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사왕련의 후계자
회의를 하기 직전 선우진은 한 통의 서신을 더 받을 수 있었다.
바로 설풍으로부터 온 서신이었다.
그 서신에는 사왕련의 현재 상황과, 사왕의 비밀 호위가 목격했다는 해청연과 사왕의 전투에 관한 자세한 상황 설명이 쓰여 있었다.
선우진은 다른 사람들도 서신의 내용을 알 수 있게끔 그것을 돌려 읽게 한 후 그사이 홀로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서신을 읽은 검성 해운백이 허탈한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모용검마저 역천혈마의 명령을 듣게 되었단 말인가? 그럼 아직 보이지 않는 혈마 전무광을 제외하더라도 화경의 고수만 네 명이라는 얘긴데….”
그 말에 주위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화경의 고수만 네 명.
실로 말도 안 되는 전력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선우진 측이 보유한 화경의 고수가 남해성녀 시서우, 천의검성 해운백, 여령색마 손은상의 세 명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숫자에서 이미 밀리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었다.
그러자 여령색마 손은상 또한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게다가 개개인의 무력도 이쪽이 높다고 볼 수 없어요. 무엇보다 사왕에겐 밀렸다곤 하지만 그와 거의 비슷한 무위를 지닌 것으로 밝혀진 역천혈마를 상대할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최소한 저로선 도저히 상대할 자신이 없군요.”
그러자 다른 화경의 고수 검성 해운백과 성녀 시서우 또한 어두운 표정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이 자리에 있는 세 명 중 가장 무공이 강한 사람을 뽑는다면 그 사람이 바로 손은상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상대할 수 없다면 다른 두 사람 또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역시 어두운 표정으로 얘기를 듣고 있던 형산파 장문인 청공진인이 탄식하듯 말했다.
“그럼 최고수들끼리의 정면대결로는 이제 승산이 없다는 얘기로군요. 게다가 만약 당대의 혈마 전무광까지 합세하기라도 한다면….”
“으으음.”
“그건….”
청공진인의 말에 회의실의 모두는 침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게까지 된다면 도저히 승산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비관적인 상황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복건용가의 가주 용우신이 말을 더했다.
“최고수들끼리의 정면대결만이 아닙니다. 사왕이 죽어 사왕련이 혼란에 빠진 상태이니 이제 세력 대 세력의 싸움으로도 밀린다고 봐야 할 겁니다. 지금 해청연 소저에 대한 무림맹 무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볼 때 그들은 무림맹을 거의 완벽하게 장악했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이니 말입니다.”
그 말에 검성 해운백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딸이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건만 그게 오히려 무림의 해악이 되어 버리고 말다니, 그로선 이 상황이 제발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용우신의 말 이후로는 모두가 막막한 표정이 되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였다.
해남유가의 가주 유해응이 문득 선우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장문인,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소?”
그 말에 모두가 선우진 쪽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이 상황에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냐마는 그래도 이제껏 그가 해왔던 일들을 알기에 혹시나 하는 한 가닥 기대를 담은 시선들이었다.
그러자 선우진이 천천히 눈을 뜨고는 입을 열었다.
“일단 세력 대 세력의 싸움으로 가져가는 것은 불가합니다. 양쪽 모두 너무 피해가 커질 것이고, 심지어 그 피해는 혈교가 아닌 무림맹과 사왕련의 피해가 될 테니까요. 싸움이 길어지고 피해가 커질수록 혈교 놈들만 점점 더 유리해지겠지요.”
그 말에 모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맞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손은상이 입을 열어 물었다.
“동생의 말이 맞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세력 대 세력의 싸움이 아니라면 소수의 싸움으로 끌어가야 한다는 건데 그게 가능하긴 할까? 우리가 유리하지 않다는 건 둘째치고 놈들은 이제 무림맹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는데 말이야. 놈들과 싸우기 위해선 무림맹 무사들을 뚫고 들어가야만 하는 상황이잖아?”
그 질문을 들은 선우진은 문득 빙긋이 웃음 지었다.
어쩐지 그건 별문제 없다는 듯한 의미로 보이는 여유 있는 웃음이었다.
그 웃음에 장내의 사람들은 이제 약간의 기대가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선우진이 경쾌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그곳으로 들어가서야 당연히 안 되겠죠. 일단 역천혈마가 함부로 무림맹을 움직일 수 없도록 한 뒤, 스스로 밖으로 나오도록 해야만 할 겁니다.”
