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알게 된 진실
선우진은 사각형 모양으로 뚫은 벽을 통해 비동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잔뜩 긴장한 채였다.
검제가 아직 어떤 인물일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산전수전 다 겪어 본 선우진에게도 충분히 긴장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려 사왕 이상의 실력을 가졌다는 당대의 천하제일인이 아니던가.
여차하면 아들인 반대하를 인질로 삼을 생각이긴 했지만, 그 정도의 고수라면 어떤 어마무시한 무위를 보여줄지 알 수 없었다.
‘뭐, 그래 봐야 묵랑 어르신보다야 약할 테니까.’
그게 선우진의 믿는 구석이긴 했다.
몽혼대법으로 꿈속에서 수련하며 검신을 수없이 겪어봤던 선우진이기에 그보다 약할 검제의 수작에 호락호락 넘어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어둡군. 눈으론 아무것도 안 보여.’
밝은 곳에서 갑자기 들어갔기에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눈으론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늘 펼쳐놓는 심안이 그리 넓지 않은 비동 곳곳을 모두 심상 안에 그려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심상 속에 그가 있었다.
비동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바위 위에서 정좌한 채 명상에 빠져 있는 한 남자가.
거의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느릿한 호흡.
자연 그 자체가 된 듯 전혀 느껴지지 않는 존재감.
그가 아마도 당대의 천하제일인인 혈랑검제 반중양일 것이었다.
꿀꺽!
선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아들의 죄를 따지겠다고 호기롭게 외치며 들어오긴 했지만 어쩐지 위축되는 심정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학 후배 선우진이 검제 어르신을 뵙습니다.”
그러곤 잠시 기다려봤다.
명상을 하고 있었던 듯하니 그가 명상에서 벗어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검제는 아무런 반응을 해 주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호흡은 아주 느리게 반복되고 있었고. 그의 눈은 계속 감긴 상태였다.
‘뭐지? 나와 대화하기 싫으시단 건가?’
선우진은 약간의 이상함을 느끼고는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다시 한번 그에게 말을 걸어봤다.
“검제 어르신. 어르신의 아들이 저지른 짓들, 그리고 검신 어르신께서 남기신 망아공에 관해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다려봤다.
그가 혹시라도 명상에 빠져 자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천하제일의 고수인 그가 명상 중이라 해서 주변을 인식하지 못할 리는 절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검제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전히 명상에 잠긴 채 어떤 대답을 해주지도, 눈을 뜨지도 않고 있었다.
그때였다.
묵랑이 신음처럼 말했다.
- 설마?
동시에 선우진의 손에 붙잡혀 있던 반대하의 자조적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흐흐흐흐흐! 아무리 불러봐야 소용없다.”
그사이 놈이 어느새 정신을 차렸던 모양이었다.
선우진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소용없다니, 무슨 뜻이지?”
그러자 놈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계속해서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으흐흐흐흐, 아버지는 주화입마에 빠지셨다. 바로 네놈이 찾는 그 빌어먹을 망아공 때문에 말이다. 정말로 자기를 잊으시고 말았지.”
“…뭐라고?”
선우진은 잠시 그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제대로 인지할 수가 없었다.
주화입마?
천하제일인인 검제가 주화입마라고?
그러고는 다시 한번 검제를 자세히 바라봤다.
빛이 없었기에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심안으로 바라본 그의 몸은 그야말로 깡마른 상태였다.
게다가 거의 멈춘 듯한 호흡, 전혀 느껴지지 않는 존재감….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우진은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가사상태라고?”
그러자 반대하가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 그래! 칠 년 가까이 저기 앉아계신 저 목내이가 바로 우리 아버지다! 천하제일인이신 검제란 말이다! 크하하하하하!”
목내이.
선우진은 그가 왜 그런 표현을 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가사 상태라고는 하지만 칠 년을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저 상태였다면 지금 그의 외형은 말 그대로 목내이에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선우진의 머릿속에서 묵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 그럴 리가. 아무리 망아공이 난해한 무공이고 그가 재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화경을 넘어선 고수가 자아를 잃어버릴 정도일 리는 없는데…. 설마?
그러던 그가 뭔가를 깨달은 듯 급히 말했다.
