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화 전륜박
설풍이 자신의 검을 완전히 밀어 올리자 위정국은 결국 훌쩍 뛰어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아까의 자세로는 그 이상의 힘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이놈….”
위정국의 얼굴에서 이제 더 이상의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적안광혈공이 진짜 광혈단과 같은 효과를 가지고 있다면 설풍과 그는 다시 동등한 조건에 선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감각을 놈도 느끼고 있다고?’
절대자가 된 듯한 이 고양감을 놈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또 분노가 치솟았다.
마치 자신의 것을 또 빼앗긴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설풍과 그의 상태가 완전히 같지는 않다는 걸….
설풍은 피처럼 붉은 흉광을 뿜어내고 있는 눈과 달리 무척 냉정한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 무공을 익혀온 그가 처음 광혈단을 먹은 위정국이나 형산파 고수들처럼 흥분할 리가 없었던 것이었다.
오히려 그는 아주 차갑고 냉정한 머리로 위정국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자신과 달리 얼굴에 툭툭 튀어나온 핏줄과 흥분한 표정이 한심했다.
‘나와는 달리 이런 감각이 처음일 테니 어쩔 수 없나?’
그런 위정국을 보며 설풍은 문득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 준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산에서만 살면서도 병치레 한번 없었던 튼튼한 육신은 어머니께서 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적안광혈공을 써도 버텨낼 수 있는 강인한 혈맥과 축복받은 재능은 아마도 아버지께 받은 것일 터였다.
적안광혈공과 야수권, 그리고 다른 무공들을 가르쳐 준 사람은 외조부님이었다.
마지막으로 자신보다 수준이 높은 상대마저도 꺾을 수 있는 뇌신의 절기 전륜박은 선우진에게서 배웠었다.
이 모든 사람들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 줬다.
그들이 준 것 중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이제 필요한 건 자신이 그것들을 얼마나 잘 사용할 수 있느냐 뿐이었다.
자신의 기량, 바로 그것뿐이었던 것이다.
설풍이 문득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러니 이젠 내가 증명할 차례다.”
그 뜬금없는 말에 위정국이 눈을 꿈틀하며 물었다.
“뭐? 갑자기 무슨 개 소리냐?”
그러자 설풍이 사납게 웃으며 대답했다.
“증명해 주마, 내가 사왕이 될 자격이 있는지를!”
그와 동시에 그가 빛살이 되어 튀어 나갔다.
파악!
위정국의 눈이 크게 확대됐다.
순식간에 그의 눈앞까지 쇄도한 설풍의 호조수가 그를 후려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
위정국은 설풍의 신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자와 같은 전능감을 느끼고 있는 그에게도, 이형환위를 연상시키는 설풍의 속도는 충분히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위정국은 비웃었다.
그뿐이었다.
그렇다고 거기에 당해 줄 정도로 위협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콰아아앙!
설풍의 호조수와 위정국의 검강이 다시 맞부딪쳤다.
그러고는 아까처럼 힘을 겨루기 시작했다.
설풍의 손에 맺힌 피처럼 붉은 강기와 위정국의 검에 맺힌 짙은 하늘색 강기가 선명한 색의 대비를 보여주고 있었다.
으드득!
이를 악문 위정국이 양손으로 검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 그 자리에 멈춰있던 위정국의 검이 설풍 쪽으로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아마 공력은 위정국 쪽이 더 높은 모양이었다.
그러자 설풍이 말했다.
“멍청하군.”
그러고는 오른손으로 하늘색 검강을 꽉 움켜잡은 채, 왼손으로 위정국을 후려쳤다.
검은 하나뿐이지만 설풍의 손은 두 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압!”
부아아앙!
손을 휘두르며 설풍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런 기본적인 것도 생각지 못하고 검으로 손과 힘겨루기나 하고 있다니, 공력만 높았지 멍청하기 이를 데 없는 짓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광혈단의 효과에 이성을 잃어 그런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때였다.
위정국이 오히려 비릿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럴까?”
그 순간이었다.
후려치는 설풍의 왼손을 갑자기 나타난 또 하나의 검강이 가로막았다.
콰아아아앙!
“!”
설풍은 경악했다.
위정국의 검은 분명 자신의 오른손에 붙잡혀 있는데, 그 검과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또 하나의 검강이 튀어나왔던 것이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이상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설풍이 자기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검강이 두 개라고?!”
그러자 위정국이 비웃듯 말했다.
“누가 두 개라더냐?”
그 순간이었다.
위정국의 검에서 또 하나의 검강이 튀어나와 설풍을 베어갔다.
샤아악!
“!”
깜짝 놀란 설풍은 온 힘을 다해 뒤로 몸을 날렸다.
처음 위정국을 덮칠 때만큼이나 빠른 이형환위급의 속도였다.
치이익!