그 말에 성질 급한 해남오가의 가주 오익덕이 급히 물었다.
“어떻게 말이오? 방법이 있단 얘기요, 장문인?”
그러자 선우진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방법이 있지요. 우리도 제갈지강이 한 것처럼 그대로 돌려주는 겁니다. 여론을 움직이는 거죠.”
그러고는 천의검성 해운백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르신께서 해 주실 일이 있습니다.”
그러자 해운백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래, 뭐든 말만 하게.”
선우진은 씨익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사왕련으로 좀 가주십시오. 그래서 따님과 싸워주셔야 하겠습니다.”
그 말에 해운백은 당황한 표정이 되어 반문했다.
“음? 사왕련? 거기 가서 청연이와 싸우라고?”
하지만 당황으로 가득했던 그의 표정은 이어지는 선우진의 설명을 들으며 점차 감탄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
선우진이 형산파에 돌아와 회의를 하기 며칠 전, 사왕과 해청연의 싸움이 끝나자마자 설풍은 사왕련으로 급히 돌아갔었다.
구심점을 잃은 사왕련이 무너진다면 무림맹을 장악한 역천혈마를 절대 상대할 수 없을 거라는 묘아란의 충고 때문이었다.
그리고 돌아간 사왕련은 그녀의 말대로 사분오열되기 일보직전이었다.
절대자인 사왕의 무위에 눌려있던 사왕련 소속 사파의 거두들, 독립세력인 사왕십삼가의 가주들이 사왕련 본전에 모여 모두 각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절대 무림맹 놈들을 용서할 수 없소! 당장 련주의 복수를 해야만 하오!”
“복수라…. 일대일 대결에서 패배했는데 무슨 명분으로 복수를 한단 말이오? 게다가 그 복수를 누가 해야 하겠소? 련주의 자리도 아직 공석인데?”
“하긴 그 말도 맞군. 일단 공석이 된 련주의 자리부터 채워야겠지. 근데… 누구를 련주로 세운다는 거지? 아직 후계자가 결정된 게 아닌데?”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면 당연히 장자인 괴정기 공자가 련주가 되어야 하지 않나?”
“무슨 소리요?! 괴정기 공자가 무슨 죄를 저질렀고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뻔히 알고 있지 않소?! 지금은 당연히 차남인 괴창기 공자가…!”
“흠, 지금 상황이라면 최근 가장 명성을 떨쳤고 무공도 높다고 알려진 설풍 공자가 되는 게 맞지 않소?”
“흥! 그는 외인이 아니오?! 무공이 높은 걸로만 따진다면 차라리 장로나 사왕십삼가의 가주들 중 한 명이 되는 게 더 맞겠지!”
“그 말도 일리가 있군. 꼭 전 련주의 자손들 중에서만 련주가 나오란 법은 없지 않은가? 사왕은 사파의 최강자를 일컫는 호칭이니까 말이야.”
중구난방으로 터져 나오는 목소리들 중 설풍을 인정하는 목소리는 별로 없었다.
그를 지지하는 사왕십삼가의 가주들이 아직 본전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가장 세력이 큰 이는 진강만가의 가주이자 총관인 만성국이었고, 그는 사왕에 의해 축출당한 첫째 아들 괴정기의 외조부이기도 했다.
때문에 지금 본전 안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만성국의 측근들은 첫째인 괴정기를 다음 대 사왕으로 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서둘러 사왕련으로 돌아온 설풍이 드디어 사왕전 본전에 도착했다.
“설풍 공자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본전의 무사가 목소리 높여 그의 귀환을 알리자 본전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대화를 멈추고는 그를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설풍은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당당히 본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뒤로는 천하삼십육성의 한 명인 삼지신창 감작형과 귀도 백기량, 백골괴마 홍추, 단악패부 고상종 등의 초절정 고수들과 다른 수하들을 대동한 채였다.
그런 그를 보는 시선의 온도는 다양했다.
경계, 증오, 호의, 호기심.
하지만 설풍은 그 모든 시선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본전의 가장 안쪽에 있는 태사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갈 뿐이었다.
그러자 그가 어디를 향하고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의 표정이 확 변했다.
그리고 한 명이 급히 뛰어나와 그의 앞을 막으며 소리쳤다.
