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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전선 비룡십삼대-331화 (331/359)

331화 역천혈마 과염-1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

운남성 비룡십삼대의 연무장에선 갑자기 어두운 침묵을 깨고 유리구슬처럼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요, 할아버지!”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여은이었다.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그렇게 소리치고는 의조부인 백학노검 양문헌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아압!”

하지만 경쾌한 기합 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신형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높이 뛰어올랐던 그녀가 낙하하며 검을 휘두르자, 꽃잎이 바람에 휘날리듯 그녀의 신형이 나풀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천상의 선녀가 춤을 추며 하강하는 것만 같은 아리따운 춤사위였다.

그러자 그녀의 주변으로 강기들이 안개처럼 번져 가기 시작했다.

마치 붉은 달무리가 달 주위로 번져 가는 것만 같은 신비로운 광경.

건드리면 그대로 흩어져 버릴 신기루를 보는 것 같았다.

“오오오!”

하지만 두 사람의 대련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운검객 벽리중은 잘 알고 있었다.

저 안개처럼 뿌옇게 보이는 강기들이 얼마나 위협적인 수법인지를….

그리고 얼마나 높은 경지의 검초인지를 말이다.

그 순간이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당여은의 검초를 지켜보고 있던 백학노검 양문헌이 드디어 가볍게 검을 휘둘러 안개 같은 검강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예전 당여은의 강기들을 유리처럼 깨트렸던 것과 똑같은 검격이었다.

디이이잉! 디이이잉!

하지만 결과는 그때와 달랐다.

쨍쨍 소리를 내며 깨져갔던 그때와 달리 당여은의 검강들은 양문헌의 검격에도 종이 울리듯 맑은 소리를 내며 뒤로 살짝 튕겨 나가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금세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달무리들.

“호오!”

양문헌은 기특하다는 듯한 탄성을 내뱉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천하삼십육성을 넘어 절대자의 영역을 엿보기 시작한 그를 당여은 혼자만의 힘으로 밀어낸 것이었다.

“좋구나!”

양문헌은 기분 좋은 목소리를 내며 조금 더 검에 공력을 실어 휘두르기 시작했다.

디이이잉! 딩! 딩!

그러자 이번에는 양문헌의 검격을 더 견디지 못한 당여은이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당여은의 주변을 감싼 붉은 달무리는 깨지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녀에게서 자연스럽게 뻗어 나온 광휘인 양 안쪽의 영역을 유지하며 그녀를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감격한 제운검객 벽리중이 더 참지 못하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훌륭하다! 너무 훌륭하구나, 여은아!”

그의 목소리에 계속해서 당여은을 몰아붙이려던 양문헌은 일단 뒤로 물러서서는 빙긋이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아우 목소리 때문에 차마 더 휘두르지를 못하겠구먼. 자네는 어째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 가벼워지고 그러는가?”

그 말에 당여은 역시 웃으며 동조했다.

“맞아요, 별것도 아닌데 너무 칭찬해 주셨어요.”

그러자 그들의 말을 들은 벽리중이 껄껄 웃으며 대꾸했다.

“이제 화경의 벽을 넘고 계신 형님의 공세를 아직 이십 대인 네가 막아냈는데 그게 별일이 아니란 말이냐? 내 보기엔 설풍이란 아이가 위정국을 꺾고 천하삼십육성이 된 것보다 훨씬 대단한 일인 것 같은데?”

그의 말에 당여은이 고개를 저으며 쑥스럽게 웃음 지었다.

“에이, 그건 할아버지께서 봐 주셔서 그렇죠. 제 수준에 맞춰주셨는데 그것도 못 받아 내면 제가 너무 부족한 거잖아요.”

그러자 벽리중이 답답하다는 듯 양문헌에게 물었다.

“허어, 참! 형님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제 말이 틀립니까? 저 정도면 우리 여은이도 충분히 천하삼십육성에 이름을 올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질문에 양문헌이 허허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허허허! 지금 우리 여은이 정도면 천하삼십육성에 충분히 이름을 올릴 만도 하지. 하지만 위정국까지는 아직 무리일세. 천하삼십육성에서도 상위권에 뽑히는 자들은 그리 만만치 않거든.”

결국 위정국을 꺾고 형산파마저 무릎 꿇린 설풍과 비교하기엔 아직 많이 무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벽리중은 그런 것쯤은 상관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천하삼십육성급 실력이 된 건 맞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고작 이십 대의 나이로 말입니다. 장하다, 여은아! 정말 자랑스럽구나!”

그러자 당여은은 수줍게 웃으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벽리 할아버지. 다 두 분께서 가르쳐 주신 덕분이에요.”

