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점입가경(漸入佳境)
무림맹 무사들이 사왕련에 대한 반감이 아닌 모용검과 해청연에 대해 의구심을 품기 시작하자 정사대전의 분위기도 시들해지고 말았다.
박수도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날 텐데 이젠 무림맹 무사들에게서 싸울 의지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설풍과 사왕련 무사들은 일단 행동을 멈춘 채 무림맹의 상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무림맹 내부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하루하루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만 하는 전선에 관한 제보들과 그럴수록 점점 커져 가는 수뇌부에 대한 의구심들.
사방에서 빗발치는 진실을 밝히라는 요구들과 이젠 무림맹 내부의 무사들에게서조차 쉽게 볼 수 있는 불신의 눈초리들.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해청연은 맹주실의 태사의에 앉아 그녀의 앞에 납작 엎드린 제갈지강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무림맹을 내 손 안에 넣게 해주겠다고?”
그러자 제갈지강이 덜덜 떨며 대답했다.
“요, 용서하십시오, 지존! 속하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해청연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곧 죽어도 자신의 무능 때문이라는 말은커녕 죄송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 무능하고 뻔뻔한 자를 굳이 계속 살려둘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었다.
물론 역천혈마 과염 또한 한때 천재라 불렸던 여인이기에 지금 상황을 제갈지강의 탓으로만 돌리기엔 무리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갈지강의 효용은 무림맹을 손에 넣기 위함이었을 터, 그게 물 건너갔다면 굳이 그를 살려둬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 또한 들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해청연은 마지막 기회를 준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물었다.
“만회할 방법이 있겠느냐?”
그러자 제갈지강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예, 지존!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게 마치 대단한 묘수라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한 제갈지강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해청연은 다시 한번 인상을 팍 찡그렸다.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보고 기다리라고?”
그러자 제갈지강이 황급히 대답했다.
“예, 지존! 일단 준비했던 결허사태와 마원웅의 얼굴을 보여주시고 시간을 끌며 천천히 해명할 수 있는 것들만 먼저 해명해 주시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저들은 결국 자신과 상관없는 전선의 일들에 관해 흥미가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 다른 사건들을 일으켜 저들의 관심을 분산시킨다면 반드시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 것입니다!”
그의 설명을 들은 해청연은 아까보단 약간 풀어진 표정으로 자신의 다홍빛 입술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흠, 소나기는 피해 가란 뜻인가?”
그녀 또한 오랜 시간을 살아왔기에 성미에 안 맞는 건 둘째 치고라도 제갈지강의 말이 충분히 일리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양 들끓어 올라도, 시간이 지나면 또 금방 시들해지는 게 개돼지들의 본성이 아니던가.
그러니 대충 시간을 끌며 뭉갠다면 이 사태 또한 그저 그냥 지나가게 될지도 몰랐다.
해청연은 잠시 고민했다.
제갈지강의 말에 따라 시간을 끌며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릴지, 아니면 그냥 무림맹을 포기해 버릴지를 말이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두 선택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인물이 갑자기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누가 나타났다고?”
“그, 그것이….”
이번에 나타난 이는 바로 혈랑검제 반중양이었다.
당대 무림의 천하제일인인 그가 드디어 은거를 깨고 안탕산에서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검제는 현재 천하의 주목을 받고 있는 무림맹의 수뇌부에 대해 이렇게 선언했다.
- 뇌신과 검신의 진전을 이은 본인은 혈교의 무리들에게 섭혼당한 이를 구분할 수 있다. 내 직접 무림맹으로 찾아가 그들이 혈교의 마수에 당했는지를 확인해 볼 것이다. 그러니 사왕련과 무림맹의 무인들은 잠시 싸움을 멈추어라!
무림인들은 다시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무려 칠 년 만에 등장한 진짜 천하제일인 검제의 소식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무공이 뇌신과 검신의 진전을 이은 것이었다니.
심지어 무림맹 수뇌부들의 정체를 밝혀줄 수 있다니.
지금 이 상황에서 이보다 더 흥미로운 전개가 있을 수 없었다.
모든 무림인들의 이목은 이제 그의 행보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그 소식을 들은 해청연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뭐, 뭐라고?! 뭐가 어쩌고 어째?!”
이미 천하제이인자라는 사왕에게 일대일로 패한 적이 있기에 천하제일인인 검제의 존재는 당연히 해청연에게도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경악한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뇌, 뇌신과 검신의 진전을 이었다고?!”
