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역천혈마 과염-3
그때였다.
해청연이 경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 목소리, 설마?!”
설랑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그녀의 목소리를 기억했듯 그녀 또한 자신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설랑은 여유 있는 미소를 가장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오랜만이군, 역천혈마. 여기서까지 보게 되다니 무척 반가운 기분이야. 물론 안 볼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야.”
그러자 해청연의 얼굴이 공포에 질리기 시작했다.
“거, 검신 사공건?! 네, 네놈이 어떻게 여기에?!”
그 질문에 마유겸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쓴 수법을 나라고 못 쓸까? 지난번에 역천귀혼대법을 보니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더구나. 네가 언젠가는 이럴 것 같았거든?”
그 말을 들은 해청연은 이제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없이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그, 그런! 역천귀혼대법은 우리 혈교의…!”
마유겸은 천천히 그녀에게로 걸어가며 말했다.
“뭐, 혈교의 수법이 그리 대단하다고, 너희 수법들이 좀 지저분하기는 하지만 우리 형제가 워낙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들이라는 건 너도 잘 알지 않느냐?”
그러자 해청연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뇌, 뇌신?! 사, 사공신 그놈도 이곳에 있다고?!”
마유겸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피식 웃음 지었다.
그가 속으로 마유겸에게 속삭였다.
- 잘하면 싸우지 않고 쫓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녀의 반응을 보니 약간 희망이 생기고 있었다.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이가 바로 자신의 형인 뇌신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생각했던 순간이었다.
정신없이 뒷걸음질 치던 해청연이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멍하니 말했다.
“근데… 이상하구나. 검신, 네가 겨우 그런 수법으로 나를 암습했다고?”
혼란에 빠져 있던 그녀의 눈은 어느새 약간 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설랑이 혀를 차며 속삭였다.
- …망했군.
하지만 속마음과는 달리 겉으론 웃으며 대꾸해 줬다.
“새로 창안한 검법이라네. 멸망한 빙궁의 무공을 되살려 주면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거든? 어째, 좀 괜찮던가?”
아주 여유 있는 대응이었지만 해청연은 이제 그 자리에 멈춰 선 채로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곤 잠시 뚫어져라 마유겸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미소 지었다.
“이제 알았다. 네놈, 귀혼대법을 쓴 것이 아니로구나. 그저 의지만을 남겨 놓은 거였어. 그리고 그렇다는 건….”
그녀는 이제 활짝 웃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네놈은 더 이상 신화경의 괴물이 아니란 얘기로구나! 오호호호호!”
그러자 마유겸은, 설랑은 더 이상 웃음을 가장할 수 없었다.
그녀가 현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육신이 발전할 수 있는 한계는 원래 일류까지였다.
그 이상은 육신이 아닌 정신의 문제.
깨달음을 통해 격을 높인 정신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절정, 초절정의 무위를 선사해 주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역천혈마 과염은 해청연의 몸에 들어오자마자 원래의 무위를 그대로 쓸 수 있었다.
해청연의 육신이 영혼의 격을 견딜 수만 있다면, 그 후엔 육신과 상관없이 그녀 자체가 화경의 끝자락에 도달한 괴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검신은 아니었다.
해청연이 말했다.
“그래, 그랬겠지. 나조차 내 영혼의 격을 담을 수 있는 육신을 찾기가 힘들었는데, 신화경에 달한 네 영혼의 격을 담을 수 있는 육신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안타깝구나, 검신이여! 신화경의 기억은 남길 수 있었겠지만 그걸 구현할 수 있는 영혼을 남기지 못했구나! 오호호호호호!”
그 말대로였다.
검신이 남긴 것은 영혼이 아닌 기억과 의지이기에, 신화경의 벽을 넘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해도 실제 무위는 마유겸의 영혼의 격을 넘을 수 없었다.
그러니 지금의 그로선 역천혈마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얘기였다.
해청연은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오호호호호! 이렇게 기쁠 수가! 이곳이라면 내 손으로 검신 네놈을 죽일 수 있겠구나!”
그렇게 소리친 그녀가 양손을 좍 펼치자, 그녀의 몸에서 다시 아홉 개의 혈룡이 뛰쳐나왔다.
크롸라라라라라!
엄청난 크기,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혈룡들이었다.
검붉은 혈룡들은 해청연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와서는 그대로 돌진하지 않은 채 촉수처럼 넘실거리며 마유겸을 노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그를 물어뜯고 싶은 듯 입을 벌린 채 도사리고 있는 것이었다.
설랑이 할 수 없다는 듯 마음속으로 말했다.
- 자, 이제 어쩔 수 없군. 도주해야겠네, 유겸. 그래도 걱정은 하지 말게나. 내 신법이라면 설사 자네의 몸이라 해도 저놈 따위는 충분히 따돌릴 수 있으니까.
