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역천혈마 과염-4
해청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놈이 죽자 얼음의 용권풍이 힘없이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비록 구천혈룡마공을 전개하느라 최선을 다해 방어하진 않았다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대단한 무공이 아닐 수 없었다.
“화경은커녕 초절정도 안 된 육신으로 이런 위력을 내다니. 괴물 같으니….”
과연 고금제일인이라 불릴 만한 자였다.
문득 백 년 전의 징글징글한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몸서리를 쳤던 해청연은 이내 사악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제 그 징글징글한 놈도 없어졌단 말이지.”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드디어 자신이 활개 칠 수 있는 시대를 만난 것이었다.
“우후후후, 이제 이 몸만 완전히 차지하면…! 으윽!”
해청연은 그 순간 심장이 확 조이는 느낌에 인상을 찡그렸다.
당대의 혈마 전무광의 금제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빨리 돌아오라며 독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으득!
이를 간 해청연은 당여은이 도주한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년만은 죽이고 가야…!”
그 순간이었다.
문득 누군가 접근하고 있는 기척이 느껴졌다.
모두 세 명의 기척, 게다가 그중 한 명은 분명 당여은의 기척이었다.
그녀의 기척을 느낀 해청연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호호호! 제 발로 돌아와 주다니 고맙기 그지없구나! 우리 청연이의 남자를 꼬셨던 괘씸한 년이지만 그래도 고통 없이 죽여 줘야겠어!”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그녀는 문득 나머지 두 명 중 한 명의 기척도 어쩐지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도 역천혈마 과염 자신이 아닌 이 몸의 주인인 해청연에게 익숙한 기척이었다.
“이건…?”
잠시 망설이던 해청연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몸을 날렸다.
당여은이 오는 쪽 방향이 아닌, 운남성 점창산, 혈교로 돌아가는 방향이었다.
***
당여은은 아까 도망쳐 왔던 길을 되돌아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도주하던 도중 두 사람을 만나게 됐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두 사람을 이끌며 소리쳤다.
“이쪽이에요!”
저 두 사람이 해청연의 모습을 한 그 괴물을 이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도주만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속도로는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이미 확인한 데다, 저 두 사람조차 그녀를 상대할 수 없다면 어차피 자신은 살아날 확률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뒤에 남겨진 양문헌, 벽리중의 두 의조부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원자의 안위가 너무 걱정되기도 했다.
그들을 버리고 도주하느니 차라리 운명을 함께 하는 게 마음이 더 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때 당여은을 뒤따라오고 있던 두 명 중 중년의 남자가 침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로… 청연이가 그랬단 말이오?”
그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린 당여은이 달리며 대답했다.
“네! 제가 보기엔 마치 누군가가 해 소저의 육신을 차지한 것처럼 보였어요.”
그 말에 남자는 침음성을 흘렸다.
“으으음, 우리 청연이가 그런….”
그러자 그의 옆에서 달리고 있던 아름다운 여인이 그를 위로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잖아요? 너무 심려치 마세요, 해 대협.”
그 말에 중년인은 애써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알겠소. 위로해 주셔서 고맙소, 손 여협.”
그때였다.
당여은이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 저기!”
그녀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전방을 바라봤다.
그러자 바로 목격할 수 있었다.
마치 운석이 떨어진 듯 뒤집혀 버린 숲의 처참한 모습을….
숲 한가운데가 둥그런 분화구처럼 완전히 초토화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보며 탄식했다.
“허어! 저런 위력이라니….”
“…이 정도는 저로서도 불가능하겠군요.”
잠시 어두운 얼굴로 그곳을 바라보던 세 사람은 다시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해청연과 다른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잠시 후, 당여은은 곧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벽리중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해청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해청연도, 그 정체 모를 괴인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분화구 한복판에 반쯤 묻힌 하얀 검 한 자루를 발견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당여은은 벽리중을 무사히 구한 후 서둘러 양문헌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으로 돌아가는 도중 완전히 파김치가 된 채 달려오고 있는 증칠을 만날 수 있었다.
“헤엑! 헤엑! 여은아! 헤엑! 무사했구나! 헤엑! 헤엑! 정말, 헤엑! 다행, 헤엑, 헤에엑.”
“증칠 오라버니!”
당여은과 두 사람은 증칠을 통해 해청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얘기를 듣는 내내 중년인의 표정은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갔다.
