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갑작스런 등장
‘사왕의 후계자 중 한 명인 광풍비룡 설풍이 형산파 장문인인 호남제일검 위정국을 꺾고는 형산파를 무릎 꿇렸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천하 무림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아무리 사왕의 후계자라고 하나 이제 고작 이십 대에 불과한 설풍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천하삼십육성 중에서도 수위에 속하는 위정국을 꺾어버렸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만 해도 충분히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심지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설풍이 위정국 한 명을 꺾은 것만이 아닌 형산파 자체를 무릎 꿇려버렸다는 믿기 힘든 소식.
그건 정말이지 무림사 전체를 돌이켜봐도 다시 찾아보기 힘들 만큼의 놀라운 업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무림의 호사가들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과거 백여 년 전, 이십 대였던 뇌신이 당시 절대자였던 무황과 그의 세력을 꺾었던 일과도 비교할 수 있을 만큼의 업적이라며, 설풍을 벌써 천하삽십육성을 넘은 절대자 중 하나로 추앙하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흥분한 나머지 이렇게 주장했다.
“그뿐이 아니지! 당시 이십 대의 뇌신도 지금 설풍 공자처럼 천하제일신성이라고 불리고 있었잖아?! 게다가 이십 대에 무황과 황궁의 무인들뿐만이 아니라 천하에서 손꼽히는 세력이었던 통천방과도 싸워 물리친 적도 있었고 말이야! 정작 설풍 공자가 통천방의 적통을 이은 사왕련의 후계자라는 건 좀 묘하지만, 아무튼 그의 행보는 과거 뇌신의 행보와도 흡사하다고!”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거기까지는 아직 너무 과한 평가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설풍이 앞으로 지난 백 년간 아무도 얻지 못했던 ‘신’의 호칭을 얻을 수 있는 고수로 성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큼은 대부분 동일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천하삼십육성 중 한 명의 자리에 호남제일검 위정국 대신 광풍비룡 설풍의 이름을 포함시키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온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영웅의 탄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가장 열광한 사람들은 사왕련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설풍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에 감격해 눈물을 글썽거릴 정도였다.
“뇌신과 비교되는 사왕련의 후계자가 등장하다니. 이게 정말 꿈이 아닌 현실이란 말인가?”
“당연히 현실이지! 설풍 공자라면 이제껏 사왕련의 주인들이 단 한 번도 올라가 보지 못했던 천하제일인의 자리를 차지해 줄지도 모른다니까! 아니지! 더 나아가 사왕련을 천하제일의 세력으로 만들어 줄지도 모르지!”
“그래, 맞아! 설풍 공자라면 충분히 가능할걸세!”
“으하하하! 어서 가자고! 이렇게 기쁜 날 술 한 잔이 빠져서야 되겠나?!”
“크하하하하! 좋지!”
한편, 사왕 괴갈현은 현재 강소성 태주의 사왕련 본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곳에서 설풍의 소식을 들은 그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천하제일인이라면 내가 먼저 차지해 보려고 했는데, 엉뚱한 녀석이 벌써 그런 소리를 듣게 되는군. 오십 년은 이른 일이지. 하여간 호사가들의 설레발이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괴갈현의 표정은 무척이나 흐뭇해 보이고 있었다.
그러자 어쩐지 예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듯한 그의 표정에 사왕의 암중 호위들은 신기한 표정으로 주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놈이 위정국을 꺾었다고? 아니, 그걸 넘어 형산파를 이겼어?”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묻고 있는 이는 사왕의 둘째 아들인 괴창기였다.
그는 여전히 안휘성의 남궁세가 근처에서 남궁가주인 창천검군 남궁조와 대결해보기 위해 머물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자 그의 수하가 허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랬다지 뭐요. 처음엔 헛소문인가 싶었는데 여기저기서 떠드는 말을 들어보니 그건 아닌가 싶더이다. 혼자서 형산파 초절정 고수 아홉 명을 작살 냈다지 않나, 아주 전설을 썼던 모양이오.”
그 말을 들은 괴창기는 부하와 비슷한 허탈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는 잠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더니만 푹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부하가 물었다.
“어디 가시우?”
그러자 괴창기가 허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돌아가자꾸나.”
“예? 어디로 말이오?”
“어디긴 어디냐? 집으로 돌아가야지.”
그 말에 주변의 부하들이 모두 깜짝 놀라 물었다.
“돌아간단 말이오? 집으로?”
“아니! 왜 돌아간다는 거요?! 놈이 위정국을 꺾었으니 우리도 남궁조를 빨리…!”
그러자 괴창기가 인상을 팍 찡그리며 대답했다.
