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역천혈마 대(對) 사왕-2
모용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럴… 수가.’
분명히 같은 화경의 경지이건만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자신이 아직 살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사왕이 그 이후 계속 공격을 이어가지 않았기 때문임을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사왕은 그 한 방으로 끝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뚜벅뚜벅 걸어오며 물었다.
“죽기 전에 최선은 다해봐야 하지 않겠나? 만약 이게 너의 최선이었다면야….”
그의 말은 거기서 끝났다.
하지만 모용검은 그 뒷이야기를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마 굳이 더 살려둘 필요가 없다는 종류의 얘기일 것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모용검은 이를 악물었다.
애초에 저런 괴물은 안 만나는 게 가장 좋았겠지만, 이미 만난 이상 어떻게든 죽여야만 했다.
자신이 죽어줄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는 옆에서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그저 지켜보고만 있는 해청연을 힐끗 바라보고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
“맹주호위대는 무얼 하고 있느냐?! 모두 쳐라!”
그러자 그들의 싸움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모용검의 호위 무사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애초에 일 대 일 대결이라고 했으니 설마 자신들을 부를 거라곤 생각지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용검의 명령을 들은 그들은 본능에 따라 바로 몸을 날렸다.
호위대인 신검대는 모용검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고, 사대 호위는 대범하게도 사왕을 향해 덮쳐갔다.
“맹주님을 보호하라!”
“하아아압!”
사왕은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네 명의 천하삼십육성급 고수들을 보고는 빙긋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기대가 없으면 어차피 실망도 없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였다.
사왕의 신형이 한순간 맹수처럼 뛰쳐나갔다.
파악!
사대호위 중 가장 연장자인 준학숭은 눈을 부릅떴다.
방만한 자세로 가만히 서 있던 사왕의 신형이 아무런 예비 동작도 없이 한순간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
그리고 그건 그가 볼 수 있었던 마지막 광경이기도 했다.
퍼석!
사왕의 주먹에 준학숭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나갔다.
준학숭 자신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 가운데 벌어진 일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의 머리가 부서질 때 사왕의 주먹은 이미 다른 사대호위들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퍼퍼퍽!
한순간 그들의 머리가 차례로 터져나갔다.
소리만 들으면 거의 동시라고 느껴질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광경을 본 모용검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사왕이 방금 천하삼십육성급의 고수 네 명을 단 한순간에 학살해 버렸던 것이었다.
과연 천하제이인자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엄청난 무위였다.
하지만 모용검과 달리 그의 호위대인 신검대 무사들은 그 광경을 보고 감탄할 겨를조차 없었다.
네 명의 머리가 터질 때, 사왕이 이미 그들 사이로 뛰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왕의 호조수가 광폭하게 휘둘러졌다.
푸화아아악!
“끄아아아악!”
“흐아아아악!”
그 순간 오십여 명이었던 신검대원 대부분이 말 그대로 소멸하고 말았다.
그 공간에 있던 신검대원들이 핏물로 화해 쓸려나갔기 때문이었다.
이제 사왕을 중심으로 반경 삼 장의 공간은 완전히 텅 빈 상태였다.
사라진 사람들의 수에 비한다면 비명소리조차 그리 크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는 행위도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이 할 수 있는 짓이기 때문이었다.
“이, 이럴 수가!”
모용검은 사대호위와 신검대를 무인지대처럼 돌파하고는 이제 자신을 향해 광폭하게 호조수를 휘두르고 있는 사왕의 모습을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사력을 다해 기합을 지르며 호신강기를 방출했다.
“하아아압!”
화아아악!
다음 순간, 사왕의 호조수가 모용검의 호신강기 위를 광폭하게 후려쳤다.
퍼어어어억!
사왕의 전력을 다한 일격은 그야말로 가공할 만했다.
모용검은 자신의 호신강기를 말 그대로 분쇄하듯 파고들어 오는 그의 호조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호신강기마저 이렇게 무력하다니, 이제 정말로 끝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모용검을 끝장내려던 사왕은 순식간에 몸을 움직여 오른쪽으로 빠져나갔다.
마치 표범처럼 민첩하고 유연한 동작이었다.
그러자 다음 순간 그가 있었던 공간이 분리됐다.
삼 장 길이의 붉은 도신이 그가 있던 공간을 양단했기 때문이었다.
샤아아악!
기습, 그것도 가공할 만한 기습이었다.
그러자 어느새 십 장 밖으로 물러났던 사왕이 자신을 기습한 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저 검성의 여식일 뿐이라고?”
그 물음에 강기로 만들었던 거대한 도 날을 회수한 해청연이 농염한 표정과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히 거짓말이었지. 하지만 계속 거짓말을 하기엔 아직 이게 죽으면 안 되거든.”
해청연에게 ‘이거’라는 호칭으로 불린 모용검은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방금 전 자신의 머리를 부술 뻔했던 사왕의 호조수도, 바로 코앞을 스쳐 갔던 강기의 칼날도 모두 공포스러웠다.