***
해청연이 점창산으로 돌아가기까지는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하늘을 새보다 빠른 속도로 날 수 있는 그녀에게 그 정도는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점창산에 도착한 해청연은 하늘 위에서부터 바로 점창파의 장문인실, 지금은 혈마 전무광의 집무실이 된 그곳 앞으로 급강하했다.
타닥!
장문인실 앞에는 그녀의 접근을 이미 알고 있었던 혈마가 미리 나와 있었다.
그가 빙긋이 웃으며 해청연에게 물었다.
“즐거운 시간 보내셨습니까?”
그러자 해청연이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 건방진 애송이 놈! 내게 금제를 가한 것도 모자라 감히 그걸로 압박을 넣어?!”
설사 알맹이는 육백 년 전의 인물인 역천혈마 과염이라고 해도, 겉모습은 이제 겨우 스물두 살인 해청연의 모습이었다.
그런 어린 여인이 자신에게 건방지다며 소리를 지르는 광경은 전무광에게 있어서 결코 유쾌하지 않은 일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무광은 전혀 기분도 나쁘지 않은 듯 밝게 웃으며 대꾸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혹 너무 멀리 가셔서 안 돌아오실까 봐 불안하더군요. 제 마음을 부디 이해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러자 그의 유들유들한 모습에 해청연은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봤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 머리를 터트려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건 해청연 또한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해청연의 심장에 금제가 걸려 있는 이상 그에게 대항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혈마 전무광은 역천귀혼대법을 시행하기 전 해청연의 심장에 금제를 가해 놨었다.
그녀의 몸을 통해 돌아온 역천혈마가 자신의 지시를 듣지 않거나, 오히려 자신을 지배하려 하는 상황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건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귀환한 역천혈마는 전무광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만약 심장에 미리 금제를 가해놓지 않았다면 벌써 전무광에게 금제를 가해 부하로 만들거나, 아예 죽여 버렸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전무광은 다시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이렇게 급히 돌아오시도록 신호를 보낸 건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혈교 천하를 위해서 말이지요.”
심장의 금제를 압박해 고통을 준 것을 그저 신호를 보냈다고 말하는 혈마의 뻔뻔함에 해청연은 다시 한번 이를 갈았다.
자신이 반항할 수 없다는 생각에 보여 주는 저 여유로운 표정과 눈빛이 그렇게 짜증 날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잠시 동안 이를 갈며 전무광을 노려보던 해청연은 곧 표정을 풀고는 문득 생긋 웃음 지었다.
그리고 나른한 표정으로 전무광에게 말했다.
“혈교 천하를 위해서라면야 어쩔 수 있나? 내가 당연히 도와줘야지. 그나저나….”
그렇게 말꼬리를 슬쩍 늘인 해청연은 문득 자연스럽게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요요한 두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녀의 얼굴, 그리고 두 눈동자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전에도 몇 번이나 봤지만 가히 충격적인 미모가 아닐 수 없었다.
화경의 고수인 전무광의 얼굴마저 순간 굳어졌을 정도였다.
그녀는 이제 색기가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전무광에게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백 년 동안이나 남자랑 자지 않았더니 말이야. 갑자기 몸이 막 뜨거워지기도 하고 그러지 않겠어? 그래서 말인데….”
그녀는 도발적인 미소를 지은 채 손가락으로 전무광의 몸을 살짝 스치듯 건드리며 말했다.
“날 가져보지 않겠어? 이 몸, 탐나지 않아?”
그 아찔한 유혹에 전무광은 순간 몸을 움찔했다.
목에 저절로 침이 넘어가고 눈에는 그녀의 자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천하의 요물이라 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색기였다.
원래 이전부터 해청연을 탐했었던 전무광이었다.
비록 알맹이는 역천혈마라 하나 해청연의 몸으로 유혹을 한다면 넘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결국 탐욕으로 가득 찬 웃음을 지으며 해청연의 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해청연이 갑자기 인상을 팍 찡그리더니 전무광을 확 밀쳐 버렸다.
팍!
“음?!”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전무광은 눈을 부릅떴다.
이미 색욕이 동했기에 그의 눈빛은 이미 짐승처럼 사나워진 상태였다.
하지만 해청연은 그를 보지 않았다.
인상을 찡그린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그래, 청연아. 알았어. 알았다. 네가 그렇게 마음이 내키지 않을 줄은 몰랐구나. 내가 잘못했단다.”
