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전선 비룡십삼대-317화 (317/359)

317화 침투-3

세 사람은 무척 빠르게 산 위의 형산파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동정수귀 사우림이 정찰을 하겠다고 말한 것이 민망할 정도로 형산파 근처까지 가는 동안 아무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위정국은 정말 대부분의 문도들을 이끌고 산을 내려가 버린 모양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드디어 형산파의 외곽 담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 사우림은 담장 구석에 뚫린 구멍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계곡물 옆에 선 채, 민망한 표정으로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람이 다가가자 그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런 식이었다면 굳이 제가 필요했을까 싶습니다. 공자께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 것 같아 송구한 마음뿐입니다.”

그 말에 선우진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애초에 사 대협께서 수고해 주시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도 못했을 텐데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 안쪽에는 아직 무인들이 남아 있는 것 같군요. 이제부터는 진짜 수고를 부탁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예?”

선우진의 말에 사우림은 놀란 표정으로 형산파의 담장 쪽을 바라봤다.

마치 산성처럼 사면 위쪽에 조성된 형산파의 담장은 그 높이가 삼 장 가까이나 됐다.

웬만한 신법의 고수가 아니고서는 넘어갈 엄두도 못 낼 만큼의 높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그 아래쪽에 뚫린 구멍에서는 계곡물이 폭포수처럼 떨어지고 있어, 그 소음으로 인해 안쪽의 소리는 전혀 들리지도 않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선우진은 저 안쪽에 무인들이 남아 있다고 단언했던 것이었다.

사우림으로선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냥 의심 없이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선우진을 의심하기엔 이제껏 그가 해 준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우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안쪽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그러고는 바로 다시 계곡 속으로 뛰어들었다.

퐁!

그는 계곡물 속을 물고기처럼 유려하게 거슬러 헤엄치더니만, 곧 폭포처럼 떨어지고 있는 계곡물조차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헤엄을 쳐서 떨어지는 물 위를 거슬러 올라갔던 것이었다.

정말이지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수공이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증칠과 모동주는 물론 천하삼십육성급 고수인 선우진마저도 탄성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허어! 저런 게 진짜 가능하다고?!”

“저자, 진짜 수귀였군요!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 아니 폭포를 거스르는 용의 승천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잠시 후, 이 장 높이의 폭포를 거슬러 올라갔던 사우림은 마침내 담장에 난 수로의 구멍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폭포수와 함께 다시 계곡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촤아아악!

그는 계곡 아래로 떨어지자마자 물 밖으로 펄떡이는 잉어처럼 뛰쳐나왔다.

그러고는 황급히 선우진에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공자의 말씀대로 안쪽에는 아직 놈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 소저와 시녀 역할을 하고 있던 정 소저가 그녀들의 거처에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위정국 놈에게 끌려간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선우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녀들을 만나 정보를 들을 수 없다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모동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제가 말한 분들을 먼저 구하러 가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분들은 형산파의 뒷산에 있는 참회동에 감금되어 계시니 굳이 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음….”

어차피 지금 그녀들을 구할 수 없다면 차라리 뒷산으로 가 참회동에 갇혀 있는 인물들부터 구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얘기였다.

선우진은 고민에 잠겼다.

그 말도 충분히 합리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시간을 끄느니 가능한 일부터 처리하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망설여지는 건, 지금 여기서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게 육합검수들의 확보를 완전히 포기하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선우진은 잠시 고민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

선무우희 우난설이 위정국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간 후, 시녀 역할을 하고 있던 정미희는 서신을 품속에 소중히 품고는 간단한 짐을 싸서 거처 밖으로 나갔다.

우난설이 얘기한 대로 이대로 형산파를 빠져나가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늘 수귀 사우림이 침투해오곤 했던 연못 앞에서 잠시 고민했다.

