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역천혈마 대(對) 사왕-3
해청연은, 역천혈마 과염은 지금 기분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였다.
사왕이란 자를 상대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야수와도 같은 유연한 몸놀림과 저돌성, 거기서 나오는 강력한 파괴력은 역대 최강의 혈마인 그녀로서도 결코 쉽게 볼 수 없었다.
해청연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생각했다.
‘지금 방금 허용했던 일격도 꽤 위험했었지.’
조금 전 사왕의 각법을 허용했던 해청연은 순간 눈앞이 하얗게 되어 버리고 말았었다.
급히 호신강기를 방출해 막았지만 그걸 통과해 들어오는 충격만으로도 잠시 전투불능 상태가 되어 버렸던 것이었다.
만약 사왕이 아까 연속공격을 가할 수 있는 상태였다면 그걸로 승부가 결정됐을지도 몰랐을 정도였다.
역천혈마 과염은 문득 백 년 전 뇌신, 검신의 옆에 있었던 광마를 떠올렸다.
사왕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광마 또한 적안광혈공과 야수권으로 맹수와 같은 전투능력을 보여주었던 자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그를 지금의 사왕과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최소한 표범과 호랑이만큼의 차이는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해청연은 그와의 비교가 완전히 쓸모없기만 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위가 아니라 성향만 따진다면….’
해청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혀로 입술을 핥고는 사왕을 향해 말했다.
“생각보다 제법이로구나. 네 조상인 광마 괴무량에 비한다면 청출어람이야.”
그러자 사왕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너는 생각보다 별로로구나. 역대 최강의 혈마라더니만 이 시대엔 아무리 잘 봐줘도 세 번째 정도밖엔 안 되겠어.”
그 말에 요염하게 웃고 있던 해청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사왕이야 그냥 한 말이었겠지만, 그 말이 해청연에겐 정곡을 찔린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이 시대에도 혹시 자신을 위협할만한 고수가 있을까 걱정하고 있던 그녀에게는 속이 뒤집어지는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해청연은 독사 같은 눈빛으로 사왕을 잡아먹을 듯 쏘아보며 말했다.
“감히…!”
그와 동시에 해청연의 몸에서 다시 아홉 개의 거대한 혈룡이 뿜어져 나왔다.
화아아악!
이번에 뿜어져 나온 혈룡들은 바로 사왕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촉수처럼 꿈틀거리며 사왕을 향해 잔뜩 도사리고만 있었다.
해청연은 그 혈룡들의 중심에서 사왕을 바라보며 선언했다.
“네놈은 이제 내 옷자락 하나 건들 수 없을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도 나를 삼인자라고 말할 수 있을지 어디 두고 보자꾸나!”
그러곤 손가락으로 사왕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가랏!”
그 순간 아홉 마리의 혈룡들이 울부짖으며 사왕을 향해 돌진했다.
크롸라라라라라라!
이번 혈룡들은 한 마리, 한 마리의 머리가 사왕을 한 입에 삼켜 버릴 정도로 거대했다.
그런 놈들 아홉 마리가 맹렬하게 돌진해오자 사왕은 차마 정면으로 부딪치지 못하고 옆으로 몸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파박!
그러자 그 순간 혈룡들도 방향을 바꿨다.
그대로 헛되이 부딪쳐 소멸했던 아까완 달리 놈들도 방향을 바꿔 사왕을 쫓아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이미 그의 행동을 예상한 듯한 움직임들이었다.
크롸라라라라라!
가장 선두의 혈룡이 입을 벌린 채 사왕을 덮쳐왔다.
그러자 그것을 피해 사왕은 다시 한번 공중으로 몸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뒤로 땅에 부딪친 혈룡 한 마리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앙!
사왕은 힐끗 뒤를 확인하며 생각했다.
‘이제 한 마리.’
하지만 아직도 여덟 마리나 남아 있었다.
그리고 여덟 마리의 혈룡들은 이제 포위망을 구축하듯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반원을 그리며 사왕을 향해 덮쳐오고 있었다.
크롸라라라라라!
해청연은 그 광경을 보며 사납게 미소 지었다.
역시 자신의 생각이 맞았던 것이었다.
과거 사왕의 조상인 광마 괴무량의 약점은 원거리 전투에 약하다는 점이었다.