그간 세 사람의 관계는 친 혈육도 부럽지 않을 만큼 가까워진 상태였다.

당여은은 오랜 기간 선우진을 보지 못했음에도 두 의조부들 덕분에 많이 힘들어하지 않고 견딜 수 있었고, 양문헌과 벽리중은 말년에 얻게 된 친손녀를 보듯 당여은을 아끼며 그녀가 성장하는 모습을 삶의 낙으로 삼아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아마 지금이 그들의 인생 중 가장 많이 웃은 시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아직 이십 대에 불과한 당여은이 양문헌의 백학검법을 완벽하게 이은 것은 물론 천하삼십육성급의 실력자로 성장해준 것이었다.

양문헌과 벽리중 두 사람에게 이보다 더 기꺼운 일이 있을 수 없었다.

월하환검무의 공능이라곤 하지만 아직 초절정에 이르지도 못한 그녀가 지금 이 정도라니, 만약 초절정의 벽을 넘게 된다면 대체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을지 너무 궁금할 정도였다.

벽리중이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형님, 오늘은 오랜만에 제대로 된 요리를 만들어 아우와 한잔하시지요. 이 아우가 아껴뒀던 소홍주를 풀겠습니다.”

그러자 양문헌이 허허 웃으며 대꾸했다.

“어허허허, 그렇게 꽁꽁 숨겨놨던 술을 풀다니,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는가?”

“하하하! 만약 오늘 같은 날 마시지 못한다면 후회하겠지요. 아우를 구두쇠로 만들지 마시고 오늘만큼은 마음껏 드시지요.”

그 말에 당여은 또한 기분 좋게 웃으며 동조했다.

“그러세요, 할아버지. 요리는 제가 만들게요.”

“허어, 우리 여은이가 요리까지 한다면야 도저히 뺄 수가 없겠구나. 손녀 앞에서 술주정은 부리지 말아야 할 텐데.”

“형님께서 술주정까지 하시려면 소홍주가 항아리로 있어야 할 터인데, 미리 준비해 놓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쉽구려, 형님.”

“저도 아쉬워요, 할아버지.”

“응? 그 녀석 참, 허허허허.”

그때였다.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

젊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은 세 사람은 순간 경악한 표정으로 목소리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파박!

백학노검 양문헌은 최근 화경의 벽을 넘기 시작한 상태였다.

아마 십오 인의 절대자 중 가장 약체라는 독안괴검 서일 정도라면 어느 정도 상대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까지 갖게 된 상태.

그런데 저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런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이렇게 근거리까지 접근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더군다나 목소리도 그랬지만, 몸을 날리며 확인한 그녀의 모습은 손녀인 당여은 또래로 보이는 젊은 여인이 아니던가.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어찌…?!’

문득 너무 방심한 탓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눈으로 모습을 확인한 지금도 자신의 감각에 그녀의 기척이 잡히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예 존재가 없는 귀신이거나… 아니면 자신을 뛰어넘는 극강의 고수라는 뜻이었다.

그때 문득 의손녀인 당여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해 소저?! 정말 해 소저인가요?!”

해 소저?

문득 당여은 쪽을 바라보자 그녀가 놀람과 반가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양문헌의 머릿속에 문득 혈교에 잡혀갔다던 검성의 딸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의 이름이 분명히 해청연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게다가 얼굴을 반쯤 가린 저 앞머리.

아마도 얘기로만 들었던 그녀가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아이가 저런 무위를 지녔다고? 게다가 이 불길한 느낌은….’

양문헌은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당여은을 황급히 만류하려 했다.

그때였다.

해청연이 코웃음을 치며 당여은을 쏘아붙였다.

“친한 척하지 마라, 더러운 년! 내가 없는 새 그를 유혹했던 주제에 무슨 면목으로 내게 반가운 척을 하는 것이냐?!”

“…네?”

당여은은 당황했다.

그녀가 말하는 그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선우진을 연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여은은 굳은 표정으로 해청연에게 물었다.

“당신… 해 소저가 아니로군요. 누구죠? 대체 누구길래 해 소저의 모습으로….”

그러자 당여은을 무섭게 쏘아보고 있던 해청연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오호호호호! 들켰구나! 어떻게 알았을까,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을 텐데 말이야? 너, 보기보다 제법 감이 좋은 모양이로구나?”

그 말에 당여은은 신속하게 검을 뽑아 해청연을 향해 겨누며 소리쳤다.

챵!

“누구냐?! 혈교의 마두냐?!”

