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전선 비룡십삼대-344화 (344/359)

344화 홍연검

사왕의 패배와 죽음.

그 충격적인 소식에 무림은 또다시 발칵 뒤집어지고 말았다.

무려 천하제이인자이자 천하삼대세력인 사왕련의 주인이 패배한 채 죽었던 것이었다.

최근 뜨거웠던 어떤 소식들도 이것만큼 무림인들을 경악시킬 수는 없었다.

게다가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를 패배시킨 사람이 십오 인의 절대자 중 한 명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검성 해운백의 딸 해청연.

아직 이십 대인 그녀가 사왕 괴갈현을 꺾었다는 말도 안 되는 사실은 모든 무림인들을 충격에 빠트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무림인들은 만나는 이들마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해청연? 이제 스물두 살인 검성의 딸이라고? 그런 소저가 있었어? 그리고 그 소저가 사왕을 이겼다는 게 말이 되나?”

이게 처음 이 소식을 접합 모든 이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반응이었다.

그러자 부족한 정보를 보충하기 위해 무림의 호사가들은 부지런히 발로 뛰며 당시의 상황과 해청연이란 사람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녀에 대한 정보가 빠른 속도로 채워졌다.

“검성 해운백 대협의 셋째 따님이신데 어려서부터 천재이자 미녀로 유명했다는군! 그 재능과 미모가 어찌나 뛰어난지, 일부러 감추기 위해 외부 활동도 하지 않고 앞머리를 내려 얼굴을 가리고 다녔었다던데?!”

“근데 헛소문 아닐까? 아무리 천재라도 이십 대, 그것도 초반에 불과한 소저가 어떻게 천하제이인자인 사왕을 이긴단 말인가?”

“듣기에 협왕 무림맹주께서 먼저 사왕과 싸우다 패하셨다는군. 그 이후 해 소저가 나섰다고 하니 사왕 또한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던 게 아니겠나?”

“오! 그렇다면 좀 말이 되는군! 그리고 그것도 충분히 엄청난 일이지! 아무리 멀쩡한 상태가 아닌 사왕이라도 누가 감히 그와 대적할 수 있단 말인가?”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라니까! 설풍이란 자의 등장에 사파놈들 좋아하는 꼴 보는 게 눈꼴시었는데, 이제 드디어 그자 따위는 비교도 안 되는 정파의 신성이 나타난 것이지!”

“크으! 검성님의 딸이라니! 난 그분의 의지가 끊어진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 제일 기쁘군!”

무림인들 중 특히 정파인들의 반응은 더욱 뜨거웠다.

그녀가 모든 정파인들의 우상인 검성 해운백의 딸이라는 사실과 얼마 전 사파인들의 우상으로 등극한 설풍에 대한 반감, 그리고 그녀가 꺾은 사람이 사파인들의 지존인 사왕 괴갈현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또한 그녀의 미모에 대한 호응도 많았다.

“해 소저의 미모가 그렇게 뛰어나다며?!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셔서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다던데?!”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게 말이 되나?”

“어허! 하오문 최고의 기록관인 만통자가 그녀를 직접 보고는 그녀는 천하제일미가 아닌 고금제일미임에 틀림없을 거라고 말했다네! 오죽하면 스스로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했겠나?!”

“그, 그래? 그 정도란 말인가?”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점차 해청연에 대한 정보가 사람들에게 널리 풀리기 시작하자 그녀의 존재는 순식간에 찬란히 떠오르는 태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모든 정파인들의 우상이었던 천하제일협객 검성의 딸.

직접 본 이들이 모두 천하제일미가 틀림없다며 장담할 정도의 빼어난 미모.

무엇보다 이십 대의 나이로 천하제이인자인 사왕을 꺾은 엄청난 무위까지….

무엇 하나 그녀에게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덕분에 그녀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지 불과 열흘도 지나지 않은 지금, 그녀는 이제 당대의 절대자가 아닌 고금제일인인 뇌신과 검신의 뒤를 이을 사람으로 인정받게 된 상태였다.