다음 순간, 둘 사이의 거리는 다시 오 장 가까이 벌어져 있었다.
설풍이 엄청난 속도로 뒤로 물러선 결과였다.
설풍은 문득 자신의 앞섶을 바라봤다.
그러자 날카롭게 베어진 앞섶 안으로 자신의 맨가슴이 보이고 있었다.
방금의 신법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지금 이 한 수로 승부가 결정 나 버렸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설풍은 다시 위정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의 검에서 세 개의 선명한 검강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와 있었다.
심지어 검 날에 맺히지 않은 검강들은 한 방향으로 고정되지도 않은 채 자유롭게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문득 형산파 문도들의 놀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오로검법!”
“저게 바로 오로검법이로군.”
“세 개의 검강이라니, 과연!”
오로검법.
설풍도 위정국이 형산파 최강의 검법이라는 오로검법을 오직 그 혼자만 익히고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사용했을 때 위정국은 반드시 상대방을 죽였기에 그게 어떤 검법인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그런데 저렇게 검과 상관없는 방향의 검강을 만드는 게 오로검법이라면….
설풍이 문득 생각했다.
‘오로검법이라…. 어쩌면 검강의 수가 저걸로 끝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설풍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위정국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눈치를 챈 것 같군. 하긴 오로검법이란 이름을 들었으니 그럴 수도 있지.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 놈들이다. 그래, 네놈 생각대로다. 이 오로검법으로 만들 수 있는 검강은 세 개가 아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위정국의 검에서 두 개의 검강이 더 솟아올랐다.
화르르륵!
모두 다섯 개의 검강이었다.
원래는 세 개의 검강밖에 만들지 못했던 그가 광혈단에 의해 증폭된 공력으로 드디어 다섯 개의 검강을 만들어 냈던 것이었다.
한편, 위정국의 검을 본 설풍은 오로검법이 왜 최강의 검법이라 불리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검강이 세 개만 돼도 팔의 개수보다 더 많아지는데 다섯 개의 검강이라니, 산술적으로 다섯 명의 위정국과 싸우는 셈이 되는 것이 아닌가.
물론 검파 하나에서 뻗어 나온 검강이니 만큼 완전히 검에서 분리될 정도로 자유롭지는 못하겠지만, 그것도 직접 확인해 보지 않고선 알 수 없는 일일 것 같았다.
그때 위정국이 설풍에게 말했다.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바로 가도록 하지. 한번 발버둥 쳐 보거라!”
그와 동시에 위정국이 설풍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섯 방향으로 부채처럼 뻗은 검강을 휘두르면서였다.
설풍은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손발을 휘둘러 스스로를 방어했다.
“하압!”
설풍의 호조수가 제일 먼저 휘둘러진 검강 하나를 후려쳐 막았다.
퍼어엉!
하지만 그 순간도 네 개의 다른 검강이 계속해서 베어오고 있었다.
“큭!”
설풍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네 개의 검강이 그를 강하게 스쳐 갔다.
치이이익!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까는 흥분해 마구 검강을 휘두르던 위정국이 이제는 예리하게 연격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쉬이이익!
다섯 개의 검강이 순식간에 덮쳐오는 놈의 공세는 마치 거대한 그물에 둘러싸인 듯 촘촘하게 느껴졌다.
설풍이 정신없이 손발을 휘둘러 검강을 쳐내려 했으나, 팔다리를 모두 이용해도 역부족이었다.
여전히 한 개의 검강이 아무런 방해 없이 그어오고 있었다.
파바바박!
쉬이익!
“으윽!”
미처 방어하지 못한 검강에 드디어 설풍의 가슴이 살짝 베어졌다.
바로 증발돼 피가 튀진 않았지만 그의 가슴에 붉은 선이 그어지고 만 것이었다.
그걸 본 위정국이 광소를 터트리며 검을 그었다.
“으하하하하! 이걸로 끝이냐?!”
쉬이이익!
한순간 다섯 개의 검강이 다섯 방향에서 조이듯 설풍을 베어갔다.
그러자 도저히 방어하지 못한 설풍이 기합을 내질렀다.
“하아압!”
화아아악!
그 순간, 그의 온몸에서 적색의 강기막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호신강기였다.
투투투투퉁!
순식간에 호신강기 위를 다섯 개의 검강이 두드렸다.
다행히 다섯 개로 분리돼서 그런지 하나만큼의 위력은 나오지 않는 모습이었다.
덕분에 간신히 위기를 넘긴 설풍은 일단 뒤로 빠르게 물러서며 호신강기를 회수할 수 있었다.
“후우우!”
설풍은 잠시 숨을 돌렸다.
방금의 과정을 통해 설풍은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 공격은 실제로 다섯 명의 위정국 같았다.
벌어지고 오므리는 각각의 움직임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던 것이었다.