역천혈마 과염의 영혼 깊숙한 곳에는 뇌신과 검신에 대한 두려움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대의 천하제일인이 바로 그들의 진전을 이었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자신을 확인하러 오겠다니,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절대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해청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아, 안 돼. 놈이 오도록 놔둬서는….”
지난 삶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뇌신과 검신의 그림자가 이번 삶에서도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
검제가 안탕산을 내려왔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하루 전, 선우진은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했었다.
“바로 내일, 검제가 등장할 겁니다.”
그러자 모두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던 중 여령색마 손은상이 제일 먼저 그에게 물었다.
“검제는 지금 주화입마에 빠져 의식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 질문에 선우진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역천혈마는 알지 못하니까요.”
“응?”
손은상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검성이 사왕련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바로 돌아와 있었던 묘아란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가짜 검제를 등장시키겠다는 거로군요.”
그녀의 말에 선우진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번에 안탕산의 산장에서 만난 무극패도 표서극 노사께서 가짜 검제 역할을 해주실 겁니다.”
그러고는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역천혈마 과염은 이미 사왕에게 일대일로 밀린 적이 있기에 그보다 강하다고 알려진 검제의 존재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검제가 지금 등장하는 것이지요. 게다가 저는 가짜 검제에게 뇌신과 검신의 진전을 이었고 그녀가 혈교도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공언하도록 시켰습니다. 뇌신과 검신은 백 년 전부터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던 인물들이니까요.”
그러자 바로 상황을 이해한 듯한 묘아란이 환한 얼굴로 감탄했다.
“역시!”
용가가주 용우신은 묘아란처럼 바로 깨닫지는 못했다.
하지만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며 선우진의 말을 되뇌었다.
“그러니까… 역천혈마는 뇌신과 검신을 두려워하고 검제를 신경 쓰고 있다. 그런데 검제가 그 모든 걸 다 한 몸에 지닌 채 나타나는 거로군. 심지어 그녀가 혈교도임을 확인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고서. 그럼 그녀로서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겠군. 그럼 이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그의 말에 손은상이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개구쟁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검제를 잡으러 밖으로 나와야겠구나?! 사왕에게 그랬듯 세 명의 화경 고수들을 대동한 채 말이야!”
그 말에 선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것도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몰래 나올 겁니다. 이번에도 세 명의 화경 고수일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동원할 수 있는 최강의 무력을 동원해서 말이지요.”
그러자 남해성녀 시서우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그때가 바로 역천혈마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겠군요.”
그녀의 말에 다른 사람들 또한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중 형산파 장문인 청공진인만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유일한 기회인 건 맞겠지만… 과연 그녀를 잡을 수 있겠소? 정면으로 붙어도 우리 쪽의 전력이 밀린다고 하지 않았소?”
그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의 말처럼 저쪽은 사왕급 고수인 역천혈마에 더해 세 명의 화경고수를 보유한 반면, 이쪽은 설사 사왕련에서 검성이 돌아온다고 해도 화경의 고수가 세 명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전력이 열세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자 선우진이 말했다.
“검성 어르신과 설풍 형님, 그리고 사왕의 비밀 호위인 표영도군 맹휘염이란 사람이 절강성으로 바로 오실 겁니다. 설풍 형님의 말로는 맹휘염이란 분은 천하삼십육성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해당하는 무력을 보유하고 있다더군요.”
천하삼심육성 중에서도 최상위권의 무위라면 화경의 벽 앞에 멈춰 있다는 뜻이었다.
그 정도면 분명 대단한 무위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그 정도론 화경의 고수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벽을 넘었는가 넘지 않았는가의 차이는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선우진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한 명 더, 괴선께서 오시기로 했습니다.”
“!”
그 말에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용우신이 급히 물었다.
“괴선이라면 청성괴선 청광진인을 말하는 건가?”
선우진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분이 맞습니다. 제 의형인 화영빈 형님을 통해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와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오오오!”
청성괴선 청광진인이라면 독안괴검 서일과 함께 천하오괴로 분류되는 화경의 고수였다.
그러니 이쪽도 드디어 화경의 고수가 네 명이 된 것이었다.
비록 역천혈마의 무공이 높다고는 하지만 협왕 모용검을 비롯한 나머지 세 명이 화경 초입임을 감안할 때 어느 정도 균형이 맞춰졌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자 드디어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선우진은 그런 그들을 향해 진중하게 말했다.