‘천하제일미 천의성녀 해청연’

이것이 그녀가 최근 얻게 된 별호였다.

그런 그녀는 현재 무림맹에서 머물며 몸을 추스르고 있는 중이었다.

사왕에게 심장이 꿰뚫렸던 상처와 그 이후 무리하게 사왕을 협공했던 여파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림맹의 맹주실.

주변에 맹주 모용검과, 결허사태와 마원웅의 두 혈마인까지 세워둔 해청연은 원래 모용검이 앉아야 했을 태사의에 편히 앉아 과일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부복한 제갈지강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그녀에게 진행 사항을 보고했다.

“지존에 대한 무림인들의 시선, 특히 정파 무사들의 시선은 이제 지존과 검성을 거의 동일시하게 된 상태입니다. 이제부터는 설사 지존께서 어떤 일을 하시든 그 일이 협의를 행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이 짧은 시간 해청연의 명성이 이렇게 드높아진 이유는 제갈지강의 공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갈지강은 이것을 앞으로 무림맹을 집어삼키기 위한 사전공작이라고 설명했다.

“지존께서 모용검에게 정당한 무림맹의 맹주 자리를 물려받게 되신다면 여러 가지 공작을 통해 혈교에 대한 인식을 순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럼으로써 결국 혈교도들에게 억울하게 지워진 무림공적이란 낙인도 벗을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해청연은 그 말을 들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무림맹의 맹주가 되어 혈교 천하를 이루다니.

그 효율성과 효과성에 있어서도, 천하인들을 엿 먹인다는 즐거움에 있어서도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계책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이제까지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나 후회스러울 정도였다.

그녀는 즐거운 표정으로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모용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지금 똥 씹은 듯한 표정으로 그녀의 앞에 부복한 제갈지강을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그의 표정마저도 해청연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 선우진이란 아이는 어떻게 됐지?”

그러자 제갈지강이 살짝 당황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 그게 현재 형산파에 남해성녀와 복건용가의 정예들이 머물고 있어 정확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형산파에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은 해청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아직 해청연의 영혼을 완전히 집어삼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선우진을 건드리는 건 무리한 일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선우진의 존재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확실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사왕 놈이 그때 내 존재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던 눈치였단 말이지. 그것도 역천혈마라는 것까지도 말이야.”

그 사실은 계속해서 그녀의 마음을 찝찝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왕이 선우진의 지인인 설풍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안다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역천혈마라는 것까지 알고 있다는 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검성 놈이 남겨놓은 망령이 하나가 아니었던 건가? 아니면 설마… 뇌신?”

그렇게 중얼거렸던 해청연은 자기도 모르게 가볍게 몸을 떨었다.

백 년 전 뇌신에게 가졌던 두려움이 영혼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문득 얼마 전 죽였던 빙공을 쓰던 봉두난발의 무사, 마유겸을 떠올렸다.

‘그때 검신의 망령인 그놈은 꼭 뇌신도 함께 왔다는 듯이 얘기했었지.’

물론 정황상 그 말은 거짓일 확률이 높았다.

자신을 겁먹게 하려는 허세일 확률이 말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해청연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뇌신 그 지독한 놈은 검신과는 또 궤를 달리했다.

검신이 신화경에 달한 고수이기 때문에 무서운 자였다면 놈은 그냥 그 존재 자체가 끔찍한 자였기 때문이었다.

그 지독한 악운과 위기 대처능력, 끈질긴 근성.

설사 신화경이 아니라고 해도 그 존재만으로도 절대 만만하다고 단언할 수 없는 자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해청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제갈지강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선우진이란 놈이 어디로 갔다더냐?”

그녀의 싸늘한 목소리에 제갈지강은 덜덜 떨며 대답했다.

“저, 절강성으로 갔을 거라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해청연이 목소리를 높여 되물었다.

“절강성이라고?!”

해청연은 이제 여유를 가장할 수 없었다.