결국 설풍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왕의 절기 적안광혈공으로 공력은 엇비슷하게 맞출 수 있었지만, 또 다른 절기인 야수권으로는 놈을 이길 수 없다는 걸.
다섯 개의 검강이라니, 네 개의 팔다리로는 확실히 무리였다.
그때 위정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확실히 신법으로는 못 이기겠군. 도저히 못 쫓아가겠어. 그런데… 언제까지 도망만 칠 생각이지, 사왕의 후계자?”
그 질문에 설풍은 피식 웃음 지었다.
놈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놈을 향해 비웃듯 물었다.
“왜? 걱정되나? 내가 이런 식으로 도망만 다니며 광혈단의 효과가 떨어질 때까지 시간을 끌까 봐?”
그 말에 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긴, 놈으로선 걱정이 될 만도 했다.
설풍이야 시간이 지나면 적안광혈공을 풀면 되지만, 놈은 그 시간이 끝나면 죽거나 폐인이 될 일만 남았을 테니 말이다.
그 마음을 들킨 놈의 얼굴에는 이제 조급함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설풍은 빙긋이 웃으며 단언했다.
“염려 마라. 그런 식으로 이길 생각은 없으니.”
그 말에 위정국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렇게 하지는 않을 거란 말은 반가웠지만 그렇게 이길 거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오로검법을 보고도 여전히 여유 있는 설풍의 표정도 신경 쓰이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위정국은 더 이상 생각을 이어나가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시간을 끌기보단 최대한 빠르게 승부를 내야 할 때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어떤 식으로 이기는지 한번 구경해 주마!”
그와 동시에 위정국이 다시 돌진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다섯 줄기의 검강이 공작처럼 그의 주변에 펼쳐져 휘둘러오고 있었다.
그러자 그걸 본 설풍의 신형이 갑자기 회오리처럼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잉!
“!”
위정국은 눈을 살짝 찡그렸다.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무공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회전한다고 해서 오로검법을 막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샤아악!
위정국은 설풍이 만든 회오리의 중앙을 두 동강 낼 듯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나머지 네 개의 검강은 서로 다른 곳을 베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맹렬히 회전하던 설풍의 호조수가 위정국의 검을 향해 휘둘러졌다.
부아아앙!
회전력이 더해졌기 때문인지 그 파공성이 무척이나 강맹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한 방뿐.
검강 하나를 막는 걸로는 나머지 검을 피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이제 베어져 조각조각 날 설풍의 미래를 예상한 위정국이 사납게 웃음 지었다.
동시에 그의 검이 설풍의 호조수와 충돌했다.
퍼어엉!
그 순간이었다.
상상도 하지 못한 거력에 위정국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윽?!”
위정국의 팔은 팽이에 부딪친 모래처럼 속절없이 튕겨 나가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경력이었다.
그러자 검강이 몇 개이건 소용이 없었다.
위정국의 팔이 튕겨 나가자 거기에 뿌리를 둔 나머지 검강들도 팔과 함께 튕겨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설풍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시작에 가까웠다.
회오리처럼 맹렬히 회전하는 설풍에게서 다시 채찍처럼 날카로운 발차기가 날아들었다.
방금 위정국이 받아냈던 것과 같은 강력한 파공성의 공격이었다.
부아아앙!
퍼어어엉!
“크윽!”
위정국은 간신히 설풍의 강격을 받아내고는 뒤로 뛰어 물러섰다.
너무 강력한 경력이기에 뒤로 물러서는 것으로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설풍이라는 이름의 용권풍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가 위정국을 따라오며 다시 한번 호조수를 채찍처럼 날리고 있었다.
부아아앙!
퍼어어엉!
“크헉!”
위정국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놈이 적안광혈공을 썼다고 해도 공력은 자신과 비슷했을 터인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압도적으로 차이가 날 수 있단 말인가?
그로선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선우진이 전해 준 뇌신의 비기 전륜박은 회전수를 더할수록 그다음 일격의 경력이 증폭되는 비기라는 것을.
그래서 설풍이 한꺼번에 몰아치기보단 몇 바퀴 회전한 후 한 방씩 일격을 날리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위정국으로선 그저 물러서는 자신을 추격해 오느라 놈이 연격을 날리지 못했다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퍼어어엉!
또 한 방의 강격을 버티지 못한 위정국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이럴 수가!”
그는 이제 완전히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빨리 설풍을 해치우고 나머지 놈들도 학살할 생각이었는데, 이대로는 다른 놈들은커녕 설풍조차도 도저히 당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앞으로 설풍이 화한 용권풍이 또다시 맹렬히 돌진해 오고 있었다.
위정국은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오로검법으로도 놈을 당할 수 없다는 걸.
‘그렇다면….’
위정국은 이를 악물었다.
이제 남은 건 하나밖에 없었다.
위정국은 온 공력을 집중해 기합을 내질렀다.
“으하아아아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