‘수로를 따라 뒤쪽의 담장을 넘을까? 아니야. 그러다 사람들이 보면 의심할 수도 있어. 그럼…. 차라리 당당히 정문 쪽으로 아무 일 없는 듯 가보는 게 낫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던 정미희는 자신의 짐이 얼마 되지 않음을 확인하고는 그냥 정문 쪽으로 내려가는 방향으로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무공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그녀이기에 담장을 넘으려다 들킬 경우 오히려 더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문득 그녀의 품에 소지하고 있는 서신의 무게가 무겁게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만약 담장을 넘다가 잡혀 소지품 검사라도 당하게 된다면 끝장이야. 게다가 이제까지도 늘 아무 일 없이 정문 쪽으로 다녔었잖아?’

정미희는 그동안 우난설의 옆을 따라다니며 늘 정문 쪽을 오가곤 했었다.

그곳까지의 거리는 좀 되긴 했지만, 적어도 이제껏 그곳을 오가는 동안 그녀에게 주목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이제까지처럼 태연하게만 행동한다면 이번에도 충분히 정문을 통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내 무공으로는 뒤쪽의 담장을 넘는 것보단 그게 최선이야.’

그렇게 결심한 정미희는 거처를 나서 정문이 있는 쪽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거처를 나가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정수귀 사우림이 후문 쪽에서 왔었다는 건 그녀로선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의 상황이 그때와 다르다는 사실 또한 간과하고 있었다.

우난설과 함께 다닐 때는 모두가 우난설에게만 주목했기에 그녀 옆에 있는 정미희가 보이지 않았지만, 우난설 옆이 아니라면 그녀 또한 충분히 시선을 끌 만한 미인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위정국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모두가 필사적으로 우난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던 그때와 달리 지금 형산파의 상황이 혼란스럽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 상황들을 생각하지 못한 그녀가 애써 태연한 걸음걸이로 정문 쪽으로 걸어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얼마 내려가지도 못해 한 무리의 형산파 무인들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무언가가 가득 든 자루를 등에 진 채 건물에서 막 나오고 있던 젊은 무인들이었다.

“!”

정미희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품속에 간직하고 있는 서신의 존재가 갑자기 더욱 무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태연한 표정으로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들을 바라봤다.

‘침착하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하지만 오히려 놀란 표정을 지은 건 정미희가 아닌 그 무인들 쪽이었다.

“헉!”

“너, 너는?!”

일개 시녀를 만난 무인들의 반응치고는 너무 지나친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과한 반응에 정미희는 이상함을 느꼈다.

그러고는 문득 그들이 나온 건물의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여기는?!’

정미희는 그 현판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들이 나온 건물의 현판에 버젓이 ‘천중고’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바로 형산파의 가장 중요한 물품들을 보관하고 있는 비고였던 것이다.

순간 정미희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무언가를 잔뜩 짊어지고 비고에서 나오는 사람들, 게다가 자신을 만나고 보여준 지나치게 놀라는 반응들.

그녀는 그들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바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이자들, 비고에서 물건을 훔쳐 도망치려는 거구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구대문파인 형산파의 제자들이 자파의 상황이 어렵다하여 비고의 물건들을 훔쳐 도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형산파가 정말 몰락해 버렸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러건 말건 정미희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형산파가 크게 몰락하면 몰락할수록 정미희에겐 더 기쁜 일일 테니까.

문제는 그 사실을 상대방이 모른다는 데에 있었다.

비고를 털다 걸린 형산파의 무인들은 황급히 검을 뽑아 그녀를 향해 겨누며 소리쳤다.

챠챵!

“이년! 거기 서라!”

“사숙! 이년이 우리를 봤습니다!”

그러자 정미희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하필 이런 자들과 마주쳐 버리다니, 최악의 시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그들의 뒤에서 한 명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정미희도 익히 알고 있는 자, 그의 얼굴을 알아본 정미희의 눈에 다시 한번 놀람의 감정이 맺혔다.

“당신은?!”

젊은 무인들이 사숙이라고 부른 그는 내당의 삼당주를 맡고 있는 자공진인이라는 도사였다.

‘자’자 배분의 도사치곤 딱히 무공이 높거나 재주가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위정국의 옆에서 입속의 혀처럼 굴며 비위를 잘 맞추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또한 그 재능 덕분에 내당의 삼당주 자리에까지 오른 자이기도 했다.