야수와 같이 탄력 있고 유연한 몸놀림, 그리고 강력한 박투술로 근접 전투에선 무서운 힘을 발휘했지만 원거리에 있는 적을 공격할만한 수단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백 년 전에도 당시 협왕의 백보신권에 낭패를 봤다는 소문이 있지 않았던가.
지금의 사왕이 비록 그때의 광마보다 강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조상의 약점을 보완하지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해청연은 여덟 개의 혈룡이 사왕을 포위해 덮쳐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다시 한번 기합을 내질렀다.
“하아아압!”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다시 아홉 개의 혈룡들이 뛰쳐나왔다.
혹시라도 놈이 저 공격을 견뎌낸다면 연속 공격을 가해 끝장을 내기 위해서였다.
‘이걸로 끝이다!’
그 시각.
사왕은 모든 방위를 점한 채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혈룡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들을 피해서 빠져나갈 구멍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전혀 당황한 표정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사왕은 몸을 낮췄다.
도약을 준비하는 호랑이와 같은 기세.
다음 순간, 짧은 기합과 함께 그의 몸이 쏘아졌다.
“흡!”
파앙!
사왕은 한 가닥 빛줄기가 되어 혈룡 한 마리의 입안으로 돌진했다.
해청연이 있는 쪽 방향의 혈룡에게로였다.
콰아아아아아앙!
사왕과 충돌한 혈룡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신형은 이미 그곳을 통과한 이후였다.
여덟 개의 혈룡에 둘러싸이기 전 한 마리의 혈룡을 뚫고 나갔던 것이었다.
그러자 그걸 본 해청연은 인상을 팍 찡그리며 준비하고 있던 아홉 마리 혈룡을 다시 그에게로 쏘아냈다.
“어딜?!”
크롸라라라라라라!
그때였다.
반원을 그리며 돌진해온 아홉 마리 혈룡에게 완전히 포위되기 직전, 사왕의 눈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그는 혈룡들 사이의 공간으로 보이는 해청연을 검지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음?”
그걸 본 해청연은 눈을 살짝 찌푸렸다.
놈이 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푸우욱!
해청연의 심장이 무언가에 꿰뚫렸다.
“허어억!”
그녀의 눈은 튀어나올 듯 커지고 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심지어 느껴지지도 않았는데 무언가가 허공을 격해 자신의 심장을 꿰뚫어 버렸던 것이었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아무런 기세도, 형체도 없이 허공을 격해 상대방을 가격할 수 있다는 소림의 절기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사왕의 조상인 광마가 백 년 전 그 절기에 의해 패배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도….
‘백보… 신권?’
심장이 꿰뚫린 해청연이 제어를 잃어버리자 아홉 마리의 혈룡들은 각각 제멋대로 날아가 사방에 충돌해 버리고 말았다.
콰콰콰콰콰콰쾅!
그러자 사왕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해청연을 향해 몸을 날렸다.
파앙!
방금 사왕이 사용한 절기는 광마의 일족이 원거리 전투에 약하다는 고정관념을 공략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장의 절기, 무흔지였다.
소리도 색도 없는 초고속의 지강이 해청연의 심장을 꿰뚫어 버렸던 것이었다.
하지만 사왕은 아직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암습을 위해 창안되어 매우 가늘고 파괴력이 약하다는 단점을 지닌 무흔지이니만큼, 심장을 꿰뚫어 버렸다 해도 저 정도 괴물이라면 곧 회복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이대로 놈을 완벽하게 죽여야만 했다.
다음 순간, 순식간에 해청연에게 짓쳐든 사왕은 뒤로 기울어져 힘없이 추락하고 있는 그녀를 향해 호조수를 휘둘렀다.
그의 온 힘을 다한 강격이었다.
“하아아압!”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어느샌가 다가온 세 명의 검이 그를 찔러오고 있었다.
쉬이이익!
“음?!”
그걸 본 사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대일의 대결에 끼어들어 방해하다니, 광폭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단 손을 멈추고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세 명의 검격은 모두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 화경의 끝자락에 도달한 사왕에게조차 그랬다.
파박!
그는 세 개의 검격을 피해 몸을 날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화경이 세 명이라고? 어떻게?’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몸을 휘돌린 그가 공중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파앗!
사왕은 그렇게 일단 거리를 벌린 후에야 그 세 명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보게 된 그들은 무림맹주인 협왕 모용검, 그리고 해청연의 뒤에 있던 가면을 쓴 두 명의 남녀였다.