- 저자에게 물어보게! 검제가 정말 화경의 벽을 완전히 넘어섰는지를!
‘예?’
그의 질문에 선우진은 순간 당황했다.
십오 인의 절대자 모두가 화경의 벽을 넘는 중이거나 완전히 넘어섰는데, 천하제일인인 검제가 화경의 벽을 넘어서지 않았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왜 그런 질문을….
하지만 그 의문을 떠올린 순간, 선우진은 바로 답 또한 떠올릴 수 있었다.
‘설마 화경을 넘어선 것이 아니라 혈랑검으로?!’
그 생각을 떠올린 선우진은 반대하에게 급히 물었다.
“검제께서 정말 화경의 벽을 완전히 넘어서신 것이 맞나?”
그러자 미친 듯 웃고 있던 반대하가 웃음을 뚝 그치더니 놀란 눈빛으로 선우진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갑자기 화를 내듯 소리쳤다.
“무슨 개소리냐?! 천하제일인인 아버지께서 화경의 벽을 넘지 못하셨을 리가 없지 않느냐?!”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선우진이 그의 말이 거짓임을 바로 판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선우진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맙소사, 정말 그랬구나. 혈랑검의 힘이었어.”
그러자 놀란 반대하의 눈이 크게 확대됐다.
뭐라고 반박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차마 말을 내뱉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선우진은 문득 자신이 알고 있는 검제의 행적에 대해 다시 떠올려봤다.
이십여 년 전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그는 무림을 떠돌며 협행을 행하다 십여 년 전 당시의 천하삼십육성이었던 천살검마와 그의 방파인 천살방을 단독으로 무너뜨리며 절대자의 한 명으로 인정받게 됐었다.
그리고 칠 년 전, 그는 곤륜파를 멸문시키려던 천마신교의 천마와 천하삼십육성에 속한 여러 마교의 고수들을 홀로 상대해 물러서게 한 뒤 천하제일인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때 천마는 검제가 살아 있는 한 절대로 곤륜파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굴욕적인 맹세로 목숨을 건지고는 피를 토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했었다.
‘이제 뇌신도 검신도 없건만, 우리 신교는 또다시 검 한 자루에 가로막히게 되고 마는구나.’
과거 천마신교가 뇌신과 검신의 아랫세대 절대자였던 매화검제에게 패퇴해 곤륜파를 도모하지 못했던 과거사를 빗댄 말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반중양은 혈랑검제라는 별호를 얻으며 바야흐로 당대의 천하제일인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떠올린 선우진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그 두 번뿐이었구나. 검제가 세상을 압도할 만한 무위를 드러냈을 때가.’
그랬다.
그는 그 직후부터 안탕산에 은거한 채 어떤 외부 활동도 하지 않았었다.
그를 추종하는 무인들이 모여들어 안탕산 주변에 번화한 도시를 만들고, 절강성의 무인들이 서로를 전혀 경계하지 않는 위험한 풍조를 만드는 동안에도 말이다.
문득 검제가 칠 년간 저 상태로 있었다던 반대하의 말이 떠올랐다.
그의 말대로라면 검제는 천마와의 싸움 직후 망아공을 익히려 하다 저런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었다.
선우진이 묵랑에게 물었다.
‘그 두 번의 활약은 반중양 본인이 아닌 혈랑검에 깃든 어르신께서 현신하셨던 거겠군요?’
그 말에 묵랑이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 그래, 아마 그랬을 것 같네. 그리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또 한 번의 현신이 있었다면 그는 아마도 세 번의 기회를 모두 써 버린 것이었겠지.
이제 선우진은 그림을 맞출 수 있었다.
검제는 자신의 능력이 아닌 혈랑검의 힘으로 천하제일인의 칭호를 얻었고, 그 힘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자 은거한 채 수련에만 매달렸던 것이었다.
그러다 주화입마에 빠져 버렸고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예전에 청성의 화영빈 형님께서 스승이신 괴선어르신과 함께 검제를 만났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만약 화경의 경지가 아니었다면 괴선 어르신도 알아볼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자 묵랑이 대답했다.
- 아마 화경의 초입, 그러니까 벽을 완전히 넘지 못한 상태였을 걸세. 전에 자네가 만났던 독안괴검 서일처럼 말일세. 그 괴선이란 자도 내가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서일과 함께 오괴에 속하는 자라면 그와 비슷한 경지였겠지.