그러자 해청연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뭐, 틀린 얘기는 아니다만, 내가 누구인지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란다, 아이야. 중요한 건.”

거기까지 말한 해청연의 몸에서 한순간 엄청난 기세가 터져 나왔다.

화아아악!

“으윽?!”

“허억!”

그녀의 기세는 마치 돌풍과도 같았다.

벽리중과 당여은은 순간 몸이 붕 떠서 뒤로 날아가다가 간신히 땅에 착지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오직 화경의 경지에 들어선 양문헌만이 자세를 낮춘 채 검을 앞으로 내밀어 간신히 제자리에서 버텨 낼 수 있었다.

그 순간 해청연이 광기 어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바로 우리 청연이를 위해 너를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만 한다는 거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가 손을 앞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서 다섯 개의 붉은 손가락이 쭉 뻗어 나왔다.

손가락 모양의 수강을 길게 뻗어 상대를 갈가리 찢어 버리는 혈교의 절기, 혈귀마조였다.

샤아아악!

붉은 강기가 당여은에게까지 뻗어 나가는 데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였다.

그냥 눈앞에서 손톱으로 할퀴는 것과도 비슷한 속도.

아직 월하환검무를 발동하지도 않은 당여은으로서는 도저히 반응할 수조차 없었다.

“!”

당여은이 자신의 얼굴을 그어오는 붉은 손톱을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때였다.

챠앙!

달무리 같은 백색의 강기가 그녀의 바로 앞에서 혈조를 쳐냈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미리 월하환검무 일 식 비월을 발동시켜 놨던 양문헌의 검강이었다.

그러자 자신의 수법이 막힌 해청연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호오! 뭐지? 갑자기 아까보다 존재감이 상승했구나? 무위를 증폭시켜 주는 무공이라도 쓰는 것이냐?”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해청연의 표정은 전혀 급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 봐야 거기서 거기라는 듯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반면 항상 여유 있는 표정을 짓곤 했던 양문헌의 표정은 현재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상태였다.

그가 당여은의 앞을 막은 채로 소리쳤다.

“어서 도망치거라, 여은아! 나로서도 얼마 버티지 못할 상대다! 아우! 어서 여은이를 데리고…!”

그 순간이었다.

해청연이 요사스럽게 웃으며 그를 덮쳐왔다.

“오호호호호! 그건 안 되지!”

화아아아악!

덮쳐오는 그녀의 몸에서 아홉 마리 혈룡이 촉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전개한 혈교 최강의 비기 구천혈룡마공이었다.

크롸라라라라!

살아 있는 것처럼 울부짖으며 아홉 방향으로 휘어져 온 혈룡이 순식간에 양문헌을 덮쳤다.

콰아아아아앙!

순간 일어난 엄청난 폭발.

그걸 본 당여은이 절박하게 소리쳤다.

“할아버지!”

하지만 그 순간 폭발 속에서 확 뛰쳐나온 건 양문헌이 아닌 해청연이었다.

그녀가 구천혈룡마공을 양문헌에게 날리고 바로 당여은을 덮쳐 온 것이었다.

“네 걱정이나 하렴!”

그녀의 하얀 손이 빛살처럼 당여은의 목을 움켜쥐어 가고 있었다.

이번에도 당여은으로선 도저히 반응할 수 없는 속도였다.

경악한 당여은의 눈이 크게 확대되고 있었다.

“!”

그때였다.

당여은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문득 하얀 검강이 해청연의 등을 찔러왔다.

“멈춰라, 요녀!”

쉬이이익!

양문헌이었다.

그가 혈교 최강의 마공인 구천혈룡마공을 버텨내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그러자 인상을 찡그린 해청연이 어쩔 수 없이 공격을 멈추고는 위로 솟구쳤다.

화악!

그녀가 살짝 짜증 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귀찮게!”

그사이 양문헌은 바로 당여은의 앞을 막아서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그의 뒷모습을 본 당여은이 놀라 소리쳤다.

“할아버지!”

양문헌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머리는 여기저기 그을린 채 산발이 되어 있었고, 옷도 넝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심각한 건 그의 왼팔이었다.

그의 왼팔이 팔뚝까지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에 타 손목까지 사라진 검게 그을린 팔뚝에선 피만 줄줄 흐르고 있었다.

“하, 할아버지!”

그걸 본 당여은이 절박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 순간 양문헌 또한 절박하게 소리쳤다.

“어서 가라니까! 아우, 뭘 하고 있는 건가?!”

그러자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양문헌을 보고 있던 벽리중이 이를 악물고는 소리쳤다.

“가자, 여은아! 어서!”