정미희가 알기로 그는 무공이 낮기에 위정국을 따라가지 않고 이곳에 남겨졌다.

대부분의 무인들이 없는 동안 본산을 지키는 임무를 받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형산파가 어려워진 이때에 본산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비고를 털고 있었던 것이었다.

과연 형산파가 왜 몰락할 수밖에 없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그런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반면 자공진인은 일순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네년은 누구냐?”

그러자 젊은 무인들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제가 압니다, 사숙! 이 여자는 분명 선무우희 우난설, 우 부인의 시녀였습니다!”

그 말에 자공진인이 탄성을 내뱉었다.

“호오! 우 부인의 시녀라고?”

이렇게 괜찮은 미색을 지닌 여인이 왜 기억에 없는 것인지 의아해하고 있던 자공진인은, 그 말을 듣고서야 그 사실을 납득할 수 있었다.

어떤 여인도 우난설 옆에 있으면 달빛 아래 반딧불처럼 빛이 바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던 정미희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들에게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저는 우 부인의 시녀입니다. 부인께서 심부름을 시키셔서 거처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그 말에 젊은 무인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정말 우난설의 심부름 때문에 거처에 다녀가는 거라면, 만약 그녀를 무사히 보내지 않을 경우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악의 경우 그녀를 데려가기 위해 다른 무인들이 올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딱 정미희가 의도한 대로의 생각이기도 했다.

이들의 사정상 다른 무인들이 올 것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으니, 자신을 보내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무인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자공진인에게 물었다.

“저, 사숙, 어떻게 합니까? 저 여인을 그냥 보내줍니까?”

그러자 자공진인은 잠시 인상을 구기며 생각에 잠겼다.

그 또한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정미희는 품속에 들어 있을 서신을 양팔로 꼭 끌어안은 채 초조한 심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임무의 성공 여부가 걸려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지나도 자공진인은 여전히 인상을 찡그린 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초조함을 참지 못한 정미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 최대한 빨리 다녀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어서 저를 보내주세요!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을…!”

그때였다.

자공진인이 결심을 굳힌 듯 단호하게 말했다.

“저년을 잡아라.”

그 말에 정미희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리고 놀란 건 젊은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예, 예? 하지만….”

그러자 자공진인이 짜증을 내며 다시 소리쳤다.

“지금 그쪽에서 인원을 보낼 여력 따위가 있을 것 같으냐?! 게다가 보내면 또 어쩔 것이냐? 우리가 이미 여기 없을 텐데. 다시 돌아올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자공진인은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정미희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저년도 우리와 같이 사라지면 되지 않겠느냐? 그럼 사람들도 저년이 무서워서 도망쳤다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그 말에 정미희의 안색은 하얗게 탈색되고 말았다.

반대로 무인들의 얼굴에는 비릿한 웃음이 돌아왔다.

무인 중 한 명이 음흉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며 물었다.

“그럼 저년을 끝까지 데리고 갑니까?”

그러자 자공진인이 게슴츠레 뜬 눈으로 정미희의 온몸을 훑으며 대답했다.

“짐이 될 텐데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느냐? 적당히 데리고 가다 맛이나 보고 처리하자꾸나.”

그러자 그의 대답을 들은 젊은 무인들이 으흐흐 웃으며 정미희의 온몸을 훑어봤다.

구대문파의 제자들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탐욕스러운 모습들이었다.

그 시선을 받으며 정미희는 눈앞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자신의 몸이 더럽혀지는 건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간 우난설이 자신의 몸을 더럽히며 정보를 얻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만 순결을 지키고 있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품속의 서신을 전달하지 못하는 상황만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됐다.

어떻게든 이걸 동지들에게 전달해야만 했다.

그녀가 절망적인 눈으로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어떻게 해?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도주하는 건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자공진인이 비록 ‘자’자 배분의 무인치고 약하다곤 하지만 절정에도 이르지 못한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만약 여기서 그냥 도망치다간 그에게 붙잡히게 될 확률이 십 할일 것이었다.

전혀 가능성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정미희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자만 없었다면….’

절망적이었다.