“멈추시오, 설 공자!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이오?!”
그는 사왕련의 총관이자 진강만가의 가주인 만성국이었다.
또한 사왕의 첫째 아들 괴정기의 외조부이기도 했다.
그러자 설풍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전대 련주이자 사왕의 정당한 후계자로서 내 자리를 찾아가는 중이오만.”
그 대답에 만성국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누가 정당한 후계자란 말이오?! 대체 누가 설 공자를 후계자로 인정했다고?!”
그러자 설풍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는 후계자 후보 중 한 명으로서 괴정기의 음모를 파헤쳐 사왕련의 안녕에 공헌했소. 또한 호남제일검 위정국을 꺾고 형산파를 무릎꿇림으로써 후계자 중 가장 높은 무위를 지니고 있음을 증명했을 뿐만 아니라 사왕련의 명성을 천하에 떨쳤지. 그런 내가 정당한 후계자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정당한 후계자란 말이오?”
그렇게 말한 설풍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만성국에게 물었다.
“설마 독을 써서 사왕십삼가를 무너뜨리려 했던 당신의 외손자 괴정기라고 말하고 싶은 거요?”
그 물음에 만성국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 얘기를 자신의 앞에서, 그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꺼내다니.
사왕련의 총관이자 사왕십삼가 중 최고의 성세를 떨치고 있는 진강만가의 가주 만성국으로서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수모가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이를 갈며 설풍에게 소리쳤다.
“네놈이 감히…!”
그 순간이었다.
설풍의 눈이 한순간 붉은 흉광을 뿜어내며 그의 몸에서 폭풍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화아아악!
그러자 만성국은 경악한 표정으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설풍이 뿜어내고 있는 기세가 전혀 상상치 못했던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폭풍 같은 기세에 초절정 고수인 만성국조차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두 걸음을 물러서야 했을 정도였다.
설풍은 붉은 광채를 뿜어내는 두 눈으로 만성국을 쏘아봤다.
그러고는 그를 압박하듯 다가가며 물었다.
“감히? 네가 지금 감히 사왕의 후계자에게 ‘감히’라는 말을 썼느냐?”
만성국은 설풍의 강력한 존재감에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러자 그와 같은 노선인 장로 한 명이 만성국의 앞을 가리며 설풍을 막아섰다.
천하삼십육성의 한 명인 흑사권군 요추곡이었다.
“설 공자, 이건 좀 지나치군. 아무리 그래도 본련의 어른에게…!”
그 순간이었다.
설풍의 신형이 한순간 용권풍처럼 맹렬히 회전하며 요추곡을 후려쳤다.
화아악!
그 갑작스런 공격에 요추곡은 인상을 팍 찡그리고는 팔을 들어 설풍의 호조수를 방어하며 소리쳤다.
“정말 무례하기 그지없구…!”
하지만 그는 그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설풍의 호조수가 방어한 그의 팔을 거침없이 부서뜨리고는 머리까지 박살 냈기 때문이었다.
퍼석!
적안광혈공과 전륜박으로 증폭된 일격의 위력이었다.
그 엄청난 사태에 장내에 있던 이들은 입을 떡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설풍은 그런 그들을 오연한 눈빛으로 둘러보며 물었다.
“또 나설 사람이 있는가?”
모두를 내려다보는 듯한 오만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이제 아무도 그에 대한 불만을 입을 담을 수 없었다.
기습이라곤 하지만 설풍이 무려 천하삼십육성의 한 명인 요추곡을 단 일 격에 격살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장내에 있는 누구도 그런 무위를 보여줄 자신이 없었다.
또한 그런 그를 상대할 자신도 없었다.
설풍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자 만성국을 한번 스윽 쳐다보고는 다시 태사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만성국이 이를 악물고 다시 소리쳤다.
“사왕의 후계자는 설 공자 한 명이 아니오! 최소한 다른 후계자들의 의견을 들을 때까진 기다려 봐야 하지 않겠소?!”
그 말에 번해채가의 가주 채서광이 급히 동의했다.
“맞소! 다른 후계자들이 다 오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사왕의 자리에 앉을 수는 없소이다! 더군다나 그는 괴가의 자손도 아닌 외인이 아니오?!”
채서광이 속한 번해채가는 사왕의 셋째 아들 괴항기의 외가이기도 했다.