“하, 하지만!”

당여은이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벽리중은 붉어진 눈으로 그녀를 무섭게 윽박질렀다.

“형님의 희생을 헛되이 할 셈이더냐?! 어서 가자!”

벽리중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고는 바로 몸을 날렸다.

당여은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면서도 그를 따라 몸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벽리중은 속도를 높이며 소리쳤다.

“정신 똑바로 차리거라! 우리는 무림인이 아니더냐?! 지인의 죽음을 보는 게 어디 한두 번이라더냐?!”

하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렇게 소리치는 벽리중의 눈은 이미 눈물이 차올라 앞이 흐려진 상태였다.

그러자 당여은도 눈물을 흘리며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월하환검무를 발동한 그녀의 속도가 바람처럼 표횰해지고 있었다.

그때 해청연은 공중에 둥둥 뜬 채로 혀를 차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문득 양문헌에게 물었다.

“쯧, 쯧. 너 정말 저년이 도망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그러고는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서 붉은 강기가 솟구쳐 올라갔다.

화아아악!

양문헌은 눈을 부릅떴다.

그녀가 보여준 경지를 도저히 가늠할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손에서 나온 강기는 더 이상 강기라고 부르기도 힘들어 보였다.

너무나도 짙게 뭉친 그녀의 강기가 삼 장 가까이 뻗은 거대한 도검이 되어 있었다.

그 붉은 도신은 그 자체로 딱딱한 고체처럼 보일 정도였다.

해청연이 요사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자, 어디 한번 막아 보려무나!”

생전 처음 보는 엄청난 경지의 검강이었다.

하지만 양문헌은 이를 악물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버텨서 당여은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줘야만 했다.

으득!

양문헌은 온 힘을 다해 백학노검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검이 그림을 그리듯 허공을 가르자 순백의 달무리 같은 뿌연 검강들이 뿜어져 나왔다.

당여은의 붉은 달무리보다 훨씬 짙은, 마치 안개들이 짙게 뭉쳐서 구름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오호호호호!”

그 순간 해청연이 손을 그었다.

그러자 삼 장 길이로 뻗어나간 붉은 도가 순백의 구름을 양단할 듯 베어왔다.

째재애앵!

양문헌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실체화가 되어버린 해청연의 강기 앞에 그의 검강이 너무도 무력했기 때문이었다.

구름과도 같은 그의 검강이 마치 유리처럼 가볍게 깨져 나가고 있었다.

파삭!

마침내 모든 강기를 거침없이 부수고 들어온 붉은 도신 앞에서 양문헌은 문득 당여은을 생각했다.

‘여은아, 부디….’

그 순간, 붉은 검강이 그의 몸에 박혔다.

푸우욱!

‘무사히….’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그의 의식은 천천히 흐려졌다.

***

당여은은 온 힘을 다해 신법을 전개했다.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녀의 의조부가 목숨을 걸고 만들어 준 시간을 헛되이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마음속으로 의조부를 한번 부른 당여은은 애써 눈을 부릅떴다.

더 이상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옆에서 역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달리고 있는 벽리중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요, 할아버지?”

그러자 슬픔에 잠긴 채 그저 달리고만 있던 벽리중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당여은의 질문에 그도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은 슬픔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의 물음처럼 지금은 어디로 가야 그 괴물을 피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때였던 것이다.

상대는, 그 괴물은 화경의 벽을 막 넘어섰던 의형 양문헌조차 버티지 못한 강자였다.

그러니 어디로 도망가든 안전할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의형조차 감당하지 못했다면 대체 누가….’

그가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하며 막막해하고 있을 때였다.

당여은이 다시 그를 향해 말했다.

“광검릉으로 가요, 할아버지. 스승님이시라면 감당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원래 처음부터 그곳을 생각하고 있었다.

벽리중에게 던진 질문은 그저 그의 주의를 잠시 돌리기 위함이었을 뿐이었다.

그 말에 벽리중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달리 방법이….”

그때였다.

누군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광검릉이라. 어떤 곳일지 무척 궁금하구나.”

당여은과 벽리중은 경악해 그 자리에 급정지했다.

그러고는 급히 머리 위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들은 볼 수 있었다.

해청연이 그들의 머리 위, 허공에 둥둥 뜬 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그녀가 사악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기다려 주긴 좀 귀찮구나!”

동시에 그녀의 신형이 당여은을 향해 내리꽂혔다.

화악!

마치 유성이 떨어지는 듯한 엄청난 속도였다.

“!”

당여은의 크게 확대된 동공에 사악하게 웃는 해청연의 얼굴이 가득 담겨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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