“그리고 역천혈마를 상대하는 역할은 검성 어르신과 제가 할 생각입니다. 다른 분들은 나머지 화경 고수들을 상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남해성녀 시서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두 분이서 역천혈마를 말입니까? 하지만 그건…. 선우 공자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차라리 저희 중 두 명이 그녀를 상대하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선우진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제 능력이야 당연히 부족하겠지요. 다만 제게 다른 계획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 예상이 맞다면 아마 한 명이 더 저희를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선우진은 문득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선우세가의 신물 홍연검을 바라봤다.
어떤 원리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자신에게 또 한 번의 삶, 그리고 또 한 번의 기회를 선물해 줬던 바로 그 검이었다.
그리고 선우진은 이번에도 이 검에게 다시 한 번의 기적을 기대해 볼 생각이었다.
***
얼마 전, 아버지 선우중이 선우진에게 홍연검을 건네줬을 때 묵랑은 그 검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었다.
- 이 검은… 검이라기보단 법구로군. 봉마검(封魔劍)이야.
‘예? 봉마검이요?’
- 그래, 세월이 오래된 듯 많이 훼손되어 있긴 하지만 이 검날에 새겨진 무늬는 분명 봉마진임에 틀림없네. 사특한 존재를 봉인하는 진법이지. 호오, 그것도 무척 고위의 봉마진이로군. 대단한 수준인데? 이 검으로 가슴을 찔렀는데 과거로 되돌아왔었다고?
‘예, 이 검 때문이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 상황 자체는 분명히 그랬습니다.’
선우진은 이미 묵랑에게 과거로 회귀했었다는 사실을 밝힌 상태였다.묵
랑은 그 사실에 무척이나 흥미로워하며 전부터 그 원인일지도 모르는 홍연검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홍연검을 받자마자 주의 깊게 살펴봤던 것인데 엉뚱하게도 그 검에서 봉마진을 발견한 것이었다.
- 흠, 시간과 관계된 진법은 분명히 아닌데 이상하군. 아무튼 이건 분명히 사특한 존재를 봉인하는 진법이 틀림없네. 그리고 지금 자네에게 가장 유용하게 쓰일 진법이기도 하지.
그 말을 들은 선우진은 순간 눈을 번뜩였다.
사특한 존재를 봉인하는 진법이 지금 유용하다면 그 의미는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걸로 역천혈마를 봉인할 수 있는 겁니까?’
- 바로 맞혔네. 이걸로 해 소저의 심장을 찌를 수만 있다면 놈을 이 검에 봉인할 수 있을 걸세.
그 말에 선우진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심장이요? 하지만 심장을 찌른다면…?’
- 아, 걱정 말게. 깔끔하게 심장을 찌를 수 있고, 이 봉마진이 제대로 작동하기만 한다면 역천혈마만 봉인할 뿐 그녀는 무사할 수 있을 걸세. 이 진법에는 대상을 보호해 주는 효과도 있거든. 역천혈마를 봉인하고 검을 뽑을 때까지 그녀를 지켜줄 걸세.
‘아!’
선우진은 이제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홍연검을 다시 바라봤다.
이 검에 그런 효용이 있었다니 마치 해청연을 구해주라고 하늘이 선물해 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선우진은 머릿속으로 해청연의 얼굴을 떠올리며 눈을 빛냈다.
‘해소저….’
물론 그 일이 쉬운 건 아니었다.
그녀의 심장에 깔끔하게 검을 찔러 넣는다는 건 그녀를 그냥 죽이는 것보다도 훨씬 어려운 일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선우진은 믿고 있었다.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분명히 가능할 거라는 걸….
***
그때의 일을 잠시 떠올렸던 선우진은 이내 고개를 들어 회의실 안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저희는 내일 아침, 검제의 등장이 알려지기 전에 미리 절강성으로 출발할 것입니다. 모두 푹 쉬시고 내일 최고의 상태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선우진은 그 말을 끝으로 회의를 파했다.
그러자 용가 가주 용우신이 남해성녀 시서우와 애틋한 시선을 교환하고는 함께 대화하며 천천히 회의실에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여령색마 손은상은 그들을 앞질러 어딘가로 급히 달려 나갔다.
선우진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씁쓸히 웃음 지었다.
아마 그녀가 생사괴의 마종환에게 달려갔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오늘 하루를 정인과 보내기 위해서 말이다.
마지막일지 모를 하루….
그랬다.
내일 아침 역천혈마와의 결전을 위해 출발한다면 어쩌면 오늘이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마지막 하루가 될지도 몰랐다.
여령색마 손은상에게도, 남해성녀 시서우에게도, 그리고 선우진 자신에게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선우진은 모두가 회의실에서 나갈 때까지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자 이제야 지친 표정을 드러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우.”