절강성이 바로 뇌신과 검신, 그 지독한 형제들의 고향이었기 때문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절강성에는 대체 왜?!”

그러자 제갈지강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 아마도 안탕산에 은거 중인 검제를 만나러 간 것 같다고 합니다.”

“…검제?”

해청연은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뇌신의 망령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좀 더 신경이 쓰였지만, 검제라는 자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해청연은 이번에 사왕과 싸우며 거의 죽을 뻔했었다.

화경의 고수 세 명을 대동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패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건 이 시대의 최강자들이 그녀에게도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검제라는 자가 진짜 사왕보다 강하다면 자신보다 강할 것임에 틀림없다는 얘기도 될 테고 말이다.

해청연은 제갈지강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검제를 처리해야겠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 갑작스러운 질문에 제갈지강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가는 황급히 대답했다.

“그, 그러려면 지난번 사왕 때처럼 합공을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가 은거한 안탕산 주변에 수많은 그의 추종자들이 상주하고 있기에 조용히 처리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게다가 사파인 사왕 때와는 달리 그를 제거할 명분도 부족하지요.”

그러자 해청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방법을 찾아내라.”

그녀의 명령에 제갈지강은 땅에 머리를 박으며 소리치듯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존!”

그리고 잠시 그 상태로 머리를 굴리고 있던 제갈지강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을 때, 그의 눈은 방금 떠올린 생각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사왕련과 정사대전을 벌이시지요, 지존.”

그 말에 해청연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되뇌었다.

“정사대전?”

그러자 제갈지강이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왕을 잃은 사왕련은 현재 근 백 년 중 가장 약화된 상태입니다. 만약 지존께서 사파척결을 명분으로 내세워 사왕련을 치신다면 정파의 영웅이 되시는 것과 동시에 다음 대 무림맹주로서 확실시되실 것입니다!”

그 말에 해청연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되물었다.

“난 분명히 검제를 처리할 방법을 찾으라고 했을 텐데?”

그러자 제갈지강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예! 지존께서 정사대전을 일으키신다면 사왕련의 본진인 강소성 바로 밑, 그러니까 절강성 안탕산에 있는 검제 추종자들을 얼마든지 끌어들일 수 있으실 겁니다.”

그 말에 해청연이 드디어 깨달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호오, 놈이 은거해 있는 곳의 주변을 비운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검제 자체를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오호!”

꽤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던 해청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 하나 잡자고 정사대전까지 여는 건 너무 규모가 과하게 커지는 게 아니냐?”

그러자 제갈지강이 송구스럽다는 듯 다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제가 정사대전을 말씀드린 건 사실 꼭 검제 때문만은 아닙니다.”

“음?”

제갈지강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지금 사왕련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 말에 해청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사왕련이?”

***

해청연이 제갈지강과 정사대전에 관한 얘기를 나누기 며칠 전, 선우진은 서둘러 형산파로 복귀했다.

검제가 은거했던 안탕산에서 나온 후 바로 사왕의 사망 소식을 들을 수 있었기에 조금도 망설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빛줄기가 되어 형산파에 날아든 선우진은 해남파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고, 그곳에 착지하자마자 설풍을 찾았다.

“형님! 설풍 형님은 어디 계십니까?!”

그러자 그곳에서 머물고 있던 해남파의 용왕지궁 유해응이 드물게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장문인! 설풍 공자라면 사왕의 일이 터지자마자 사왕련으로 돌아갔소!”

그 말에 선우진은 살짝 안심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행이로군요. 혹시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아직 이곳에 있을까 걱정했었는데….”

그러자 옆에 있던 일도살경 오익덕이 호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으하하! 장문인이 없어도 이쪽엔 묘아란 소저가 있었지 않소? 그녀가 충격에 빠진 설풍 공자를 재촉하더구려. 빨리 사왕련으로 가 중심을 잡아야 한다며 말이요. 묘아란 소저도 지금 그와 함께 있소이다.”

그 말에 선우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역시 묘 소저입니다.”