결국 괴선으로선 검제의 무위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었을 거란 얘기였다.
하지만 그 설명을 들어도 여전히 기분이 찝찝한 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세 번의 기회를 다 써버렸다곤 해도 여전히 검신의 가르침을 받았을 텐데 어떻게 저렇게까지 된단 말인가?
그때였다.
반대하가 원한이 가득한 눈빛으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때, 검신의 의지가 사라졌을 때 네놈이 가지고 있는 묵랑검을 찾을 수만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아버지도….”
“…뭐?”
선우진은 그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혈랑검에서 검신의 의지가 사라져 묵랑검이 필요했다고?
대체 왜?
그러자 묵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그건 내가 설명해 주겠네. 아무래도 이제 그 사실을 밝혀야만 할 것 같군.
‘…예?’
그의 말에 놀란 선우진의 눈이 크게 확대됐다.
사실을 밝힌다고?
그간 어르신이 숨겨왔던 무언가가 있었다는 건가?
묵랑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내가 현신해 자네의 몸을 움직여줄 수 있는 세 번의 기회를 다 사용하게 되면… 내 의지는 묵랑검에서 영원히 사라진다네.
‘…예?’
- 그리고 망아공을 익혀도 마찬가지일세. 자네가 망아공을 익히게 되면 나는 더 이상 이 묵랑검에 머무를 수 없게 되지.
선우진은 멍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무 충격적인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묵랑 어르신이… 내 스승님께서 사라지신다고?
영원히?
두 번째 삶이 첫 번째 삶과 완전히 달라진 이유를 딱 하나만 꼽으라고 말한다면, 선우진은 주저하지 않고 묵랑을 만나게 된 것이라고 얘기할 것이었다.
묵랑은, 검신은 아버지의 정을 별로 느껴본 적이 없었던 선우진에게 아버지가 되어준 사람이었고, 또한 무공을 가르쳐 준 스승이었으며, 모든 일을 함께 겪으며 시시콜콜한 농담을 나눌 수 있게 된 친우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 혈교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자신하게 된 자신감의 원천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어르신이 영원히 사라지신다고…?’
선우진으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아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얘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묵랑이 씁쓸한 말투로 사과했다.
- 이 사실을 미리 알게 된다면 자네가 위험한 상황에 빠져도 나를 현신시키지 않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아예 망아공을 익히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얘기해 주지 않았다네. 미안하네.
선우진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충격받은 그의 눈동자가 바람을 맞은 갈대처럼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
한동안 넋을 잃고 있었던 선우진이 정신을 차린 건 한참 눈치를 보고 있던 반대하가 슬금슬금 도망가려고 했을 때였다.
선우진은 등 뒤에서 살금살금 기어가고 있는 반대하를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물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나? 언젠가 검제께서 다시 깨어나시게 된다면 너부터 처벌할 거라는 생각은?”
그러자 흠칫 놀랐던 반대하는 이내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를 처벌한다고? 아버지가? 웃기지 마라! 아버지가 안 계신 동안에도 천하제일인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애써 왔던 나를! 대체 어떻게 처벌할 수가 있단 말이냐?!”
선우진은 그의 말에 되물었다.
“‘천하제일인의 명성을 지켰다.’라…. 사람들을 속이고 죄 없는 이들까지 희생시켜가면서 말이냐?”
그러자 반대하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작은 흠집 좀 있다고 보석이 돌멩이가 된다더냐? 큰일을 위한 작은 희생이었을 뿐이다.”
그 대답을 들은 선우진은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내가 알기로 검제께선 천하제일인의 명성을 탐해 협행을 벌이신 게 아니라, 스스로를 희생해 협행을 하시다 보니 천하제일인의 명성을 얻게 되신 걸로 알고 있다. 그러니 검제 어르신께 큰일이란 협의를 행함이셨겠지. 그런데 네가 말하는 큰일이란 무엇이냐? 타인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얻고자 한 것이 너의 탐욕 이외에 또 무엇이란 말이냐?”
그러자 반대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고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잘난 척하지 마라! 네놈이 아들인 나보다 아버지를 더 잘 안단 말이냐?!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본 적도 없으면서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이냐?!”