“지금 남궁조를 꺾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형산파를 무릎 꿇린 것만큼의 업적을 세우려면 남궁조가 아닌 남궁세가를 꺾어야 한다는 얘긴데, 너희를 데리고 그게 가능한 얘기겠냐?!”
그 말에 괴창기의 부하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잠잠해졌다.
확실히 그들만으로 남궁세가와 싸우는 건 그야말로 미친 짓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남궁조와의 싸움은 대련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남궁세가와 싸우면 사생결단이 될 것이 아닌가?
큰일 날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괴창기는 잠잠해진 부하들을 향해 다시 말했다.
“그리고… 앞으론 말조심해라. 설풍 형… 님께 놈이 뭐냐? 놈이?”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부하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자존심 강한 괴창기가 누군가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일은 한 번도 없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형님… 이요? 설풍 그자가요?”
부하들이 묘한 눈으로 반문하자 괴창기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내가 인정할만한 업적을 세우면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그에게 약속하지 않았더냐?! 설마 나를 약속이나 어기는 소인배로 만들 셈이냐?! 그만 닥치고 빨리 짐이나 싸라!”
하지만 그렇게 소리치는 그의 얼굴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이유가 분노는 아닐 것 같았다.
괴창기의 부하들은 서로 슬쩍 시선을 교환하고는 서둘러 돌아갈 짐을 싸기 시작했다.
***
한편 선우진과 설풍 일행들은 바로 형산파를 떠나지 않은 채 며칠 정도 그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형산파의 쇄신 노력을 직접 확인하고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선우진이 생각하기에 형산파의 상황은 아직 몇 가지 불안요소가 남아있었다.
청공진인과 모동주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 그들이 형산파의 전권을 장악한 게 아니기에 얼마든지 돌발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형산파 내부에 아직 위정국을 추종하는 자들도 충분히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선우진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역사 속에서도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그럼에도 강력했던 지도자를 잊지 못하고 추종하는 자들은 얼마든지 있어 왔습니다. 더군다나 앞으로 봉문을 해야 할 형산파처럼 어려운 시절을 겪게 될 경우 더더욱 강력했던 과거에 향수를 갖는 자들이 나오곤 했었지요.”
그 말은 위정국의 시절을 잊지 못하고 청공진인과 모동주에게 반기를 드는 자들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그간 해남파와 복건용가에 의해 호남성 남쪽에 묶여 있었다가 복귀할 초절정 고수들의 경우 그 성향을 알 수 없었기에 더더욱 위험했다.
그래서 선우진은 병약해진 청공진인의 무력을 더해 주기 위해 자신이 데리고 있던 육합검수 파천조의 초절정 검수들을 형산파로 복귀시켜 줄 생각이었다.
아직 기억이 완전히 회복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나머지는 청공진인과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자 그 생각을 들은 묵랑이 물었다.
- 그들의 고를 제거해 줄 생각인가?
그 질문에 선우진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만일에 대비해 당장 그러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그들을 통해 형산파의 동향을 들을 수도 있고, 고에서 풀려난 저들이 다른 생각을 가질 수도 있으니까요. 몇 년 후에 조용히 제거해 주도록 하지요.’
- 흐음, 협객이라기보단 모사가 할 법한 생각이로군.
묵랑의 평가에 피식 웃음 지은 선우진이 물었다.
‘실망하셨습니까, 어르신?’
- 그럴 리가. 실리 없이 겉만 번지르르한 협의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중요한 건 내용이지 포장이 아니라네. 그 고지식한 유학자들의 시조 공자께서도 상황에 맞는 유연함을 강조하셨지 않았던가?
공자의 제자인 자로와 염구가 ‘도를 들으면 즉시 실천해야 합니까?’라는 같은 질문을 했을 때 각각 다르게 대답해 줬던 일화를 말하는 것 같았다.
당시 공자는 성격이 급한 자로에게는 부모형제가 살아계시는데 어찌 바로 실천할 수 있겠냐고 대답하고는, 소심한 염구에게는 즉시 실천해야 한다며 서로 다르게 대답해 줬었다.
그 일화는 도를 실천한다는 사실 자체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 실천은 인물과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가져가야만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었다.
묵랑은 그런 공자의 일화를 들어 선우진의 결정을 응원해준 것이었다.
그는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 다만 그 사실을 들키지는 않도록 조심하게나. 괜히 위정국과 똑같은 놈으로 몰릴 수도 있으니 말일세.
‘예, 조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어르신.’
- 뭘 감사한다는 건지 잘 모르겠군. 옳은 일을 옳다고 해줬는데 무슨 감사가 필요하단 말인가.