사람들 앞에선 충분히 승산이 있는 척 여유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사실 역천혈마와의 결전은 승산이 그리 높지 않았다.
무림인들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압도적인 무위를 가진 최강자의 존재였고, 이번 싸움에서의 최강자는 누가 뭐래도 역천혈마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설사 하늘이 도와 승리한다고 해도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무사할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었다.
‘아니, 희생자가 생기는 게 오히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
선우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어두운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봤다.
문득 당여은이 보고 싶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오늘을 그녀와 함께 보내고 싶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그녀를 꼭 끌어안고,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다.
마지막 한 번만이라도 말이다.
그리고 광검릉에 가 있을 바보 같은 친구들, 비사영과 배종관이 보고 싶었다.
두 번의 삶 동안 모두 자신의 친구가 되어준 그들과 마지막일지 모를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이 순간, 그들 모두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선우진은 문득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배가 불렀구나, 선우진. 지금 옆에 있는 사람들부터 신경 쓸 것이지.”
그러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버지 선우중과 새어머니 소난소가 있을 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일지 모를 오늘 그들을 볼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
다시 하남성 무림맹.
혈랑검제 반중양이 은거를 깨고 등장했다는 소문을 들은 해청연은 잔뜩 신경질적인 표정이 되어 제갈지강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정보에 따르면 검제는 그의 추종자들을 전혀 대동하지 않고 홀로 안탕산을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존께선 사왕 때처럼 안휘성으로 가셔서 그가 지나갈 위치에 매복하시면 됩니다.”
그 말에 해청연은 여전히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은 표정으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의 정보기관 만청각을 이용해 정보를 모아오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그를 안 죽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이런 점에선 꽤 쓸 만한 놈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해청연은 뭔가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찝찝함이 계속 그녀의 기분을 긁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기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감각들이 그녀에게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검제가 생각보다 더 강한 자라는 뜻일까? 이 정도 전력으로 모자라다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감각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때였다.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제갈지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속하가 지존께 전력이 될 만한 자들을 추천해도 되겠습니까?”
그의 물음에 해청연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불안한 표정을 너무 겉으로 드러내 보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왕 들킨 것, 그녀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흥! 이번 싸움에서 전력이 되려면 최소 천하삼십육성의 수위권에 드는 실력자여야 하는데, 네가 그런 자들을 추천할 수나 있단 말이냐?”
그러자 제갈지강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물론 지존께서 보시기엔 부족하시겠지만… 화경의 고수를 두 명 정도 추천해 드리려고 합니다.”
화경의 고수라고?
그 말을 듣자 해청연의 눈이 크게 확대됐다.
“화경의 고수라고?!”
“예, 그렇습니다.”
해청연은 이제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제갈지강을 바라보았다.
화경의 고수가 그것도 두 명이라니.
만약 여기에 화경의 고수가 두 명 더 추가된다면 검제가 아니라 검신도 상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엄청난 전력이었다.
그녀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게 누구냐?”
그러자 해청연의 관심을 얻는 데 성공한 제갈지강이 득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한 명은 독안괴검 서일이라는 자입니다. 적당한 대가만 준다면 무슨 일이든 해주는 자이지요. 마침 지금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하니 바로 연락하면 충분히 끌어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물음에 해청연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직도 연락하지 않고 뭘 하고 있는 것이냐? 어서 불러라. 그리고 또 한 명은?”
그러자 제갈지강이 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역시 천하오괴 중 한 명인 괴흉이란 자입니다. 정사양도에 걸친 자인데 본인의 흉한 얼굴 때문에 미인에게 무척 약하다는 약점이 있지요. 제 생각으론 만약 지존의 존안을 그놈에게 보여주신다면 놈은 무슨 일이든 다 시키는 대로 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말을 들은 해청연은 매혹적인 표정으로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호오, 그것 참 내가 좋아하는 성향의 무인이로구나. 그런 자라면 당연히 얼굴을 보여줘야지.”
자신의 미모에 혹한 자들을 조종하는 건 예전부터 역천혈마 과염이 자랑하던 특기 중 하나였다.
그러니 그런 성향의 인물이라면 이미 포섭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청연은 그제야 찝찝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자, 뇌신의 후인 검제여. 이로써 네가 상대해야 할 화경의 고수 숫자가 네 명에서 여섯 명으로 늘어났구나. 어떠냐? 여섯 명도 감당할 수 있겠느냐?’
이런 사실을 선우진으로선 당연히 알 수 없었다.
그야말로 점입가경이었다.