그들의 반발에 설풍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그들을 돌아봤을 때였다.
문득 누군가 큰 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소! 설풍 형님은 분명히 우리 사왕의 일족이고 나는 형님을 정당한 후계자라고 이미 인정했으니까!”
사람들은 깜짝 놀라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들은 볼 수 있었다.
본전의 문 안으로 씨익 웃으며 걸어 들어오고 있는 두 명의 청년들을….
그중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사왕의 둘째 아들이자 유력한 후계자 후보였던 괴창기였다.
자존심이 하늘까지 닿아 자신보다 강한 자가 아니면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던 그가, 설풍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정당한 후계자라고 인정했던 것이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는 잘생긴 청년 또한 입을 열어 동의했다.
“저 역시 설풍 형님이 정당한 후계자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괴가와 설가가 한 핏줄인데 애초에 외인이란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지요.”
그렇게 말한 그는 사왕의 넷째 아들인 괴서기였다.
이로써 사왕의 아들들 중 후계자의 자격을 유지하고 있던 두 아들이 모두 설풍이 후계자라는 사실을 인정했던 것이었다.
그러자 본전 안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대 사왕련주가 이미 정해졌다는 사실을….
하지만 총관 만성국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손자 괴정기를 그 꼴로 만든 설풍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영향력을 동원해서라도 설풍이 다음 대 사왕련주가 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련주의 자리가 후계자들끼리의 담합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지 않소! 련주께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신 것도 아니니 그걸 결정하기 위해선 모든 사왕련 무인들의 여론을 다 반영해야…!”
설풍은 이제 악을 쓰고 있는 만성국을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었지만 이제는 굳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다.
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이미 자신이 후계자임을 인정했다는 걸 모두의 눈빛에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를 해결해 줄 사람이 따로 있기도 했다.
만성국이 기를 쓰고 설풍을 반대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눈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마치 허공에서 튀어나온 듯 갑작스러운 등장이었다.
그러자 만성국은 깜짝 놀라 말을 멈추고는 황급히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
만성국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이는 얼음같이 냉정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련주님의 마지막 유언을 전하겠소.”
그러자 문득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저 사람은… 맹휘염?!”
“련주님의 그림자가 어떻게 이곳에?!”
그는 사왕십삼가 중 비주맹가의 최고수이자 사왕 괴갈현의 오랜 벗인 표영도군 맹휘염이었다.
또한 그는 스스로 사왕의 그림자가 되기를 맹세하고 평생을 음지에서 지낸 사왕의 최측근이기도 했다.
그가 사람들을 향해 무심하게 선언했다.
“련주님께선 설풍 공자를 후계자로 세우라 명하셨소. 그리고 그 명령에 반대하는 자들의 처리 또한 제게 명하셨소.”
그렇게 말하는 맹휘염의 무심한 눈은 만성국에게 못박혀 있었다.
만성국은 이제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처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설풍은 이제 다시 태사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뒤돌아 사람들을 한번 오연하게 둘러보고는 천천히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장내의 사람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으며 외치기 시작했다.
“련주님을 뵙습니다!”
“련주님을 뵙습니다!”
처음에 한 명, 두 명 무릎을 꿇었던 사람들은 물결이 번져가듯 점점 주변으로 퍼져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마침내 본전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설풍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마지막 사람의 목소리가 본전 안에 울려 퍼졌다.
“련주님을 뵙습니다!”
설풍은 입꼬리를 올려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공석이었던 사왕련주의 자리가 채워진 순간이었다.
설풍은 슬쩍 시선을 돌려 자신의 부하들 뒤에 서 있던 묘아란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묘아란이 생긋 웃으며 전음을 보냈다.
- 아주 잘하셨어요, 설 공자. 역시 실전에 강하시네요.
그 말에 설풍 또한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사실 그에게 최대한 오만한 자세로 나가 압도적으로 강자 한 명을 죽여 버려야 한다고 말해줬던 사람이 바로 묘아란이었다.
힘을 숭상하는 사왕련이기에 압도적인 힘과 오만한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고 조언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밖에서 만났던 괴창기와 괴서기, 그리고 표영도군 맹휘염을 순차적으로 나타나도록 계획한 사람 또한 묘아란이었다.
설풍은 역시 앞으로 사왕련을 운영하기 위해선 그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아무래도 아우인 선우진을 잘 설득해 봐야만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