자신의 말뜻을 모른 체하는 묵랑의 말에 선우진은 그저 빙긋이 웃음 지었다.
두 번째 삶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얻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중 최고를 꼽자면 묵랑과 인연을 맺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묵랑은 그런 선우진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지만 모른척하며 다른 말을 꺼냈다.
- 그나저나 파천조의 초절정 고수들이야 그렇다 쳐도 파산조의 검사들은 돌려보내기가 좀 그렇겠군.
‘예, 그들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일 먼저 얻었던 육합검수 파산조의 절정 무인들은 형산파와는 상관없는 다른 기억을 덧씌워줬기에 아무래도 형산으로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아직 스스로 사고할 만큼 회복되지 못한 설풍의 파산조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선우진은 묵랑과 그런 대화를 나누며 형산파 뒤쪽의 산을 홀로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이름 높은 다섯 개의 산 중 하나인 형산의 경치를 감상하며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한참 산을 오르던 선우진은 문득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눈에 보인 광경은 그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오후의 태양이 서쪽 하늘로 천천히 내려가며 하늘을 점점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노을을 배경으로 한 형산의 봉우리들은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길쭉하게 솟아올라 구름 위로 비쭉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도저히 현실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의 신비로운 풍경이었다.
그 장엄하기까지 한 풍경에 선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오악 중 남악이라고 불릴만한 절경이로군요.”
그러자 묵랑 또한 감탄한 목소리로 동조했다.
- 그래, 형산의 절경이라면 죽기 전에 꼭 봐 줄 만한 가치가 있지.
그때였다.
선우진은 문득 뒤쪽 숲에서부터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무척 빠른 신법을 전개하고 있는 초절정 고수의 기척이었다.
거기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파에 선우진은 뒤돌아 그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진 소저?”
그러자 무슨 일인지 숲에서 급히 튀어나왔던 진소은은 갑자기 선우진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급히 멈춰 섰다.
“아앗! 서, 선우 공자?!”
지나치게 당황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의 놀란 모습에 선우진은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요즘은 기척을 숨기는 게 습관이 되어 못 느끼셨던 모양이구려. 놀라게 해드려 미안하오. 근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거요, 소저?”
그러자 진소은이 당황한 표정으로 급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저는 그저, 그저 그러니까… 아! 형산의 절경을 좀 구경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하하하….”
누가 봐도 방금 생각해 낸 것 같은 이유였다.
선우진은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게 급하게 말이오?”
그러자 너무 당황한 나머지 놀란 토끼 같은 표정이 된 진소은이 힘겹게 말을 짜냈다.
“네, 네?! 아, 그, 그건 그거니까… 아! 해가, 해가 질까 봐 그랬어요! 깜깜해지기 전에 봐야 하니까. 하하, 하하하….”
그녀의 어설픈 대답에 선우진은 피식 웃음 지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하면 요 며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일을 처리하느라 그녀와 따로 얘기할 만한 기회가 없었기는 했다.
진소은의 성격상 그렇다고 연태진처럼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말을 걸 수도 없었을 테니 그간 선우진이 혼자 있을 때만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거기까지 파악한 선우진은 푸근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마침 저도 형산의 절경을 구경하려던 참인데, 급하지 않으시다면 저와 함께 가시겠소?”
그러자 진소은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네! 좋아…! 아, 아니. 그, 그럼 그럴까요?”
반사적으로 활짝 웃으며 대답하려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황급히 말을 바꾸는 진소은의 모습이었다.
그러고는 풀죽은 얼굴로 자기 머리에 꿀밤을 때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묵랑이 중얼거렸다.
- 아무래도 연 소저에게 한 소리 들었나보군. 너무 좋은 티를 내지 말라고 말일세.
선우진은 따뜻하게 웃으며 그녀의 모습을 바라봤다.
귀여웠다.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문득 이대로 그냥 여동생처럼 지낼 수 있어도 충분히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일 테고….’
선우진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진소은이 그런 걸 바라지 않는 이상,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하는 건 결국 자신의 이기심일 뿐일 것이었다.
그러니 이제 남은 선택지는 그녀를 밀어내거나, 받아들이거나 두 가지뿐인 것 같았다.
‘아니지, 사실 두 가지도 아닌가?’
선우진에게 있어 이제는 그녀를 밀어낸다는 선택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진소은이 지금의 선우진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껏 생사를 함께했던 그녀를 밀어내 인연을 끊는다는 건 도저히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사실상 진소은과의 관계는 이미 결정된 것인지도 몰랐다.