무림의 절대자라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이토록 초라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 해청연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모용검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사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소개하지. 나는 과염이라고 해. 역천혈마라고도 하지.”
그 말에 사왕은 문득 자신에 의해 삼분지 이가 죽고 나머지도 병신이 되어버린 신검대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그녀가 저런 말을 했다는 건 남은 자들도 다 죽이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대부분은 자신이 죽인 자들이지만 남은 자들도 저렇게 죽음이 예약되자 약간 안쓰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 해청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흠, 내 이름을 듣고도 별로 놀라지 않는군? 설마 내 정체도 알고 있었다는 건가?”
그 질문에 사왕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지? 본좌가 놀랄만한 가치라도 있나?”
그렇게 말하는 사왕의 눈에서는 붉은 흉광이 태양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적안광혈공을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자 해청연 또한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제법 오만하군. 그 얼굴로 놀란 표정을 짓게 만드는 것도 재밌겠어.”
두 사람의 몸에선 이제 폭풍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선공을 가한 쪽은 사왕이었다.
그의 신형이 해청연을 향해 포탄처럼 쏘아졌다.
아무런 예비 동작도 없이 공간을 찢어버리는, 마치 이형환위와도 같은 돌진이었다.
슈아악!
하지만 해청연 또한 그 정도로 당황할 리가 없었다.
사왕의 신형이 쏘아지는 것과 동시에 그녀가 양손을 내밀자 붉은 수영들이 온 공간을 가득 채우고는 사왕에게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아!
마치 우박의 폭풍과도 같은 수백 개의 수영, 혈교의 절기 천환마장이었다.
그러자 사왕은 마치 수강의 폭풍 속으로 뛰어드는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수강에 휩쓸려 금방이라도 산산조각 나 버릴 것만 같은 상황, 하지만 그 상황에서 사왕은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러고는 기합을 내지르며 오히려 속도를 높였다.
폭풍 속으로 스스로 뛰어드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아압!”
그러자 그의 몸으로 쏘아져 가던 수영들은 갑자기 뿜어져 나온 사왕의 호신강기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파바바바바바박!
맹렬한 폭우 같았던 붉은 손 그림자들은 붉은 장막과 부딪치자 물방울처럼 힘없이 터져나갔다.
돌진하는 사왕의 속도조차 늦추지 못하는 무력한 모습이었다.
다음 순간, 천환마장을 뚫고 순식간에 지근거리까지 돌진해온 사왕의 모습에 해청연은 눈을 꿈틀했다.
“제법!”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거대한 수영 하나가 벼락처럼 뿜어져 나갔다.
퍼엉!
수백 개의 수영으로 공격하는 천환마장과 달리, 한 방의 파괴력을 중시하는 혈교의 절기 폭뢰혈장이었다.
지근거리에서 뿜어져 나온 폭뢰혈장이 바로 사왕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의 상반신을 다 덮을 듯한 거대한 손 그림자가 호신강기 위를 강타하려 하고 있었다.
아니, 강타할 뻔했다.
사왕이 고양이 같은 유연한 몸놀림으로 몸을 빙글 돌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샤아악!
그는 그 짧은 거리에서 몸을 한번 회전하는 것만으로 폭뢰혈장을 흘려내 버리고 말았다.
해청연 조차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야수 같은 몸놀림이었다.
“!”
그 순간 몸을 회전한 사왕의 호조수가 그대로 해청연을 후려쳤다.
“하압!”
퍼어엉!
“큭!”
해청연은 포탄처럼 튕겨 나가고 말았다.
순간 호신강기를 방출해 직접적으로 강타당하지는 않았지만 어마어마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사왕은 아까 모용검에게처럼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는 뒤로 튕겨 나가는 해청연에게 바로 따라붙었다.
그러고는 호조수로 다시 한번 해청연을 후려쳤다.
“훕!”
그 순간이었다.
사왕의 힘으로 튕겨 나가던 해청연이 힘을 거스르지 않고 같은 방향으로 땅을 박찼다.
파박!
그러자 급가속한 그녀의 뒤로 사왕의 호조수가 헛되이 허공을 스쳐 지나갔다.
부아아앙!
간신히 사왕의 공격을 피한 해청연은 다시 한번 땅을 박차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곤 기합을 내질렀다.
“하아아압!”
그러자 허공으로 솟구치는 그녀의 온몸에서 아홉 마리의 거대한 혈룡들이 뛰쳐나왔다.
구천혈룡마공이었다.
아홉 마리의 혈룡들은 광폭하게 울부짖으며 입을 벌린 채 사왕을 향해 덮쳐갔다.
크롸라라라라라!
“!”
사왕은 싸움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돌진을 멈추고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저걸 정면으로 맞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샤아악!