자공진인만 없었어도 도주 확률이 훨씬 올라갔을 텐데, 그의 존재가 모든 가능성을 막고 있었다.

도주를 하든, 대항을 하든 모두 다 마찬가지였다.

그때 젊은 무인들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자, 이리 얌전히 오너라. 귀여운 것아.”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확률은 낮지만 그래도 아예 없지는 않은 어떤 방법이….

하지만 그 생각을 떠올리고도 정미희는 순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생각이 떠올랐다고 해서 그걸 바로 실행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다고 해도 그녀는 엄연히 정파의 여식이었다.

그런 그녀로서는 방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실행하는 것이 도저히 내키지 않았다.

절망 섞인 탄식을 토해 내며 생각했다.

‘못 하겠어. 그건 너무….’

그때였다.

무인들이 망설이는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여전히 탐욕스러운 웃음을 흘리고 있는 채로였다.

“으흐흐흐! 이년, 뭐 하고 있느냐?! 얌전히 따라오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 순간 그녀는 문득 우난설을 떠올렸다.

정조나 자존심 따위는 아무런 값어치도 없다는 듯, 그동안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남자의 여인으로 살아왔던 그녀의 모습을.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으득!

피가 터져 나왔다.

짜릿한 통증과 비릿한 피맛을 느끼며 생각했다.

더 이상 우난설에게 부끄러워질 수는 없었다.

임무를 위해 모든 걸 희생했던 그녀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맡긴 일조차 실패한다면 대체 무슨 낯으로 그녀를 본단 말인가.

마침내 마음을 결정한 정미희는 바로 아까 떠오른 생각을 실행하기로 했다.

그녀는 갑자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무인들을 향해 간절히 빌기 시작했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제가 거짓말을 했어요! 사실 함께 가면 죽을 것 같아서 부인 옆에서 도망쳐 나온 거였어요! 제발 저를 죽이지 마세요!”

그녀의 갑작스러운 말과 행동에 무인들은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를 찾으러 누군가 올까 봐 걱정했는데 사실은 그녀도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었다.

당황한 젊은 무인들은 이제 어떻게 하냐는 표정으로 자공진인을 바라봤다.

그러자 자공진인 또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더 이상 급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생각을 다시 정리해야만 했다.

하지만 정미희는 그들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바로 다음 행동에 들어갔다.

정미희는 갑자기 자신의 옷깃을 풀더니 어깨가 드러나도록 상의를 슬쩍 내렸다.

스르륵!

그러고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자공진인을 향해 사정하기 시작했다.

“진인! 제발 살려 주세요! 저를 살려 주시면 뭐든지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진인, 제발….”

그러자 무인들의 눈이 크게 확대됐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색욕이 동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젊은 무인들뿐만이 아니었다.

자공진인 역시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말았다.

꿀꺽!

꽤 예쁜 얼굴로 짓고 있는 애절한 표정, 흐트러진 상의와 드러난 뽀얀 어깨.

아무리 부패했다 해도 산에서 무공수련만 하던 무인들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큰 시각적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젊은 무인들은 무언가 불끈 솟아오르는 감각을 느끼고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슬쩍 자공진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기, 사숙….”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눈빛이 뭘 말하고 있는지는 자공진인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자공진인 역시 이미 색욕이 동한 상태였다.

자공진인이 혀로 입술을 핥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널 찾으러 올 사람이 없다는 말이냐?”

그러자 정미희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

“네, 네. 너무 무서워서 그만 거짓말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뭐든지 할 테니 제발 목숨만 살려 주세요!”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자공진인의 입꼬리가 탐욕스럽게 올라갔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급할 일도 없었고, 그렇다면 지금도 다른 일을 할 여유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녀에게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자공진인은 으흐흐 웃으며 그녀의 드러난 맨 어깨를 살며시 잡아봤다.

그러자 매끈한 어깨의 감촉과 함께 정미희의 온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겁먹은 눈빛과 부드러운 맨살의 감촉,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자공진인은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으흐흐흐! 이리 오너라, 귀여운 것.”

그러고는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확 끌어당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