지금 현재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선우진이 혈교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자신했던 이유인 사왕이 죽었고, 합류시킨다면 승리가 확실해질 거라고 생각했던 검제의 존재가 허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사왕련의 세력마저 잃어버린다면 무림맹을 장악한 저들에게 절대로 대응할 수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사왕련의 남은 세력들을 서둘러 추스르고 집결시키는 일이 가장 중요했는데, 그 부분을 자신이 없는 사이 묘아란이 깨우쳐 준 모양이었다.

믿을 수 있는 모사의 존재라는 건 이래서 든든했다.

선우진은 유해응과 오익덕을 향해 말했다.

“사람들을 모아주시겠습니까? 바로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유해응과 오익덕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장문인!”

선우진은 먼저 회의실로 향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상황을 정리해봤다.

상황은 매우 불리했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정보는 저들보다 이쪽이 좀 더 많이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무림맹에서 탈출한 한 명의 존재 덕분이었다.

‘사마여량. 그래도 그를 만날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지.’

사마여량은 전대 무림맹주이자 전대 협왕인 천기강 시절 군사로 활약하던 천중지자 사마중손의 조카였다.

하지만 천기강과 사마중손이 정혈대전에서 사망하고 제갈지강이 실권을 장악하자, 그는 사마중손의 가문인 사마세가를 철저하게 견제하고 억압했었다.

사마여량은 그 와중에서도 뛰어난 지혜로 당대의 협왕 모용검과의 연결고리를 마련할 수 있었던 자였다.

그는 언젠가 제갈지강의 탐욕으로 둘 사이가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그 부분을 모용검에게 경고해줬던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었지.’

시간이 지나자 사마여량의 예언대로 모용검과 제갈지강은 결국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모용검은 비밀리에 사마여량을 불러 자신의 암중모사로 삼았었다.

모용검이 제갈지강을 실각시키고 운남성으로 내쫓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사마여량의 지혜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 일이 있은 후로도 모용검은 여전히 사마여량을 자신의 암중모사 이상으로는 쓰지 않았다.

사마여량은 맹주실과 소리관이 통해 있는 비밀 골방에서 모용검이 필요할 때만 조언을 해주는 목소리로만 존재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 상황에 사마여량은 매우 비참함을 느꼈다고 했다.

그가 조언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잠깐뿐, 그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을 그는 골방에 앉아 여인들과 노닥거리기나 하는 맹주의 소리를 들으며 지내야만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무림맹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그 일이 벌어졌던 것이었다.

제갈지강이 데리고 나타난 자들에 의해 맹주가 갑자기 제압되어 버리는 사태가….

‘그녀는 자신을 역천혈마라고 했소. 내 기억이 맞다면 백 년 전, 뇌신과 검신의 시대에 오백 년 만에 깨어났었다는 혈마가 바로 그 역천혈마 과염이었지. 그런 그녀에게 제갈지강은 완전히 섭혼된 것 같더구려. 그녀를 지존이라고 부르며 극도로 굴종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말이오. 그리고 그녀가 데리고 온 두 명의 고수들을 맹주는 결허사태와 마원웅이라고 부르며 놀라워했었소.’

‘결허사태와 마원웅이라고요? 그들이라면…?’

‘맞소. 지난 무황총 사태에 죽었다고 알려진 점창파의 장문인 마원웅과 정혈대전 때 사망한 아미파 장문인 결허사태요.’

지난 삶을 겪은 선우진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혈마인이겠군요.’

그러자 사마여량은 놀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었다.

‘맞소! 역천혈마라는 그녀가 그 두 사람을 그렇게 말했었소!’

상황을 파악한 선우진은 일단 하늘에 감사했다.

사마여량이 맹주실과 떨어진 골방에서 소리만 들을 수 있었기에 그 상황을 생생히 들으면서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바로 무림맹을 탈출해 검제를 찾아 안탕산으로 왔던 것도 하늘의 도움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저들에게 화경의 고수가 둘 뿐이라는 착각을 바로잡을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선우진은 그에게서 얻은 정보를 일단 회의에서 공유하고 그간 생각했던 대책에 대해 논의해 볼 생각이었다.