선우진은 천천히 뒤돌아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알 수 있다. 나 또한 묵랑검의 주인이니까. 마지막 한 번 남았을 기회를 타인을 위해 사용하셨을 그분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그 말을 들은 반대하는 충격 받은 표정으로 선우진을 바라봤다.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이 기억 속 아버지의 모습과 겹쳐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검제 반중양이 안탕산에서 폐관에 들어가려 했을 때, 반대하는 마지막 기회를 사용해 천하제일인의 명성을 얻어놓고는 왜 바보처럼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냐고 화를 냈었다.
그때, 아버지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었다.
‘내가 마지막 기회를 써서 구하고자 한 건 천하제일인의 명성이 아니라 협의, 그리고 많은 이의 생명이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을 한 것이었지. 다만 아쉬운 점은 스승님을 떠나보냈다는 것이니, 이제부턴 그분의 유지를 받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눈에는 천하제일인이라는 명성에 대한 어떠한 자부심도, 미련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스승을 떠나보낸 슬픔만이 가득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떠올린 반대하는 차마 더 이상 선우진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러자 선우진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결국 너의 탐욕을 위해서 검제께서 추구하시던 가치를 망가뜨렸다. 아마 그분께서 깨어나신다면 제일 먼저 너의 목을 치시겠지.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의 목을 베는 것은 차마 두고 볼 수 없는 일, 그러니 대신 내가 너를 징벌하도록 하겠다.”
선우진의 말에 반대하는 놀란 눈으로 무언가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할 수 없었다.
아주 짧은 찰나의 빛이 번뜩이고, 다음 순간 그의 목에서 빨간 실선이 그어졌기 때문이었다.
반대하의 목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광경을 바라보며 묵랑이 문득 물었다.
- 깨어난 검제가 자네에게 원한을 품을 수도 있지 않겠나? 그래도 아들인데 말일세.
그 말에 선우진이 대답했다.
‘그가 깨어난다면 아마도 칠 년 전의 마음으로 깨어날 테니 그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칠 년 전, 타인을 위해 마지막 남은 기회를 사용했던 그라면 아마도 그런 악행을 저질렀던 반대하를 죽인 일로 선우진을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란 뜻이었다.
그 말에 묵묵히 동의한 묵랑은 잠시 후 다시 선우진에게 물었다.
- 이제 어쩔 생각인가?
그러자 깊은 한숨을 내쉰 선우진이 빙긋이 웃으며 되물었다.
‘혹시 제가 망아공의 구결을 보기만 해도 떠나셔야 하는 겁니까?’
- …아니, 그렇진 않네. 자네가 망아공을 완전히 익힐 수 있을 때까진 도와줘야 할 테니까.
그 대답을 들은 선우진은 살짝 안도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저는 망아공을 외우기만 하고 지금 익히지는 않겠습니다. 다행히도 혈교에 비해 저희 고수들의 숫자가 많지 않습니까? 사왕도 있고, 여령색마 손 선배에 검성 어르신, 게다가 성녀님까지 있으니까요. 그에 비해 놈들 중 화경의 고수라야 기껏 역천혈마와 혈마뿐이니, 제가 당장 망아공을 익히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을 겁니다. 세 번째 기회도 안 쓸 수 있을 거고요. …아마도 말이지요.’
그의 말에 묵랑도 이제야 약간의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그 또한 선우진의 말에 살짝 마음이 놓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선우진이 급히 다시 물었다.
‘아, 물론 혹시라도 어르신께서 바로 안식으로 들어가시고 싶으시다면 그럴 수 없겠지만요. 혹시… 바로 안식에 들어가기를 바라십니까?’
무척이나 불안한 표정으로 묻는 선우진이었다.
그 물음에 묵랑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 그럴 리가 있겠나? 나도 조금 더 자네와 함께 있고 싶다네.
선우진이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고, 손주를 갖는 것까지 보고 싶다는 얘기는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말에 안도하는 선우진의 모습이 그의 말에 안도한 자신과 닮아 보였음에 웃음 지었을 뿐이었다.
묵랑은 문득 지금 이 순간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지금 바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선우진이 전제했던 모든 것들이 어떻게 격변하고 있는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