몸을 빙글 회전시킨 사왕의 옆으로 혈룡 한 마리가 스쳐 지나갔다.
고양이처럼 유연한 몸놀림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또 한 마리의 혈룡이 그를 덮쳐왔다.
사왕은 급히 땅을 박차고는 그것을 뛰어넘을 수밖에 없었다.
“훕!”
파박!
그러자 공중으로 뛰어오른 그를 향해 일곱 마리 혈룡이 포위하듯 일곱 방향에서 덮쳐왔다.
이미 허공으로 몸을 띄운 사람이 도저히 피할 수 없을 방위를 점한 채였다.
크롸라라라라락!
이 공격은 결정타였다.
아니, 결정타였을 것이었다.
만약 사왕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자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쉬이이익!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포위 공격 속에서, 화경의 끝자락에 도달한 자, 사왕 괴갈현은 그대로 새처럼 비상해 버렸다.
마치 협곡 사이를 비행하는 매처럼 일곱 마리의 혈룡들을 부드럽게 피해 하늘 높이 날아올랐던 것이었다.
그가 날아간 발밑에선 서로 충돌한 혈룡들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콰콰콰콰콰쾅!
그 순간이었다.
사왕은 구천혈룡마공을 피해낸 게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다.
공중으로 날아올랐던 그의 몸을 향해 벼락을 머금은 붉은 검날이 빛살처럼 베어왔기 때문이었다.
샤아아악!
“!”
그것은 강기로 이루어진 붉은 검날이었다.
이미 높은 곳으로 날아올라 있던 해청연이 그를 양단할 듯 강기의 검을 내리쳤던 것이었다.
그러자 사왕은 더 피하지 못하고 최대한 호신강기를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압!”
화아아악!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사왕은 자신의 호신강기를 두부처럼 베어버리며 순식간에 눈앞까지 다가온 붉은 검날을 목격해야만 했다.
이대로는 몸이 그대로 두 동강 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큭!”
처음으로 인상을 찡그린 사왕은 황급히 두 손으로 박수를 치듯 손바닥을 부딪쳤다.
베어오는 해청연의 검 날을 향해서였다.
터엉!
그러자 붉은빛을 뿜어내는 두 손이 해청연의 붉은 검날을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수들에게나 가능할 법한 공수탈백인의 수법을 역천혈마를 상대로 성공해낸 것이었다.
어마어마한 반응속도와 집중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위기는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순간, 검 날에서부터 붉은 뇌전이 폭발하듯 방출됐기 때문이었다.
파지지지직!
“크으으으윽!”
사왕은 자기도 모르게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수십 개의 벼락이 온몸을 지지는 듯한 고통에 천하의 사왕조차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궁세가의 제왕검결을 개량해 만들었다는 혈뢰검결의 무서운 위력이었다.
그러자 해청연은 요사스럽게 웃으며 검 날에 힘을 더했다.
“오호호호호! 짜릿하겠구나?!”
파지지지지직!
맹렬한 붉은 뇌전이 계속해서 수십, 수백 가닥으로 점멸하며 사왕의 몸을 지졌다.
해청연의 검 날을 놓을 수 없는 사왕으로서는 그 끔찍한 공격을 몸으로 받아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끄으으으윽!”
그러던 한순간이었다.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일까.
결국 검날을 붙잡고 있던 사왕의 손에선 힘이 빠져나가고 말았다.
그러자 해청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왕의 몸을 향해 그대로 검을 내리그어버렸다.
“오호호호호!”
샤아아악!
바로 그때.
그대로 침몰해버리는 듯했던 사왕의 몸이 물결치듯 부드럽게 휘어졌다.
스르륵!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뱀장어처럼 유연하게 움직인 사왕의 몸이 붉은 검날을 그대로 흘려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육백 년 전의 괴물인 역천혈마 과염으로서도 처음 보는, 그야말로 물 그 자체가 된 듯한 놀라운 몸놀림이 아닐 수 없었다.
경악한 해청연이 소리쳤다.
“아니?!”
그 순간이었다.
검날을 완전히 흘려낸 사왕이 몸을 휘돌리며 해청연을 후려 찼다.
퍼어어엉!
“아아악!”
해청연은 포탄처럼 튕겨나갔다.
호신강기로 급히 방어했음에도 온몸의 뼈가 부스러지는 듯한 엄청난 충격이었다.
사왕은 그런 그녀를 보며 눈을 번뜩였다.
그녀를 몰아붙일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사왕은 한번 혀를 차고는 오히려 땅으로 착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의 온몸은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상태, 도저히 전투를 지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몸을 회복시켜야만 했다.
아까운 기회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후우우우.”
사왕은 천천히 호흡하며 몸 안에 쌓인 안 좋은 기운들을 뿜어냈다.
망가졌던 몸이 빠르게 다시 활력을 되찾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통해 몸 상태를 끌어올리고는 공중에 둥둥 뜬 채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해청연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