검신은 고금제일의 신법 최강자라고 할 수 있는 뇌신의 친동생이자, 그의 형이 갖지 못한 뛰어난 무학의 재능으로 형의 신법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할 수 있었다.
비록 마유겸의 몸이라고 해도 신법만큼은 당대 무림의 누구도 따를 수 없을 거라고.
상대가 설사 화경의 끝자락에 이른 괴물 역천혈마 과염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자만 그가 막 도주하려 할 때였다.
마유겸이 문득 담담하게 말했다.
‘완전히 도주하지 말고 적당한 속도로 그를 최대한 유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르신?’
그 말에 설랑이 멈칫하고는 되물었다.
- …자네?
그러자 마유겸이 씁쓸히 웃으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설랑이 마유겸의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일각도 채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 안에 해청연을 완전히 따돌리지 못한다면 마유겸은 절대 살아날 수 없었다.
그러니 그가 지금 그녀를 유인하겠다고 말한 건 도주를 포기하겠다는 말과도 같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당여은이 피할 시간을 주기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뜻이었다.
그 말뜻을 깨달은 설랑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마유겸을 만류했다.
- 그렇게 한다고 해서 큰 차이가 생기지는 않을 걸세. 그녀에게 기껏 일각도 안 되는 시간을 벌어줄 뿐이겠지.
하지만 마유겸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제 목숨값으로 그녀에게 일각의 시간을 더 줄 수 있다니, 충분히 괜찮은 거래인 것 같습니다.’
설랑은 탄식했다.
마유겸의 뜻을 돌릴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해청연이 광소를 터트리며 손을 뻗었다.
“오호호호호호! 뭐 하고 있느냐? 얼어붙은 것이냐, 검신?!”
그러자 도사리고 있던 거대한 혈룡 하나가 마유겸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었다.
크롸라라라라라!
혈룡의 입은 순식간에 돌진해 와서는 멍하니 서 있던 마유겸의 몸을 그대로 삼켜 버렸다.
동시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아아앙!
그 순간이었다.
오 장 밖의 공간에 이형환위처럼 나타난 마유겸이 당여은이 간 반대 방향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걸 본 해청연이 깔깔거리고 웃으며 허공을 날아 그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깔깔깔깔! 검신, 네가 도망치는 모습을 다 보다니! 정말이지 다시 살아난 보람이 있구나!”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세 마리의 혈룡이 다시 마유겸의 등을 향해 시간 차를 두고 날아들었다.
크롸라라라라라!
제일 앞서 날아든 혈룡 한 마리가 다시 마유겸을 삼켰다.
바로 일어나는 거대한 폭발.
콰아아아아아앙!
하지만 그 순간 다시 공간을 이동한 그의 신형이 폭발의 오 장 옆쪽에 나타나 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해청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오호호호호! 멋진 점멸보로구나!”
그 순간이었다.
바로 뒤따라온 또 다른 혈룡이 다시 마유겸의 몸을 덮쳤다.
하지만 또다시 이형환위.
콰아아아아앙!
세 번째 혈룡 또한 마찬가지였다.
콰아아아아앙!
그러자 해청연은 너무 즐겁다는 듯 깔깔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깔깔깔깔깔! 무위가 낮아져도 그 점멸보는 여전하구나! 자, 그럼 아예 공간을 막아 버리면 어떨까?!”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네 마리의 혈룡들이 다시 방출됐다.
다섯 마리만 남았던 혈룡이 다시 아홉 마리가 된 것이었다.
해청연이 두 손을 활짝 펼치며 기합을 넣었다.
“하아압!”
그 순간 아홉 마리의 혈룡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뿜어져 나갔다.
크롸라라라라라라!
흩어졌던 혈룡들은 각각 반원을 그리더니만 사방에서 마유겸을 향해 돌진해 갔다.
그가 빠져나갈 수 있는 모든 공간을 막은 채였다.
그 순간이었다.
마유겸의 몸이 한 줄기 빛으로 화했다.
쉬이이익!
찰나의 시간이 지난 후, 그의 몸은 십 장 앞 공간에 이동해 있었다.
아홉 마리의 혈룡이 완전히 포위를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리 속도를 높여 빠져나갔던 것이었다.
그의 뒤로 아홉 마리 혈룡이 충돌하며 천지가 뒤집힐 듯한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콰콰콰콰콰콰콰쾅!
그러자 뒤따라오던 해청연의 표정이 드디어 조금 굳어졌다.
“성광행?”
성광행은 검신의 형 뇌신의 신법 절기였다.
역천혈마 과염이 백 년 전에도 이를 갈았던 뇌신의 무공이 여기서 다시 나타났던 것이었다.