상황이 매우 안 좋았긴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절망적인 건 아니라는 게 선우진의 판단이었다.

‘최소한 지난 삶보단 훨씬 낫지. 적어도 가능성 있는 방법들이 아직…!’

그런 생각을 하며 회의실로 걸어가던 선우진은 문득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의 눈앞에 너무도 그리워하던, 하지만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가 감격스런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르신!”

그러자 상대가 선우진의 기억과 똑같이 호탕한 모습으로 웃으며 그를 반겨줬다.

“하하하하! 오랜만이군. 잘 지냈는가?”

그는 바로 선우진에게 존경스러운 어른의 모습이란 게 무엇인지를 처음 알게 해줬던 그의 우상, 검성 해운백이었다.

제갈지강의 음모에 의해 죽었다고 알려졌었던 그가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던 것이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이미 서신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직접 본 그의 모습이 감격스럽지 않을 수는 없었다.

선우진은 촉촉해진 눈빛으로 그에게 달려갔다.

“어르신!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그러자 검성이 특유의 너스레를 부리며 대답했다.

“내 몸은 아주 쌩쌩하다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그런지 꼭 다시 태어난 것 같더군, 하하하하!”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검성은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선우진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걱정해줘서 고맙네. 그리고… 청연이를 구하러 혈교로 쳐들어가 줬다는 얘기도 들었네. 그것 또한 고맙네.”

하지만 거기까지 말한 검성의 눈빛은 이내 살짝 어두워지고 말았다.

그가 씁쓸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청연이가 자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도 들었네. 자네가 그 애를 위해 그렇게 애써줬는데….”

그 말에 선우진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 일이 청연 소저가 했던 일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소저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겠지요. 역대 최강의 혈마라는 역천혈마의 빙의를 누가 견뎌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저 제때에 그녀를 구해내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러자 검성 해운백은 선우진에게 따듯하게 웃어주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마음이 좀 가벼워졌네.”

하지만 그렇게 웃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씁쓸하고 어두워 보였다.

그가 문득 진중한 눈빛으로 말했다.

“만나자마자 이런 얘기를 하게 되어 미안하지만, 자네에게 부탁이 하나 있네.”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조차 좀처럼 없었던 검성의 진중한 부탁이었다.

그의 무거운 분위기에 선우진 또한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말씀하십시오.”

그러자 검성은 결연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그 아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내게 맡겨주시게. 역천혈마의 인형이 된 그 아이를 내가 안식에 들게 해 주고 싶네. 그게… 아비의 역할일 테니 말일세.”

선우진은 그가 왜 이렇게 슬프고 결연한 눈빛을 띠고 있는지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딸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겠다고 결심했던 것이었다.

그런 결심을 해야 했던 그의 가슴이 얼마나 무너졌을지 선우진으로선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에 안타까운 눈빛으로 검성을 잠시 바라본 선우진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어르신.”

그러자 검성이 얼굴을 굳히며 절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디 이해해주시게나. 나는 내 딸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모습도, 다른 이에게 내 딸이 죽는 모습도 볼 자신이 없다네. 차라리….”

그때 선우진이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어르신. 제 말은 청연 소저를 죽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 청연이를 죽일…. 뭐라고?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뒤늦게 선우진의 말을 이해한 검성이 눈을 크게 뜨고는 그를 바라봤다.

역천혈마를 없애기 위해, 천하의 안정을 위해 딸을 죽여야 한다는 걸 알지만, 아버지인 그가 딸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찢어져 버릴 것 같은 고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선우진이 딸을 죽일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해준 것이었다.

그로선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었다.

선우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찾았습니다, 어르신. 그녀에게서 역천혈마를 꺼낼 방법을요.”

그렇게 말한 선우진은 등 뒤에 매고 있던 세 자루의 검 중 한 자루를 뽑아 검성에게 보여주었다.

바로 선우세가의 신물인 홍연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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