물론 당여은의 허락부터 받아야 하는 일이고, 진소은에게도 그 사실을 분명히 얘기해 줘야만 하겠지만 말이다.
선우진은 진소은을 슬쩍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환한 표정으로 석양이 지는 형산의 봉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선우진과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노을을 가리키며 어린아이처럼 탄성을 내뱉었다.
“우와아! 저 노을과 봉우리들을 보세요, 공자! 너무 신비해 보이지 않아요?! 저 봉우리들은 어떻게 저런 기둥 같은 모양을 유지할 수가 있을까요?! 바람만 불어도 넘어질 것 같은데…. 저 위에 정말 신선이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선우진은 진짜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는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음 짓고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렇구려. 저런 곳이라면 정말 신선이 살 것도 같소.”
정말이지,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소저였다.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자신의 마음까지 순수해지는 그런 기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소은이 가진 매력 중 가장 치명적인 건 자기 주변의 사람들까지 무장해제 시켜버리는 저 순수하고 착한 마음일 거라고.
선우진은 문득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소저, 한번 확인해 보시지 않겠소? 저 위에 정말 신선이 사는지를 말이오.”
“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한 표정으로 반문했던 진소은은 기둥 같은 봉우리 위쪽을 가리키는 선우진의 손가락을 보고는 그제야 그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가 바로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좋아요!”
그러자 선우진 또한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좋소! 그럼 출발!”
“출발!”
선우진과 진소은은 바로 몸을 날렸다.
파박!
두 사람의 초절정 고수는 비조처럼 날아 가장 가까운 봉우리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늘을 떠받친 기둥처럼 길쭉하게 구름 위로 솟아 있는 봉우리를 향해서였다.
***
잠시 후 해가 서쪽 지평선에 반 정도 걸렸을 때쯤, 두 사람은 마침내 구름 위에 우뚝 솟은 봉우리 위에 서 있을 수 있었다.
봉우리의 높이는 그야말로 천 길이었고, 거기까지의 각도는 수직 그 이상이었지만 선우진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난이도가 아니었다.
선우진은 중간에 해가 질 것 같자 그때부터 진소은을 등에 업고는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구름을 뚫고 봉우리 꼭대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그러자 처음에는 당황했던 진소은도 이미 업혀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인지 곧 자연스럽게 선우진에게 몸을 맡겨주었다.
구름 위로 우뚝 솟은 봉우리의 정상에서 진소은은 탄성을 터트렸다.
“와아아아! 세상에!”
그들이 올라온 봉우리 위에는 역시 신선이 살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구름 위로 솟아오른 봉우리 위에서 바라본 붉은 석양은 신선의 거처보다도 더 신비롭고 아름다운 광경을 눈앞에 펼쳐주고 있었다.
선우진과 진소은은 넋을 잃은 채 운해를 넘어 저 멀리 지평선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해가 사라지자 여전히 붉은 노을빛 하늘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한숨지었다.
그때 진소은이 문득 중얼거렸다.
“이 순간이 기억 속에 그림처럼 영원히 남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늘 보고 싶을 때 꺼내 볼 수 있게….”
그 말에 선우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소. 정말 멋진 광경이구려.”
그때 진소은이 문득 선우진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음 지었다.
아무런 티끌 하나조차 없는 것 같은 너무나도 맑은 웃음이었다.
선우진은 문득 그 웃음이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해가 졌음에도 여전히 붉게 물든 노을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노을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얼마나 눈부신 사람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선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잠시 후 장엄한 붉은 노을 아래 두 명의 그림자가 하나로 합쳐졌다.
그 과정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웠기에 둘 중 누구도 이상함을 느낄 수 없었다.
잠시 후, 선우진은 뒤늦게야 자신이 진소은에게 입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문득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당여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를 할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아무 얘기도 못 한 채 그녀에게 입부터 맞추고 말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떨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진소은의 촉촉한 입술도, 그녀의 부드러운 몸도 도무지 밀어낼 수가 없을 만큼 포근한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의 목소리였다.
“선우 공자?”
“!”
선우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한순간 온몸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아니 벼락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천길 봉우리의 정상에, 심지어 자신의 심안으로도 감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누군가가 지근거리까지 접근해 자신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경악한 선우진은 진소은을 자신의 몸으로 가리며 황급히 뒤돌아섰다.
그때였다.
그는 그 순간 바로 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
지금 자신의 눈앞에 보인 사람의 모습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선우진은 도저히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그녀가 서 있었다.
앞머리를 눈 밑까지 내려 하관만 보이는 얼굴, 하지만 그 하관만으로도 미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백의의 여인이 말이다.
선우진이 문득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청…연 소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