저런 신법을 신화경의 경지가 아니어도 쓸 수 있다니, 상당히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게 된 순간 그녀는 이제 뭔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성광행을 그가 썼다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다.
신화경이 아닌 상태에서 저런 속도를 낼 수 있다는 게 좀 불공평하긴 했지만, 저 형제들이야 원래 괴물 같은 놈들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저걸 쓸 수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저런 속도로 도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좀 이상했다.
‘아까 저걸 썼다면 순식간에 내게서 도주할 수 있었을 텐데 대체 왜? 그렇다면?’
그 순간 해청연은 상대가 도주하고 있는 방향이 당여은의 반대 방향이라는 사실을 문득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놈이 자신을 유인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으득!
‘이 여우 같은 놈이….’
해청연은 놈을 추격하는 것을 멈추기로 했다.
아쉽지만 어차피 잡을 수 없다면 굳이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조금 전부터 심장이 조이는 압박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해청연의 심장에 새겨진 금제, 당대의 혈마 전무광이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해청연은 심장에 느껴지는 통증에 이를 갈고는 발걸음을 멈췄다.
‘애송이 따위가 감히….’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금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해청연의 몸을 완전히 차지하는 것이 먼저였으니까.
지금은 빨리 당여은부터 처리하고 돌아가야만 할 것 같았다.
해청연이 그렇게 더 이상 마유겸을 쫓지 않고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설랑이 혀를 찼다.
- 놈이 아무래도 자기를 유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로군.
그러곤 마유겸에게 물었다.
- 어떤가? 자네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는 건가?
그의 물음에 마유겸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하지만 죄송하다는 마유겸의 말에 설랑은 그저 피식 웃음 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죄송할 게 뭐가 있겠는가? 처음부터 남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지를 후계자의 조건으로 건 사람이 바로 나였는데. 자네는 충분히 훌륭한 후계자였다네.
마유겸의 신형은 이제 해청연의 등을 향해 빛살이 되어 쏘아지기 시작했다.
쉬이이익!
그의 눈에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해청연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설랑이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역천혈마! 어디를 가느냐?!”
그 순간 마유겸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거대한 파도와도 같은 몇 겹의 한기가 그녀를 향해 몰아쳐 가기 시작했다.
아까 전 그녀 주변을 얼음의 나라로 만들었던 설랑검법의 일 초 북풍검파였다.
하지만 그 공격을 본 해청연은 코웃음을 치며 다시 거대한 아홉 마리의 혈룡을 뿜어냈다.
구천혈룡마공이었다.
크롸라라라라라라!
혈룡들은 울부짖으며 한기의 파도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자 그것들의 충돌에 한파들은 눈송이처럼 힘없이 부서져 산산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파스스스스!
너무나도 무력한 광경이었다.
그러자 해청연이 광소를 터트리며 소리쳤다.
“꺄하하하하! 죽어라, 검신!”
아홉 마리 혈룡은 다시 반원을 그리며 마유겸의 주변을 둘러쌌다.
아까처럼 그가 빠져나갈 틈을 없애버리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유겸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다시 도주하지도, 그것들을 향해 시선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저 해청연을 바라보며 검을 휘둘렀을 뿐이었다.
설랑검법 오 초
만설개세
그 순간, 한파가 분쇄되며 눈발처럼 힘없이 부스러졌던 얼음조각들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래처럼 작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얼음조각들이 돌풍에 휘말린 듯 해청연을 덮쳐 갔던 것이었다.
쏴아아아아!
“!”
해청연은 깜짝 놀랐다.
한순간 용권풍 안에 갇힌 듯 얼음조각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회전하고 있었다.
“감히!”
그녀는 구천혈룡마공으로 계속 마유겸을 공격하는 동시에 자신의 주변에 호신강기를 펼쳤다.
그 순간, 얼음의 용권풍이 그녀를 향해 확 조여 왔다.
파사사사사삭!
“저, 저런?!”
해청연은 경악했다.
고작 얼음조각들일 뿐인데 그것들이 회전하며 조여오자 호신강기가 갈려 나가고 있었다.
공력의 차이가 말도 안 될 텐데도 저런 위력이라니, 놀라운 초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이럴 수가?!”
그녀는 부서져 가는 호신강기를 바라보며 문득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구천혈룡마공에 정신을 집중했다.
얼음의 용권풍이 호신강기를 모두 깎기 전에 자신이 먼저 놈을 쳐야만 했다.
그 순간, 마유겸은 온 사방에서 덮쳐오는 혈룡들을 바라보며 설랑에게 말했다.
‘저 같은 놈이라 죄송했습니다, 어르신.’
그러자 설랑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겐 자네가 최고의 후계자였다네.’
마유겸의 심상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음 지었다.
서로의 마음을 알기에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그 순간, 아홉 마리 혈룡이 마유겸의 몸을 덮쳤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