….

그게 지금 선우진이 형산파를 침투하려는 이유였다.

그 계략의 일환으로 그는 일단 반형회에서 침투시킨 간자인 우난설과 정미희를 구할 생각이었다.

그 이유는 그간 고생했을 그녀들을 무사히 빼내는 동시에, 그녀들에게 새로운 육합검수를 양성하고 있는 비밀 장소에 대한 정보를 듣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선우진이 생각하기에 현재 양성하고 있는 육합검수들의 존재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이 싸움을 훨씬 쉽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강력한 패가 될 수 있었다.

형산파가 저질렀던 다른 악행들은 타 문파들에게 행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타문파 사람들에게 형산파의 평판을 떨어뜨릴 수는 있어도 형산파 문도들을 흔들 수는 없다는 게 선우진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실혼인은 자파의 문도들에게 행한 악행이었으니까. 그러니 현재 양성 중인 육합검수를 확보해 형산파 문도들에게 보여줄 수만 있다면 분명히 형산파 무인들을 흔들 수 있을 거다.’

그게 선우진이 노리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형산파와의 전면전이 시작되기 전 반드시 그 정보를 얻어 육합검수들을 확보해야만 했다.

그러니 그러기 위해선 거기까지 안내해 줄 동정수귀 사우림의 역할이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