사왕은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용검, 네놈이….”
그러자 모용검은 죽은 무사의 손에서 주워 온 검을 휘돌리며 씁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미안하게 됐군. 나도 사정이란 게 있어서….”
그러자 사왕의 눈이 다른 두 남녀를 훑었다.
가면을 써 얼굴을 가린 그들은 목석처럼 선 채 사왕을 견제하고만 있는 중이었다.
그들의 뒤로 왼쪽 가슴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고 있는 해청연의 모습이 보였다.
역시 심장이 꿰뚫렸음에도 회복하고 있는 중인 모습이었다.
사왕은 이를 악물었다.
완벽히 이기는 상황이었는데….
그 순간이었다.
해청연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섬뜩한 독기로 가득 찬 눈빛이었다.
그녀가 사왕을 가리키며 외쳤다.
“쳐라!”
그러자 두 명의 남녀가 즉시 사왕을 향해 돌진했다.
모용검 또한 혀를 차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파지지직!
사왕은 두 남녀의 검에서 파직거리는 백색과 청색의 뇌전을 보며 중얼거렸다.
“혈뢰검결….”
아까 호되게 당했던 혈교의 절기 혈뢰검결이었다.
하지만 좀 이상했다.
뇌전의 색이 붉은색이 아니라는 건 그들의 내공이 혈교의 것이 아니란 뜻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하아압!”
사왕의 몸에서 붉은 호신강기가 뿜어져 나오며 그들의 검을 튕겨냈다.
주변에서 파직거리는 뇌기에 손을 부딪치기가 꺼려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어느새 머리 위로 뛰어올랐던 모용검의 검이 백색의 벼락이 되어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앙!
아까는 제대로 써 보지도 못했던 모용세가의 절기 백룡검법이었다.
그들의 공격을 받으며 사왕은 오랜만에 난감함을 느꼈다.
아무리 그가 사왕이고 저들이 화경의 초입이라 해도 세 명의 화경 고수를 동시에 상대하는 건 확실히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사왕의 뒤쪽 호숫가에 정박되어 있던 배에서 관전하고 있던 사왕의 호위무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지존!”
그들은 사왕의 호위대인 사룡대로 모두가 초절정의 고수들로 이루어진 열두 명의 무사들이었다.
특히나 열두 명이 함께 시전하는 검진은 사왕 본인조차도 쉽게 깨트릴 수 없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을 힐끗 본 사왕의 입에 희미한 웃음이 맺혔다.
저들이 합세한다면 좀 여유가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먼저 빠르게 이들을 정리하고…!’
그 순간이었다.
크롸라라라라라!
사왕은 자신의 머리 위로 지나가는 아홉 마리의 혈룡을 올려다보며 경악했다.
구천혈룡마공이었다.
해청연이 부상도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저 마공을 전개한 것이었다.
그는 뒤에서 돌진해 오는 수하들을 바라보며 급히 소리쳤다.
“안 돼! 피해라!”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 혈룡들은 그대로 열두 명의 초절정 고수들을 덮쳐 버리고 말았다.
콰콰콰콰콰콰콰쾅!
거대한 폭발이었다.
사왕은 호신강기로 세 화경고수들의 공격을 일단 버텨내며 망연한 표정으로 그들 쪽을 바라봤다.
그들 십이호위가 위협적인 순간은 검진을 발동하고 힘을 합쳐 적을 상대할 때였다.
반면 구천혈룡마공은 사왕 자신조차도 막기 부담스러운 위력을 지닌 마공이었다.
그러니 검진을 펼치지도 못한 그들이 그것을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전멸이었다.
으드득!
사왕은 이를 갈며 해청연 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왼쪽 가슴을 감싼 그녀가 사악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끝장이다, 사왕.”
그 말에 사왕이 사납게 웃으며 비웃듯 대꾸했다.
“역대 최강의 혈마라고?”
그 말에 해청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결국 사왕 자신을 이기지 못해 합공하는 것에 대한 비웃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감히!”
사왕은 분노하는 해청연을 보며 주변에 은신한 채 싸움에 끼어들려 하고 있는 비밀호위 맹휘염에게 전음을 보냈다.
- 휘염! 그 아이에게, 풍이에게 가라! 가서….
다음 순간, 사왕은 네 명의 화경 고수에 의해 둘러싸이고 말았다.
천하제이인자 사왕 괴갈현이라는 큰 별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