잠시 동안 달래듯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녀는 이내 차가워진 눈빛으로 전무광을 보며 말했다.
“우리 청연이가 너와는 하기가 싫다는구나. 아무래도 첫경험을 하기에 네가 매력이 없는 모양이야.”
그 말에 전무광은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사나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렇게 자신을 자극해 놓고 무슨 말도 안 되는 변명이란 말인가.
절대로 이대로 보내 줄 수는 없었다.
금제를 이용해서라도 그녀를 범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해청연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기껏 나를 데려와 놓고 다시 보내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리 쉬운 아이가 아니거든?”
그 말에 그녀를 거칠게 안으려던 전무광이 움찔했다.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해청연의 심장에 새겨진 금제는 전무광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심장에 고통이 가해지고 심해지면 터져 버리는 금제였다.
그러니 그녀가 한 말은 차라리 심장이 터질지언정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거라는 뜻인 것 같았다.
그러자 끓어오르는 탐욕에 잠시 얼굴이 일그러졌던 전무광은 결국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고작 색욕을 채우고자 겨우 데려온 역천혈마를 다시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무광은 흉광이 줄기줄기 뿜어 나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말했다.
“고작 어린 계집 하나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다니 무척 실망스럽구려.”
그러자 해청연, 역천혈마 과염이 색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실망스럽겠지. 하지만 이 나를 감당할 정도의 몸을 가진 영혼이라면 이 정도는 해 줘야 하지 않겠어?”
그렇게 되물은 그녀는 몸을 돌리고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자신의 방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무광에게 등을 돌린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빌어먹을….’
사실 답답한 건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직 완전히 먹어 버리지 못한 해청연의 영혼도, 심장에 걸린 전무광의 금제도 모두 다 짜증 났다.
처음 자신의 영혼을 감당할 수 있는 육신으로 되돌아왔을 때, 그녀는 정말이지 환희에 가득 찼었다.
이런 완벽한 육신이라니, 마치 자신을 위해 준비된 것만 같지 않은가?
이 육신이라면 자신의 능력을 십 할 발휘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기뻐하던 그녀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몸의 원 주인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 어떻게 고작 스물두 살짜리 어린 계집의 영혼 따위가….’
화경의 끝자락에 도달한 역천혈마의 영혼은 다른 영혼들과 그 격을 전혀 달리했다.
그녀가 빙의했을 때 다른 영혼들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런데 해청연의 영혼은 그렇지 않았다.
분명 자신보다 훨씬 격이 떨어지는 영혼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완벽하게 누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누르기는커녕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몸의 주도권을 잃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육백 년 전부터 무림의 절대자였던 역천혈마로서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방법을 달리하기로 했다.
해청연의 영혼과 싸우기보다는 그녀의 영혼에 충격을 줘 천천히 정신력을 약화시키기로.
그녀가 선우진을 찾아갔던 이유도 사실 그래서였다.
해청연의 육신을 차지하며 기억 또한 공유했기에 그가 해청연을 그저 친구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아주 대성공이었지.’
그녀는 그곳에서 선우진의 입으로 다른 여인과 혼인을 약속했다는 사실을 해청연이 듣도록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주도권을 차지한 역천혈마는 심지어 해청연의 손으로 그의 여인인 진소은을 거의 죽여 놓기까지 했다.
둘 다 해청연의 정신을 무너뜨리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죄책감은 정신을 무너뜨리는 아주 좋은 도구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했던 그녀는 문득 이를 갈며 생각했다.
‘당여은이라는 계집까지 죽일 수 있었다면 훨씬 더 확실하게 무너뜨릴 수 있었을 텐데.’
해청연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질투에 눈이 멀어 선우진의 여인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행위는 그녀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행위였다.
그러니 당여은을 해청연의 손으로 죽였다면 지금쯤 이 육신을 완전히 차지했을지도 몰랐다.
‘혈마와 자는 것 또한 그랬을 테고 말이지.’
하지만 당여은을 죽이는 것도 전무광과 관계를 맺는 것도 실패한 지금, 역천혈마 과염은 여전히 해청연을 잘 달래며 육신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정도에만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실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였다.
그녀의 등 뒤에서 완전히 냉정을 회복한 전무광이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아까 부탁한 일을 해 주시겠다고 하시지 않으셨소? 혈교천하를 위한 일을 말이오.”
그 말에 해청연은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어진 전무광의 말을 들은 그녀의 얼굴에는 점점 사악한, 하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운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